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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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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지 位良池* 위양지 位良池* 행전 박영환 외가에 갈 때마다 놀이터였던 위양지“밥 묵고 놀아라”외할머니가 찾을 때마다또래들과 더 놀고 싶어완재정宛在亭 마루 밑에 몸을 숨겼지만이내 손목 잡혀 볼이 부었다 “많이 먹어라”보리고개라 해도아낌없이 차려주신 귀한 쌀밥허겁지겁 달게 먹노라면체할까 염려하시던 할머니 예나 지금이나이팝꽃은 풍년이다흰쌀밥이 송이송이 매달렸다할머니는 손자 위해가지마다 그릇 가득 밥 지어놓고보이지 않는다얼마나 먼 곳에 계신지.  *위양지는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있으며 완재정은 안동 권씨 위양 종중의 입향조 학산 권삼변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못 가운데 지은 정자이다.
이서국 이야기(4) 이서국 이야기(4) 행전 박영환 그날 이서국 왕실은 신라군에게 왕궁을 내어주고 남산 은왕봉隱王峰에 몸을 감추었다 어지럽게 꽃이 아우성을 치고 덜 익은 노래가 되어 꽃술에서 울음을 삼킨다 세월의 파도가 수없이 지우고 지워도 감당하기 힘든 긴 시간 가파른 벼랑이 물구나무 서기를 하다가 그늘의 독백을 듣고 만다 목에도 가슴에도 까맣게 에워싸는 절망 바람 위에서 바람을 키운 얼굴들 비틀거리며 비탈길을 걷는다 저 멀리 백곡 궁성을 바라보는 젖은 탄식은 빗장을 친 별빛 사이로 포물선을 그린다
묻는 말 묻는 말 행전 박영환 지나가고 있는 것인지 지나오고 있는 것이지 밝음인지 어두움인지 한 번은 알고 가야할 듯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지만 다시 알 수 없는 커튼에 쌓여 힘없이 지우고 만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벼랑인지 평지인지 붉은 꽃인지 푸른 꽃인지 대답을 얻지 못하고 걸어가는 시간 참으로 주제넘게 걸어둔 언어들이 옆구리의 이곳저곳을 휘젓는다.
꽃의 길 꽃의 길 행전 박영환 어찌 눈물샘만 꿰매고 있을 것인가 떨어지니 꽃이고 오래가지 않으니 꽃이다 지지 않는 꽃이 어디 있다더냐 꽃은 꽃의 삶을 안다 탄식을 만들어 애달와하지도 않고 미련의 옆구리에 붙어 추근대지 않는다 가진 것만큼 즐기다가 두려움 없이 내려놓는다 꽃이 되었다고 뽐내지 말자 아쉬워 할 때 떠나자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다 꽃은 꽃을 알고 꽃의 길을 살기에 꽃이다
낙화 낙화 행전 박영환 그대는 이미 깃발을 접고 소생할 용기를 잃었다 노을을 가슴에 안고 그림자의 탄식을 듣는다 행복을 그리다가 열정을 얻고 허공에 던져진 푸념 옹이진 사연 침묵 속에 눈물샘을 꿰맨다.
웃음 전도사 웃음 전도사 행전 박영환 늘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스님이 계신다 너무 선하고 구김살 없는 익살스럽기도 한 웃음에 따라 웃지 않을 수 없다 칙칙한 영혼을 말끔히 헹궈내고 아름답게 채우는 위대한 웃음의 전도사 스님은 웃으며 살자며 문을 두드려 막힌 가슴을 쓸어내고 있다.
되었다 되었다 행전 박영환 할 말을 다하고 살수 없지 않는가 더러는 억울하여 자존심이 상해도 참아서 평화가 왔다면 그뿐 버스를 타고 가면서 손 한번 흔들었으니 되었다 알고도 속을 수 있지 않는가 더러는 용서할 수 없어 가슴을 칠 수 있지만 참아서 웃을 수 있다면 그뿐 물소리 새소리에 고개 한 번 끄덕였으니 되었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동행하는 것 아닌가 더러는 문을 열고 닫을 때 거친 숨소리를 만날 수도 있지만 참아서 기다릴 줄 알면 그뿐 이제라도 신발 소리가 같게 되었으니 되었다.
그리움 그리움 행전 박영환 문득문득 조용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하이얀 눈발 위에 조용히 발자국을 찍다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눈을 감아도 더 또렷하게 다가와 포근하게 손을 잡아주던 추억 지우면 지울수록 더 아련한 그리움 겨울 강이 아무리 얼어붙어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던 따스한 눈빛 그를 위해 오늘도 문을 잠그지 못합니다.
노을 마을 노을 마을 행전 박영환 길을 가다가 저녁노을을 바라본다 노을은 서쪽 하늘을 움켜쥐고 마을로 쏟아진다 세 살에 아비를 잃은 그 아이의 시 구절처럼 붉은 사연을 안고 쏟아진다 마지막 글귀를 주고받지 못하는 인연이 너무 슬프다 우물을 들여다 본다 두레박이 아무리 애를 써도 끈이 없으면 물을 길어 올리지 못한다 야속한 사람 야속한 사람 원망하지만 문득 그 사람의 노을도 너무 붉다 노을이 쏟아진 그 마을은 노을 마을이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 강아지의 주검 앞에 행전 박영환 그 아이들의 시신을 묻었다 티없이 맑은 백설같은 그들은 죽어서도 고왔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눈이 마주쳤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 애절한 그 눈동자에게 아무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아팠다 아름답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으랴 모두 살아날 권리가 있고 모두 지켜줄 의무가 있건만 그 약속들이 겨울의 찬바람을 넘지 못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겨울에 태어나지 말고 제발 가난한 어미에 의해 버려진 농막에 태어나지 말아라 사람만 계급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강아지의 세계에도 계급이 있는 것이 너무 슬프다 잘 가시게 명복을 빈다 미안하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