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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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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라 행전 박영환 돋보기를 쓰고도 바늘귀를 찾지 못해 쩔쩔매는 아내에게 근시안인 내가 실을 꿰어주며 벌써 그렇게 눈이 나쁘면 쓰냐고 농담했다 바늘을 건네받은 아내는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붙여놓고 밥상을 차렸다 이상하게 국의 간이 맞지 않았다 요즈음 너무 짜게 한다고 했더니 미안해하며 나이가 드니 미각이 자꾸 무디어진 것 같다고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순간 심하게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노안에 바늘귀 찾는 것만 어려운 줄 알았더니 미각까지 무디어졌다니 요리 솜씨 좋던 아내에게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내가 너무 무심했다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던가 회초리 하나 들고 내 종아리를 내리쳐야 할 것 같다 “밥만 먹지 말고 미안한 마음까지 같이 먹으며 밥상 차리는..
몸탱이에게 몸탱이에게 행전 박영환 몸탱이 하나 데리고 사는 것이 힘이 든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주어야 한다 학교도 보내야 하고 여기저기 여행도 다녀야 하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 가끔씩 그가 너무 밉다 조금만 먹어도 살이 찌고 허리가 아프고 시력이 나빠 안경에 의지하고 임프란트로 음식을 씹고 보청기로 말소리를 듣는다 대장에 혹이 생겨 사망선고 직전까지 갔을 때는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기도 했었지 그래도 고마운 것은 아직까지 고쳐주면 고쳐주는 대로 툴툴 털고 나를 잘 끌고 다니는 것이다 언제까지 나와 그가 함께할지 모르겠다 몸탱이여 사는 그날까지 내 탓 네 탓 하지 말고 잘 지내보자
갑진년 새해에는 갑진년 새해에는 행전 박영환 육십간지의 41번째로 푸른 색의 甲과 용을 의미하는 辰이 만난 갑진년甲辰年 새아침 새로운 해가 동쪽 하늘 구름을 뚫고 활활 타오른다 새해에는 청룡靑龍의 힘으로 하늘은 하늘처럼 땅은 땅처럼 사람은 사람처럼 살게 하소서 새해에는 용의 마음으로 하늘이 땅을 미워하지 않고 땅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은 하늘과 땅을 받들게 하소서 새해에는 비상하는 용을 따라 아침 하늘이 저녁 땅 되고 저녁 땅이 아침 하늘 되어 우리 모두 하늘과 땅의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새해에는 하늘의 평화가 노랫말이 되고 땅의 행복이 선율을 만들어 사람들이 용의 등을 타고 노래하게 하소서 합장하여 두 손 모으다.
서유럽 여행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벽 박영환 쌓을수록 아픈 것 네가 아픈 줄 알았는데 결국은 내가 더 아프구나 불덩이 감당하지 못하고 사무친 듯 다시 보지 않겠다고 삭이지 못했는데 되돌아 내 안에 벽이 되었구나 맞는지 몰라 그대의 진실이 그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게 또 진실이 아니었구나 아프면 안돼 이어서 일어나는 아픔 벽이 무너져 문이 마중을 한다 이제 손을 내미는 일만 남았다.
연꽃 연꽃 행전 박영환 빗방울이 쪼아대는 군자정 난간 위에서 우리 장모님 아흔 두 살 손바닥에 연꽃을 건져 올린다 “곱다, 고와’ 어느새 아지랑이의 온기, 그늘 두꺼운 아픔, 언 못의 상형문자 이 모두 비우고 채워서 받들었다 “장모님이 훨씬 더 곱습니더” 뜬금없는 늙은 사위의 립서비스에 새악시 연꽃 볼로 붉어진다 그래서 한 마디 더 덧붙인다 “장모님, 지금 시집가도 되겠심더” *군자정은 청도군 화양면 유등리에 있는 넓은 연지(蓮池) 가운데 있는 정자임.
참새 타령 참새 타령 행전 박영환 겨울에 바람을 막느라고 문에 비닐을 쳐놓았는데 그 갈라진 틈에 참새 한 마리 들어가서 파닥인다. 녀석을 잡아서 날려주었더니 신나게 날아갔다. 녀석, 잘못하면 참새구이 될법한 이승과 저승을 오갔으니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할 말이 많겠지, 박씨라도 하나 물어오려나 하니, 아내가 응수한다. 다리가 성했는데 박씨야 기대하겠습니까, 그것도 그러네, 그래도 그 집 은혜는 잊으면 안 된다고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겠지. 암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가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 집 방앗간은 그냥 지나가고 그 집 논의 나락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하겠지요. 참새 대가리 같다는 말이 있는데 기억할까, 참새가 죽어도 짹 하고 죽는다고 하는데 기대해봅시다. 오랜만에 부부가 참새 타령에 웃었으니 그것만 해도 보..
우리의 이무기님 듣고 있나요 우리의 이무기님 듣고 있나요 행전 박영환 거북등 논에는 모들이 배배꼬였고 흙먼지 날리는 밭에는 작물들이 잎을 늘어뜨리고 제 그림자를 감고 있다 앞산도 뒷산도 모두 쨍쨍 뻐꾸기만 모진 소리로 자지러지는데 농심의 가슴에 화근내가 가득하다 천제의 뜻을 어기고 비를 내리게 한 뒤 이무기가 급히 침상 밑으로 숨던 날 대신 이목이 벼락을 맞았는데 그 이후 이무기도 같이 사라졌다 보양선사님 우리의 영웅 이무기는 지금 어디에 숨어 있나요 우리는 그의 등뼈 곧추 세운 절박한 반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쳐있는 불임의 땅은 응급실의 혼돈이다 사나운 채찍은 아예 박음질 너무 매워 시들어가는 소리 귀대어 흔들어보는데 죽어도 물에 빠져 자맥질을 하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란다. 우리의 이무기님, 듣고 있나요 운문사에는 이무기의 전설..
행복 행복 박영환 아무도 나와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내도 다르고 아들도 딸도 다릅니다 옆집 101호에도 앞집 가게에도 버스에도 기차에도 비행기에도 나와 똑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똑 같아도 다르지 않는 것도 똑 같아 위로하고 나누며 같이 웃고 울 수 있어 행복합니다 오늘은 또 어떤 친구를 만나 나를 떼어주고 그 자리에 그의 미소를 담아 올 수 있을까요 해가 밝은 아침
돼지 감자 돼지 감자 행전 박영환 돼지감자를 캐다가 그의 이름을 생각하니 괜히 미안하다 달덩이처럼 미끈하게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흉한 모습도 아닌데 낙인을 찍듯 돼지라고 멍에를 씌운 심사는 무엇인가 이름만 그런가 지난여름 그에게 너무 무심했다 그냥 산비탈 밭 그곳에 있으려니 했다 김을 매지 않았고 물도 주지 않았다 하기야 그러고 보니 씨도 심은 적이 없다. 지난 해 수확을 하고 난 뒤 겨우 숨만 붙은 잔뿌리가 고랑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천생 천출賤出 대접이라 죽을 맛이었을 텐데 배알이 없는 건지 더러움 타지 않고 인고의 날을 보냈다 그들이 믿는 건 그들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며 위로하는 것이다 멀대처럼 키만 큰다고 구박을 받으면서도 안간 힘을 다해 키가 커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그들이 이길 수 있는 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