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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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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현 역 남성현 역 행전 박영환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토요일이면 고향집에 왔다가 일요일에 대구로 올라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고향 수야 마을에서 대구로 바로 가는 교통편은 없었다. 도보로 얼마간 걸어 나와야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갈 수 있는 길은 대략 세 방향이었다. 하나는 십 리 정도 걸어와서 칠성리 앞에서 대동버스를 타고 가는 것, 그 다음 하나는 삼십 리 길인 팔조령 고개를 넘어 삼산에 가서 삼천리 버스를 타는 것, 남은 하나는 이십 리 길을 걸어와서 남성현에서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거리상으로는 칠성리에 와서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러나 나는 공교롭게도 가장 먼 거리인 팔조령 고개를 넘는 길을 많이 택했다. 칠성리로 가면 가깝기는 해도 버스비가 비쌌고 또 청도읍, 경산을..
종소리의 뜨락에서 종소리의 뜨락에서 행전 박 영 환 ‘학교’란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종소리이다. 사실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운 노래도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문에서 기다리신다’ 이다. 생각해보면 교단에 서 있는 사람들은 ‘종소리’로 시작해서 ‘종소리’로 끝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학창시절 18년은 선생님들께서 우리를 기다리며 울려주신 종소리 속에 ‘어서 모이자’를 외쳤으며 교단생활 40년 동안은 ‘기다리신다’의 종소리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어서 모이자’의 마음을 만들려 했던 것 같다. 그 동안 삶의 반경이고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하며 한 번도 거역하지 못한 이 종소리의 둥근 원 속에서 울고 웃으며 많은 연(緣)을 만들었다. 은사, 제자, 학우, 선배, 동료, 후배, 학부모,..
삶의 황금기 삶의 황금기 행전 박영환 백세 시대가 곧 온다고 한다. 현재의 추세대로 간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동의를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정말 그렇게 될까,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너무 기대치를 부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요즈음 김형석 교수님이 활동하시는 것을 보면 100세 시대란 말이 허풍이 아닌 현실이란 느낌마저 든다. 김 교수님은 현재 아흔 여섯이다. 그런데 아직도 정정하게 강연을 하시는 등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98세가 되는 해에 공개 구혼을 하여 사랑을 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농담으로 던진 말이지만 정말 그런 일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이 보인다. 만일 김 교수님이 공개 구혼을 하면 파트너로 신청하..
백곡 마을 백곡 마을 박영환 경북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土坪里) 백곡 마을을 찾아갔다. 내가 이곳을 찾아간 데는 두 가지 목적 이 있었다. 하나는 이곳이 옛날 청도 지역에 터를 잡았던 이서국( 伊西國)의 도읍지이기에 그 흔적 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또 하나는 청도가 낳은 큰 어른이신 탁영 김일손 선생의 종택이 있는 곳이니 선생의 체취를 느껴보고자 한 것이다. 이서국은 삼한 시대 부족 국가의 하나로 신라 유리왕 14년(297)에는 금성(경주)을 침공하여 신라를 위기에 몰아넣은 적이 있었다. 미추왕릉에서 나온 죽엽군의 등장으로 실패했지만 한 때는 상당한 규 모의 힘을 갖춘 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유적은 오산(鰲山)의 은왕봉(隱王峯) 및 망바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악간의 출토품, 지석묘 등이 ..
머리 없는 부처 머리 없는 부처 박 영 환 경주 남산에 눈이 온다. 오는 눈은 이내 녹아 가지를 타고 흐른다. 첫눈, 산을 덮어 쌓이면 운치도 있으련만 아쉽다. 얼마 가지 않아 쉬 녹는 까닭을 알았다. 머리 없는 부처님을 만난 것이다. 부처님의 등줄기를 타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부처님 당신은 왜 얼굴을 감추었나요.누가 감추라고 했나요. 아니면 스스로 감추어 버렸나요. 얼굴이 없으면 눈도 없고 입도 없고 코고 없고 귀도 없다. 즉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숨도 쉬지 않고 듣지도 않는다. 그러면 그는 죽은 생명이다. 그러나 그를 자세히 보면 죽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머리 없는 부처님은 왜 눈물이 마르지 않는가? 남산은 신라의 시작과 마지막이 있는 곳이다..
홍낭(洪娘) 홍낭(洪娘) 행전 박영환 아마 초여름이었을 게다. 버드나무 잎이 한층 더 푸른빛을 띠었다. 오늘은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며칠째 그곳에서 어떤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 여인이 나타났다. 그 짜릿한 경이와 전율감. 이 무슨 횡재. 내가 기다리던 그 미모의 여인은 연분홍 치마저고리로 곱게 단장하고 물기 오른 버드나무에 기대어 고운 상념에 잠겨 있었다. 여인은 나긋한 버드나무 가지를 살며시 눌러 곱디고운 손가락에 감더니 마침내 연초록 잎사귀에 묻어나는 계절의 향취를 음미하며 입맞춤을 했다. 저것이다. 내가 그토록 그리던 모습이다. 카메라 셔터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행여 낌새를 차려 자리라도 피하면 곤란. 얼굴이 드러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 옆모..
119 119 박영환 119가 고맙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느끼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많이 다르다. 직접 일을 당해본 사람들은 절실할 것이고 뉴스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본 사람들은 좀 피상적인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 것 같다. 몇 년 전 10월 하순 어느 날 아내가 구급대의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 정말 예기치 않던 사고였다. 그날 우리 부부는 초등학교 동창 내외들과 함께 산행을 했다. 산도 높은 산이 아니다. ㅊ군 뒤편의 야산이다. 어떻게 보면 본격적인 등산도 아니고 점심 식사 뒤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산에 오른 것이다. 산행을 하는 도중 아내는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정상에 모여 간식을 먹을 때만 해도 아무런 이상한 징후가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 아내는 동행한 부인들과 담소를 ..
겨울에 피는 꽃도 있다 겨울에 피는 꽃도 있다 행전 박영환 지난 봄, 고향, 청도군에서 개설한 농민사관학교, 제9기 청도반시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안 주변 지인들 중에서 격려를 하기도 했지만 더러는 이제 교직에서 퇴직을 하여 쉴 나이에 새삼, 어려운 농사 공부를 하려 하느냐고 걱정을 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 과정은 지원자도 많아 시험이란 관문이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시험도 부담이 되었다. 시골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중학교 이후 도시에서만 생활하여 농업에는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청도반시 재배 및 농업 일반 상식'을 테스트하겠다는데 통과할 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그리고 이 과정은 미래의 농업, 농촌 발전을 선도할 경영 능력 및 ..
내가 곁에 있겠소 내가 곁에 있겠소 - 간병일기 박영환 2013년 2월 14일 음력으로는 정월 초닷새 날이다. 고향집 뒤꼍에서 감나무 정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의 비명이 들렸다. 급히 톱을 던져두고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니 아내가 다리를 움켜잡고 비병을 지르고 있었다. 일으켜 세우려하니 기겁을 했다. 골절인 게 분명했다. 급한 대로 널빤지두 개를 양옆에 대고 끈으로 묶어 차에 옮겼다. 옮기는 동안 아내의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청도읍에 있는 정형과에 들렀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오른쪽 허벅지가 골절되었다고 했다. 상태가 심해 그곳에서는 수술을 할 수 없으니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잠시 망설였다. 거리상으로 대구가 가깝지만 아무래도 부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산 곳이기..
수야 못 수야 못 박영환 고향 마을은 시내나 강이 없는 마을이기에 우리들은 주로 못에서 여름을 보냈다. 지금도 눈을 감 고 있으면 또래들의 멱 감던 물소리가 귓전에서 풍덩풍덩하고 들린다. 까만 아이들의 개구쟁이 물 장구에 금방 옷을 적실 것 같다. 그 때 가당찮은 내기를 많이 했다. 몇 길이나 되는 깊은 곳인데도 건너편 돌무더기 섬까지 먼저 가기를 했던 것이다. 사탕 한 알에 목숨을 건 내기였다. 힘이 떨어져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맞았지만, 그래서 소문이 퍼져 부모님께 혼이 나기도 했지만 이튿날은 또 물속에 뛰어들고 있었다. 겁이 없는 것인지 바보인지. 소를 물속에 밀어 넣고 등위에서 놀았다. 소는 부력이 있어 특별히 동작을 하지 않아도 물에 잘 떴다. 소등에 매달려 신나게 깔깔대다가 물속에 첨벙첨벙 뛰어 들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