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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마을(소설, 수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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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석 없는 달 결석 없는 달 행전 박영환 드디어 7월 1일. 조례시간, 칠판 중앙에 붉은 글씨로 ‘(1)일째 결석 없는 날’이라고 크게 썼다. 이때 등 뒤에서 ‘빈자리가 있심더’ ‘저거 누구 자리고’ 등등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역시 자리가 몇 곳 보였다. 나은지, 남기도, 주석호가 보이지 않았다. 은지는 시내에서 들어온 학생으로 이곳 기숙사에서 생활을 한다. 전날 나도 사택에 있지 않고 볼일이 있어 집에 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이 아이도 문제집을 사기 위해 나가는 길이라며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가는 방향이 비슷해 내 차에 태워주었는데 내리면서 내일부터 우리 반 전체가 ‘결석 없는 달’을 만들기로 했으니 정신 바짝 차려 일찍 올 것이라고 했는데 …. 은지는 중학교 때 너..
안개 저 편에 안개 저 편에 행전 박영환 그 해의 사계절은 유난히도 안개가 많았다. 아무리 훌훌 털어도 옷자락 깊숙이 스며든 안개를 털지 못해 괴로워했다. 어느 여고 3학년 담임 시절, 정민이란 아이를 맡았다. 소녀가장, 철거민, 허약한 체질 -, 너무 딱했다. 햇살 한 줌을 얻고 싶은 정민의 소박한 소망은 번번이 좌절되고 그의 주변은 항상 어둠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짙게 깔려 있었다. 정민의 집도 한 때는 여느 집 이상으로 웃음이 떠날 날이 없이 오순도순 정답게 살았다. 그러나 정민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예비군 중대장을 하던 아버지가 친구의 보증을 잘못 서는 통에 재산을 전부 날리고 Y동 무허가 판잣집으로 나앉으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거의 폐인이 되..
노루 | 중편소설 | 노루 행전 박영환 내가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6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우리 중대원들이 중대장 이문수 대위를 ‘루노’라고 불렀다. ‘루노’라니. 좀 특이한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말은 아닌 것 같고, 영어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많이 궁금했는데 얼마 뒤 우리 소대 선임하사인 김 중사로부터 중대장의 별명에 얽힌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중대장님의 별명인 ‘루노’는 얼른 들으면 무슨 뜻인지 잘 몰라 약간 헷갈리지만 알고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노루’를 말하는 것입니다. 직접 ‘노루’라고 하기가 뭐했든지 살짝 뒤집어 ‘루노’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노루’입니다.” “노루라고요?” ‘노루’란 소리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의 어릴 때 별명이 ‘..
울고 싶자 때려주고 울고 싶자 때려주고 행전 박 영 환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부장인 나는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선생님들을 독려하며 자율학습 지도를 했다. 그 날도 저녁 9시경, 3학년 층에서 자율학습 지도를 하고 있다가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 들어서니 3반의 현지 어머니가 담임인 손 선생님께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담임이면 아(아이)를 그 따우(따위)로 때리도 되능기요, 다 큰 여자 아이를 몽둥이로 개 패듯이 패고.” 느닷없이 방문하여 항의를 하니 손 선생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얼굴만 푸르락누르락 했다. “거기에다가 ‘인간쓰레기’라고 하면서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했다면서요, 이제 머리를 다쳤으니 자연스럽게 포기 되겠네예.”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몽둥이로 개 패듯이 패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요 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요 행전 박영환 어느 여고에 근무할 때 우리 반 슬비란 아이가 가출을 했다. 학생회장이며, 공부도 잘하고 모든 면에 모범적인 슬비의 가출 소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외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를 했지만…. 아무리 방학 중이라 하지만 고3 학생이 별 이유 없이 학교 보충수업에도 나오지 않고 부모님도 모르게 외가에 간 것은 문제가 있다. 슬비는 얼마 전부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표정이 밝지 못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으며 성적도 떨어졌다. 지난 번 7월 모의고사에서는 학급에서 10위권 이후로 밀렸다. 전교에서도 10위권 이내에 들어가던 아이가 학급에서도 10위 밖으로 갑자기 떨어진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모의고사를 치르는 날, 몸이 아..
지루한 일주일 지루한 일주일 행전 박영환 9월 11일 수요일 아침. 여느 날처럼 보충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 의자에 몸을 누이듯이 깊숙이 앉았다. 이 때였다. 복도가 갑자기 왁자하는가 싶더니, 이내 교무실 문이 급하게 열리며 내가 맡은 2학년 7반 학생인 광원이가 뛰어들어 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녀석은 분을 이기지 못해 시익씩거렸다. “선생님, 3학년들이 술을 먹고 마구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 때 3학년들의 험상궂은 얼굴들이 교무실 창틀 주변에 매달렸다.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을 때 잠시 고개를 돌리긴 했어도 시선을 풀어 버리면 다시 더 날카롭게 광원이 면상에 깊숙이 박히는 것이었다. 또 사고를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자세히 얘기해 봐, 3학년들이 어떻게 한다고?” “공연히 시비를 걸어 마구..
쌍둥이 행진곡 쌍둥이 행진곡 행전 박영환 일반적으로 우리는 ‘쌍둥이’란 말을 듣게 되면 약간의 호기심을 가진다. 우선 얼굴이 얼마나 닮았을까? 또 행동은 어떤가? 하는 것 등이 관심의 대상이다. 너무나 얼굴이 닮은 두 자매나 형제의 모습을 보노라면 공연히 마음이 흐뭇하고 생명의 신비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한다. 실제 그들은 다른 형제들보다는 훨씬 더 호흡이 맞고 조화미가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1+1은 2가 되지만, 이들은 3도 되고 4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ㄴ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2학년에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형, 강종호는 4반에 있었고 동생 강종구는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5반에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쌍둥이 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우선 그들은 얼굴도 별로 닮지 ..
정미는 가숩니다 정미는 가숩니다 행전 박 영 환 신학기, Y 여중에 전출되어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학생들의 얼굴이며 신상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첫날, 강정미란 학생이 결석을 했다. 생활 기록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강정미 - 전 학년도의 출석 상태도 좋지 못했다. 결석 28일, 지각 15회, 결과 3회, 조퇴 20회. 성적은 대부분 ‘가’이고 어쩌다가 몇 과목이 ‘양’이며 전교 석차는 621/621. 성적이나 출결 상태도 그렇지만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아이의 나이였다. 중학교 3학년인데 19세, 고등학교 3학년 나이가 아닌가. 지난 2학년, 정미의 담임이었던 권 선생님을 찾았다. “정미가 첫날부터 결석을 했군요?” 정미란 말에 권 선생님은 설명하기 곤란한 듯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때 권 선생..
얼 굴 얼 굴 행전 박영환 오래 전 어느 학교에 근무할 때이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통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겨우 잠이 드는 순간, 전화 벨 소리가 요란했다. 수화기를 들면서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새벽 두 시였다. "여보세요, 박 선생님 댁입니까?" "그렇습니다만은…." "선생님 계십니까?" "제가 박 선생입니다만, 무슨 일로..." 단잠을 깨운 것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잠도 덜깬 상태라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밤중에…. 여기는 보현 파출소입니다." "파출소라고 했나요?" 잠결이라도 '파출소'란 말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네, 다름이 아니고, 선생님 반에 서형태라는 학생이 있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형태가 무슨 사고라도 저질렀나요?" "네, 일을 좀 벌였습니다. 미안하지만, 선생님께..
구곡령 구곡령 박 영 환 내 고향과 대구는 칠 십리 길, 그 가운데 성곽처럼 우뚝 막아 선 고개가 구곡령이다. 구곡령은 이름 그대로 아홉 개의 크고 작은 봉들이 저마다 사연을 안고 있다. 얼른 보기에는 밋밋하고 순하게 보이나 산을 타다 보면 이내 숨이 턱에 닿는 험한 산세다. 지금은 아홉 구비를 넘나들며 널찍한 아스팔트 도로가 시원하게 닦여 버스 등 각종 차량이 질주하고 있지만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나무뿌리가 발길을 잡는 좁은 길밖에 없었기에 걸어서 넘을 수밖에 없었다. 구곡령 고개 마루엔 산신각(山神閣) 하나가 있었다. 이곳은 사십대 초반의 부부가 성치 못한 아들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곳이었다. 아이는 말도 못했으며,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항상 밑이 없는 전천후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주 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