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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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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꾼 나무꾼 행전 박영환 함부로 나무꾼 흉내 내지마라 선녀를 위해 도끼를 든다면 모두 용서 될까 나무의 아픔은 어떡할래 무엇을 위한 가두고 잠가버린 그 무엇 사이의 나무들 숲이 필요한건 나무일뿐 나무꾼도 아니고 선녀도 아니다 무엇의 숙명 같은 그 무엇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지 말자 오늘은 우리가 나무이다 달빛이 알을 낳는 숲이 되어 그가 그토록 소망했던 새소리 물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무서워 무서워 행전 박영환 더러는 황홀하지만 따뜻하지 않아 무서워 함께하여 어루만지지 못하고 평행으로만 달리니 무서워 추억만 만들어 놓고 모른 체 애써 떠나가는 뒷모습이 무서워 세월 당신 오늘 따라 갑자기 더 무서워
웃는 것 웃는 것 행전 박영환 웃는 것이다. 바보라 해도 웃는 것이다. 아무 준비도 없고 나누어 가질 것도 없어도 그냥 좋아라 웃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족한다는데 웃지 않을 수 있는가. 초대받지 않는 광장이래도 불 하나 켜고 그냥 가슴을 맞대고 웃어보는 것이다. 지금 숲은 자꾸만 어두워지고 추위가 몰려오는데 웃는 소리만 가득하다. 참 별난 기획이다. 대사의 처음과 끝이 웃음뿐이니. 혹시 우는 소리가 어디 들릴까 귀를 기울여도 웃음은 그치지 않는다. 어디까지 갈까. 정말 끝이 있기는 있는 것인가. 실타래 속에 비비고 감춘 웃음의 행진. 그래 웃어 주자. 저렇게 웃기고 있지 않는가. 웃어주자.
우밍이 우밍이 행전 박영환 ‘우밍이’ 꼬불꼬불 산길 돌아 찾아간 청도와 창녕의 경계지역 하늘 아래 첫 동네 ‘원명마을’을 그렇게 부른다 그곳에서 쑥스러워하며 명함 한 장을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김비룡씨다 이름이 좋다고 하자 “울 아부지가 기 한 번 펴라고 이름은 좋은 것 지었는데 이름값 못하고 이래 삽니더” 머리를 긁는다 “이제 어엿한 팬션 사장 아닙니까” “팬션 사장, 딴은 그러네예” 하기야 지금은 옛날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단다 “그 때는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요. 나무 해다 팔고, 나물 뜯어 시장에 내고, 쌀을 만나는 것은 원님 만나는 것보다 힘들었지예” 세상이 바뀌었다. 음지가 양지로 바뀐 것이다. 사람구경 못하던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시원한 폭포 소리 따라 길이 비좁아졌다 “저 폭포 이름 ..
눈이 내린 날 눈이 내린 날/ 행전 박영환 - 서울 효창공원 애국 선열 묘역에서 잠을 깨운 것은 아닌지요 오늘만이라도 쉬셔야 하는데 하기야 어떻게 잠이 오시겠습니까 사방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효창공원은 문이 여러 개 있습니다 좁은 것 같아도 길도 여러 개 있습니다 둘러가는 길도 있고, 질러가는 길도 있습니다 저마다 제 길이라 하고 그 길이 맞다고 걸어갑니다 지금도 당신은 계단 길을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계단은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처음이고 끝이지요 하나하나 진실되게 디딜 때 우리 몸이 바로서서 원하는 곳에 이르게 되겠지요 길이 아닌데 길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이 신음하고, 나무가 울고 있는데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이 와서 어제의 길을 덮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 길을 만들어..
반보기 반보기 박영환 모녀의 상봉은 눈물의 만남이다 구경하는 양 나왔다는 딸 그렇게라도 얼굴을 보는 것이 다행이란 어머니 누가 볼세라 손도 마음 놓고 잡지 못하는 억센 금줄 속에 반만 보는 반보기라 지켜보는 연꽃도 표정이 어둡고 정자도 할 말이 없어 먼 산만 쳐도본다 만나면 할 말이 참 많았는데 반가움과 서러움에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느라 시간만 훌쩍 지나간다 언제 마음 편하게 친정나들이를 할 수 있을까 중도에서 몰래 만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온다 아버지 뵈온 지도 감감하고, 남동생과 여동생도 만나고 싶은데 아! 오늘도 어머니만 만나고 다른 가족은 보지 못한 채 돌아서야 하는 아픔 “어렵더라도 우짜든지 참고 견뎌야 뒤끝이 있는 기다” 달래는 어머니께 “걱정 마이소. 잘 살겠심..
청도 남산 청도 남산 행전 박영환 남산은 품이 참 넓다 그는 늘 말하고 있다 지치면 모두 달려오라고 어머니처럼 품에 안고 시원한 폭포수 물을 받아 발을 씻겨 주고 등목도 시켜준다 그리고 나무와 새들의 노래를 들려준다 남산은 키가 참 큰 산이다 그는 늘 말하고 있다 지치면 나를 부르라고 아버지처럼 번쩍 들어 맑은 바람 불러 모아 가슴을 씻겨주고 머리를 짚어준다 그리고 봉우리와 긴 능선의 호흡을 전해준다 남산의 넓은 품과 큰 언덕이 있어 우리는 등을 비비고 때로는 응석도 부리며 평화를 찾는다 남산이 있어 좋다.
내 사랑 경아 내 사랑 경아 행전 박영환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녀를 떼어놓을 수 없고 벗어날 수도 없다 혹시 그녀가 잠시 내 눈 앞에 사라지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녀부터 먼저 찾아야 한다 그녀가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녀와 인연을 맺은 것이 그 얼마인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이니 사실은 아내보다도 한참 먼저 만난 셈이다 아무리 나의 시야가 안개 속에 흐려 있어도 그녀가 다가오는 순간 나의 기상도는 쾌청, 맑음이다 나는 그녀를 통해 세상을 보고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녀는 나의 운명이다. 그녀의 성씨는 안씨이고 이름은 경이다. 안경(眼鏡)
단석산에서 단석산에서 행전 박영환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을 찾았다 수도를 하던 열일곱 살 김유신 장군은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따뜻한 온기는 아직도 남아있다 한 자루 신검에 몸과 마음을 묶어 단칼에 월생산 초승달 어둠을 햇살 환한 단석산으로 바꾼 장군의 자신감 가득한 함성이 들린다 그 동안 나를 끌어주는 난승難勝은 누구였고 나는 어떤 칼을 가지고 있었던가 얼마나 자신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돌을 내리쳤던가 과연 그 돌에 금이라도 갔던가 괜히 흠집만 만든 것이 아닌지 아직도 월생산을 맴돌며 초승달만 그리고 있는 것 같아 단석산을 오르는 것이 부끄럽다. *단석산은 화랑 김유신 장군이 수도를 하던 곳이다. 원래는 초승달이 돋는 월생산이었으나 장군이 칼로 돌을 내리쳐 갈라지면서 단석산이라 불렀다. 난승難勝은 장군에게 자신..
고향집 당신은 고향집 당신은 행전 박영환 당신은 주춧돌을 놓으신 증조부님과 그 뜻을 정성스럽게 받든 할아버지, 아버지의 말씀과 발자국이 있는 넓은 품입니다 토담은 착해서 앞장서 바람을 막았고 도란도란 손을 꼬옥 잡은 안채와 사랑채는 정담을 나누다말고 그윽한 묵향에 취하기도 했습니다 배부른 나락두주, 밥 짓는 연기, 햇살에 반짝이는 장독대, 황소의 새김질 뛰고 또 뛰던 마당, 아이들이 목청을 자랑하는 사이 두레박도 지지 않고 우물의 시원한 노래를 쏴하고 풀어놓았습니다 비빌 언덕이요 쉼표이었던 당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지켜 서서 가려운 등을 보듬어 긁어주고 왜 그리 숨이 가쁘냐고 덥석 안아 달래주었습니다 날아가는 까마귀라도 술 한 잔 대접해야 마음이 편하고 동냥을 온 사람도 집에 들어서면 모두 귀한 손님이라 화알짝 대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