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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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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말 묻는 말 행전 박영환 지나가고 있는 것인지 지나오고 있는 것이지 밝음인지 어두움인지 한 번은 알고 가야할 듯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지만 다시 알 수 없는 커튼에 쌓여 힘없이 지우고 만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벼랑인지 평지인지 붉은 꽃인지 푸른 꽃인지 대답을 얻지 못하고 걸어가는 시간 참으로 주제넘게 걸어둔 언어들이 옆구리의 이곳저곳을 휘젓는다.
꽃의 길 꽃의 길 행전 박영환 어찌 눈물샘만 꿰매고 있을 것인가 떨어지니 꽃이고 오래가지 않으니 꽃이다 지지 않는 꽃이 어디 있다더냐 꽃은 꽃의 삶을 안다 탄식을 만들어 애달와하지도 않고 미련의 옆구리에 붙어 추근대지 않는다 가진 것만큼 즐기다가 두려움 없이 내려놓는다 꽃이 되었다고 뽐내지 말자 아쉬워 할 때 떠나자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다 꽃은 꽃을 알고 꽃의 길을 살기에 꽃이다
낙화 낙화 행전 박영환 그대는 이미 깃발을 접고 소생할 용기를 잃었다 노을을 가슴에 안고 그림자의 탄식을 듣는다 행복을 그리다가 열정을 얻고 허공에 던져진 푸념 옹이진 사연 침묵 속에 눈물샘을 꿰맨다.
웃음 전도사 웃음 전도사 행전 박영환 늘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스님이 계신다 너무 선하고 구김살 없는 익살스럽기도 한 웃음에 따라 웃지 않을 수 없다 칙칙한 영혼을 말끔히 헹궈내고 아름답게 채우는 위대한 웃음의 전도사 스님은 웃으며 살자며 문을 두드려 막힌 가슴을 쓸어내고 있다.
되었다 되었다 행전 박영환 할 말을 다하고 살수 없지 않는가 더러는 억울하여 자존심이 상해도 참아서 평화가 왔다면 그뿐 버스를 타고 가면서 손 한번 흔들었으니 되었다 알고도 속을 수 있지 않는가 더러는 용서할 수 없어 가슴을 칠 수 있지만 참아서 웃을 수 있다면 그뿐 물소리 새소리에 고개 한 번 끄덕였으니 되었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동행하는 것 아닌가 더러는 문을 열고 닫을 때 거친 숨소리를 만날 수도 있지만 참아서 기다릴 줄 알면 그뿐 이제라도 신발 소리가 같게 되었으니 되었다.
그리움 그리움 행전 박영환 문득문득 조용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하이얀 눈발 위에 조용히 발자국을 찍다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눈을 감아도 더 또렷하게 다가와 포근하게 손을 잡아주던 추억 지우면 지울수록 더 아련한 그리움 겨울 강이 아무리 얼어붙어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던 따스한 눈빛 그를 위해 오늘도 문을 잠그지 못합니다.
노을 마을 노을 마을 행전 박영환 길을 가다가 저녁노을을 바라본다 노을은 서쪽 하늘을 움켜쥐고 마을로 쏟아진다 세 살에 아비를 잃은 그 아이의 시 구절처럼 붉은 사연을 안고 쏟아진다 마지막 글귀를 주고받지 못하는 인연이 너무 슬프다 우물을 들여다 본다 두레박이 아무리 애를 써도 끈이 없으면 물을 길어 올리지 못한다 야속한 사람 야속한 사람 원망하지만 문득 그 사람의 노을도 너무 붉다 노을이 쏟아진 그 마을은 노을 마을이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 강아지의 주검 앞에 행전 박영환 그 아이들의 시신을 묻었다 티없이 맑은 백설같은 그들은 죽어서도 고왔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눈이 마주쳤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 애절한 그 눈동자에게 아무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아팠다 아름답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으랴 모두 살아날 권리가 있고 모두 지켜줄 의무가 있건만 그 약속들이 겨울의 찬바람을 넘지 못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겨울에 태어나지 말고 제발 가난한 어미에 의해 버려진 농막에 태어나지 말아라 사람만 계급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강아지의 세계에도 계급이 있는 것이 너무 슬프다 잘 가시게 명복을 빈다 미안하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네.
마음에게 마음에게 행전 박영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없다 늘 중심을 잡고 있는 것 같아도 나도 모르게 도망을 갔다가 상처를 입고 들어온다 마음이 약해 내치치 못하고 품고 있어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때로는 못된 마음이 시기하고 미워하며 못된 세상의 잔치판을 벌인다 상처는 얼마나 잘 받던지 쓰잘머리 없는 말 한마디에도 금이 가서 끙끙 앓으며 밤잠을 설친다 얼마나 가볍던지 칭찬 한 마디에 세상을 얻은 듯 춤을 춘다 그래도 기다릴 줄 알고 분노를 삭이고 용서하는 추억을 만들자 아직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그 마음을 사랑합니다.
비슬산에 오르며 비슬산에 오르며 행전 박영환 용천사를 지나 천황봉으로 걸어갔다 신선의 거문고 소리가 들리는 바위에 앉아 저물도록 진달래 꽃물을 들이고 억새를 불러 계절의 노래를 나눈다 길은 길을 만들었다 끊어진 길을 바람이 이어주고 구름이 보듬을 때 나무들이 등불을 달았다 그는 평화이고 사랑이고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