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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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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당신이여 해, 당신이여 행전 박영환 의연한 햇살이거느리고 산 당신은 턱을 서산에 걸어도 아침의 순수함을 잃지 않고 진홍의 둥근 얼굴 그대로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자리를 바꾸어 산의 이름이 다를 뿐 처음과 끝이 같다. 진실로만 승화된 당신이여 그 이름은 우연이 아니다. 당신은 행복의 역사 다가가 황홀한 포로가 된다. 어둠이 잠시 당신을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가릴 수는 없다. 당신께서 다가올 웅혼한 아침을 기다리며 다시 동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리라.
청도역 청도역 박영환 청도역에 오면 청도 반시가 익어가고 왕방울 눈을 부라리며 전의를 불태우는 황소의 포효가 있다. 오는 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는 이 흐뭇해 이빨을 내어 놓는다 그 모습에 괜히 어깨를 쭉 편다 손을 꼬옥 잡은 노부부는 부모님 같고 배낭을 메고 온 젊은이는 자식들 같아 의자를 권하며 정말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이라고 한 마디 건넨다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그 대답 돌아오면 싱긋 웃는다 떨어져 있어도 늘 머물러 있는 곳 추억의 샘은 계절마다 색깔이 다른 향수를 만들어 열차의 바퀴 따라 필름을 풀어낸다 기적소리와 함께 떠나고 있지만 돌아올 나를 위해 청도역은 언제나 자리 하나를 비워놓고 있다 이름만 떠올려도 고마운 곳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어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다
죽지마 죽지마 행전 박영환 '죽지 마' 망망대해 파도 위에 돌고래 한 마리 병을 얻어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쉬자 온 바다의 돌고래들 가슴 태우며 모여들어 부리와 부리로 떠받치며 안간힘을 다하다. 끝내 그는 숨을 거두었지만 가는 길 외롭지 않았다. "셩님아, 아프지 말거래이" 경남 의령 어느 마을 여섯 할머니 서로를 의지하며 형님 아우로 살고 있다. 큰 형님 병을 앓아 자리에 누웠다. 다섯 아우 눈물 펑펑 쏟으며 밤을 새운다. 우리 형님, 몸은 아파도 마음만은 행복하다. 그 바다와 그 마을은 내가 아닌 우리로 사는 따뜻한 마음이 있어 물빛도 아릅답고 산새도 곱게 운다.
소 눈 소 눈 박영환 소 눈이 과학실 실험대 위에 올라왔다 놀란 눈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보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자꾸만 그쪽으로 마음이 쏠리는데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은 예리한 해부용 칼을 들이댄다 공막, 각막, 맥락막, 망막, 홍채, 모양체 걷어내고 수정체를 잘도 적출한다 마음 언짢아 칼을 대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라고 말하자 지도하는 과학 선생님, 그저께 다른 반에서 우는 아이 두 명 있었다고 했다 그 말 들으며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뜬금없이 무주 구천동의 어령탑이 왜 떠오르는지. 횟집에서 고기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탑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살생했으니 마음 풀어 달라고 위로하며 제사지내고 있다 과학실에도 그런 탑이 하나 있었으면 참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실험하라고 도장 꽉..
나 스티커 끊어 주게 나 스티커 끊어 주게 행전 박영환 "이리 오세요" 무단으로 좌회전 하다가 걸렸다. 임자 만났구나. 몇 만원 날라가게 됐다. 연이 나무에 걸리듯 옴짝 달싹 못하고 경찰 앞에 다가가니 회심의 미소 잘못했으니 당할 수밖에 복이 없으면 이런 수도 있는 거지 한숨을 쉬었다. 동동거린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행길에 이런 몰골 보이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마! 빨리 내이소, 면허증 양심 꾸개넣고 한 번 빌어봐, 이 때다 "나 모르시겠습니꺼? 선생님 제자 기욱입니더." "아! 기욱이로구나" "누가 봅니더. 퍼떡 가이소." "고마우이" 하면서 신나게 빠져나갔다. 한참 오다가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내가 늘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한 말은 어찌 할꼬! 아이들에게 들려준 말들이 바윗돌이 되어 차 앞을 막아 선다. 차를 다시..
실밥 실밥 행전 박영환 삶은 실밥 다독거리는 작업이다. 몸이며 옷이며 실밥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마음에도 실밥이 있다. 풀리고 무너지는 것은 한 올에 시작하는 것 빈혈을 앓고 있는 실밥 고지방질에 허리가 굳어 있는 실밥 때가 묻고 탁한 공기에 숨이 찬 실밥 질주하는 세월의 소리에 깜짝깜짝 놀란다. 터지면 안 된다고 뇌이고 있지만 자꾸만 닳아 간다. 찬바람이 밖에서 문고리를 흔들고 중심을 잃은 감각들이 안에서 소란하니 나의 실밥은 외줄타기를 하는 남사당처럼 늘 불안하게 곡예를 한다. 오늘도 문을 나서며 실밥의 눈치부터 먼저 살핀다.
홍시 홍시 행전 박영환 잎사귀 사이에 몰래 얼굴 내밀다 들켜버렸구나. 빠알갛게 물든 얼굴 시집가고 싶니? 엄니도 참 때가 왔느니라. 안가면 안 돼 거짓말, 옆집 순이처럼 얌전히 있든지. 엄니 나 얼굴 많이 빨개졌지 얼굴만 빨개졌니, 속살까지 전부 젖은걸. 총각들이 나 좋아할까 말랑말랑 다정다감하지,달콤하고 귀엽지, 겉과 속이 같이 타는 너의 순정에 입이 함지박 될 텐데. 누가 내 볼을 깨물면서 행복해 할까. 아! 기다려지네
아내의 손 아내의 손 행전 박영환 아내의 손은 성할 날이 없다. 어제는 도마질에 왼손이 베이더니 오늘은 찌개 냄비에 오른손이 데었다. 밴드를 붙여달라고 손을 내밀면서 "그게 그렇게 뜨거운 줄 몰라서..." 미안해 한다. 심드렁하게 데인 손을 잡았는데 순간 너무 말짱한 나의 손을 보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상처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밥차려야 하는데 빨리 붙이지 않고...." 자신의 손보다 밥상이 더 걱정이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면서 이미 자신의 손을 잊어버린 사람 조용히 감싸면서 말했다. "여보, 고마워요."
더 아픈 손가락 더 아픈 손가락 행전 박영환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지만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 애써 아니라고 웃고 있어도 그 아이의 눈물을 알고 있다. 참으로 모진 바람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아이는 꽃향기에도 멀미를 하고 밝은 달에도 눈이 부셔 커어튼을 내린다. 생인손을 앓고 있는 손가락, 그 손가락 때문에 나는 늘 장갑을 끼고 있다.
구절초 사랑 구절초 사랑 행전 박영환 나의 이름은 쑥부쟁이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에 빠질 줄 나도 몰랐습니다 우연히 임을 만나 사랑했지만 바람 같은 그대는 이미 가족이 있는 몸 이룰 수 없는 사랑인 줄 알고 있지만 구슬 쥔 손을 접기만 하면 그대는 오늘만 아는 사람이 되어 나의 곁을 떠나지 못합니다 단단히 마음먹고 그대 가슴에 기대어 울었지만 끝내 손을 펴고 말았습니다 떠나는 그대 발자국 소리 가슴을 두드리던 날 구름을 물고 휘어진 언덕길을 지나 임을 만났던 바위로 달려갔습니다 글썽이는 노을이 먼저 알고 하늘을 물들였습니다 잊으렵니다. 정말 잊으렵니다 몸을 날렸지만 질긴 인연 어쩔 수 없어 떨어진 자리에 구절초가 되었습니다 등을 타고 자란 그리움이 숲처럼 둘러서서 보랏빛 사연을 담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안개가 쌓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