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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

동유럽 여행(7) 쉔부른 궁전이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동유럽 여행(7)

 

               쉔부른 궁전이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행전 박영환

 

◎ 쉔부른 궁전

 

   여행 7일째, 부다페스트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향했다.  10시 20분, 국경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기에도 민들레가 많았다. 최 교장이 쌈을 싸 먹을 것이라고 뜯었다. 왕 교수가 한 잎 떼어 입에 넣고 씹었다. 마누라가 죽으면 안 되니 먼저 시식하는 것이라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11시 40분경 비엔나에 도착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 도착했다.

  “눈물이 팍 쏟아질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것입니다.”

  

가이드의 말대로 김치찌개를 내어놓았는데 고향 맛을 느꼈다.

  비엔나에는 한식집이 많다고 한다. 요즈음은 대한 항공 직항로가 개설되어 있어 식재료 공급이 잘되는 편이라고 했으며 또한 배달을 잘 해주니 인기가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배달의 민족입니다.”

  하고 농담을 하는 통에 같이 웃었다.

  현지 가이드는 여기에서 25년간 산 여성분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유럽 대륙 중앙에 있는 내륙국으로, 13세기 말부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기 시작하였으며 독일에 합방되기도 하고 소련 점령에 점령되기도 했지만 1955년 독립주권을 회복한 나라이다.

  먼저 쉔브룬궁전에 갔다.

  

  제국의 찬란한 영광이 있는 곳

  민망한 오욕의 눈물도 있는 곳

  주인은 모두 떠나고 역사만 남았도다

 

  이곳은 원래 17세기 초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을 갔다가 발견한 ‘쉔부른’, 즉 아름다운 샘에서 유래한 것이다. 비엔나 남서쪽으로 2 키로미터 떨어져 있는 쉔부른궁전은 합스부르크왕가의 여름철 별궁(別宮)이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가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이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염두에 두고 설계 한 것으로 방이 1,400여개나 된다.

  궁전에 들어가기 전 먼저 들린 곳이 궁전 뒤편 언덕 위에 있는 원형의 정자 ‘글로리에타’이다. ‘요

셉 2세와 마리아 테레지가 1775년에 세우다’란 글귀가 있었다. 이처럼 이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내려와 궁전 안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본 곳이 넓은 의식의 방이었다. 그곳은 대형 무도의 장이기도 한데 고급 병풍과 벽화가 많았다. 역시 마리아테레지의 전신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여제’라고 불리며 실제로도 황제 역할을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가 아닌 황후였다. 그래서 그녀가 생전에 사용했던 칭호는 Königin(여왕)과 Kaiserin(황후)의 머릿글자를 딴 ‘K.K’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스테판 황제는 프랑스 국경 주변의 로트링겐 공국(현 프랑스 로렌) 출신이었는데 정치는 멀리하면서 건축과 예술 분야 등 수집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가 수집했던 것들은 현재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17년, 신성로마제국 12번째 황제 카를 6세와 황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사이에  장녀로 태어나서 1780년 생을 마감했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는 빈에 유학하러 온 프란츠 스테판과 사랑에 빠져 열열이 사랑하다가 마침내 19세에 결혼했다. 이 부부는 금슬이 좋았으며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음악, 건축, 문화,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고 궁정 음악가를 양성하여 빈 도처에 음악가, 예술가가 넘치게 했으며 철권정치가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정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위를 남자에게 계승하도록 되어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공주의 몸으로 왕권을 이어받는데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카를 6세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불행이도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이 요절하자 카를 6세는 자기 핏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1713년,

아들이 아닌 딸도 오스트리아·보헤미아·모라바·헝가리 등 합스부르크 왕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국사조서(國事詔書)를 국내 및 각국에 발표했다. 그 뒤 그가 염려하던 대로 아들을 얻지 못하고 1717년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나자 딸에게 왕통을 이어가게 했다.

  그러나 카를 6세가 서거한 후 주변 나라들은 그녀의 왕권 상속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나이 어린 그녀에게는 큰 시련이었지만 천부적인 정치 역량을 발휘하여 아들 요제프가 태어나자 1741년 3월, 헝가리로 달려가 미래의 황제를 위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여 마침내 열렬한 지원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헝가리 이외에 반대하는 나라가 많아 한때는 황제 자리를 숙부인 카를 7세(카를 알브레히트)에게 내어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마침 4년만에 카를 7세가 죽고 황태자 막시밀리언 3세도 황제 자리에 관심이 없자 1745년 10월 4일에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앉히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 로렌왕조 통치시대 연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의 대부분을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의 부르봉 가 일족과 정략 결혼을 시켰다. 그 가운데 열다섯 번째의 딸인 마리 앙또아네트는 프랑스의 루이14 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불행하게도 사치를 일삼다가 프랑스혁명에 빌미를 제공하게 되어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이곳에는 마리아테레지의 장남 요셉2세의 결혼(1760.10.7.) 그림도 있었는데 재미  있는 두 가지가 발견되었다. 그 하나는 황제와 황후만 밥상을 받고 있었고 다른 하객들은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객에 모차르트가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뒤에 다른 사람의 얼굴을 지우고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 공개되는 방 중에 몇 개를 기술해본다. 

  푸른 중국의 방 - 푸른 바탕색 벽에 중국화가 있다. 특히 이 방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가 퇴위선언서에 서명을 했던

곳이다. 그는 혐오했던 나플레옹에게 사랑하는 딸을 내어주었으며 그 사위에게 무릎을 꿇게 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 것이다.

  고자개의 방 -  쉔부른궁전 중에서 가장 화려한 방이며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이 사망하고 난 뒤, 미망인으로 있을 때 머물던 방이다.

  나플레옹방 - 나폴레옹이 이곳을 점령하고 난 뒤, 1805년과 1809년 쉔부른에 있을 때 머물던 방이다. 나플레옹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증손녀 마리 루이제와 결혼하여 아들 라이히 슈타트 공작을 낳았다. 나플레옹이 몰락하고 난 뒤, 아들은 그곳에 연금되어 있다가 21세의 젊은 나이에 그 방에서 죽었다. 그 때 키우던 종달새도 같이 죽었다고 한다.

  도자기 방 - 마리아테레지아의 집무실. 원래는 목각이지만 색깔을 입혀 도자기 같이 보이는 것이다. 

  거울의 방 - 모차르트가 연주를 한 곳이다. 6세의 모차르트가 연주를 마친 뒤, 마리아 테레지아 무릎에 올라가 입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곳은 여러 종류의 나무며 꽃들로 조경이 잘 되어 있으며 정원 곳곳에 조각상들이 서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동물원이 있는 곳이다. 마침 날씨가 더웠는데도 시원한 분수가 더위를 식혀주었다.  

 

◎ 본궁

 

  

쉔부른 궁전을 나와 시내에 있는 본궁으로 이동했다. 원래 구 시가지는 성벽으로 되어 있었지만 프란체스 왕이 성벽을 부수고 도로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 때 초원을 팔아 건설 비용을 충당했다고 한다.  비엔나는 인구가 160만 정도로 대구시 정도이다. 녹색도시로 성장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살기좋은 도시’ 1위로 꼽히고 있다. 한 때는 이곳도 시내에 묘지가 있었으나 공원묘지를 조성하여 외곽으로 옮겼다. 건물은 동유럽 다른 나라처럼 옆집과 공간을 두지 않고 이어 지었다.

  왕궁 (Hofburg)은 합스브르크의 역대 왕조가 13 세기부터 191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매번 각기 다른 양식으로 좀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증축하여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황실 보물관 (Schatzkammer)과 예배당(Burgkapelle) 이 볼 만하다 . 예배당에서는 7-9 월을 제외한 매주 일요일과 종교 축일에 미사가 집전되는데 이때 천사의 목소리라 하는 빈 소년 합창단의 예배 봉사가 있다 . 영롱한 합창단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독이 말끔히 풀린다고 하지만 우리는 일정 때문에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해 아쉬웠다.

  이곳은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하고 난 뒤 50만 군중 앞에 연설한 곳이기도 하다.    

 

◎ 성 슈테판 성당 

  19세기 말에 완성된 네오고딕 양식의 화려한 빈 시청사를 지나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사원인

슈테판 성당에 갔다. 빈의 상징이자 혼이라고 일컬어지는 성 슈테판 성당은 12세기에 세워진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 성당이다. 이름은 기독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는 성인 슈테판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보헤미아의 왕인 오토가 2 세와 합스브르크 왕가의 루돌프 6 세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한 이래 300 여 년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화재로 내부가 소실되었으나 국민의 성금을 모아 1948 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한편 이곳은 모차르트의 화려한 결혼식과 초라한 장례식이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

  성당 앞 광장은 마침 오순절 축제 기간이라 연주 등 볼거리가 많았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매점도 있었다. 여기뿐만 아니고 곳곳에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상점이 있었다.

  빈은 쓰레기 소각장이 시내 중심부에 있었다. 전혀 공해 물질을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으며 밖에서 보면 쓰레기 소각장은 잘 조각된 예술품 같았다.

 

◎ 호이리게

  

 

오스트리아는 오래된 식당들이 많다. 1905년에 만든 돈까스 집, 1447년부터 계속하는 식당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앞선 1137년이나 된 “호이리게” 라는 식당이 있었다. 무려 873년이나 되었고 우리나라 연대로는 고려중엽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은 각국의 많은 대통령 및 연예인, 종교지도자 등이 찾아온 곳이기도 하다. 또 베토벤이 자주 찾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호이리게’란 그 해에 새로 만

든 와인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을 파는 술집이란 뜻이다. 우리도 기념으로 여기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음식은 구운 감자, 셀러드, 비엔나 소세지, 돼지고기 훈제에 와인이 나왔다.

  와인을 마시며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든 악사들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연주 하면서 홀에 들어왔다. 그들은 곧 우리나라의 가요인 ‘만남’, ‘보리밭’, ‘해변의 여인’, ‘아리랑’ 등을 연주했다. 이국인들의 연주에 맞춰 우리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도 추억에 남을 일이었다. 

 

 

◎체크인 호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온 시간은 저녁 9시, 그런데도 날이 밝았다. 이곳 사람들은 해가 짧은 겨울에는 가족과 같이 지내고 여름에는 산책을 즐긴다고 한다. 이곳은 월급을 14번 받는 꼴이란다. 여름 휴가비와 겨울 휴가비를 받기 때문이다. 

  ‘체크인’이란 호텔에 들어갔다. 한적한 시골 호텔로 개구리 소리가 요란했다. 처음에는 헙수룩하여 걱정을 했으나 식당이 깨끗하고 음식도 좋았다. 특히 과일을 많이 내어 놓아 아내가 좋아하였다. 또 어떤 곳은 따뜻한 물도 1유로를 내라고 했으나 여기는 돈을 받지 않았다.

  이곳에 독일 여행객들도 투숙하였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니 반가워하였다. 우리도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배웠다고 했더니 독일어를 잘 하는 줄 알고 물어오는데 말이 짧아 쩔쩔 매었다. 외국에 나가서 외국어로 술술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 딸린 호프집에서 맥주 몇 병 시켜놓고 일행 몇 명이 한잔씩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빈의 밤은 편안하게 깊어갔다.   

 

동유럽 여행 (8)  '모차르트의 고향 짤츠부르크'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