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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

동유럽 여행(6) 헝가리 부다페스트

동유럽 여행(6)

 

                        헝가리 부다페스트 

 

행전 박영환

 

◎반스카 비스트리카 강변

 

  

여행 제6일, 아침에 일어나 스로바키아, 반스카 비스트리카 강변에 산책을 나갔다. 강이라기보다는 내에 가깝지만 타트라 산맥에서 흘러내려오는 깨끗한 물이 풍부하게 흘렀다. 유속도 상당히 빠른 것 같았다.

  다리 위에서 아내와 바람을 쏘이고 있는데 마침 출근하던 어떤 부인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고마웠다.

 

 

 

◎선팅

 

  ‘동유럽의 파리’라고 불려지는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역시 타트라 산맥을 넘었기에 구릉지대나 산악지대를 지났다. 8시 30분에 출발하여 12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이날은 정말 오랜만에 햇빛이 쨍쨍했다. 가이드가 우리 일행은 신 내림을 받은 사람 같다고 했다. 비가 오다가도 우리가 내리면 비가 오지 않고 이렇게 날이 좋으니 정말 축복을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주내내 비가 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여행하는 이 시기가 오순절 휴일 때라 차가 거리에 나오지 않아 교통도 막히지 않으니 보통 복이 아니란 것이다.  날씨 사정을 잘 몰라 내복까지 입었는데 더웠다. 거리에도 각양각색 복장이었다. 겨울옷을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팔을 입은 사람도 입었다. 

  햇빛이 늘 부족한 곳이라 모처럼 햇빛이 나니 웃옷을 벗고 선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벨상 수상자 18명의 나라

 

  현지 가이드 문 씨가 나왔다. 33세로 경호학과를 졸업하고 헝가리대학에 유학을 온 학생이다.

  헝가리는 9세기에 판노니아 평야에 마자르인들을 이끌고 들어온 아르파드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에 있던 헝가리는 1867년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자치 왕국으로 되었으나 1930년대 히틀러에 의해 나치 독일의 강요로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 뒤 히틀러의 패배 후 소련군이 진주한 헝가리는 다시 공산 정부 아래에 들어갔다. 그 이후 소련이 해체되자 헝가리는 서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고 있다.

  현재 전 국민의 84.4%가 핀-우그리아어파의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헝가리인(마자르인)들이다. 이 나라도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으면 현재 1000만명에 조금 모자란다고 한다.

  농산품은 싼 편이지만 공산품은 비싸며 빈부격차가 심하다고 한다. 폴란드처럼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으며 반면에 세금은 약 50% 정도 낸다고 한다. 이곳 역시 대학원까지 무료이다. 음악을 전공하면 악기 대여도 해줄 정도이다. 물론 과외가 없으며 직업교육이 활성화 되어 있다. 출산 휴가도 3년간 주며 그 때 80%의 월급도 지급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도 인구가 줄어진다고 하니…. 세계 각국마다 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헝가리는 평야이기 때문에 대체로 외침을 많이 받은 나라로 저항의식, 투쟁의식이 강하던 나라이다. 1956년 소련에 항거하여 자유 민주 투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 때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김춘수의 ‘부다페스트 소녀’가 생각이 났다.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 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김춘수의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 중에서)

 

  “이곳은 마잘족의 나라가 되어 얼핏 ‘마자리 - 머저리’라는 말이 연상될지 모르지만 절대로 멍청한 나라가 아닙니다.” 가이드가 강조했다. 국민 소득 만불이 넘고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만 해도 18명이나 된다. 물론 1․2차 세계 대전시 많은 과학자가 망명 또는 이민을 하면서 국적을 바꾸어 공식적인 헝가리 노벨상 수상자는 3명뿐이지만 헝가리인임에는 틀림없다.

  1926년 세계 최초로 파프리카로부터 비타민C를 분리하는데 성공하여 노벨의학상을 받은 사람도 있고 볼펜을 최초로 만들고 칼라 TV와 냉동고를 처음 만든 사람도 헝가리인이다. 그 외에 변압기, 성냥, 증기기관, 비행선이며 전신전화를 처음 발명한 사람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 정도이니 이 나라의 과학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음악도 발달한 나라로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가 스승으로 모셨던 스트라우스도 헝가리 음악가이다. 이곳의 오페라 하우스는 비엔나보다는 작지만 내부는 잘 되어 있다.

 

◎ 동․서양 교차지점

  헝가리는 동양이 끝나고 서쪽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나라이기에 서양적이긴 하지만 동양적인 유전자가 있는 나라라고 한다. 몽고반점이 있고 키가 작고 머리카락이 검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금귀줄을 치고 고추를 다는 풍속이 있는데 이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동양적 문화와 비슷한 것이 있다하여 그들을 아시아 계통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을 듯하다. 헝가리 사람들 역시 그 주장에는 별로 동의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도 부다페스트는 200만 정도가 되며 교민은 800명 정도 되는데 삼성전자, 한국타이어, LG, 하나은행 등의 주재원 가족이 많다고 한다. 한인회 구성은 되어 있지 않으며 한인 청년회 홈페이지에도 총무인 자기와 회장이 들어올 정도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아리랑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비빔밥이었다. 한 그릇에 10유로이니 14000원 꼴이었다. 맛이 있었다. 항가리인들도 많이 온다고 했다. 정원에 찔레꽃을 심어 놓은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주인은 이곳에 온 지 약 5년 정도 되었는데 찔레꽃을 보며 향수를 달랜다고 했다.

 

 

몸이야 떠나도 마음이야 떠났겠소

음식은 비빔밥 꽃내음은 찔레꽃

한국말 인사 건네며 마음을 달레네

 

◎ 부다왕궁, 마챠시 교회 

  부다왕궁을 보았다. 13세기중엽 몽고군의 습격을 피해 부다에 성을 세운것이 왕궁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 후 증축을 했지만 터기 지배하(1542~1686)에 큰 손상을 입었으며, 1686 십자군 전쟁시 그리스도교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제국시절 바로크 스타일의 새로운 왕궁이 재건축되었으며 19세기 후반 현재의 규모로 확장 되었다. 1945년 2차대전 당시 바로크 스타일 왕궁이 불에 탔으나 304m에 이르는 외양과 돔 형태를 변형하여 복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미술관, 역사박물관, 도서관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광장에는 터키군을 물리친 5척 단구의

지략가 유진장군의 동상이 보였다. 기마상 밑에 결박당한 흑인과 터키인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동상 두 개가 더 있는데 소설 속의 인물을 동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나는 현모양처였고 또 하나는 헝가리판 카사노바인 바람둥이인데 발을 만지면 정력에 좋다는 이야기가 있어 워낙 많이 만지는 통에 발이 반질반질했다. 

  마챠시 교회 - 13세기 건축된 고딕양식의 건물로 부다 지구의 상징이다. 헝가리 왕의 대관식이 열리던 곳인데, 마챠시란 이름은 1470년 마챠시 왕의 명령으로 88미터 뾰족탑이 증축되면서 붙여졌다. 오스만투르크(지금의 터키) 통치 시절에는 이슬람교의 예배하는 건물인 ‘모스크’로 사용되다가 17세기 카톨릭 교회로 환원되면서 당시 유행하던 바로코 양식이 도입되었다. 새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고 싶은 성당으로 꼽힌 곳이다. 마침 사암을 깨끗하게 세척하여 검은 때가 보이지 않았다. 

     어부의 요새 - 얼마 전에 폭우가 쏟아져 키 큰 나무가 폭풍우에 뿌리가 뽑힌 것이 있었다.

  뾰족한 고깔 모양의 하얀색 탑 7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수천 년 전 헝가리를 건국한 7명의 마자르족을 상징한다. 거기에 기마상은 초대왕인데 십자가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왕권과 종교권 두 개를 가지고 있다는 표시라고 한다. 19세기에는 어부들이 여기에서 적의 침입을 막았기 때문에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대통령궁으로 가는

길에 베토벤 기념관도 있었다.

 

  강너머 페스트가 한눈에 들어오네

  나라위해 몸을 던진 어부의 마음이

  뾰족한 고깔 위에서 바람되어 펄럭이네 

 

◎ 영웅광장

  

헝가리 건국 천년(1896)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가운데 기념탑이 대천사 가브리엘이고 기둥 아래쪽은 아르파드(마자르족 족장, 건국의아버지)와 부족장 6인의 기마상이 있다. 양 옆 반원형의 기둥 사이사이로 성 이슈트반(헝가리 최초국왕) 등 역사에 남는 왕들과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들의 동상이 늘어서 있다.

  광장에 서 있으려니 수녀라고 하면서 가까이 와서

  “이름이 뭐예요. 저는 수녀입니다. 가난한 어린이 돕기에 참여해주세요.”

  하도 한국말 발음이 정확하여 2유로를 주었다. 그런데 한국말을 정말 잘 하는 줄 알고 다른 말을 물었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 말밖에 몰랐던 것이다. 속은 기분이었다.

  여행객이 참 많이 붐볐다. 여기에는 수녀처럼 날씬하고 예쁜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면 뚱뚱한 사람들도 참 많았다. 우리를 안내하는 기사 분은 배가 많이 나왔다. 그분의 배가 나온 것을 보며

  “내 배는 배가 아니다.”

  라고 하니 일행들이 웃었다.

  

다뉴브강에서 유람선을 40분 정도 탔다. 강변에 국회의사당이며 잘 정돈된 예스런 건물들의 그림자가 물위에 떴다. 이날이 마침 양 교수와 최 교장 내외의 결혼 40주년 기념일이라 와인과 맥주를 돌렸다. 두 분은 선단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왈츠 춤을 추었다. 40년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는 꼭 그렇게 되라고 축하하면서 큰 박수를 보냈다. 금슬 좋은 두 부부 정말 보기 좋았다.

  

  

 

  우리도 내년이면 사십년 기념일

  내년에 우리도 와인 한잔 돌릴께요

  아내가 약속을 하니 박수를 선불 받고

 

  저녁에 부다페스트 시내에 있는 호텔에 투숙했다. 중국인이 경영했다. 대형 도자기가 로비에 가득했다. 화장실에 처음으로 밑바닥에 하수구 구멍이 있었다. 이 호텔 근처에 중국어로 된 간판들이 꽤 보이는 것으로 보아 화교들이 많은 것 같았다.

  저녁에 일행인 한 사장이 왕 교수와 최 교장의 결혼 40년을 축하하여 술을 돌렸다. 또 몇 분은 축

하노래를 불렀다.   

 

 

 

 

 

동유럽 여행(7) '오스트리아 비엔나'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