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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

동유럽 여행(9) 뮌헨과 백조의 성

동유럽 여행(9)

                     뮌헨과 백조의 성

 

행전 박영환

 

◎뮌헨 

 

  여행 9일째, 뮌헨으로 갔다. 다시 독일로 가는 것이니 남동쪽에서 돌아가는 길이다. 아침 7시 40분 출발 3시간 정도 걸려 뮌헨에 도착했다. 마로니에꽃이 풍성한 가슴을 열고 우리를 반겨주었다.

  알프스 산맥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뮌헨은 독일에서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이어 3번째로 큰 도시로 독일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잘츠부르크에 이어 독일인들이 좋아하는 곳을 오게 된 것이다.

  뮌헨은 베네딕투스 수도회 수도원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으며  바텔스바흐 가문이 1255년 본거지로 삼은 이후  700년 이상 뮌헨을 다스렸다. 14세기초 루트비히 4세가 크게  발전시켰는데  1634년 전염병이 퍼져 인구의 1/3이 사망했고, 1643년에는 구스타프 아돌프가 다스리던 스웨덴에게 점령되었다. 그 이후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1세가 현대적 뮌헨을 계획하고 건설했다.

  루트비히 2세가 작곡가 바그너를 후원함으로써 음악·가극 도시로 만들었으며 이때부터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1918년 11월 비텔스바흐 왕조의 통치는 루트비히 3세의 퇴위로 끝나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정치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나치)당에 가입해 그 지도자가 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가 집회를 가졌던 맥주저장소 지하실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의 집회가 1923년 11월 8일 바이에른 당국에 대한 소요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심한 폭격을 받았다.

   

◎ 두 문인의 발자취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독일에 처음 유학했던 전혜린이 이곳 남부에서 살았다. 그녀는 이곳에 유학하며 독일 문학작품을 번역하기도 하고 또 수필을 썼다. 그녀는 법대에 다니다가 3학년 때 독일로 가서 1959년 뮌헨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번역과 문단활동을 했지만 설흔 한 살 젊은 나이에 자살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생의 한가운데’ 및 ‘데미안’ 등을 번역했고  1966년에 나온 유고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또 독일에서 활동했던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번역한 것도 큰 업적이다.

  이미륵은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독일로 망명한 분이다. 이 분 역시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 등을 전공했다.

  1946년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했을 때 독일의 한 잡지는 “올해 독일어로 쓰여진 가장 훌륭한 책은 외국인에 의해 발표되었는데, 그는 이미륵이다”라고 했으며 독일 문단에서 인정을 받아 교과서에도 실렸다.

 

◎ 맥주부터 마시고

 

   

뮌헨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간 곳이 구시가지 암프라츨 9번지에 있는 호프브로이 하우스이다. 이곳은 400년 전통을 지닌 세계적인 맥주 전당이다. 흔히들 줄여서 <하베>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원래 이곳은 왕궁 맥주 양조장에서 출발했다. 독일은 석회질 땅이기에 식수가 문제이다. 그래서 발효해서 마시는 맥주산업이 발달했다. 아침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벌써부터 여기저기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프브로이하우스는 각종 기록을 지니고 있다. 우선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 주점이다. 좌석만 3600개에 달하고 하루 방문하는 고객이 평균 3만명 정도라고 하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열린 해에는 하루에 1ℓ짜리 맥주 3만6000잔이 팔린 기록도 있는 곳이다.

  뮌헨은 맥주 축제로도 유명하다. 세계 최대의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는 1810년 루트비히 1세의 결혼식 피로연으로 시작됐으며 매년 10월 첫째 일요일의 보름 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뮌헨 시가지 전체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뮌헨의 인구가 130만 명 정도인데 이 기간 찾아오는 관광객은 6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상주 인구보다 관광객이 다섯 배 정도 되는 셈이다. 

  이 축제 기간 700만ℓ가량 맥주와 생선 40톤, 닭 65만 마리, 소시지 110만 개가 소비된다고 한다. 그 분위기에 한 번 젖어 보고 싶다. 그 시기에 다시 한 번 찾아야겠다. 

 

 

맥주의 본터인데 어찌 그냥 지나리오

술 한잔 높이 들고 건배를 외친다

모두들 건강하시오 이 기분은 오래오래

 

 ◎ 시청사

  신시청사가 있는 마리엔 광장은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다. 쇼핑 센터도 많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 부근에 모여 살고 있다.

  이곳은 아름다운 종소리로 유명하다 종을 칠 때  인형들이 움직이는데  인형극을 보기 위해 수많은 국내외 방문객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1867-1908년에 지어진 신시청사는 뮌헨의 중심부인 마리엔 광장의 북쪽에 있다. 네오 고딕 양식에 따라 지어져 우람한 외관을 자랑하며, 중앙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종루에는 독일에서 가장 큰

움직이는 인형 시계 글로켄슈필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인형들의 춤은 1568년에 있었던 왕가의 결혼 축하연 중 기사들의 마상 시합과 페스트 퇴치를 기념하는 술통 제조업자들의 춤을 재현하고 있다.  종탑의 높이는 85m이다.

   옆에 프라우엔성당이 있다. 이 성당 종루에 올라가면 뭰헨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시간에 쫓겨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일행 중 서울에서 오신 할머니 두 분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데 그분들은 성당을 만나게 되면 다른 만사를 제쳐놓고 들어가서 기도를 올렸다. 이날도 일정에 쫓기니 밖에서 잠깐 구경만 하라는 부탁이 있었지만 애써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만 바삐 나오다가 길을 헤매는 통에 40분 정도 지체되고 말았다.

이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의 공연이 있다. 밖에서 연주를 한다고 결코 무시할 일이 아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시청사 곳곳을 임대하여 장사를 하고 시청 안마당에서 노천 식당을 경영하는 것은 조금 생소했다. 우리네 관공서에서는 이런 일이 없기에. 그러나 또 그렇게 일상화된다면 또 괜찮을 것이다.

 

        백조의 성 

 

 

독일, 뮌헨을 떠나 퓌센에 있는 ‘백조의 성’으로 갔다. 그런데 이 ‘백조의 성’이란 통상적으로 부르는 이름이고 공식적인 명칭은 노이슈반슈타인성이다.

  가는 길은 전형적인 시골길이었으며 주변 구릉에 목장이 많았고 젖소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이따금 목장에서 일하는 차들이 느린 속도로 운행하기에 길이 막힐 때도 있었다. 멀리 알프스 산에는 5월인데도 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산 중턱에 있기 때문에 ‘백조의 성’은 멀리서도 그 모습이 금방 드러났다. 일행들은 차안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터뜨리며 성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 독특한 성이었다. 디즈니랜드 성도 바로 이를 본떠 만든 것이다.

  이 성을 만든 이는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이다. 그는 바그너의 예술성을 주제로 직접 설계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바그너의 예술에 대해 심취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바그너는  1813년 라이프지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어머니가 새로 재혼했는데 그 계부가 배우이며, 극작가이고 화가, 가수이었기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궁핍한 생활을 면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면서 극본도 직접 쓰고 연주활동도 하지만 별로 성공하지 못하고 빚만 잔뜩 지게 되었다. 그러는 속에서도 첫 오페라인 ‘결혼’ 이 성공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아끼던 ‘탄호이지’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많은 부채를 지게 되어 도망을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구세주로 나타난 이가 바로  18세에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2세였다. 선천적으로 정치보다는 음악, 시, 미술 등 예술세계에 빠져 있던 왕인지라 바그너의 시와 음악을 만나는 순간 이내 헤어날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든 것이다.

  그는 바그너의 부채를 전부 다 갚아주는 등 온갖 호의를 베풀면서 가까이 데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데리고 있다기보다는 모시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바그너도 이 구세주 왕에게 충성의 서약을 했다. “오, 은혜로 충만하신 왕이시여, 천상의 감동에서 솟아난 눈물을 당신께 바침으로써 그리도 비천하고 애정에 굶주려 왔던 제 가련한 인생이 품고 있던 시적 경이감이 드디어 지고한 현실이 되었음을 당신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이 인생의 마지막 한 단어까지 마지막 한 음계까지 저의 인생은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1864년에 쓴 편지 내용이다. 그 이후 왕은 오스트리아 여황제의 동생인 약혼녀 소피샤를로트와 결혼날짜가 잡은 처지였으나 파혼을 선언하고 만다. 이 사실도 바그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조의 성’은 1869년부터 시작하여 1886년까지 17년간에 걸쳐 지은 대 역사이었다. 만약 왕이 죽지 않았다면 공사는 수 년 간 아니 수 십 년 간 더 계속 되었을 것 같다.  

  주차장에서 언덕 위에 있는 ‘백조의 성’을 관람하러 가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이곳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손쉽고 마차를 타고 가면 나름대로 특유의 정취가 있어 색다른 관광도 된다. 아니면 조금 힘들더라도 아예 도보로 갈 수도 있다. 우리 일행들은 일단 올라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갔다가 내려올 때는 마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는데 옛날 우리나라 6,70년대 버스처럼 계속 사람들을 밀어 넣는 통에 발 디디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수용하려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성곽 뒤편 구름다리 위로 갔다. ‘백조의 성’은 여기에서 조망하면 성곽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기도 하려니와 경치도 가장 좋다. 이 성의 사진이 달력에 많이 활용되는데 그 대부분이 이 구름다리 위에서 찍은 것이다. 밑을 내려다보니 천 길 낭떠러지인데다가 이날따라 바람까지 많이 불어 줄이 끊어질듯 심하게 흔들렸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요동을 칠 때마다 자지러지는 탄성이 쏟아졌고 그 소리에 놀라 다리가 더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가슴을 조이며 기념 촬영을 했다.  

  구름다리를 내려와 성곽 내부를 둘러보았다. 중세의 성을 재현한 사치스런 성채, 낭만적 정취가 가득했다. 벽으로 둘러싸인 안뜰과 실내정원, 뾰족탑, 망루, 인공동굴…. 두 개의 층을 터서 지은 왕의 알현실은 비잔틴 대성당을 본떠 만들었다. 푸른색의 둥근 천장은 별들로 장식했고, 붉은 반암(斑岩)으로 만든 둥근 기둥이 그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에는 전체를 장식하는 벽화들이 많은데 모두 바그너 음악의 주제들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공을 들여 지은 성이지만 정작 왕이 여기에 머문 기간은 불과 6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철저히 바그너의 예술성을 의식한 성인데도 정작 바그너 자신은 이곳에 한 번도 와 보지 않았다고 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사치스런 성을 축조하여 오래오래 호사를 누리며 살고 싶었겠지만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어 남가일몽(南柯一夢),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루트비히 2세의 죽음은 의문이 많다. 그의 주검이 가까운 못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자 평소 수영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누군가에 의해 타살되었을 것이라는 설을 제기했고 한편 그것이 아니고 정적에 의해 구금되는 비극을 맞은 상황에서 이를 비관하여 자살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설에서 설로 이어질 뿐 사인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못한 채 미궁으로 남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루트비히 2세는 자기 사후에 혹여 이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할까 염려하여 자신이 죽으면 성을 부숴 버리라고 부하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성을 부수지 않았고  그 뒤 히틀러도 부수려고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성은 그대로 남아 결국 관광지가 되고 말았다.

  이 성을 짓는 과정에 엄청난 돈이 들어 나라 곳간이 거덜났으며 마침내 국가의 기반까지 흔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무모할 정도로 무리가 따랐기에 원성 또한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왕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고 죽음까지 맞이했던 것인데 지금은 오히려 관광 수입을 톡톡히 올려 주는 효자 노릇을 하니 세상일은 참 알고도 모를 일이다. 

  내부를 둘러보고 돌아오려니 갑자기 구름이 모이더니 비가 쏟아졌다. 일행들과 마차를 타고 내려가기 위해 마차 정류장에 갔는데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은지 기다리는 줄이 꼬리를 물고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다간 예정된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 것 같았다. 차라리 걷는 게 빠를 것 같아 마차를 포기하고 걸어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유모차를 밀고 내려오는 한국인을 만났다. 그의 부인은 외국인이었다. 그가 먼저 한국에서 왔느냐고 말을 걸었다. 그렇다고 하면서 인사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8세 때 미국에 입양되어 갔으며 미국에서 35년간 살았고 현재는 군인의 신분으로 독일에 파견되어 나왔다고 했다. 대구에 형제들이 있어 가끔 연락을 한다고 한다. 좀 어눌하지만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다. 우리말을 잊지 않고 있어 고맙다고 했더니 당연한 것이라고 하여 더더욱 고마웠다. 그런데 그 유모차에 탄 것은 아기가 아니고 강아지였다. 아이는 낳지 않기로 했단다.

  내려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음 여행지로 떠났다. 참 이야기꺼리가 많은 ‘백조의 성’이었다.

 

 

동유럽 여행(10)

'네카어 강변의 하이델베르크'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