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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

천연림의 숨결이 가득한 필리핀

  천연림의 숨결이 가득한 필리핀

 

 

 

                                                                                       행전 박영환

 

 

  3월 21일(월), 저녁 9시 30분 일행들과 함께 김해공항에서 필리핀 행 비행기를 탔다. 일행은 같이 퇴직을 한 분들이다.

   마침 기내에서 스튜어디스로 근무하고 있는 S여고 제자 구양을 만났다.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 제자를 만난 건 처음이다. 곱게 자라 보람된 일을 하는 것을 보니 무척 기뻤다.

  구양은 짬짬이 곁에 와서 학창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불편한 점이 없는지 도와줄 것이 없는지 수시로 물었다. 그리고 비행기가 도착하자 술 한 병을 선물했는데 그 속에 예쁜 글씨로 쓴 쪽지 편지도 들어 있었다.

 

선생님

 

  제자이자 승무원 구○○입니다.

  4년 정도 일하면서 비행기에서 은사님을 만나는 것이 처음이라 너무 기쁘고 반갑습니다.

  선생님 뵈려고 오늘 따라 부산에서 출발하는 비행기에 탔나 봅니다.

마음으론 하나라도 더 챙겨드리고 싶은데

뭐 드릴게 없네요. 마음은 가득인 거 아시죠?

  오늘 마닐라 비행은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여행 가셔서 좋은 거 많이 보시고 맛있는 것 많이 드시고 오세요.

  손님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2011.3.21.

                                      

                      부산 - 마닐라 비행기 안에서

 

                                  제자 ○○ 드림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출발부터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밤 12시 15분,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시간은 01시 15분이니 1시간을 번 셈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마닐라 시가지는 불빛이 별을 뿌려놓은 것 같았다. 한 밤중인데도 별은 잠들지 않고 멀리서 온 손님을 맞고 있었다.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가이드 고 씨가 마중을 나왔다. 한국을 떠나 필리핀에서 5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고 씨도 부산의 K 상고 출신인데 공교롭게 같은 일행인 이 교장의 제자였다. 이번 여행은 이상하게 제자들을 많이 만나는 여행이다. 사실은 공항 출구에서도 박 교장의 제자를 만난 적이 있다.

  02시 40분 자리에 들어 잠시 눈을 붙이고 3월 22일(화) 아침 9시, 따가이따이 지역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필리핀 가이드인 ‘준’씨가 눈인사를 보내며 턱을 들었다.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턱을 들면서 인사를 한다. 필리핀 사람들은 서로 마주치면 잘 웃는다. 그 밝은 웃음이 상대편을 참 편안하게 했다.

  남쪽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고속도로라 하지만 별로 길이 시원하게 뚫리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제일 해결 안 되는 것이 교통체증이라고 하는 말이 빈말인 아님을 실감했다. 하기야 어려움이 어찌 교통체증뿐이겠는가!

  필리핀은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루손, 비사야, 민다나오 세 구역으로 나누고 가장 큰 섬, 루손 지역에 필리핀 수도 마닐라가 있다. 정확한 명칭은 메트로 마닐라이고 메트로 마닐라 안에 마닐라시가 별도로 있다.   

  필리핀 전체 인구는 9200만 명이다. 그런데 이는 정식으로 등록된 숫자이고 등록되지 않은 인구도 최소한 500만 명 정도는 될 것이라 한다. 마닐라만 해도 1400만 명이 살고 있다.

  천주교 국가이니 피임약이나 피임 도구를 팔지 않는다. 자연 아이들을 많이 낳는다. 그러나 근래에는 4명만 낳자고 홍보를 하기도 한단다. ‘준’은 38세인데 아기가 3명이라고 한다. 보통 이 정도 연배에는 5-6명 정도 아이가 있게 마련인데 그에 비하면 적은 편이라고 한다.

  이렇게 인구가 늘어나니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빈부격차가 심한 곳이다. 너무 많이 낳아도 문제이고 우리나라처럼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져도 문제이다.

  이번에 우리가 필리핀에서 여행한 코스는 활화산 지역인 ‘따가이따이’와 폭포로 유명한 ‘팍상한’ 그리고 야외 온천인 ‘히든 밸리’이었다. 그런데 이 세 코스 모두 공교롭게 야외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체험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열대지역의 강렬한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선크림을 바르는 것은 필수였다. 일행 중 한 분은 예사로 생각하고 그냥 나섰다가 화상을 입어 한 동안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려 지푸니를 탔다. '지푸니'란 지프에 포니(당나귀)를 합친 합성어이다. 옛날, 미군들이 군용트럭을 버리고 갔을 때 운전을 하지 못하는 필리핀 사람들이 당나귀로 차를 끌고 다녔는데

 

그때 그런 이름이 생겼단다.    문에 커튼 몇 조각으로 햇볕을 가리고 있는 차인데 속력을 내지 못하는 것, 소음이 심한 것,  몹시 덜컹거려 엉덩이가 아픈 것 등등 우리 시골의 경운기 수준이었다. 운전하는 도중 기사는 틈틈이 엔진을 식히려고 냉각수를 계속 보충했다. 우리 경운기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열악한 차이지만 이곳 서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교통수단이다. 이유는 우선 값이 싸기 때문이다. 4킬로미터 가량 가는데 우리 돈 200원 정도이며 하루를 빌리는 데는 7 만 원 정도이다. 행선지 표시가 있는데 이를 보고 손을 들거나 차를 두드리면 세워준다. 차비는 뒤에서 앞으로 전달한다. 매달려서 가거나 지붕에 타고 가면 공짜라고 한다.

  좌석도 군인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갈 때 그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남녀가  무릎을 맞대어 가다보면 정분이 나는 로맨스도 있다. 그래서 '사랑의 지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차 앞에 말 모형을 장식하는 기사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 하나이면 애인이 한 사람이란 뜻이고 말을 세 마리 붙여놓으면 애인이 세 사람이란 뜻이다. 일부다처인 모슬렘 기사들 중에 자랑으로 붙여놓은 사람이 있으니 세 개 붙인 것을 찾으면 가이드가 큰 선물을 하겠다고 하여 열심히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필리핀 교통체증의 원인 중 하나가 이 지푸니이다. 거북이 걸음으로 다니는데다 고장도 잦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차가 고장이 나면 갓길에 나가지 않고 제 자리에서 고치기 때문에 길이 더 막힌다고 한다.

  차가 고장 난 것 외에도 장의행렬, 축제들 때문에 예사로 2-3시간 길이  막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 젖어 있는 터라 별로 짜증을 내지 않는다. 하기야 이곳 사람들은 시간도 통신회사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도 잘 적응하고 있단다. 열대지역 특유의 모습으로 전혀 바쁘지 않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속이 터지는 일일지 몰라도 어쩌면 그 여유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지푸니에서 내리면서 기사에게 이곳 토속어로

  “살라마 뽀”

  라고 했다. ‘고맙습니다’란 뜻이다.  아주 좋아하며

   “뽀기”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미남’이란 뜻이다. 미녀는 ‘마간다’라고 하는데 피부가 하얀 사람은 무조건 미남 미녀라고 부른단다.

  따가이따이란 ‘축복의 땅’이란 뜻이다. 처음에는 활화산 지역인 이곳이 축복받은 땅이란데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일본에 큰 지진이 일어난 직후인지라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화산이 폭발하면 쏟아진 화산재가 좋은 거름이 되어 땅이 비옥하게 되니 그렇게 말을 한단다.

  

실제 이곳은 땅이 비옥하여 과일들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이곳을 지나다보면 당도가 높고 물이 많은 코코넛, 망고, 파인애플, 바나나 등을 파는 과일 가게가 즐비하다. 코코넛 나무는 높이가 10미터이면 뿌리가 25미터라고 한다. 그런데 수익성도 있어 이 나무 8 그루만 있어도 아이를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고 한다. 1980년대 교황이 방문했을 때 환심을 사기 위해 코코넛으로 궁전을 만들어 바쳤지만 교황이 자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코코넛은 많은 일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곳은 정말로 살기 좋은 곳입니다. 비교적 임대료도 싸고 생활비가 적게 들어갑니다. 그런데 필리핀에는 세계 30위 이내 대학이 네 곳이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손자들을 데리고 오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 손자가 있는 분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가이드가 여담으로 던진 말이다.

  “손자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네, 요즈음, 아이가 공부를 잘 하려면 어머니의 정보에 아버지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는 우스갯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빚을 내어서라도 손자를 데리고 와야 되겠는데….”

  누군가의 말에 같이 웃었다.

  실제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한국인이 약 20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우리 민족 특유의 근면성으로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나름대로 기반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필리핀 사람들도 한국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근래에는 한류 열풍으로 한국 연예인들의 인기가 높다. '소녀시대'가 공연을 하러 왔을 때는 '소녀시대의 날'을 붙이기도 할 정도이었다.

  필리핀은 6.25 전쟁 때 세 번째로 한국을 지원했던 전통적인 우방 국가이다. 계속 우호적인 관계가 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11시 30분 경, 호숫가 식당에 짐을 맡겨놓고 타알호수를 건너가는 배에 승선을 하기 위해 구명조

끼와 우의를 입었다. 우리 일행은 9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작은 배를 탔다. 호수라고 하기보다는 큰 대양 같았다. 건너는 데는 30분 정도 시간이 걸렸지만 작은 배라서 그런지 많이 흔들리고 부서지는 파도가 사정없이 뱃전을 때리는 통에 물벼락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혹시 카메라에 물이 들어갈세라 피하느라 사진을 찍기도 힘들 정도였다.

  배에서 내리니 말을 타는 곳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마부들이 말을 끌고 왔다. 관광객보다 말이 더 많으니 마음대로 좋은 말을 선택할 수 있었다. 말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가이드가 일일이 살펴서 낙점을 했다. 퇴짜를 맞고 물러나도 조금도 불평이나 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가이드는 냉정하게 이것저것 열심히 살폈다. 드디어 내가 탈 말이 결정되었다. 가이드와 마부가 고삐를 잡으며 타라고 했다. 조심스럽게 발걸이를 걸고 올라탔다.

  제주도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등 위에 올라 간 적은 있지만 이렇게 장시간 타는 것은 처음인지라 혹시 떨어질세라 상당히 긴장 되었다. 힘이 들어간 팔이며 잔등의 뼈에 걸린 엉덩이도 몹시 아팠다. 아무튼 얼떨결에 말 위에 앉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마부와 말 때문에 마음이 영 편치 못했다. 

 

마부는 허름한 유니폼에 146번을 달고 있는 어린 소년이었다. 하의는 닳아, 속에 팬티가 훤히 보였다. 신이래야 얇은 슬리퍼를 하나를 끌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험준한 골짜기를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말 역시 한낮인 12시부터 40여분 동안 숨을 헐떡이며 산에 오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퇴짜를 맞는 말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마 먹이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겨우 선택되긴 해도 힘에 부쳐 올라가지 못하는 통에 중도에서 도로 내려오는 말도 있었다. 마부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내려왔다. 

  다행히 내가 탔던 말은 그런대로 힘은 좋아 보였다. 중도에 마부 소년이 같이 탔는데도 힘에 딸리지는 않았다. 마부가 재촉을 하자 빨리 뛰어 올라가게 되어 내가 몇 번이나 “천천히”라고 제지했

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오니 이 아이들도 '천천히' 같은 기본적인 한국말은 알아들었다. 그런데 일행 중 어떤 분은 천천히 가자는 뜻으로 자동차 1단을 떠올려 '퍼스트'라고 했는데, 엄청 속력을 내어 혼이 났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퍼스트는 제일 빠른 속력이었다. 또 어떤 분은 앞에 가고 있는 일행과 같이 가자고 앞 사람을 가리키며 ‘투 게더’ 했는데 마부는 자기와 같이 가자는 뜻으로 알고 말에 같이 타더라고 했다. 외국에 나오면 언어가 항상 문제이다. 

  아무튼 정상에 오르니 먼저 와서 기다리는 일행이 코코넛에 빨대를 꽂아 주었다.

  이곳에는 코코넛이 일반화된 음료수이었다. 숭늉이나 커피 같은 역할을 했다. 코코넛은 물이 참 많은 과일로 목이 마를 때 빨 때를 꽂아 먹기도 하고, 다 먹고 난 뒤에는 속을 오려내어 먹기도 했다. 흡사 우리나라 박 속을 연상하기도 했다. 아무튼 과일은 여러 용도에 쓰인다. 심지어 몸이 아파도 먼저 과일로 치료를 할 정도이다. 감기가 들었을 때 바나나로 치료하는 것은 일상화되어 있다.   

  마침 가게 주인 남자도 바나나를 먹으며 그물처럼 생긴 요람 위에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사람도 감기 치료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코코넛으로 목을 축이고 난 뒤, 타알호수를 찬찬히 다시 내려다 보았다.

 

  타알 호수 - 해발 3 미터도 채 안 되는 낮은 분화구에 있으며, 이 분화구의 가장 넓은 곳의 너비는 24 킬로미터에 이른다. 면적이 244 제곱킬로미터로 필리핀에서 3번째로 큰 호수이다. 호수 안에 타알 화산섬이 솟아 있고, 이곳에 또 하나의 작은 분화구인 옐로 호가 있다. 그러니 복합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해발 300 미터의 이 화산섬은 1572년 이후 25번 분화했고, 가장 최근의 분화는 1970년에 일어났다. 오래된 칼데라의 바깥쪽 측면이 절벽까지 완만하게 솟아 있는데, 이 절벽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남동쪽에 있는 948 미터의 마칼로드 산이다. 국립공원 안에 있는 주요한 관광자원으로 관광객들은 보통 북쪽의 산등성이에서 호수를 내려다본다. 이 호수에서 발원하는 판시피트 강은 남서쪽의 절벽 사이를 통과해 남중국해의 발라얀 만으로 흘러들어간다.

  옐로호는 흡사 백두산 천지연의 축소판과 같았다. 성분은 유황과 철이며 녹색빛을 띠었다. 내려가서 온천욕을 즐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우리나라 J 건설회사에서 25년 임대 계약을 맺고 개발을 계약했다고 한다.

  13시 20분 하산을 했다. 내려올 때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모자를 쓰지 못할 정도였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내려오면서 보니 주변 민가에 닭들을 많이 키우고 있었다. 닭이 우는 소리는 한국 닭과 똑 같았다. 닭은 언어가 다르지 않고 만국 공통어를 쓴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그런데 그 닭들, 대부분이 싸움닭이라고 했다. 이 사람들, 식민지로 있는 동안 배운 것이 천주교와 도박이라고 할 정도이다. 카지노도 성행한다. 얼마 전 우리나 연예인 한 사람이 도박 사건을 일으켜 구속이 된 것도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4시 30분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역시 한국인이 경영하는 곳이라 음식이 입맛에 맞았다. 식당 앞에 놀던 이곳 아이 한 명이 우리가 문을 열고 나오자 ‘반갑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화장실에 갔는데 변기가 몸체밖에 없었다. 아마 여자 분들은 볼일을 보는데 무척 힘들었을 것 같았다.   

 

  3월 23일(수), 여행 제2일, 다행히 별로 덥지 않았다. 원래는  3월과 5월은 34도에서 38도를 오르내리는 가장 더운 시기이다. 이때는 학생들도 방학을 한다. 그런데 올 해는 이상 기온이 되어 30도를 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저 늦봄 정도이었다. 사실 매우 더울 것을 대비하여 여름옷을 준비하여 갔지만 별로 덥지 않아 직사광선도 막을 겸 봄 지퍼를 입었는데도 입을 만했다. 우리에게는 여행하기 좋은 기후가 된 셈이었다. 

  팍상한으로 출발했다. ‘팍상한’ - 이름이 좀 특이했다. 뭐가 팍상한 것 같지만 ‘갈라진 계곡’이란 뜻이며 막다피오강 상류에 있는 필리핀 대표 관광지이다. 마닐라에서 150 킬로미터 정도 되며 2시간 정도 버스로 달려 도착했다.

  

강의 길이는 10 킬로미터이다. 구명조끼와 헬멧을 쓰고 배에 탔다. 폭이 70 센티미터, 길이 8 미터의 방카라는 나무 보트였다. 보트에 2명도 탈 수 있고 3명도 탈 수 있지만 우리는 3 명씩 탔다. 힘은 들어도 돈을 더 많이 벌기 때문에 보트맨은 3 명이 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처음에는 모터를 단 예인선이 와서 여러 대를 같이 끌고 갔지만 상류에 가까워질수록 수심이 얕아 노를 젓기도 하고 직접 밀기도하고 끌어당기기도 했다. 우연하게 우리 조 세 사람 모두 좀 뚱뚱한 편이라 족히 200 킬로그램은 넘는다. 오랜 경험에 의한 숙달된 동작이었지만 역시 지치는지 가다다 쉬곤 했다. 급류 속에 비지땀을 흘리는 것을 보노라니 미안하기도 했다. 우리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을 때마다 “만원, 만원”하면서 팁을 요구했다.

 

 

 

  관광객들 중 한국인들이 많으니 아예 우리말을 하는 것이다.

 정말 대부분 관광객들이 한국사람 같았다. 액션을 보인다는 말이 생각났지만 고생이 되는 것은 정말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지역에서는 이 직업이 꽤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대를 이어 이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배를 끌어당기는 등 힘을 많이 써야 할 앞부분은 아들이 맡고 조금 수월한 후미는 아버지가 담당한다. 세월이 지나 아들이 아버지가 되면 아들에게 앞자리를 맡기고 자기는 뒤로 가는 것이다.    

 

 

   눈앞에 절경들이 펼쳐졌다. 역시 세계 7대 절경 중에 하나라고 할만 했다. 천연림과 기암괴석이 즐비했다. 이곳은 ‘여명의 눈동자’ ‘킬링필드’ 등 촬영지로 유명하다. 베트남을 소재 영화를 이곳에서 찍곤 한다. 

  때때로 이구아나가 나타났다. 자라와 원숭이도 보인다고 했지만 우리는 보지 못했다.

  

대나무로 집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 위에서 생활할 모양이었다. 한 가족이 모여 남편은 목욕을 하고 아이들은 물장난을 치고 아내는 빨래를 하는 모습들 …. 그리고 소들도 더위를 피해 물속에서 자맥질을 하고 …. 그 모두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1시간 정도 걸려 폭포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19개 정도의 폭포가 있는데 이 폭포가 가장 큰 폭포이었다. 보트에서 내려 15인용 쯤 되는 대나무 뗏목에 옮겨 탔다. 옷을 입은 채로 폭포에 들어가기 때문에 카메라를 비닐봉지에 넣어 간수했다.

  폭포를 맞으면서 소망을 빌면 한 가지는 들어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로또 복권 당첨을 빌었는데 정말 거액을 탄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필리핀 사람들은 딸을 살림 밑천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주로 이곳에서 딸을 낳게 해달라고 빈다고 한다. 필리핀은 여성들이 할 일이 많으니 여아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도 여성적인 사람이 많다. 

  빌 때도 놀라서 ‘악’하고 비명을 지르면 효험이 없다고 하는데 낙차가 40여 미터 되는 폭포를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고 견디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폭포수를 탓하지 못하도록 한 쪽 통로를 열어둔 것이다.

 

  보트에서 내리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잘 피하여 식당에 들어갔는데 역시 한국인이 경영하는 곳이었다. 제자 구 양이 선물로 준 포도주를 같이 나누어 먹었다.

  따가이따이가 과일을 많이 재배하는 곳이라면 팍상한은 쌀농사를 짓는 곳이다. 3모작을 하니 쌀이 풍부하다.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70년대, 수확량이 많은 품종을 도입하여 우리나라에도 심은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통일벼이다. 수확량은 많아도  푸석한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식성에는 맞지 않아 점차 심지 않았지만…. 보릿고개 시절 우선 배를 채우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국제적으로 보면 우리처럼 차진 쌀을 먹는 곳은 10% 정도에 불과하고 그 외 90%는 이런 종류의 쌀을 좋아한다고 한다. 얼른 생각하면 농사기술이 없어서 이런 품종을 재배하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고 좋아하니 심는 것이다. 실제 소화도 이 품종이 잘 된다고 한다.

  필리핀은 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나라이다. 농업과 서비스업이 주류이니 공산품은 대부분 수입을 한다. 심지어 전기도 수입을 하는 나라이다. 일자리가 별로 없으니 넉넉하게 살지 못한다. 우리나라 60-70년대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많았다.    

  저녁 식단은 재래시장인 씨사이드 마켓에서 사다가 먹었다. 알리망고, 새우, 오징어, 라푸라푸 등

을 먹었는데 나름대로 별미였다. 저녁 식사후 베이워크길에 나갔다. 노천에 음식점이며 술집들이 많았다. 해변에는 친구, 연인, 가족 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이 날은 수요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적은 것이라고 했다.

  금요일 밤이면 마닐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탄 차량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이곳에도 20만은 족히 몰린다고 했다. 필리핀은 쉬는 날도 많다. 공휴일이 주중에 있으면 당겨서 연휴를 만들고 당일도 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축제도 많다. 심지어 ‘물뿌리기 축제’, ‘빨간 바나나를 위한 축제’ 등도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해도 그들 편에서 보면 그럴만하다. 바쁘게 설칠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사계절에 사는 사람들은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지만 늘 더운 나라는 오늘 못한 일은 내일하면 되는 것이다.  음식도 많이 먹지는 않아도 자주 먹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루 8끼를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노천까페에서 생맥주를 한잔씩 했다. 기다랗게 생긴 맥주 통이 특이했다.

 

  

24일(목), 리잘 공원으로 갔다. 이곳은 필리핀 독립 영웅 호세리잘(J Rizal 1861-1896)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필리핀은 1571년부터 1946년까지 스페인에 327년, 미국에 40년, 일본에 4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곳이다.  호세리잘은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스페인에 의해 처형당한,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영웅이다.

  그는 의사이며 시인이고 소설가, 과학자였다. 리잘이 필리핀과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 한 것은 스페인 신부들과 통치자들의 부정, 부패와 비리를 신랄하게 파헤친 “나

를 건드리지 마라” 라는 소설을 쓰고 나서부터이다. 이 소설이 필리핀의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때부터 필리핀 국민들 사이에서 독립의지가 싹트게 되었다. 이 소설은 스페인 당국에 의해서 금서로 지정이 되었고, 리잘은 요주의 인물로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후에도 리잘은 소작료 인상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를 주도하기도 하는 등 스페인 당국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독립 운동의 지도 기관인 ‘필리핀 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

  그 뒤, 필리핀에서 카푸티난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이 혁명의 주범으로 몰려 결국 1896년 12월30일 지금의 리잘 공원 자리에서 뒤돌아 선 채 총살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1898년 스페인에게 독립된 이후, 1913년 처형된 루네타 공원을 리잘 공원이라 이름을 바꾸고 기념비 및 리잘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여기에 유해도 같이 안치하여 24시간 경비를 서고 있다.

  이곳은 필리핀의 독립기념일과 대통령 취임식 등 국가적인 행사가 치러지는 성지이다.

  그의 시 ‘나의 마지막 작별’이 감격으로 다가온다.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

이제 내 생명이 더 밝아지고 새로워지리니

나의 생명 마지막 순간까지

너 위해 즐겁게 바치리

(중략)

잘 있거라

내게 다정했던 나그네여

즐거움 함께했던 친구들이여

잘 있거나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아 죽음은 곧 안식이니

 

  젊은 애국지사의 피 끓는 조국애가 절절히 서려 있는 시이다. 삼가 경의를 표하며 그 이름, 천추에 길이 빛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히든밸리에 갔다. 11시, 마닐라를 출발하여 12시 40분에 도착했다. 히든밸리란, 이름 그대로 해발 300미터의 ‘숨겨진 계곡’으로 1913년부터 개인 소유의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1972년부터 국가에서 휴양지로 하자고 하여 일반 관광객에게 개방한 곳이다.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고 히든밸리 폭포까지 걸어가며 산림욕을 즐겼다. 코코넛을 비롯한 열대식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500년 이상된 자이언트 식물들이 많아 뿌리만 해도 허리까지 차는 나무도 있었다. 이를 지나가다 보면 작은 성벽을 넘는 기분이었다. 대나무도 있었는데 열대지방이 되어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대나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왕대였다. 드디어 폭포수, 웅장한 물소리를 배경으로 일행들 모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온천은 5개였다. 어른들 용 웜풀(WARM POOL)이 3개, 러브 풀(LOVE POOL) 1개, 광천수(소다

수) 풀이 1개인 것이다. 우리 일행들은 웜풀 제1풀장에 들어갔다. 나이가 들어 수영복을 입고 보니 좀 멋쩍었지만 이내 동심에 젖어 풍덩풍덩 수영을 했다. 마킬링산 정상에서 25도 정도의 광천수가 폭포를 이루어 쉼 없이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물이 참 깨끗했으며 피부미용, 피부질환, 관절염 등에 효능이 있다고 했다. 

  우리 일행 이외에도 서울에서 온 젊은 부인과 꼬마가 있었고 미국인, 중국인

도 있었다. 이제는 숨겨진 계곡이 아닌 국제적인 계곡이 되었다.

  점심 식사는 구내식당에서 했다. 뷔페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주류 반입이 금지 되어 있다. 이곳 회장 할머니께서 관광객들이 술 마시고 비틀거리는 꼴이 보기 싫다고 금지 했단다. 그 모습 중에 한국인들은 없었는지 걱정되었다. 

  수영을 하고 나오자 간식까지 주었다. 떡, 약밥, 과일 그리고 수제비 등, 엔간한 점심상 정도 수준이었다. 인심이 참 좋았다. 

  연로하여 걸음 걷기가 불편한 회장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식당에 나와 있었다. 가까이 가서 한

국에서 왔는데 사진 한 장을 같이 찍자고 부탁드렸다. 딱지를 맞을까 걱정을 했는데 의외로 손을 꼭 잡고 포즈를 취해 주었다.  처음에 역광으로 찍어 잘 나오지 않았기에 다시 찍자고 했더니 흔쾌히 방향을 바꾸어 다시 포즈를 취해주었다.

  술을 못 가져오게 할 정도로 호랑이 할머니인 줄 알았더니 아주 자상하고 부드러운 분이었다. 손이 참 따뜻했다. 

  식당에는 3인조 악단이 노래를 불렀다.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이에스트 데이’, ‘세드무비’ 같은 곡과 한국 노래 ‘사랑의 미로’를

불렀다. 앵콜을 요청했더니 ‘만남’을 불렀다. 역시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니 한국 노래를 많이 준비한 모양이었다.

 

  3월 25일,  03:30 마닐라 공항을 이륙했다. 밤 시간이지만 마닐라 시가지는 역시 불빛이 찬란했다. 그 불빛 속에 따가이따이의 마부 소년, 팍상한의 보트맨, 히든밸리의 할머니 모습, 그리고 독립 운동의 영웅 호세리잘 상 등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오래오래 뇌리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 다시 필리핀에 온다면 이번에 가지 못한 원주민 지역을 찾아서 봉사여행을 한 번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