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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49)묵헌(墨軒)과 경재(敬齋) 선생의 독서실이었던 월간재(月澗齋)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49)

묵헌(墨軒)과 경재(敬齋) 선생의 독서실이었던 월간재(月澗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청도문인협회 회장

월간재
청도신문(2021년 6월 23일)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월봉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월간재를 찾았다.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면 6칸의 중당 협실형 평면에 좌단부로 누마루 1칸을 돌출시킨 웅장한 건물이다.

  원래 이곳은 묵헌(墨軒) 이용(李瑢, 1616〜1698) 선생과 공의 아들인 경재(敬齋) 이광익 (李光翼, 1653〜1711)의 독서실이었는데 묵헌공 사후 100년이 되던 해인 1798년(정조 22)에 후손들이 건립한 재사이다.

  묵헌공의 현손인 국리(菊籬) 이형천(李衡天)은 ‘월간 서당’이란 글제로

“집 뒤는 푸른 봉우리이고 집 아래는 개울이라

언덕에 달 높이 뜨면 그림자 가지런하다

마을 가득하게 밥 짓는 연기 젖어들고

강당 아래 나무 그늘이 지면 몇 마리 새 지저귀네(하략)” 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름에 주춧돌이 기울어지고 재목이 상하여 1967년 옛집을 헐고 새집을 중건했다.

  묵헌공의 고조는 고성 이씨 입청도조(入淸道祖)인 모헌공(慕軒公) 이육(李育)이고 증조는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된 이교(李郊), 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반(李礬)이다. 아버지는 옥계(沃溪) 이담(李潭)인데 임진왜란 이후 유호(柳湖)에서 광명대리(光明臺里)로 복거(卜居)하였다.

  묵헌공은 타고난 큰 기품에 천성이 어질고 효심이 극진하였으며 형제의 우애가 돈독했다. 평소 명리(名利)에 욕심이 없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삶을 영위했다.

  경재공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어진 성품으로 궁핍한 사람들을 보면 지나치지 않고 늘 베풀었다. 만년에는 시냇가에 ‘경재(敬齋)’를 짓고 독서하며 선비의 큰 길을 걸어갔다. 묵헌공의 손자에는 이장춘(李長春), 이희춘(李希春), 이의춘(李宜春)이 있고 증손자 영취헌(瑛翠軒) 이경담(李慶聃)은 덕망이 있어 숭모하는 사람이 많았고 이경신(李慶新)은 자수성가한 거부이었다. 현손 이형중(李衡重)은 위선에 대한 열의가 있어 당숙인 경신과 사촌 동생인 이형천과 더불어 조상의 묘소에 석물을 세웠다. 또 이형택(李衡宅)은 효행으로 증 동몽교관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이며 자경도설(自警圖說)을 지었다.

  그리고 후예인 매운(梅雲) 이정희(李庭禧)는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무기 구입을 목적으로 한 광복회(光復會) 활동을 했다. 그 뒤 경상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후원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매전면 온막동(溫幕洞)에 온명 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초대원장으로서 민족 의식 고취에 힘썼다.

 

‘월간재 사적록(月澗齋事蹟錄)’이란 시제로 적어본다.

 

월간재에는 달처럼 물처럼 고운 조상에 대한 경모심이 있고 후손들의 단합된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이 모여 ‘월간재 사적록’을 엮었다. 순기의 서문이 있고 종호의 월간재 ‘유래 및 중건전말기’와 ‘중수 표성 발기’에는 소상하게 월간재의 자취를 알려준다. 또한 종달, 태기, 극기는 월간서당 중건 사유기를 적었다. 이규헌의 상량문이 있고 묵헌공 및 경재공의 묘비명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 수록된 후손과 방손 유림들의 주옥같은 중건운이 곱게 빛난다.

우측에서 본 월간재
월간재 중건기
월간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