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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47)별도의 공간에 사당이 있는 파주 염씨(坡州廉氏) 영소재(永昭齋)

영소재
청도신문(2021년 5월 26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47)

별도의 공간에 사당이 있는 파주 염씨(坡州廉氏) 영소재(永昭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청도문인협회 회장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 장전마을 조곡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영소재를 찾았다.

  이 재실은 1953년에 건립하였으며 1975년에 중수했는데 여느 재실과 다르게 서원 형식으로 별도의 공간에 구연사(龜淵祠)란 사당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대청에는 박효수가 쓴 ‘영소재기’가 있고 사당에는 송재성이 쓴 ‘구연사 중수기’가 있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충경공(忠敬公) 매헌(梅軒) 염선생(廉先生)을 비롯하여 우정승(右政丞) 국파(菊坡), 공조참의(工曹參議) 경은(耕隱), 권무지평(權務持平), 훈련원 정(訓練院 正) 염말경(廉末卿) 다섯 분을 배향하고 있다.

  소천1리 장전마을에 파주(坡州) 염씨가 입향한 것은 임진왜란 전으로 추정된다. 입향조는 염말경(廉末卿) 선생으로 자는 경옥(慶玉)이다. 공은 어모장군(禦侮將軍) 행훈련원정(行訓練院正)이었는데 임진왜란때 진주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이 되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충북 옥천을 떠나 잠시 자인에 머물다가 소천에 들어와 시거했다. 아들 3명이 있었는데 한성(漢成), 귀성(貴成), 준성(俊成)이다. 장손의 후손은 청도에 세거하고 그 외는 김해, 경산, 대구, 영천, 경주, 창녕 등에 흩어져 산다. 9세손 중묵(重默)은 호가 성암(誠庵)인데 정성이 각별하여 ‘구연사’ 중수를 독담하였다. 14세손 호인(鎬仁)은 묘우 및 영소재 증축에 노력했다.

  구연사 사당에 배향된 가장 큰 어른은 충경공(忠敬公) 매헌(梅軒) 염제신(廉悌臣) 이다. 공은 1354년(공민왕 3)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곧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 1356년에 친원파(親元派)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한 뒤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원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고 1358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가 되었을 때, 신돈(辛旽)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다. 1371년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정벌할 때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이기고 돌아와 곡성백(曲城伯)에 봉해졌다.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고, 곧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가 되었으며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에 봉해졌다.

  특히 그의 초상화가 보물 제1097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53.7㎝, 가로 42.1㎝로 현존하는 예가 극히 드문 고려 말기의 초상화이다. 그림을 그린 작가는 미상이나 염제신이 공민왕의 장인(염제신의 딸이 신비(愼妃)임)이기에 공민왕이 그린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온화한 기품이 느껴지는 상호와 단순한 평정건과 어깨선의 윤곽이 작품에 깊이를 준다. 상태는 안료가 칠해지지 않은 바탕면의 손상이 있다. 그러나 얼굴의 상태는 매우 좋다.

 

‘감동’이란 시제로 몇 줄 올렸다.

 

조상에 대한 공경과 긍지가 높은 문중이다

재실을 찾은 날 바깥어른은 물론 안 부인들까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재실로 달려와

입을 모아 조상을 칭송하며 한 마디씩 거든다

여러 마을을 찾았는데 이렇게 열성적인 마을은 처음인 것 같다

그러면서 또 하시는 말씀, 문화재가 될 수 없느냐고

문화재의 조건은 내가 관여하지 못하지만

그 열정 정말 문화재 감이다

감동.

사당인 구연사

 

구연사 사당내
염제신 초상화
영소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