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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5)밀성 박씨 12중조(中祖)의 한 분인 박중미(朴中美) 선생의 묘봉재(妙峯齋)

묘봉재

 

청도신문(2022년 12월 21일)


청도지역 서원
재실고택 탐방(85)
밀성 박씨 12중조(中祖)의 한 분인 박중미(朴中美) 선생의 묘봉재(妙峯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교장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 묘봉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묘봉재(妙峯齋)를 찾았다.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묘봉산은 명당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산의 형세가 뾰족하고 기묘하게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죽은(竹隱) 박중미(朴中美) 선생이다. 공은 밀성 박씨 12중조(中祖)의 한 분이다.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과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1361(공민왕 10)에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홍건적이 국경을 넘어와 서경까지 침입하였을 때 안우(安佑), 정세운(鄭世雲), 홍언박(洪彦博) 등과 함께 적을 소탕하여 나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를 제수받았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때 왕이 선생의 공훈을 기려 사패지 수 친평을 하사했으며 이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밀직부원군 사패지표석(密直府院君賜牌地標石)이라고 음각한 네 개의 표석을 세웠다. 1965년 경까지만 해도 이 표석은 경계석에 더해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는 경외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원래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어떤 사람이 표석을 뽑고 난 뒤, 이름 모를 병에 걸렸다가 표석을 도로 갖다 놓고 용서를 빌고 난 뒤 낫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지금은 산기슭 밭두렁에 겨우 하나 남아 있을 뿐 논 속에 있던 것도 없어지고 어떤 것은 도로가 확장되면서 매몰되어 버렸다고 한다.
  후손인 순묵(청도군 문화해설사 회장)씨의 안내로 사패지 표석에 이어 공의 묘소를 찾았다. 마을 서편 언덕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꽤 심하여 길옆에 설치한 보조 밧줄을 잡고 올라갔다. 묘역은 근래에 새롭게 사토를 하는 등 크게 보수하여 기품있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 아래 공의 아들이며 손자의 묘역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해마다 추향 때는 전국에서 수 많은 종원들이 묘소를 찾아와 시제를 올린다고 하니 면면히 이어지는 후손들의 조상에 대한 숭모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공의 장남 희는 안동부사로 화녕군(和寧君)에 봉해졌고 차남 해()는 대사헌(大司憲)이다. 그가 살던 경산 내매동 집터에는 당시애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다. 희의 아들 등()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였으며 해의 아들 울()은 단성 현감이었다. 영천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하고 있는 노계(蘆溪) 인로(仁老)도 공의 후예이다. 그는 임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과 항전했으며 수군 만호, 용양위 부호군이었다. 널리 애송하고 있는 조홍시가(早紅柹歌)를 비롯한 60여 수의 시조와 선상탄(船上嘆), 누항사(陋巷詞)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겼다.
  공의 후손들 중에는 명망있는 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국회의원만 해도 주현, 찬종, 상희, 대동, 재호, 민식 등이 있다.

  묘봉재는 1932년에 밀직부원군 묘재로 창건했으며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했다.

 

묘봉마을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홍건적 물리친 큰 공신이 잠드신 곳
임금님도 높이 기린 사패지 옛터에는
대대로 잇고 이어서 숭모정신 뜨겁다

 

밀직부원군 박중미 선생 묘소

 

사패지 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