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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4)능주 구씨(綾州 具氏) 효열각(孝烈閣)과 내성군 정기원(萊城君 鄭期遠) 선생의 추모비

효열각
청도신문(2022년 12월 7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4)
능주 구씨(綾州 具氏) 효열각(孝烈閣)과 내성군 정기원(萊城君 鄭期遠) 선생의 추모비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각남면 화리 입구 무학산(舞鶴山)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능주 구씨(綾州 具氏) 효열각(孝烈閣)을 찾았다. 구씨 부인은 1839년(헌종 5) 출생했으며 화리의 동래 정씨 성암(性菴) 정규상(鄭圭祥, 1841〜1918)과 결혼하였다.
  부인은 단정하고 온순한 성품으로 가난한 선비의 토담집에 어렵게 살면서도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어 화목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만 남편이 병을 얻어 자리보전을 하게 되자 부인은 남편의 인분(人糞)을 맛보며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고 구완했으며 남편이 혼절하여 임종 직전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수혈(輸血)하여 남편이 다시 회생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유명을 달리했으며 남편의 사후에는 시부모님을 공경하며 극진한 효성으로 모셔 이웃에서 크게 칭찬했다.
  이러한 열행과 효행에 감동한 고을의 유림들이 연이어 서명하여 포상하여 줄 것을 부(府)에 청하고 영내(營內)에도 청하였는데 마침내 1871년(고종 8) 7월 성균관으로부터 포창 완의문(褒彰 完議文)을 받았으며 1874년 정월 도와 지방의 유림들이 발문하고 출연(出捐)한 돈으로 효열각을 창건하게 되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누수(漏水) 등으로 퇴락하였는데 2017년 경북 및 청도군 동래정씨 내성군 종친회, 화동 동래 정씨 종중이 협력하여 중건했으며 부인의 6대손 농학박사 원재, 광재가 효열부 능주 구씨 열행약기(孝烈婦綾州具氏烈行略記) 동판을 헌품하고 4대 지손 창수가 기문을 지었다.
  복암(復庵) 장화식(蔣華植)은 1934년에 쓴 ‘효열부(孝烈婦) 구씨 여포기(具氏 閭褒記)’에서 “성균관으로부터 ‘포창 완의문(襃彰完議文)’ 발급받았다는 것은 사시호(私諡號)를 받은 것과 같은 뜻이다.”라고 했다.
  효열각 옆에 내성군 충의공 정기원(萊城君 忠毅公 鄭期遠, 1559〜1597) 선생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공은 158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으며 1596년 고급주문사(告急奏文使)로 명나라에 가서 조정과 황제를 설득하여 만 명의 군사를 남원에 파병하게 하였으며 명나라 총병인 양원(楊元) 장군 접반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5 6천여 왜적이 남원성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이때 양원 장군이 피신할 것을 강권하였으나 선생은 선친께 남원성을 사수하겠다는 서찰을 보내고 최후 항전을 하다가 39세 일기로 1597 8 16일 순국(殉國)하였다.
  선조 임금은 예조판서로 증직하고 선무공신(宣武功臣) 내성군으로 추봉하여 불천위로 제향하게 했다. 현재 국가에서는 남원 만인의총(萬人義塚)에 선생을 주벽으로 제향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김천 아포 내격묘(萊格廟), 충남 보령시 호국사에서 제향을 하고 있다. 2017년 선생의 후손들이 추모비를 세우고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각남 화동에 처음 정착을 한 분은 내성군의 현손인 두망(斗望)이며 그의 현손인 덕묵(德黙)은 통정대부(通政大夫)였으며 그의 5남인 규상이 바로 능주 구씨의 남편이다.
  이날 창수(昌秀) 동래정씨 내산부원군파 종친회장이 자세하게 선대의 행적을 들려주었다.

 

‘화리 언덕에서’란 시제로 글을 올린다

 

인분을 맛 보며 남편 구완 구씨 부인
왜적에 맞서서 나라 구한 내성군
그 누구 칭송 않으랴, 손모아 절 올리다
 

효열부 구씨 여포기

 

내성군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