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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3)삼형제를 배향하는 삼우재(三友齋)와 창녕조씨(昌寧曺氏) 열녀각(烈女閣)

삼우재
청도신문(2022년 11월 23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3)

삼형제를 배향하는 삼우재(三友齋) 창녕조씨(昌寧曺氏) 열녀각(烈女閣)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교장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에 위치한 삼우재를 찾았다. 이곳은 각북과 대구를 잇는 헐티재를 넘어가는 도로변 언덕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삼우재의 배향 인물은 곽수병(郭守洴), 수찬(守澯), 수정(守禎) 삼형제이다. 공들은 고려 인종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랐으며,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진 포산 곽씨 시조 곽경(郭鏡) 24세 손이며 청백리 안방(安邦) 12세손이다. 1876년 큰 흉년이 든 이듬해 노모를 모시고 현풍에서 기근(飢饉)을 피할 수 있는 넓은 농토가 있는 오산리로 이거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공들은 농사와 글 읽기를 업으로 삼고 청렴한 생활을 하며 바깥세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

  그 뒤 공들이 타계한 이후 후손들이 계를 모아 1946년에 삼우재를 창건했다. 이 재실을 짓는데 주창을 한 분은 연곤(演坤, 수정의 아들)이다. 삼우재 대들보에 그가 세 가지 큰일을 이루었다고 적었는데 세 가지란 이 재실의 건립과 선대 묘소 석물을 비롯하여 1933, 마을 입구에 세운 창녕조씨(昌寧曺氏) 말남(末男) 열녀각(烈女閣)’건립을 말한다.

  조씨는 남편 곽종향(郭鍾餉, 18601919, 시조의 26세손)과 결혼한 지 몇 해가 되어도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해 전염병으로 남편이 죽음에 이르렀다. 이때 사람들이 전염병에 옮을까 염습(殮襲)해주는 것을 꺼렸기에 조씨가 직접 염습을 하러 들어갔다가 나와서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하고는 옆방으로 들어간 뒤 소식이 없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문을 열어보니 조씨가 시렁에 목을 매달아 죽어 있었다. ‘아내가 죽지 않으면 남편이 죽게 된다는 속설에 따라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렇게 조씨가 죽은 뒤에 남편 종향은 이튿날 깨어났는데 아내가 보이지 않자 일가친척들에게 아내가 왜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두 말을 못하고 있다가 다시 묻자 하는 수 없이 사정을 들려주었다. 이때 종향이 탄식하며 내가 어디론가 정처 없이 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급하게 부르며 당신은 아직 그곳에 갈 때가 아니다. 되돌아가서 다른 부인을 만나 대를 이어 달라 부탁하고는 사라졌다. 그때 나에게 그 말을 남긴 사람이 바로 나의 아내였단 말인가?” 하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그 뒤 종향은 재혼을 하지 않고 아내를 그리며 혼자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열녀각은 단칸 규모의 맞배집이며 안에 열부조씨기적비(烈婦曺氏紀蹟碑)’가 있다.

삼우재 역시 1973년에 새롭게 중수하고 후생 창승(昌承) 조상 첨모(瞻慕) 재소로 빠짐이 없는 이곳을 중심으로 후손들은 조상의 하던 일을 잊지 않고 이어가자.”고 쓴 삼우재기를 마루에 걸었다.

  이날 진우(鎭宇, 연곤의 증손)씨가 재실이며 열녀각을 안내하며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는 연로하신 노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서울에서 고향집에 내려와 9년 동안 수발을 들고 있다.

 

오산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도타운 형제애를 기리는 삼우재

지아비 살려낸 열녀 조씨 비각 앞에

헐티재 오르는 길손 합장하며 머물다

 

 

삼우재기

 

열부조씨 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