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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1)충효(忠孝)와 우애를 이어가는 박신보(朴臣輔)선생의 풍산재(豊山齋)

풍산재
청도신문(2022년 10월 26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1)

충효(忠孝)와 우애를 이어가는 박신보(朴臣輔)선생의 풍산재(豊山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마을 뒤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풍산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박신보(朴臣輔)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밀성이며 고려 시중(侍中) 도평의사(都評議事)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언부(彦孚)의 후예이다. 할아버지는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 전문형(典文衡)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이며 시호가 문정(文靖)인 행산 세균(杏山 世均)이며 아버지는 중서전문형(中書典文衡) 증 좌찬성(贈 左贊成)이며 시호가 문절(文節)인 도은 문빈(桃隱 文彬)이다.

  공은 조산대부(朝散大夫) 군기소감(軍器小監) 이조참판(吏曹參判) 증 숭정대부 이조판서(贈 崇政大夫 吏曹判書)이었다. 공이 밀양을 떠나 풍각 차산리에 이거하였다.

  손자인 오졸재 한주(迃拙齋 漢柱, 1459 ~1504)는 사마시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사간원 정언, 성균관 전적 등을 지냈다. 성품이 청렴하고 의가 아니면 취하지 않고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부모 봉양을 위하여 창녕 현감을 청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혼절을 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하였다. 사간원 헌납이 되었을 때 연산군의 실정(失政)과 유연에 대해 극간했고 임사홍(任士洪)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무오사화 때 유배를 갔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46세에 참형을 당했다.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 5현이다.

  6대손 낙계 환생(樂溪 還生)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한 뒤 의병장으로 선두에 섰다. 군량을 마련하여 보급하는 한 편 수차례 왜군 격퇴에도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 의병진에서도 활약했다.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에 녹훈되었고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에 제수되었다. 대구 망우당 공원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봉안되어 춘추향사되고 있다. 낙계재가 있다.

7대손 은석 별룡(隱石 別龍)은 증 호조정랑(贈 戶曹正郎)이다. 8대손 현파 대영(玄坡 大榮)은 증 가선대부 오위도총관(贈 嘉善大夫五衛都摠府摠管)이었다. 9대손 은암 진기(隱庵 振杞)는 경사(經史)를 통달한 큰 선비이며 만취 진단(晩翠 振檀)은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절충장군(贈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兼 折衝將軍)이었다. 성암 진춘(惺菴 振椿)은 통덕랑(通德郞)으로 효심히 지극했고 두 형을 공경하여 삼우당(三友堂)에 같이 지냈다.

  14대손 야은 홍곤(野隱 洪坤)은 부친의 병환에 단지(斷指)하여 처방하고 대변의 맛을 보며 거처를 떠나지 아니한 효도가 있었고 우애 또한 지극하여 동생이 병이 나자 산속에서 백일기도를 했다. 봉향하는 화수당(花樹堂)이 있다.

  풍산재는 1881년(고종 18)에 건립하여 1938년에 이건하였으며 1999년도에 새로 이건했다. 대청 벽에 이우섭이 쓴 ‘풍산재기’와 ‘풍산재 중건기’가 걸려있다. 재사 뒤에는 박신보제단(朴臣輔祭壇)과 우애가 남달랐던 삼형제를 모시는 ‘곤계삼공제단(昆季三公祭壇)’이 있다.

 

‘풍산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충효로 빛난 가문 우애도 돈독한

차산리 풍산재 판서공 후예들

선대를 받드는 향불 오래오래 이어가리

 

앙지문

 

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