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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0)강재호(姜載浩) 선생의 거산당(居山堂)과 완산 이씨 ‘열각(烈閣)’

거산당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0)
강재호(姜載浩) 선생의 거산당(居山堂)과 완산 이씨 열각(烈閣)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각남면 옥산 2리 윗대산에 자리 잡고 있는 거산당을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거산 강재호(居山 姜載浩) 선생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공은 계용(啓庸)의 후예이다. 계용은 고려 24대 원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며 국자박사(國子博士)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었으며 박사공파 파조이다. 11대조는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등의 벼슬을 지낸 준백(准伯)이며 8대조는 현감(縣監)을 지낸 귀손(貴孫)이다.
  공의 고조인 무년(茂年)이 조선 선조 때 경기도 양주에서 청도 미대촌(美大村)에 시거하였다. 공의 증조인 정암공 문서(靜巖公 文瑞)는 문장과 필명으로 당세에 이름을 날렸으며 국담 박수춘(菊潭 朴壽春,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 정유재란 때 의병 창의)과 도의(道義)로 교의(交誼)하였다. 할아버지는 청계공(淸溪公) 일승(日昇)이며 훈련판관(訓鍊判官)을 지낸 진명(秦明)의 셋째 아들이다.
  거산공이 미대를 떠나 옥산(대산)에 택거하여 거산당을 짓고 스스로 수학하여 문행이 바르고 명리를 좇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거산진유(居山眞儒)라 하였다. 향중 유림들이 문우계(文友稧)를 조직했으며 유고집이 있다.
  현손인 조회(肇會)와 일회(一會)는 모두 하열암 시찬(夏悅庵 時賛)의 문에서 학업을 닦아 당세에 명망이 높았다.
거산당은 1920년에 후손들이 새로 지었으며 1995년 등 여러 차례 중수했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이며 마루에 순재(醇齋) 김재화(金在華)와 송조헌(宋祖憲)이 각각 쓴 ‘거산당 중건기’, 예대주(芮大周)가 근찬한 ‘거산당 중건 상량문’ 등이 있다.
6.25 전쟁 때는 재사 뒤편에 있는 대산사의 불상을 이곳으로 옮겨 빨치산에 의해 손상되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거산당 아래 쪽에 강재호 처 열부 완산 이씨(18151898) ‘열각(烈閣)’이 있다. 진사 한산 이경구(韓山 李慶求)가 찬한 열녀 행실기’(전석봉이 1958년 펴낸 도주지 수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재호의 처 완산 이씨는 이진반의 딸이다. 남편이 일찍 죽자 봄, 가을로 남편의 새 옷을 짓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이 일을 83세에 생을 하직할 때까지 평생 동안 하였다. 이에 유생들이 천고에 없는 열부라 칭송하며 진정을 하여 비를 세웠다”.
  비각은 단칸[單間]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비각 전면에 烈閣이라 흰 바탕에 적어서 걸어두었다. 주위에는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앞에는 일각문을 세워 출입하게 하였다. 가구(架構) 3량가의 2익공(二翼工)집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비각 내에는 사인 진주 강재호 처 열부 완산 이씨지비(士人晋州姜載浩妻烈婦完山李氏之碑)’라 음각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거산당 열각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열각의 베틀 소리에 무너지는 거산당
자네 뜻 알았으니 바느질을 멈추시게
오늘도 실밥 한 올에 목이 쉰 두 부부

 

완산 이씨 '열각'

 

열부비

 

김재화가 쓴 '거산당 중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