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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78)만각재(晩覺齋) 서유원(徐惟遠) 선생의 묘재인일성재(一誠齋)

일성재

 

청도신문(2022년 9월 7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78)

만각재(晩覺齋) 서유원(徐惟遠) 선생의 묘재인일성재(一誠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각남면 신당리 마을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일성재를 찾았다. 이곳은 만각재(晩覺齋) 서유원(徐惟遠, 1610∼1683) 선생의 묘재이다.

  공의 본관은 달성이며 시조는 고려(高麗) 판도판서(版圖判書) 진(晋)이며 파조(派祖)는 근중(近中, 시조 7세손, 통정대부 사헌부감찰)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백형 득겸(得謙)과 망우당 곽재우와 함게 창의를 했던 재겸(再謙,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이다.

  공은 효행이 깊어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병환을 간호하였으며 8세 때 부친상, 12세 때 모친상을 당하자 애통하고 비탄함이 성인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형제간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벼슬길에 급급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평소 제자들에게 효와 우애를 강조하며 경계하는 잠(箴)을 지어 말하되 ‘일성(一誠)’은 한결같은 참됨이며 이는 일만의 거짓을 소멸하는 것이고 ‘일경(一敬)’은 한결같은 공경으로 일만의 간사함을 막아낸다고 하였다. 또 공은 율곡 이이 선생의 이통기국지설(理通氣局之說)에 대해 공론을 세워 말하되 “이(理)가 아니면 기(氣)가 뿌리가 없고 기가 없으면 이가 의지할 바가 없느니라” 하였다.

  또 우암 송시열이 써준 “때늦게 먹으면 고기 맛인 듯하고 편안히 걸으면 수레를 탄 듯하다. 이로움 찾으면 해가 되고 착한 일 하면 가장 즐겁도다”란 시가 있다고 달성 서씨 감찰공파 파보에 수록되어 있다.

  청도 신당 마을 입향조는 공의 증손인 풍남 대건(豊南 大建)이다. 공은 이곳이 산수가 아름답고 토지가 비옥하여 후손들을 길러낼 만한 터이지만 교화(敎化)가 부족함을 알고 백운동규 10개약(白鹿洞規十個約)을 지침으로 하여 착하면 상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이른바 상선벌악(賞善罰惡)’을 하여 양속(良俗)의 마을로 바꾸었다. 10 2녀를 두었으며 그 후손들 중 학행 높은 분이 많이 배출되어 문중이 크게 융성했다.

  의암 명락(毅庵 命洛, 풍남공의 여덟째 아들)은 경호(鏡湖) 이공 성담(性潭) 송공 양문에 종유하여 대취(大就)하였고 중용 대학 성리도를 짓는 등 문장이 저명하였다. 동암 경문(桐庵 景汶, 풍남공의 맏손자)은 학행이 높아 원근에서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 공이 글을 가르치던 서당은 오늘날 화산재(華山齋)로 이어오고 있으며 제자들의 계가 결성되어 해마다 스승을 기리며 모임을 하고 있다.

  백인당 력(百忍堂 瓅, 대림의 손자)은 진사이며 문장이 뛰어나고 폐해가 많은 정치를 아뢰는 폐정소(弊政疏)’를 올리기도 했다. 그 이외에도 학가재 필용(學稼齋 必龍) 정와 광찬(靜窩 光贊) 2명이 문장 덕업이 저명하여 진사에 합격하였다.

  진현(普鉉, 일명 海壽)은 공군 장성(將星)이었으며 윤학(潤鶴), 윤홍(潤鴻) 형제는 사법고시에 동시 합격했다. 윤학은 검사와 변호사로 윤홍은 고등고시 행정과도 합격했으며 판사, 대법관,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화산재 내에 영모당을 창건했다.

  각남면 옥산 1리 옥척마을에 만각재의 둘째 손자인 석경(錫璟)과 그 아들 대갑(大甲), 대해(大海), 대익(大翊)을 배향하는 옥천재(玉川齋)가 있다.

  일성재는 1964년에 중건했고 일성(一誠)이란 만각재의 잠(箴)에서 인용한 것이다.

 

‘일성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한결같이 참되고 한결같이 공경하라

거짓을 소멸하고 간사함을 막아라

만각재 엄숙한 교훈 후손들을 깨운다.

 

달성 서씨 곽당문중 사적비

 

화산재

 

일성재 중건기
청남 처사 유허비

 

영모당

 

옥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