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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6)이중경 선생의 ‘오산지(鰲山志)’ 산실인 수헌정사(壽軒精舍)

역주 '오산지'
청도신문(2023년 1월 18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6)

이중경 선생의 오산지(鰲山志)’ 산실인 수헌정사(壽軒精舍)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수헌정사(壽軒精舍)는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 있었다. 수헌 이중경(李重慶, 15991678) 선생은 이곳에서 청도 최초의 사찬(私撰) 읍지(邑誌)인 오산지(鰲山志)를 편찬했다. 공의 가문인 전의(全義) 이씨들이 수야리에 정착한 것은 공의 증조부인 흥지(興智)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의 사위가 되면서 경기도 금천에서 입청도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두암(竇岩) 기옥(璣玉)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한강(寒岡) 정구(鄭逑)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두암은 39세에 작고했지만 유림들이 높은 문장과 기개를 기려 도림서원(道林書院)’을 지어 배향했다.

  6세에 아버지를 잃은 수헌은 외가인 예천 고평리에서 살다가 20세에 청도로 돌아와 청도 원정리 죽산인 참봉 박형(朴炯)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뒤 미리 한벽당(閑僻堂)이라고 새겨둔 오대(梧臺) 49세에 봉서정(鳳棲亭)을 짓고 이듬해부터 66세가 될 때까지 머물었다. 현재 이곳은 밀양군 상동면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청도 땅이었다. 공은 이곳에서 자연과 벗하며 학문과 문학 활동에 전념하며 연시조인 오대어부가(梧臺漁父歌) 20수를 창작하고 그간의 시문을 수습하여 잡훼원집(雜卉園集)’을 남겼다.

  그 뒤 67세가 되던 해 1665(현종 6)에 고향 수야리에 수헌정사를 짓고 80세인 1678년에 작고하기 까지 13년간 만년을 보내면서 오산지를 완성했다. 그러나 오산지 편찬에 착수를 한 것은 그보다 40여년 전인 1627년 군수 류진(柳袗)의 계획 아래 군지(郡誌) 만드는 일을 맡으면서 사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류진이 파직되어 떠나면서 결실을 보지 못하다가 75세 때인 1673(현종 14)에 청도군수 권일(權佾)의 부탁으로 종전의 기록물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그는 오산지 서문에서 내가 삼가 옛날에 들은 바를 취하고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모아 사실에 부합되는 것은 따르고 잘못된 부분은 없애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군수께 드렸다. 만약 누군가 우리 고을 고금의 자취를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을 펼치는 순간 관아에 앉아서도 온 고을의 사정을 훤히 볼수 있으며 오늘날에 살면서도 앞 시대를 두루 알 수 있을 것이니 아마도 백성을 다스리고 군을 다스리는 일에 보탬이 될 것이다 라고 적어두었다.

  오산지에는 산천형세총론(山川形勢總論)’에 이어 역사, 문화, 인물, 토산물 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2003년도에는 청도문화원에서 이상동(李相瞳)이 역주(譯註) 역주 오산지를 발간하여 수헌의 말처럼 그 당시의 사정을 쉽게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수헌은 도선답산기(道詵踏山記)를를 원용하여 수야리는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만세가 지나도 깨어지지 않는 땅으로 두 물줄기 사이에 명당이 있다 고 했다. 수야촌은 지금의 수야2리이니 이곳에 정사를 짓고 오산지 등을 편찬하며 장선고개 너머 선대의 묘소도 돌봤을 것 같다.

 

수헌정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외가에서 글을 읽고 오대에서 어부가

돌고 돌아 자리 잡은 만년의 수헌정사

청도의 최초 역사서 오산지가 태어나다

 

 

 

 

 

오대에 새겨진 '수헌의 장구지소'
수헌의 친필인 '한벽당'
오대 어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