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7)
청도읍 내리의 교리(校理) 김백견(金伯堅) 선생 첨계재(瞻桂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청도읍 용각산 아래 내리(內里)의 첨계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김백견(金伯堅, 1452〜1529)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사중(士重)이며 성균 진사(進士) 문과 교리(校理)였다.
공의 가계는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고 고려의 판도판서(版圖判書) 김관(金管)을 파조(派祖)로 한다. 증조부 서(湑)는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분릉군(盆陵君)에 봉해졌고 조부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천거되었으며 사시호(私諡號)가 절효(節孝)이며 아버지는 유훈에 따라 청도에서 김해로 옮겨 선영을 지켰던 성균 진사 청계(淸溪) 순(順)이다.
공은 덕행과 문장이 비범하였으며 향정(鄕正)으로 뽑혀 의성 현령 김계금(金係錦), 청송 현감 백계영(白啓英), 인의(引儀) 배경(裵絅) 참봉 송숙형(宋叔亨)과 김해 회로당(會老堂)을 짓고 사촌 동생인 탁영(濯纓) 일손(馹孫)이 기문을 지었다. 이곳에서 훈도하여 풍속을 바로잡았다. 또한 공은 탁영과 상의하여 시조의 능묘를 수리하였으며 재궁을 짓고 위토를 사서 향사를 받들었다. 서흥(瑞興)인 김희연(金熙淵)은 공의 묘비에 “단혈(丹穴)의 봉황은 터럭이 아름답고 곤륜산의 옥(玉)은 광채가 빛나는데 공이 이 보다 더한 사람이다.”고 했다. 문집이 있었으나 실전(失傳)하여 안타깝다. 공이 김해에서 내동으로 옮겼으며 그 이후 후손들이 계속해서 가문을 빛내며 살고 있다.
첨계재는 1946년 죽촌(竹村)에 지었다가 1958년 내동으로 이건했으며 목조 와가 정면 5칸 전퇴이다. 재실 이름은 죽촌 계곡(桂谷)에 있는 산소를 우러러 살핀다는 뜻으로 ‘첨계재(瞻桂齋)’라고 했다.
1973년 낙성연(落成宴) 때 봉사손(奉祀孫) 석곤(錫坤)은 원운(原韻)에 “옛 가업을 이어가기 어렵고 충효가의 명성을 잃을까 두렵다. 선대의 묘소를 바라보니 감회가 깊고 낙성연에 향리의 어른들이 노고를 잊고 찾아주시니 선대의 영광이 전보다 백배 더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에 축하를 하는 근차운(謹次韻) 60여 수가 답지했으며 이를 ‘첨계재지(瞻桂齋誌)’에 수록했는데 함안인 조용태(趙鏞泰)는 “김관의 후손은 삼한을 빛내고 절효의 유풍은 백세에 전한다.”고 했다.
대청 마루에는 김달(金達)의 ‘첨계재기’와 권상규(權相圭)의 ‘첨계재 이건기(移建記)’, 박용운(朴龍雲)의 ‘첨계재 이건 상량문(上樑文)’이 걸려 있다.
또 배향 인물의 한 분인 교리공 아들 홍(鴻)은 성균 진사였으며 손자 우(釪)는 주서(注書), 전(鈿)은 판관(判官)이었는데 광해군 패륜 이후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했다. 증손 유생(有生)은 현감, 봉삼(鳳三)은 통덕랑(通德郎)이다. 영삼(泳三)과 효삼(孝三)은 문학과 덕행이 높았다. 6세손 응경(應慶)은 진사이고 수명(受命)은 통정대부였다. 7세손 석기(碩起) 역시 통정대부였다. 석구(碩龜)는 학문이 높았고 석두(碩斗)는 효행이 높아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올랐고 소학을 매일 읽으며 익혔다.
‘첨계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용각산 뒤로 하고 우뚝 선 첨계재
교리공 높은 뜻 대대로 지키니
거룩한 충효의 가문 오래오래 빛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