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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40)만우(晩愚)박정형(朴廷瀅) 선생이 후학을 길러내던 일신재(日新齋)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40)

만우(晩愚)박정형(朴廷瀅) 선생이 후학을 길러내던 일신재(日新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  연구회  회원. 청도문협 회장

 

 

일신재
2021년 2월 9일, 청도신문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질머리 마을)에 위치한 일신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만우(晩愚) 박정형(朴廷瀅, 1876~1935)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밀성이며 소요당 박하담의 후예이다.

  공은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와 향산 이만도에게 사사(師事)하였다. 두 분 스승 모두 안동 출신으로 당대의 큰 학자이며 의병장을 지낸 분이다. 향산 이만도의 저서인 ‘향산집’에 “박 수재(朴秀才) 정형(廷瀅)이 멀리서 일월산(日月山)으로 나를 찾아와 배우고자 하였으나 그 뜻이 부끄럽게도 나는 아픈 몸이라 그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대학(大學) 경 1장’을 써서 준다. 이것은 나의 학문의 큰 표준이니, 유교가 황폐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학문을 굳건히 세운다면 덕으로 들어가는 문로(門路)에 차질이 생길 염려는 없을 것이다. 부디 노력하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향산의 격려를 받은 박정형은 청도로 돌아온 뒤 대학경 1장의 ‘큰 배움의 길은 먼저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고 다음은 그 밝아진 마음으로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데 있으며 그 결과 지극히 좋은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는 내용을 늘 새기며 독실하게 학문에 매진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 유학의 큰 경륜을 쌓았다.

  이러한 공의 고매한 명성이 널리 퍼져나가자 가까이는 물론 경주, 경산, 영천 등지에서도 많은 제자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제자 수가 점차 늘어나 80 여명에까지 이르자 장소가 협소하여 도저히 수용하지 못할 형편이 되었고 이에 제자들이 계를 모아 기금을 마련하는 등 적극 동참하여 ‘일신재’가 창건되었다.

  이 일신재 창건에 즈음하여 공의 또 한 분 스승인 김도화는 직접 ‘日新齋記’를 써주었는데 은나라 시조인 성탕(成湯) 임금의 목욕하는 그릇에 새겨져 있는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을 상기하며 날로 새롭게 일취월장하기를 빌었다. 이 기문을 쓴 때가 1912년이다.

  그 후 ‘일신재’는 1984년에 새로 지었고 1994년 및 2016년에 대문채를 앞으로 물리는 등 크게 중수했다. 이곳에는 ‘일신재기’만 해도 셋이고, ‘일신재 중건기’ 하나 그리고 ‘삼체정기’까지 있다. 곁들여 ‘三棣亭’이란 현판도 같이 걸려 있는데 이 ‘삼체정’은 만우공 삼형제의 돈독한 효심과 우애를 기리는 것이다. 공은 상을 당했을 때 시묘 3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행한 보기 드문 효자이었다.

  또 율재(慄齋) 이한걸(李漢杰)이 1926년 11월에 공을 찾아와 시를 남겼는데 이도 벽에 걸려 있다. 요약하면 ‘북풍이 나의 소매를 스치는데 남쪽으로 구룡산에 와서 지란(芝蘭)의 집에서 이별한 지 8년 만에 얼굴을 대했네, 언제 다시 자리를 만들어 함께 거문고를 다스릴고”하는 절절한 내용이다. 공의 저서로 ‘만우집(晩愚集)’ 2책이 있다.

 

‘일신日新’이란 시제로 글을 올린다

 

두 분의 큰 스승 나라사랑 뜻을 이어

영재를 길러내어 내일을 기약하던

그 정신 다시 새롭게 일신으로 우뚝서다

 

일신재 전경
척암 김도화가 쓴 '일신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