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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38)제우당(悌友堂) 박경전(朴慶傳)선생을 배향하는 이모정(二慕亭)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38)

제우당(悌友堂) 박경전(朴慶傳)선생을 배향하는 이모정(二慕亭)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이모정

                                                             <청도신문 2021년1월 8일>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 소재하는 이모정(二慕亭)을 찾았다. 이곳은 의병대장이었던 제우당(悌友堂) 박경전(朴慶傳, 1553〜1623) 선생을 배향하는 재사이다. 공의 본관은 밀성(密城)이며 호는 제우당 또는 이모당(二慕堂)이라 했다. 아버지 장사랑(將仕郞) 박이(朴頤)와 어머니 의흥 예씨(義興芮氏)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이서면 수야리에서 출생했다.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1591년 부친상을 당하여 상주의 몸으로 여막을 지키던 중, 왜적이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을 일으켜 부산에 이어 울산, 김해, 양산 등지를 함락시키고 마침내 20일에는 청도까지 침범하게 된 소식을 들었다.

이때 공은 통곡하여 가로되 “시운이 불행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기울어진 이때 비록 상주의 몸이지만 어찌 작은 허물을 피하여 대의를 허물게 하겠는가, 마땅히 나라를 위해 지킬 것이다.” 하며 부친 묘 앞에서 아우 경윤(慶胤), 경선(慶宣)과 함께 삼형제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같이 맹서한 후 형제·조카 및 동민을 따르게 하여 성현준령(省峴峻嶺)을 거쳐 청도의 산동 지역인 운문산 일대에 이르러 1592년 5월 1일부터 총 34회 출전하여 수많은 적군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고, 경주와 울산 전투에도 참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제우당 문집에 전하는 ‘맹약문(盟約文)’을 통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공의 의기와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다.

1598년 창녕현감(昌寧縣監)에 봉해졌고, 1605년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그 뒤 1816년(순조 16) 병조판서 자헌대부 겸 지의금훈련원사에 추증되었으며 이서면 학산리 용강서원 내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있다.

  공은 배자예부운략책판(排字禮部韻略冊版)을 복각하였다. 이는 송나라 정도(丁度)가 편찬한 책으로 과거시험을 위하여 간행한 운서이다. 원래 청도에 1464년(세조10)에 제작한 도주본(道州本)이 있었다. 이 ‘도주본’의 판목(版木)을 적천사(磧川寺)에 보관했는데 전란(戰亂) 중에 소실되었기에 동생 국헌(菊軒) 박경윤과 함께 충북 ‘영동본(永同本)’에 따라 1615년(광해군7)에 새로 복각(復刻)하였다. 이 해가 명나라 만력(萬曆) 43년이었기에 ‘만력본(萬曆本)’이라고 하는데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원(仙巖書院)에 보관하고 있다가 지금은 안동 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원래 ‘제우당’이 만년을 보냈던 강학지소(講學之所)인 이모정(二慕亭)과 봉향을 하던 제우당(悌友堂)은 운문면 순지리에 창건되었지만 운문댐 축조로 1993년, 현재 위치에 옮겨 ‘이모정’으로 신축했다. ‘二慕亭’의 ‘二慕’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한다는 뜻이다. 또 이 재사 한 곳에 공의 막내 동생인 상우재(尙友齋) 박경준(朴慶俊)을 추모하는 공간도 마련하여 활용하고 있다. 또 운문면 오진리 공의 묘소 아래는 묘재인 오강재(梧岡齋)가 있다. 처음에는 4칸 한옥이었으나 노후하여 헐고 2016년에 양옥으로 신축했다. ‘제우당’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작은 허물 피하여 대의를 버릴 건가

한 목숨 내어놓은 거룩한 창의 정신

갈수록 더욱 뜨겁게 메아리로 쌓이다

 

                                                            <배자예부운략>

제우당 문집

                                                     

운문면 오진리에 있는 제우당 묘재인 오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