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각제일교회 출신의 독립유공자 홍재범 지사
1. 출생
홍재범은 풍각제일교회 설립 4인방(김경수 김양석 조병종 홍종찬) 가운데 한 분인 홍종찬(洪鍾贊) 영수와 모친 최수천(崔守天) 여사 사이에서 1884년 8월 19일에 경북 청도군 풍각면 성곡동 714번지(청도군 풍각면 성곡길 10-2)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이었다.

그 이후 홍재범 가정은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덕양동 153번지, 그리고 풍각면 차산동 103번지로 이사하여 살다가 “독립공채 모집 및 워싱턴회의 독립청원 사건”과 관련하여 일경에 검거되었을 때는 대구부 명치정 2정목 50번지(구 대구제일교회 부근)에서 살았다.
2. 신앙생활
1899년 3월에 풍각제일교회가 설립되고 2년이 지난 1901년, 홍재범의 아버지 홍종찬은 풍각제일교회의 설립자 김경수 영수에게 기독교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전 가족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홍재범도 아버지의 결정을 따라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성곡리에서 각북면 명대동에 있는 풍각제일교회까지는 두 시간은 족히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물을 건너고 산길을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주일마다 도시락을 준비하여 전 가족이 소풍 가듯이 아침 일찍이 집을 나서서 교회에서 온종일을 보내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풍각제일교회 권서 홍재범 홍재범 지사의 교회 직분은 ‘권서(勸書)’였다. 풍각제일교회가 소장한 문서에는 “홍재범, 장치견, 김경일 제씨의 권서로 시무한 년이 유하얐고.” 권서 홍재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초창기 한국 교회에는 권서라는 직분이 있었다.

‘권서’(colporteur)라는 말은 불어의 ‘col(목)’이라는 말과‘porteur(운반한다)’라는 말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였다. 즉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걸어 물건을 운반한다는 뜻으로 행상인을 말한다. 한국에서 권서가 시작된 것은,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한글로 번역될 때였다. 만주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에 의하면, 이 무렵 간행된 쪽 복음서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에 반입되었는데, 그들은 무보수로 수백 권의 단편 성경을 팔거나 배포했다. 로스는 1882년 10월 6일 한국 최초의 권서인 서상륜에게 500권의 단편 성경과 그 밖의 기독교 관계 소책자들을 주어 평안도 의주로 들어가게 했다.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 권서들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교회사에서 이름 없이 성경을 반포한 이들이 수천 명 있었는데, 이들이 권서(勸書)이다. 권서는 등에 ‘복음짐’(성경책)을 지고 부르튼 발로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성경을 보급했다. 그들은 다니다가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곳에서 밤을 지새우며 성경을 가르쳤다.
권서는 그 사역의 특성상 사명감이 투철하고 믿음이 좋으며 특히 책 판매에 탁월한 소질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권서들은 매일 아침 7~8시까지 찬송과 기도·성경공부를 하고 오전 9시부터 둘씩 짝을 지어 판매 활동을 시작했다. 하루에 100〜150권의 책을 ‘복음 궤짝’이라 부르는 상자나 봇짐에 넣어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조금 여유가 있는 권서는 당나귀나 자전거를 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걸어 다녔다. 점심은 아침에 준비한 밥과 짠지로 해결했다. 원칙적으로 퇴근 시간은 오후 6시였지만, 판매와 전도에 열중하다 보면 밤 9시를 넘겨 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사랑방 전도모임’을 가졌고, 개종자가 생기면 근처 교회에 연결하여 계속해서 돌보도록 했다. 권서들은 자기가 책임 맡은 구역은 한 곳도 빼지 않고 모두 다녔는데 하루 평균 20Km 이상을 다녔다.
특히 권서들이 즐겨 찾은 곳은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장터였다. 그들은 장터 한쪽에 성경과 달력, 쪽 복음, 교리문답 등을 펼쳐놓고 찬송을 부르면서 성경을 팔았다. 해 질 녘이 되면 술에 취한 장꾼들을 피해 여인숙으로 가서 성경을 팔았다.

그러나 나라를빼앗기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생활필수품도 기호품도 아닌 성경을 파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권서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한글을 가르쳐서라도 성경을 팔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조선의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최선을 다하여 성경을 권하고 팔았다. 권서는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성경을 무료로 배부하지는 않았다. 돈이 없으면 곡식이나 생선, 달걀, 옷, 성냥 등을 받고 성경과 교환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홉스(Thomas Hobbs)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공짜로 주면 귀히 여기지 않고 성경을 잘 읽지도 않습니다.” 권서는 가난과 무지와 미신과 서양종교에 대한 나쁜 선입관 등으로 많은 경멸과 모욕과 핍박을 받았다. 권서는 서양 귀신이 들렸다며 마을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얼굴이 피로 물들기도 하였다. 산속을 헤매다 산적을 만나거나 호랑이, 반달곰에게 찢기기도 하고 시장터에서 몰매를 맞기도 했다. 산골 마을을 심방하다 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동사하기도
권서의 선발조건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격심한 육체노동에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갖춘 자. ②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특심한 열정을 소지한 자. ③주위로부터 칭찬을 받는 덕망을 갖춘 자. ④돈의 유혹에 잘 빠지지 않는 자. ⑤한문을 잘 알고 어느 정도의 지식수준을 갖춘 자 등이다.
일본 순사에게 독립군 첩자로 잡혀서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권서 중에는 부인 권서도 있었다. 이들은 남자가 들어갈 수 없는 부엌과 바느질 방을 개설하여 성경을 팔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남편 흉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여인에게 부인 권서는 다림질도 도와주고 함께 나물도 다듬으면서 복음을 전했다. 당시 여인은 글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부인 권서는 온종일 성경을 읽어주고 저녁에는 한글도 가르쳤다. 이처럼 권서가 수고한 결과 1908~1940년까지 한국의 전체 성경 보급의 85%가 권서의 ‘부르튼 발’과 ‘복음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선교사는 “권서의 사역을 들어보면 마치 사도행전의 한 장을 읽는 것 같다.”

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께 충성한 권서로 인해 무지와 가난과 우상숭배의 나라 한국은 점점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홍재범 지사는 바로 이러한 권서 직분을 받아 성경을 어깨에 지고 청도 일대를 다니면서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했다. 성경을 두 어깨에 지고 복음을 전하러 다닌 홍재범 권서의 발길이 있었기에 청도의 골짜기 마을마다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4. 일신학교 교사 홍재범
홍재범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06년 풍각제일교회에 일신학교(日新學校)가 세워지자 1기로 입학하여 공부했다. 그리고 이어서 계성학교(啟聖學校)에서 대구·경북지역의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교사 양성과정 단기반을 수학하고 풍각제일교회 부설 일신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교사양성과정은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한 달씩 1년에 두 차례 운영되었다.
풍각제일교회가 소장한 “일신학교 역사”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1906년에 학당을 설립하여 최명신(崔命申)씨의 교수하에 생도 약간인이 수업하다가 1909년 이르러 교육령에 의하여 학교급 주인가를 득하여 4∼5년간 교육하다가 경비 곤란하여 폐지되었으며, 1920년에 이르러서는 교육기관이 없으므로 안타깝게 여겨 학교를 기쁘게 설립하여

교장 김만성씨와 교사 홍재범씨 교수하에 1921년 봄에, 최성찬과 조위석 두 사람이 제1회 졸업하여 현재 대구계성학교 수업 중이고, 지금 현재 본 교회의 학교에는 남생도 27인, 여생도 10인이 재학 중이다.

2) 1920년에 재개교한 일신학교는 교장 김만성, 교사 홍재범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일신학교는 오래 운영되지 못했다. 1922년 5월 20일에 풍각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할 때 그 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풍각초등학교는 일신학교 학생들을 그대로 인계받고 신입생을 모집하여 개교함으로 개교 2년만인 1924년 3월 24일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일신학교가 문을 닫자 일신학교 교사로 있던 김만성과 홍재범은 대구 선교지부로 가서 선교사들을 돕게 되었다. 홍재범은 대구선교지부의 선교사 서기가 되어 선교사들의 사역을 도왔다.
5. 워싱턴회의 독립청원 문서와 홍재범 지사
1919년 1월에 개최된 파리강화회의를 통하여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베르사이유 체제’라고 한다. 이 회의에 조선유림단(儒林團)은 조선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그러나 조선독립을 청원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 쟁탈전이 치열하게 진행되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 사이에 미국 워싱턴에서 동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 대한 열강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 일명 태평양회의)가 개최되었다.
워싱턴회의는 3개 조약을 체결하여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둘러싼 열강들 사이에 일시적 타협을 이루었다. 워싱턴회의를 통하여 이루어진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국제질서를 ‘워싱턴체제’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열린 두 회의를 통하여 세계질서는 1920년대 후반까지 상대적으로 안정 상태를 유지하였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당수 독립운동가는 워싱턴회의를 민족 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 독립운동의 마지막 기회로 인식하였다. 한국은 워싱턴회의에 초청을 받지 못했지만,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하여 서재필(徐載弼), 정한경(鄭翰景), 돌프(Fred A. Dolph) 등

으로 대표단을구성했다. 이승만은 대표단장으로 하는 한국 대표단은 임시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의제에 포함하여 줄 것을 간청하는 진정서(陳情書)와 임시정부의 독립 요구서(獨立要求書), 그리고 국내 13도 지역 대표 367명이 연명 날인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를 접수하였다. 한편 이현수(李賢壽)는 워싱턴회의에서 조선통치에 대한 외국인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외국인 선교사에게 배부하려고 “조선인이 일본의 군국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날 것을 충심으로 열망하고 있을 때, 워싱턴회의라는 절호의 기회가 왔으므로 조선에 대한 원조와 동정을 구한다.”라는 요지의 영어로 된 글과 워싱턴회의를 기회로 하여 독립운동이 필요함을 기

재한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였다. 영문으로 된 인쇄물은 대구·평양·전주의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거주 외국인 의사 아아힌 등에게 우송하고 『자유지』는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를 비롯한 조선 내 각지에 배부하여, 독립운동의 선전과 민심의 동요를 도모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홍재범은 이현수 등과 함께 1923년 1월 24일 제령위반으로 대구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된 인사는 총 42명으로 주로 기독교인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선교사 서기‘는 홍재범이 유일했다.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선교사 서기로 근무 중인 홍재범은 선교사들에게 조선독립을 호소하는 글을 보내는데 중간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자신이 선교사 서기로 있고 많은 선교사들을 알고 있는 홍재범은 이현수가 작성한 조선독립을 청원하는 영문 글을 선교사들을 통하여 워싱턴회의에 보내는데 핵심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국민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한국대표단의 존재 자- 7 -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워싱턴회의 의제에서도 한국 문제를 완전히 제외하였다. 결국, 민족 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독립론은 파리 강화 회의와 마찬가지로 워싱턴회의에서도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동안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맹목적인 기대와 환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결과적으로 외국에 의존하는 외교적인 독립운동은 국제 정세의 변화가 없는 한 무망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6. 독립공재모집 사건에 연루된 홍재범 지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상해에 주재한 우리 동포들에게 인구세(人口稅)를 부과해 예산을 조달하는 외에 국내외 각지에서 오는 군자금을 모아 충당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임시정부를 운영해 나가기가 어려워지자, 1919년 11월 29일 「독립공채조례」를 비롯해 「공채표발행규정(公債票發行規程)」, 「공채모집위원규정」 등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독립공채조례」는 전문 19개 조로, 「공채표발행규정」은 4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공채모집위원규정」은 전문 24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1920년 4월 17일부터 시행한다는 사실을 명기하였다. 독립공채는 임시의정원 결의에 의해 모집하되 기채(起債) 정액은 4,000만원으로 하며, 명칭을 ‘대한민국원년독립공채’라고 하였다. 공채의 이자는 연 100분의 5로 하고, 공채증권은 무기명 이자표부(利子票付)로 하되 액면 금액은 임시정부가 발행한 일천 원짜리 독립공채임시정부가 발행한 백 원짜리 독립공채- 8 -1,000원, 500원, 100원의 세 가지로 규정하였다.

공채의 원금은 우리나라가 독립한 뒤 5개년부터 30년 이내에 수시로 상환하기로 하였다. 공채 응모자는 응모 액수, 주소, 성명을 청약서에 쓰고 청약액 매 100원에 대해 5원의 보증금을 첨부해 임시정부 재무부 상해공채관리국이나 재무총장이 지정한 공채 모집 위원에게 내주게 하였다. 공채는 외국인에게도 응모하게 하였으며 응모액이 1만 원을 초과하면 특별 포장을 수여한다고 규정하였다.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花園面) 명곡리(椧谷里) 출신의 이현수(李賢壽)는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로 건너가 재무부 서기로 일하였다. 그 뒤 1920년 7월 무관 학교를 나와 1920년 8월 임시정부 교통차장 김철(金澈),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차장 윤현진 및 도인권의 지시를 받고 임시정부의 달성, 경주, 성주 3개 군의 공채모집위원(公債募集委員)과 경북교통사무특파원(慶北交通事務特派員)으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배포하여 인심을 동요시키고 독립공채 모집, 국내 연락기관 설치 등을 지시받는 한편,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 내한에 즈음하여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왕성함을 알리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현수는 「암호문(暗號文)」과 「주비단단제(籌備團團制)」를 비롯한 「경고문(警告文)」,
「자유신보(自由申報)」, 「물품불구매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 「납세거부서(納稅拒否書)」, 「독립공채모집인정서(獨立公債募集認定書)」 등을 휴대하였다. 이현수는 임시정부의 국내연락기관으로 달성군 유가면(瑜伽面) 금동(琴洞) 출신의 이상철(李相徹)을 달성군교통사무지국장(達城郡交通事務支局長), 달성군 화원면 출신의 기독교 조사 임원조(林元祚)를 영천군교통사무지국장(永川郡交通事務支局長)으로 임명하고, 달성군 가창면 출신 이경만(李敬萬)은 임시정부 통신연락(通信連絡)의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한편 이현수는 달성군 달서면(達西面) 출신의 기독교도 정팔진(丁八鎭, 본명 丁德鎭)과 함께 대구, 안동, 영천, 경주 등 경북 일원의 친일군수, 면장 기타 관공리 및 부호 유지들에게 「경고문(警告文)」, 「물품불구매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 「납세거부서(納稅拒否書)」 등을 발송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대구부내(大邱府內) 노상에 살포하여 반일 애국정신 고취와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1923년 1월 9일 일본 관헌이 자신의 활동을 탐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현수는 경북 경찰부에 자수하여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이현수는 일경에 체포된 이후 국내 활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정 8년(19191년) 9월인지 10월경 상해로 가서 1개년 체재하고 대정 9년 8월경 귀국하였는데,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상해임시가정부원이 되어 그 재무부원으로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의 임무를 띠고 경상북도에 특파되어 성주, 경주, 달성 3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게 되었다. 나는 상해에서 돌아올 때 조선독립공채증권을 지참하고 왔는데, 액면은 1천 원 및 5백 원의 것을 섞어 합계 4만 원어치를 가지고 왔다. 나는 대정 9년 여름 대구부 달성공원 동쪽 전옹당(傳翁堂)에서 임양재와 만나 동인(同人)에게서 조선 독립운동에 진력하라고 권유를 받았으나 나는 이미 근신 중이므로 일체 이를 거절하였다. 또 나는 상해가정부 발행인 공채 모집을 위해 경상북도 달성, 성주, 경주의 특파원이 되어 왔다는 뜻을 동인에게 말하자, 동인은 성주로 가서 공채를 모집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나는 동인의 안내로 금산에서 동인의 친척 집으로 갔었다.” 1921년까지 청도군 풍각면 풍각제일교회에서 교회 권서로, 교회 부설 일신학교 교사로 섬기던 홍재범을 이현수가 접촉한 것은 이현수의 독립공채 모집 사건이 대구·경북지역 기독교인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언급된 42명의 관련자 중에 21명이 기독교인으로 목사, 조사, 영수, 선교사 서기, 신도였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31일, 「경북에 또 중대사건」『매일신보』, 1923년 1월 31일, 「경북에 중대사건」- 10 - 동아일보와 매일신보는 이 사건을

“경북에 또 중대사건”이라는 제목을 기사화했는데, 이 사건에 관련된 42명 가운데 핵심인물로 10명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홉 번째 인물로 홍재범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사건에 홍재범이 얼마나 깊이 관여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고 핵심적 역할을 했음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현수의 독림공채모집 사건에 연루된 홍재범은 이현수 자수⸱ 검거 이후 체포되어 1923년 1월 24일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대정8년 제령 제7호’는 대한제국 광무 11년(1907년)에 공포된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언론 동작 또는 타인을 선동, 교사 또는 사용하거나, 타인의 행위에 간섭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는 자는 50 이상의 태형, 10개월 이하의 금고 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규정한 ‘보안법 제7조’를 대체하는 법률이다.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일본은 한 달 보름 만인 4월 15일 독립운동을 탄압할 법적·행정적 근거를 마련했다. ‘대정 8년(1919년) 4월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이 바로 그것이다. 제령 제7호 1조는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다수 공동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하고자 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라고 제정했다. 2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하던 기존 ‘보안법’보다 훨씬 형량이 높았다.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선동한 자도 똑같이 처벌하고, 영토 밖에서 독립을 도모한 행위에도 적용하도록 했다. 발각 전 자수하면 형을 경감하거나 면제토록 해 조직 와해도 노렸다. 법원도서관이 발간한 『국역 조선고등법원판결록』에 따르면, 3·1운동 때 붙잡힌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보안법과 제령7호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홍재범은 1923년 1월 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이현수의 독립공채모집 및 워싱턴회의 독립청원사건으로 체포된 42인 중 1인으로, 1월 24일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위반으로 기소되어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1월 29일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출감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홍재범 지사 1923년 불기소로 출감한 홍재범 지사는 그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전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갔다. 그 이후 일경에 쫓겨 연해주로 도망가야 했다. 가족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홍재범은 자녀로 딸만 두 명 두었다.
맏딸은 홍복상(洪福祥, 1909년 7월 1일 생), 둘째 딸은 홍복술(洪福述, 1917년 2월 14일 생)이었다. 홍복상은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출신 김봉두(金鳳斗)와 1925년에 결혼하여 1931년에 맏딸 김연선(현 91세, 선순위 수급권자)을 낳았다. 그래서 김연선은 함경도에서 태어났다.
김연선은 현재 경북 청도군 이서면 행정명곡길 58에 살고 있으며 수야교회 은퇴권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둘째 딸은 연일군 흥해면 남송동의 장만술(張萬述)과 1939년에 결혼했다. 그 이후 홍재범 지사는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족들은 살길을 찾아서 일본으로 갔다가 해방을 앞두고 귀국하여 경북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에서 살았다.
홍재범 지사는 2022년 광복절에 나라의 독립을 위한 그 공을 인정받아 독립유공자 정부포상 명단 303명 가운데 포함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보훈처가 밝힌 홍재범 지사의 주요 공적은 다음과 같다. “1923년 1월 경북 대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이현수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경북 경찰부에 체포되는 등 독립에 기여함.”
홍재범 지사는 아들이 없어서 포상은 선 순위 수급권자인 외손녀 김연선 권사님이 받았다.
(위의 내용은 풍각제일교회(목사: 김영호)가 제공한 내용입니다.)

깃발의 시간
- 풍각제일교회 출신 홍재범 지사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축하드리며
박영환
지금은 우리가 깃발을 높이 들 시간이다.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여
청춘과 목숨을 버린
당신을 위하여
높고 큰 깃발을 흔들어야 할 시간이다
지금은 우리가 당신 어깨의 짐을 내려 받을 시간이다
파김치가 되도록 마을마다 매고 다니던 복음궤짝을
일신학교 교사로 흘리던 땀방울을
간절한 염원으로 워싱턴 독립청원 문서에 연서하던 일을
미국 선교사와의 가교역할을 자임하던 일을
독립운동 자금인 독립공채 모집 사건으로 체포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의기와 투혼을
이제는 우리가 권서勸書 되고 교사 되고 서기 되고 투사 되어
당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받아 이어갈 시간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 다짐을 하는 시간이다
만주와 연해주를 전전하며 오로지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어디에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모를
이름없는 고혼이 되어 이국만리 떠돌던
당신의 눈물을 닦아드리며
영원히 우리의 가슴에 모시겠다고 다짐을 하는 시간이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매
죽어서 사는 길을 당당히 걸어가신
당신의
큰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큰 목소리가 쌓인다
지금은 당신의 깃발을
겨레의 깃발로 승화시켜야 하는
엄숙한 깃발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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