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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지역 서원 재실 현황

청도지역 서원 재실 현황 - 명동재를 중심으로 

 

                                      행전 박영환

 

2022년 7월 14일(목), 청도문화원 선비아카데미 강좌가 청도군 이서면 수야4리(귀일마을) 명동서사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제가  '청도지역의 서원 재실현황- 수야4리의 명동서사(明洞書社) 중심으로'란 주제로  강의를 맡았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교직을 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오면서 고향 청도를 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음에 '청도문학신문'이란 까페를 개설하여 청도에 관한 자료를 올렸습니다.
  그 중에도 특히 서원 재실 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몇 년에 걸쳐 300여 곳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이 자료가 '청도군  마을지'에 올리고 또 '청도향교지'에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근래에는 청도신문에 이를 연재하고 있는데 74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심사를 선비 아카데미 강좌에서 발표할 수 있었고 더구나 명동서사에서 서원 재실의 현황과 제 15대조 할아버지인 병재 박하징 선생과 고향마을을 소개하는 시간이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명동서사
김종봉 문화원장 인사말씀
상읍(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설명을 하고 있다
강의 중
단체촬영

 
청도 지역의 서원 및 재실 현황
이서면 수야 4리 명동서사를 중심으로
 
행전 박영환
 
  서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이며, 특히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보급한 이래 남송·원·명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재실은 삼국시대의 시조묘(始祖廟)와 신궁제도(神宮制度)에서 발생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적 생활윤리로써 예제의 강화를 가져왔고 주자가례의 실천적 공간으로 종가, 사당, 서원, 향교 등과 함께 유교문화의 큰 틀을 형성 하였다. 묘제를 수행하기 위한 제축공간으로 ‘齋, 齋舍, 齋室’이라 칭했다.
 
Ⅰ청도의 서원 및 재실, 사당, 누각
 
1. 현황

읍면 서원 재실 정자 및 누각 서당 사당
청도읍 1 21





22
화양읍

11 4 1 2 18
각남면 1 20





21
풍각면 3 35 1



39
각북면 2 10



1 13
이서면 5 68 2 1

76
운문면

17 2

1 20
금천면 4 23 2



29
매전면

53 3

1 57
16 258 14 2 5 295
연대 1500 1600 1700 1800 1901-1944 1945-1999 2000
6 8 11 46 82 130 12 295

1)면 별로는 이서면(26%)과 매전면(19%)에 많이 있다. 동리 별로는 각남에 신당과 옥산, 각북에 남산, 명대 금천에 신지와 김전, 임당 매전에 관하, 남양, 온막, 하평 운문에 공암 이서에 수야, 대곡, 대전, 신촌, 학산, 흥선리에 5곳 이상이 있다.
2)전체 67 성씨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 밀성 박씨 74, 고성 이씨 43, 김해 김씨 22, 의흥 예씨 12, 경주 이씨 10 순으로 많으며 경주 김씨 9, 전주 이씨 8, 경주 최씨 8, 재령 이씨 8 곳이 있고 동래 정씨, 파평 윤씨, 평택 임씨, 아산 장씨 는 5곳이 있다.
5)서원은 1518년 자계서원(紫溪書院)을 시작으로 1995년에 창건한 운천서원(雲泉書院)까지 총 16 서원이 있으며 대부분 재실 및 사당에서 출발했다가 서원으로 승호 개편되었다. 조선 고종 이전의 서원은 철폐령에 의해 모두 훼철되었다가 그 이후 새로 복원한 것이다.
3)재실은 1607년에 창건된 영모재로부터 2013년에 신축된 현암재에 이르기까지 258 곳이 있다. 그 중에 1800년대 까지 창건 된 곳은 71 곳으로 24%에 불과하며 나머지 224곳(76%)은 1900년 이후에 창건 된 것이다.
4)2000년대 이후에 13곳이 폐쇄되었는데 새로 창건된 재사도 12곳이 된다.
4) 정자 및 누각은 삼족대(1519), 군자정(1550), 운수정(1577)에 이어 2014년에 복원한 탁영정에 이르기까지 14곳이 있다.
5)사당은 1670년에 지은 운계사를 비롯하여 5곳이 있는데 용헌 이원 종택 및 탁영종택은 불천위 사당이 있다.
6)건물구조: 서원은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5-7칸 정도의 강당이 있으며 대청이 가운데 있고 좌우에 방이 있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대체로 강당 아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으며 강당 뒤에는 별도의 영역에 내삼문(內三門) 안에 사당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형식이다.
재실은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팔작지붕의 목조와가 4칸 또는 5칸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좌우에 방이 있고 가운데 대청이 있는 ‘중당 협실형’이다. 마당 좌우에 하당과 관리사가 있다. 서원과 재실 공히 뒤에는 대나무를 심고 주변은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대청앞에 재사 이름 편액이 있고 대청벽에 ‘서원기’ 또는 ‘齋記’와 ‘上樑文’이 걸려 있다.
5)근래에는 국한문 혼용 ‘齋記’도 있으며 콘크리트 양옥 재실도 있다.
 
Ⅱ.명동서사(明洞書社)
 
청도군 이서면 수야4리(귀일) 응봉산 기슭에 남향으로 좌정하고 있으며 재사의 구성은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솟을 대문, 축대위에 정면 5칸(대청 3칸, 온돌방 2칸, 중당협실형), 측면 2칸의 팔작 와가이다.
동재(방3칸)와 서재(방2, 고방2)가 있고 중문으로 통하는 별도의 공간에 관리사(방2, 마루1, 부엌1)가 있으며 식당(양옥)이 따로 구비되어 있다. 토석담장을 둘렀다.
건물 정면에 재사 이름인 ‘明洞書社(명동서사)’, 대청에 ‘明洞實記(명동실기)’, ‘書明洞實記後(서 명동 실기 후)’, ‘白鹿洞 規約(백록동 규약)’, ‘歸一古屋(귀일고옥)’, ‘明洞祠 上梁文(명동사 상량문)’, ‘存敬齋(존경재)’, ‘輔義齋(보의재)’ 등 여러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명동서사의 배향인물은 병재(甁齋) 박하징(朴河澄) (1483년 성종14- 1566년 명종21)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밀성이고 자는 성천(聖千)이며 호는 병재(甁齋)이다. 고조부는 여말 충신인 충숙공(忠肅公) 송은(松隱) 박익(朴翊), 증조부는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역임한 우당(憂堂) 박융(朴融), 조부는 입청도 선조인 소고(嘯皐) 박건(朴乾),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박승원(朴承元), 어머니는 진주인 경절공 하숙부(河叔溥)의 딸이다.
공의 삼형제는 삼태성(三台星)이 품에 안기는 태몽을 꾸고 난 뒤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공이 어릴 때는 자가 삼성(三星)이었다. 그리고 선생의 형제 이름에 ‘河’자가 들어간 것은 외가 하씨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河淡, 河淸, 河澄이 되었다. 조부 소고공이 병조판서 김철성 사위가 되어 수야로 이거하고 아버지가 하숙부의 사위가 되면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되어 세거지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8세 때‘소학’을 해석했다. 뒷날에 쓴 ‘삼가 백씨의 독소학유감(讀小學有感)의 시에 화운하다’ -‘병재선생문집’권1에 수록-를 보아도 소학을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小學篇中至味存 소학6편 속에 지극한 맛이 담겨져 있어
看看不厭不知昏 보고 또 보아도 싫지 않아 날 저무는 줄도 모르네
根培枝達方成實 뿌리 북돋아 가지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튼실한 열매 맺듯
熟讀深究古聖言 익숙히 읽어야만 성현의 말씀 깊이 깨닫게 되리라
 
11세 때 이미 시에 능숙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으며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 주자가례를 탐독하여 그 요체인 공(恭)․경(敬)․근(謹)․신(愼)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정진하였다.
이 때 큰 형인 소요당이 병풍의 그림을 보고 시를 읊자 공도 차운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梁公神筆下 뛰어난 신공의 신비로운 붓끝이로고
造化多此間 많은 조화가 그 속에 다 있구려
借問釣臺客 강가의 고기 낚는 이에게 길을 물어
作伴好還山 둘이서 짝을 이루어 기꺼이 산으로 돌아가네
 
1505년(연산군 11) 23세 때 공의 삼 형제가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杏壇)을 쌓았다. 공은 일찍이 백씨 소요당과 함께 성현의 초상을 그려 분향재배하고 경모의 뜻을 표했는데 이에 단을 쌓고 은행나무를 심어 공부하고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수야 행정리 마을의 유래)
공은 이처럼 학문적 경지가 높고 깊었으나 그 살던 시기가 근세조선 4대 사화(士禍)가 있었던 때인지라 출사(出仕)야말로 덧없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1515년(중종10) 33세 때 어사 이시백(李時白)의 추천으로 통훈대부 사간원(通訓大夫司諫院) 정언(正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원래 벼슬에 뜻이 없었던지라 전하를 입대(入對)한 후 옛 제왕의 도(道)와 임금은 모름지기 ‘德’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진언(進言)하고 고조부였던 충숙공 박익의 유허지를 둘러본 뒤 향리로 돌아와 오로지 성리학을 강론하며 저술과 학문 연마, 후진 교육에 힘썼다. 그 때 석대를 쌓아 두어 무(畝)의 땅에 연못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별업(別業)이다. 청도문헌고에도‘명동제(明洞堤)는 둘레가 890자, 깊이가 4자이다. 못 가운데 누석대(累石臺)가 있으며 그 위에는 병재공의 수구제(守口齋)가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못이 있었기에 병재공이 지내리(池內里)에서 출생했다고 했던 것 같다.
1517년(중종 12) 35세 때 소요당을 도와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을 간행했다. 주문공이 편찬한 근사록이 소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선생 형제가 사재를 내어 간행하여 보급했다.
1518년(중종 13) 36세 때 소요당과 삼족당의 사창 건립을 도왔으며 38세 때는 주세붕이 방문하여 운문 명소를 함께 즐겼다. 1531년(중종 26) 49세 때 김 삼족당 곽 경재와 함께 곡천대에서 시를 짓다. 1537년(중종 32) 55세, 주자가례에 심취한 후 일상생활의 본령임을 설파했다.
공은 58세 때 모친이, 60세 때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전후 6년을 여막에서 보냈다. 이때 삼족당 김대유가 조문을 와서 남긴 시가 있고 주세붕이나 남명 조식 같은 이도 직접 여차(廬次)까지 와서 조문을 했다.
1550년(명종 5) 68세 때, 회재 이언적의 강계 적소에 위문하는 글과 약재를 보냈다. 1557년(명종 12) 75세 때 퇴계 선생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1566년(명종 21) 84세 때 별세했다.
 
공은 영남 사림은 물론 충주, 기호사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과 교유했다. 청송 성수침, 탄수 이연경, 삼족당 김대유 등과의 학문적 도의상교(道義相交)를 했으며 특히 당대 최고의 학자로 일컬어지는 남명과는 인성의 선악에 대한 문답설을, 퇴계와는 사(辭)와 이(理)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는 공의 학문적 경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병재(甁齋)’란 호는 조 남명이 지어준 것인데 이는‘입 지키기를 병 틀어 막듯이 한다’는 뜻이다. 이후 공이 거처하는 집을‘수구재(守口齋)’라 명한 것은 호의 ‘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즉 늘 몸을 낮추어 행동을 무겁게 하고 과묵한 것을 근본으로 삼으며 벼슬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다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은 학문과 더불어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될 정도로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병을 앓자 젖을 먹지 않고 피하므로 주위 사람들이 ‘젖먹이 효자’라고 했으며 형 두 분이 금천 신지 지역으로 이거한 뒤에도 홀로 부모님 겉을 지키며 차거나 더운 날씨에도 옷을 벗지 않고 잠시도 부모님을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뒤에도 전후 6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등 하늘도 감동을 한 효행에 관한 일화는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공은 생존 시에 형조참판의 관직이 내려지고 사후에는 학덕을 포상하는 특전으로 호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명동서사에 제향되고 있다.
박하징의 생애와 학행은 9세손 박승해(朴升海)의 ‘가전본장(家傳本狀)’, 심영석(沈英錫)의 ‘묘갈명’ 이효순(李孝淳)의‘행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병재선생문집 서문’을 지었다. 저서로는‘병재선생문집’ 4권1책이 전한다.
명동서사는1857년(철종8)에 시작하여 1858년(철종 9)에 완공되었으며 1862년(철종13)에는 명동사의 서원 승격을 위해 안동 유림들이 도산통문(陶山通文)을 돌렸는데 1868년(고종5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맞았다. 그 때 사우는 훼철되었으나 후손 성균 진사 박기우의 노력으로 강당건물은 보전되었다. 1910년에 이어 1971년(辛亥)에 크게 중수했으며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중수했다.
 
Ⅳ.도산통문
 
이 통문은 1858년(철종 9)에 명동사를 창건한 뒤 사림에서 서원으로 승격하려는 뜻으로 이 통문을 작성하게 되었다. 당시 서원의 승격은 안동 도산서원 유림들의 통문이 절대적이었다.
 
<내용>
아래의 통문으로 두루 알려드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사당을 세워 현인을 제사함은 도 있는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이며 사당에서 서원으로 승격하는 것은 존경하는 분을 숭배하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생각하건대 우리 박공 병재 선생은 중종 명종의 성대하고 밝은 때와 수사(洙泗, 공자의 고향, 즉 유학의 근원) 도학이 다시 천명되던 운 때를 맞이하여 청송(성수침) 가문과 자주 학문을 강론하시고 회재(이언적) 및 퇴계(이황) 선생과도 서신 왕래를 통하여 의를 더욱 도탑게 하셨으며 또 탄수(이연경), 우계(성혼), 남명(조식), 삼족당(김대유) 제 선생과 학문을 토론하고 강마하여 우리 유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안으로는 소요(박하담), 성와(박하청) 두 형님들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가정의 명성을 천양하시어 동남지방의 거유가 되셨으니 얼마나 장하십니까! 예컨대 경(敬)으로써 몸을 조신하여 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앉아 있는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부모님을 지성으로 섬기어 눈 속에서 꿩이 날아들게 한 것은 선생의 효도였습니다. 산림 속에서 팔장만 끼고 앉았네(林間袖手坐看川, 병재 선생이 정언 벼슬을 내린다는 중종의 비방기를 읽고 지은 시)라고 시를 읊음은 선생이 세상에 나가고 물러가는 법도였으며 봄바람도 효심을 능히 알았다는 시구(春風應解至孝貞, 삼족당 김대유가 공의 여막에 조문하러 와서 지은시)는 선생의 여묘 생활이었습니다.
그 외에 법이 되고 스승이 될만한 가언(嘉言)과 선행 또한 어느 것인들 백세토록 의심 없는 바른 논리가 아님이 있으리오마는 한스럽게도 세상의 교화가 점차 미약해지고 유풍도 점차 떨어져서 선생이 작고하신 지 삼백 년이 지났으나 아직까지도 선생을 공경하는 의식을 게양할 곳이 없었으니 무릇 둥근 갓을 쓰고 네모진 옷깃을 입는 사람이라면 누가 억울한 마음을 간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지 선생의 덕망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지고 사림들의 공의(公議)가 한결같이 뭉치어 수석이 아름답고 선생의 자취가 깃든 귀일원의 빈터에 새로운 묘원(廟院)을 건립하였으니 이는 단지 후손들의 근본에 보답하는 터전이 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선비들이 장려되고 진작되며 보고 듣고 깨닫는 데는 더욱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저희들의 미미한 말 한 마디야 옥을 다듬는 돌이나 쇠를 끌어당기는 자석이 되지는 못하지만 인륜과 본성은 누구나 같으니 자연 소문을 들으면 감격함이 이와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여러 존위깨서는 도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숭배하는 뜻을 준수하여 하루 속히 성대한 일을 착수한다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임술년(1862) 청월 초 오일 도산서원 상유사(上有司) 유학 이조순
그 외에도 재유사(齋有司), 제통(製通), 사통(寫通) 등 24명이 연명을 했다.
 
* 명동서사는 1857년에 시작하여 1858년(철종 9)에 완공하여 1862년(철종 13)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사당은 훼철되고 강당은 성균진사 박기우의 노력으로 손상되지 않았다.
 
 
Ⅴ.수야리의 유래
 
수야리는 신라시대 풍수의 대가인 도선(道詵)이 그의 비기(秘記) ‘도선답산기(道詵踏山記)에 “오산군(鰲山郡, 청도의 별칭)의 동쪽 5리쯤에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만세(萬世)가 지나도 깨어지지 않는 터가 있으며, 수여현(水餘峴)의 두 물줄기 사이에 명당이 있다. 수여는 지금의 수야촌(水也村)이다. -鰲山郡東五里許 有渴龍飮水形 有萬歲不破之基 水餘峴兩水間 有明堂云 水餘 今爲水也村”라고 했다. 1673년 이중경(李重慶)도 오산지(鰲山誌)를 편찬하면서 이 도선의 비기를 소개했다.
이렇게 도선이 비기를 남길 정도로 유서 깊은 명당 마을로 알려져 있는 수야리는 마을 북쪽에 있는 삼성산(三聖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인 태봉(胎峯)을 중심으로 분기하면서 깊은 골짜기를 형성하는 속에 그 사이의 낮은 산기슭과 들판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쪽에는 삼성산(三聖山)에서 뻗어 내린 또 다른 산줄기가 낮은 산지를 형성하면서 덕령 동쪽을 따라 내려가다가 학산리(鶴山里)에서 멈추면서 수야리 마을을 크게 에워싸고 있다.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다툴듯한 융기(隆起)가 자연적인 지령(地靈)이 되어 마을을 보전해주는 듯한 취락의 요건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수야리는 현재 중촌(中村), 신기(新基), 서녘, 행정(杏亭), 명곡(明谷), 덕령(德嶺), 귀일(歸一)등의 자연 부락이 있다.
수야리 마을 앞에서 뒷산을 조망하면 도선의 비기에 소개된 것처럼 흡사 용이 굽이쳐 내려오는 형상이다. 그래서 용은 물이 있어야 하니 ‘물이 있습니다.(떠나지 마십시오)는 뜻’으로‘水也’라 했다고도 하고 또 귀일곡과 명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也’자 형으로 갈라져 흘렀다고 ‘水也’라 했다는 것이다. 다른 일설에는 수야 지역의 땅이 자갈과 모래가 많아 건조하기 때문에 물이 좀 있어달라고 ‘水也’라고 했다고도 하기도 한다.
또 주목할 것은 보통 '수야'를 '수아태'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서국 아이의 태를 묻은 곳' '서아태'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 이서국 왕자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胎峯山)의 태실과 관련하여 지명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보통 태실이 있는 곳은 그 앞에 물이 있어야 한다. 원래 태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물속(양수)에 있었으니 물이 있어야 태가 편안할 것이다. 그런데 수야는 별로 물이 많지 않다. 그래서 동리 이름을 '水也'라 했을 수 있다.
또 수야(水也)를 어원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수(水)’의 훈(訓)은 ‘물, 믈’로 표기할 수 있다. ‘믈’의 연음은 ‘므리’로 곧‘머리’를 표기한 것이다. ‘야(也)’는‘들’을 나타내는‘야(野)’의 음을 취한 다른 표기이다. 즉, 마을이 자리한 곳은 넓은 들이 있었기 때문에 ‘머리 들’이라는 뜻에서 한자로 훈음차(訓音借)하여 ‘수야(水野)’를 ‘수야(水也)’로 표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수야(水也)란 마을 이름의 정확한 유래를 알 수는 없지만 음운으로 해석하면 ‘넓은 들’ 혹은 ‘큰 마을’로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朝鮮 聚落’後篇(1933)에 의하면 수야동은 1930년대 당시 밀양 박씨가 120호로 구성되어 청도 관내의 다른 종족 마을보다 큰 규모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제일 큰 규모에 속했다. 옛날에는 수성 나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살지 않고 현재 수야리 4개 마을 중 3리를 제외하고는 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밀성 박씨의 입청도 선조인 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은 1439년(세종21) 밀양 삽포에서 청도 수야로 이주했다. 그 뒤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박승원(朴承元), 청도의 큰 학맥을 형성했던 소요당(消遙堂) 박하담(朴河淡), 성와(城窩)박하청(朴河淸), 병재(甁齋) 박하징(朴河澄) 3형제가 태어났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창의를 하여 청도지역을 방어했던 박경신(朴慶新), 박경전(朴慶傳) 박경윤(朴慶胤)등 14의사도 수야리에서 출생했다. 제우당 박경전이 “대의를 위해서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며 나라를 위해서 한 번 죽으면 족할 것이다. ”맹세하고 형제 숙질 등의 가족과 동민 100여 명을 따르게 하여 남성현을 향하여 수야리에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소고 박건의 장인이었던 병조판서 김철성도 이곳에 살았다. 김철성의 사위가 되면서 박건이 밀양에서 수야로 이주한다. 병조참판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던 하숙부(河叔溥)도 이곳에 살았다. 하숙부는 사직공 박승원의 장인이요 박하담, 박하청, 박하징의 외조부이다. 외할아버지의 은혜를 잊지말라고 이름에 ‘河’가 들어갔다. 또한 큰 학자로 이름을 떨쳤던 두암(竇巖) 이기옥(李璣玉)이 태어나고 그를 향사했던 도림서원(道琳書院)도 수야에 있었다. 뿐만아니라 이기옥의 아들인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은 만년에 수야에 수헌재를 짓고 여기에서 청도 최고(最古) 군지인 오산지(鰲山誌)를 1673년(현종14), 75세 때 완성했다. 이기옥의 숙부인 이덕복(李德福)도 의병을 창의하여 이화(현재 귀일)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순절했다. 이기옥의 조부 이흥지(李興智)가 소요당의 사위가 되면서 경기도에서 수야로 이거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의 이씨들이 수야에 터전을 잡은 것이다.
또한 의재(義齋) 김홍한(金弘漢, 1568∼1592)은 고령에서 수야리로 이거한 고령 김씨 청도파의 원조인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청도 읍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그 뒤 송암 김면의 의병군단이 이끄는 ‘무계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25세 젊은 나이에 순절하였다.
그리고 수야 행정마을 뒷산인 태양산에는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조의제문 사건으로 목숨을 버린 탁영 김일손의 묘소가 있다. 서녘 관음곡에는 성와 박하청, 응봉산에는 판서 김철성, 병재 박하징의 묘소가 있다.
법정 마을은 수야, 1,2,3,4리이지만 자연 부락은 일곱 마을인데 다음과 같다.
 
 
1)중촌(中村)
중촌이란 이름은 중간에 있는 마을을 뜻하는 것 같다. 중촌 마을 아래에 ‘새터밭새’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 ‘새 터 밭 사이에 있는 마을’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새터밭새’ 마을이 두암 이기옥이 태어났다는 가촌(佳村)일 것 같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새터밭새 ’근처에 큰 숲이 있었고 숲이 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리 사람들은 이 숲을 ‘도름 숲’이라고 했다. 이는 청도 유림들이 두암을 위해 건립한‘도림서원’이 있는 숲이란 뜻이다. 아마 생가가 있는 마을에 서원을 지었을 것이고 또‘가촌(佳村)’이란 마을도 음차를 했을 뿐 동리의 가에 있는 마을을 이르는 경우가 많으니 여러 가지 정황으로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2)서녘 마을
서쪽에 그레이스 골프장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관음사가 있었던 관음곡 입구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3)신기(新基)
중촌마을과 인접해 있으며 새로 터를 잡아 정착한 마을이다.
4)행정(杏亭)
행정 마을은 태양산 산자락 아래 형성된 마을이다. 소고 박건의 손자인 소요당 박하담, 성와 박하청, 병재 박하징이 1505년(연산군 11)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杏壇)을 쌓고 학문을 연마한 것에 유래하여 행정 마을이라고 했다. 500여 년이 된 이 은행나무는 지금도 동리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5)발래미[明谷]
행정 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햇살을 밝게 받는 마을 ‘밝담이’, ‘발램이’, ‘발래미’로 불렀고 그 이후 한자로 명곡(明谷)이라 표기했다고 한다.
6)덕령(德嶺)
덕령 마을 뒤에 있는 낮은 구릉의 고개를 넘으면 금촌리(琴村里)와 보리미 마을로 이어진다.
7)귀일(歸一)
귀일(歸一)마을은 삼성산 줄기인 매봉 아래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명동(明洞)’,혹은‘이화(耳火)’로 불려지기도 했다.
1918년에 간행된 5만분의1 지형도에는 명동(明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명동’이란 ‘밝은 마을’이란 뜻이며 병재공 박하징을 배향하는 재실인 ‘명동서사’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인 이화(耳火)도 밝음과 관련이 있다.
‘이화(耳火)’의 ‘화(火)’의 뜻인 ‘밝다’와 ‘밝을 명(明)’을 사용하여 명동(明洞)으로 표기한 점은 서로 연관이 있다. ‘밝을 명(明)’은 곧‘환하다, –한하다’로‘ 한’의 뜻을 취하여 한자로 ‘일(一)’로 표기하고, ‘이화(耳火)’의 ‘이(耳)’의 훈인 ‘귀’를 음을 취하여 한자로 ‘귀(歸)’로 표기하여‘귀일(歸一)’로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귀’와 관련이 있다. 수야 저수지 둑에서 동리를 바라보면 절골과 미옥골이 귀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귀 마을’인 것이다. ‘귀일(歸一)’은 ‘귀곡[耳谷]’을 발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에 동리 이름을 새긴 표석이 있다. 마모가 되어 ‘이(耳)’ 다음 글자가 화(火)인지 천(川)인지 구별이 잘 안 되지만 임진왜란 때 서면 의병들이 청도읍성 탈환 직전에 집결한 곳이 ‘이화(耳火)’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화’임에 틀림없다. 이 마을은 병재(甁齋) 박하징(朴河澄)의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마을이다. 그래서 귀일(歸一)마을 이름도 병재공이 삼형제 중에서 두 형인 소요당(41세)과 성와공(39세)은 금천면 신지로 옮겨가도 병재공(37세)은 같이 떠나지 않고 혼자 선산을 지키기 위해 행정 마을에서 돌아와 정착했다고 ‘귀일(歸一)’로 부른다고 한다. 이곳에는 병재공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아무튼 수야는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아왔으며 역사적으로 한 시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태어나고 또 잠들어 있는 곳이다.
2015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밀성 박씨 소고공파 문중 특별전이 열렸는데 그 때 주제가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마을을 집약하여 알려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수야리에는 재실이 11곳 있는데 밀성 박씨 재실(明洞書社, 爲有亭, 景陶齋, 尙遠齋, 慕菴齋, 景圃齋, 永思亭, 歸厚齋), 김해 김씨 재실(永慕齋), 고령 김씨 재실(溯遠齋), 연주 현실 재실(追遠齋)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