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의 정자와 재실
행전 박영환


용암재(龍巖齋)
◯관리문중: 옥산 전씨
◯소재지: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779(상리)
운문댐 옆 국도 20호선을 따라 가다가 공암리(상리)에 들어서면 입구에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3칸(방1, 고방1, 출입문)을 들어서면 마당 건너 팔작지붕 겹처마 4칸(방2, 마루2,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시멘트 기단 위에 화강암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방과 마루 사이에는 사분합들문을 달아 필요시에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전면에 재사의 이름인 ‘龍巖齋’편액이 걸려 있으며 대청마루에 이채진이 근찬한 ‘용암재 상량문’, 이종은이 쓴 ‘용암재기’가 있다. 그 외 재사 건립 및 보수에 공헌한 ‘헌성록’도 새겨 놓았다.
재사의 보호를 위해 전면에 유리문을 달았으며 마당에는 자갈을 깔았고 주변에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은 전세굉(全世宏)으로 본관은 옥산이며 고려말 조선 초에 예조판서를 지낸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의 후예이다.
◯연혁: 1985년에 창건했고 2013년에 유리창 설치 등 크게 중수했다. 용암재는 종중의 후손들이 모여 조상의 유덕을 추모하고 문중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회의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공암 마을 옥산 전씨 입향조는 전세굉의 손자인 전명재(全命在)이다. 옥산 전씨들이 한 때는 30여호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으나 운문댐이 수몰되면서 타지로 흩어지고 현재는 한집만 살고 있다.


효목재(孝睦齋)
◯관리문중: 기계유씨(杞溪兪氏) 공암문중(孔巖門中)
◯소재지: 운문면 공암리 773-2
용암재 뒤편, 산 기슭에 운문호를 바라보며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물구조: 철근 콘크리트 와가이다.
시멘트 기단 위에 대리석 계단을 만들었고 입구 문은 목재 문이다. 재사 주변에 헌함을 만들었다. 재사의 이름인 ‘孝睦齋’ 편액을 달았다. 대문 및 담장은 없다.
◯연혁: 1995년에 기계 유씨의 종사로 건축했다.


영호재(榮湖齋)
◯관리문중: 초계 변씨
◯소재지: 운문면 공암동 707-3
공암 동편 언덕에 푸른 대나무를 배경으로 운문댐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겹처마 팔작지붕 5칸(방3, 마루2, 중당협실형) 재사이다. 대리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대청 앞에 ‘榮湖齋’ 편액을 걸었으며 재사 보호를 위해 전면에 유리창을 달았다.
◯연혁: 운문댐 수몰로 용담에서 공암으로 옮겨 1992년에 건축했다.


은암재(隱巖齋)
◯관리문중: 경주 김씨
◯소재지: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707-4
공암리 동편 언덕에 운문호를 바라보고 서남향으로 좌정함
◯건물구조: 팔작지붕 4칸(방2, 마루2 중당협실형)의 재사이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형성했다. 마루 앞에 ‘隱巖齋’ 편액이 걸려 있으며 전면에 재사 보호를 위해 유리창을 달았다.
좌측에 3칸(방2, 부엌1) 하당이 있다. 주변에 블록담장을 둘렀다.
◯연혁: 경주 김씨의 재사이다. 이 재사는 운문댐의 수몰로 인하여 1989년 현 위치로 옮겼으며 후손들이 모여 문중 회의를 하고 조상의 유덕을 추모하는 장소로 활용한다.

거연정(居然亭)
원래 이 정자는 윤봉한(尹鳳翰) 선생이 청도 8경 중 하나인 공암풍벽(孔巖楓碧) 빼어난 경치를 즐기던 장구지소(杖久之所)이다. 공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후손으로 자(字)는 기중(岐仲)이며 호(號)는 청수헌(聽水軒)이다
공은 일찍이 관심도(觀心圖)와〮 경심도(警心圖)를 지어 좌우에 놓고 보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향리 사람들과 함께 향약을 세우고 학교를 설치했는데, 관찰사 이중하(李重夏)가 澹於勢利勤於爲善하니 此非孟所謂一鄕之善士- 권세와 이익에는 담담하고 착한 일에는 힘썼으니 이것이 맹자가 말한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라고 서문을 썼다. 저서에는 유생들이 실천에 옮겨야 할 습속을 비교한 삼사비류(三事比類) 및 도행장록(桃杏腸錄) 등이 있는데 필독서가 될 만한 귀중한 책이다.
또한 이 정자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던 이른바 ‘다물단군자금모집사건(多勿團軍資金募集事件)’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권대웅이 연구하여 그 내용을 소상히 정리했는데 이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이 다물단(多勿團)은 1925년 4월 14일 북경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 운동 단체이다. 다물단의 ‘다물’은 용감, 전진, 쾌단(快斷) 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공암동은 민족 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1906년에는 사립 유천 학교를 설립 운영하던 윤대섭(尹大燮)이 도동 학교(道東學校)를 설립하였고, 운문면의 최성희(崔聖熙)는 1919년 3월 18일 운문면 공암리에서 이용환(李龍煥), 김문근(金文根), 윤병림(尹炳林) 등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1924년 1월 12일 대구출신 서동일은 거연정에서 예안 군수 출신 윤영섭(尹瑛燮)과 그의 제자 윤병채(尹炳采), 윤병일(尹炳馹) 등을 만나 윤병채의 양가 맏형수인 이심동(李心東)에게서 독립운동 자금 1,000원을 받았는데, 이는 윤병채가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재산이 넉넉한 윤병권(尹炳權), 최홍태(崔洪台), 최홍열(崔洪烈), 박순병(朴淳炳), 김일준(金馹俊) 등에게도 군자금협조를 얻어냈다. 그 뒤 서동일은 다시 국내로 파견되어 1925년 1월 8일 윤영섭을 다시 방문하고, 거연정에서 윤병채, 윤병일, 최성희 등과 이심동에게 현금 30원을 제공받았다. 또 3차로 청도를 거쳐 경산에서도 모금운동이 있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서동일을 비롯하여 청도의 윤영섭, 윤병채, 윤병일, 최성희(崔聖熙) 대구의 배천택, 이종호(李鍾昊) 등이 제령(制令) 위반 혐의로 붙들려 1925년 6월 검찰에 넘겨졌다.
거연정은 퇴락하여 새로 지었는데 구조가 옛모습과 좀 달라 아쉽지만 주변 바위에 새겨진 ‘山高水長’, ‘活水源’은 그대로다. 현판과 안내판도 있었으면 한다.
*공암리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는 공암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암리는 중곡과 상리, 용방이 합해져서 형성된 마을이다. 운문댐 건설과 함께 경작지 대부분이 수몰되고 표고버섯 재배를 통해 생활하고 있다.
[명칭 유래] 구무바우[공암(孔巖)]가 있어 공암 또는 고암이라 하였다. 공암은 글자 그대로 구멍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이위면(二位面)이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용암(龍巖), 공암(孔巖), 중리(中里), 상리(上里), 하신기(下新基), 하동경(下東京)을 합해서 공암동이라 하고 운문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공암동에서 공암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구룡산에서 흘러온 한줄기의 산등이 공암리에서 멈추고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라 공암 바위에서 감돌아 나가는 곳이 용암이다. 공암은 끝을 모른다고 해서 옛 지리지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굴이며, 공암 풍벽(孔巖楓壁)은 청도 팔경의 하나이다. 운문댐으로 마을 앞이 막혀 있고, 경작지는 대부분 운문댐에 수몰이 되었다. 산비탈에 일군 밭들은 대부분 한국 수자원 공사의 지원으로 표고버섯 재배지로 변해 있다. 지촌리로 가는 왼편 길 위 바위에 학가대(學稼臺)라는 각자가 있고, 그 아래는 농경지였으나 지금은 유휴지가 되어 있다. 원래는 이곳까지 운문댐 물이 찼지만 수위 조절로 물마루의 높이를 낮추면서 지금은 물이 들어오지 않는 유휴지가 된 것이다.
[현황] 2012년 6월 현재 면적은 7.26㎢이며, 총 34가구에 72명[남자 31명, 여자 4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신원리, 서쪽은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용전리, 남쪽은 운문면 서지리, 북쪽은 운문면 지촌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상리와 중리, 용방, 작은 용방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상리에만 주민이 살고, 다른 지역은 모두 수몰된 상태이다. 용방은 산의 끝머리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용바우라고 했는데, 음이 변하여 용방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계천 건너에 10여 가구가 살았는데 이곳을 작은 용방이라고 불렀다. 농경지가 없고 대부분 표고버섯을 재배하여 생활하고 있다. 청도에서 경주로 가는 국도 20호선이 지나고 있다. 중리 부근에 고인돌 7기가 전한다. 원래 10기가 있었는데 과수원을 만들 때 3기가 파손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서지에서 경주로 갈 때는 바위산 중허리를 넘어 다녔고 바위 사이로 난 길이라 해서 암도(巖道)라 했다. 여름에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에 푸른 산이 비쳐서 공암 창벽(孔巖蒼壁)이라 부르고, 가을엔 잡목에 아름다운 단풍이 물들어 공암 풍벽이라고 불린다. 공암이 있는 곳은 산이 불쑥 내민 곳으로, 깎아지른 암벽 높은 곳에 아이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다. 옛 문헌에 보면 옛날부터 이 지역을 지나던 사람들이 하도 신기해서 돌을 던져 보면 낭낭(朗朗)한 소리가 한참이나 들린다고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운문댐 축조 전에는 마을이 공암 남쪽에 있었다. 공암면사무소가 있었고, 마을 뒤에는 18세기에 사기그릇을 만들었던 가마도 있었다. 깎아지른 바위에 다섯 개의 시문이 각자(刻字)되어 있으나 완전한 판독은 불가능하다. 이 주변에는 풍호대(風呼臺)와 곡천대(曲川臺)라는 정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수몰로 인해 모두 없어졌다. 현재 공암리는 수몰로 인해 위쪽으로 옮겨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은 재사(齋舍)가 3곳이 있다. 마을 앞쪽에는 파평 윤씨들의 정자가 있었지만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허물어져 지금은 옛터만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위와 돌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옛날의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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