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각남면 예리리/ 행전 박영환
2019년 3월 4일, 청도군 각남면 예리마을을 찾았습니다. 이곳에도 고성 이씨와 충주 석씨의 재실이 있고 효열각도 있습니다.


경덕재(景德齋)
◯관리문중: 고성 이씨
◯소재지:청도군 각남면 예리리 836-1(가례마을)
마을 중간 남향이다.
◯건물구조: 3칸(고방, 출입문, 식당)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5칸(방3, 마루2) 팔작지붕 재사가 있다. 50센티미터 정도의 축대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구체부를 구성했다. 마루 북쪽에 널판문이 있고 벽에 박효수가 쓴 ‘경덕재 상량문’ 및 김재화가 쓴 ‘경덕재기’가 걸려있다. 정면에는 재사의 이름인 ‘景德齋’ 현액이 있다. 대문 맞은 편에 하당이 있고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블록 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이문(李璊)
본관은 고성이며 자는 계지(桂之)이다. 용헌공 이원의 후예이며 모헌공 이육의 5대손으로 증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이다. 유호동에 거주하다가 늑평동에 잠시 머물었으며 그 뒤 각남 구곡으로 택거하였다.
◯연혁: 1960년 대에 신축했으며 2012년 경에 강판기와로 바꾸는 등 중수했다.
현재 가례마을에는 후손들이 30여호 살고 있다.


다음은 효열각입니다


효열각(玄風 郭氏 孝烈閣)
◯관리문중: 고성 이씨
◯소재지: 청도군 예리리 789-2 가리마을 입구에 위치
◯건물구조: 뱃집 강판 기와이며 정면에 출입을 통제하는 문이 있으며 목재 울타리를 둘렀다.
◯배향인물: 이택준과 그의 처 현풍 곽씨
마을 입구에 이문 공의 5대손인 이택준(李宅俊, 1793∼1815)과 그 처 현풍 곽씨(玄風郭氏)를 기리는 효열각(孝烈閣)이 있다.
효성이 뛰어난 이택준은 부모님 돌아가신 뒤, 큰 하천을 건너 멀리 떨어진 묘소를 매일 찾아가 애통하며 극진히 성묘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큰 비로 하천에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게 되자 애절하게 통곡을 하니, 물길 가운데가 끊겨 하천을 건너 성묘할 수 있었다. 이는 이택준의 효성에 하늘이 감복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이런 내용이 1822년(순조 22) 3월 11일 서울과 지방에서 보고하여 예조에서 수합한 충·효·열의 초계(抄啓)에 들어갔는데 이택준은 그 중에서도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에 포함되었다. 그 결과 다음 달인 윤 3월에 효행이 정식으로 인정되어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贈童蒙敎官 朝奉大夫)를 증직(贈職)하는 교지를 받게 되었다.
이택준의 처 현풍 곽씨도 열부로 추숭을 받았다. 현풍 곽씨는 이택준이 1815년(순조15) 세상을 떠나자 상례에 정성을 다하고 난 뒤 비통함을 참지 못해 상복을 벗자 바로 지아비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이 또한 조정에 알려져 지아비 이택준과 더불어 1822년 예조 초계의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에 포함되었으며, 이택준이 조봉대부로 증직되던 날 영인(令人)으로 증직되는 교지를 받았다. 문무관 4품에 오른 남편들의 작호는 봉정대부(奉正大夫), 조산대부(朝散大夫), 진위장군(振威將軍), 정략장군(定略將軍) 등으로 나누어졌으나, 부인들은 통틀어 영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832년 편찬된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 청도군 편의 ‘열부’ 조에 영인으로 증직된 현풍 곽씨가 누락이 되어 문제가 되었다. 이에 1832년과 1834년 이택준의 동생 이택락(李宅洛) 등이 청도 군수와 경상도 관찰사에게 탄원서인 상서를 올렸다.
이 효열각은 조선 철종 때 구곡리에 세웠으나 40여 년 전 현재의 위치로 옮겨 후손들이 받들고 있다.
2015년도에 새로 강판기와를 올리는 등 중수했다.


예강재(禮崗齋)
◯관리 문중: 충주 석씨
◯소재지: 각남면 예리리 산 45
마을 앞 큰 도로에서 100미터 지점에 동향으로 넓은 들을 바라보며 좌정함
◯건물구조: 3칸(출입문, 고방, 화장실) 대문을 들어서면 4칸(방3, 마루1)의 철근 콘크리트 와가가 있다. 마당 앞에 준공 기념비가 있으며 잔디 마당이다.
정면에 ‘禮崗齋’ 현액이 있으며 마루에 이흥중이 찬한 ‘예강재기’와 ‘예강재 건립표성기’가 걸려 있다.
◯배향인물: 예강처사(禮崗處士) 석가응(石佳應)
한강 정구 선생의 제자였던 운포(雲圃) 석여신(石汝信)의 5대손이다.
그는 유림의 전통을 이어받아 인품이 고매하였고 일찍이 그의 동생인 석산응(石山應)과함께 마역동(磨亦洞) - 현재 가례마을-에 우거하였다.
◯연혁: 1969년 목조와가로 건립했으나 풍파로 허물어진 것을 1983년 철근 콘크리트 와가로 보수하였다.
그 이후 석씨들은 사회의 변천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생활 터전을 옮겨가버리고 현재 이 마을에는 살지 않는다. 해방후 일본에 거주하던 석인수 형제가 거금을 갹출하여 이 재사를 건립하게 되었는데 이때 여러 종친들도 협력하여 제전(祭田)을 장만하여 조상의 향사를 받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예리(禮里)마을이라고 부르는 데 대해 예강재기에 “타인이 동리에 거주하면서 동명을 오히려 예리라고 부르니 아마 이 동리는 예강공(禮崗公)이 살던 유지이니 그 유덕을 길이 잊지 말자는 소이인 것 같다” 기록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는 예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예리리(禮里里))
각남면사무소가 있는 예리리는 가례(加禮)와 평리(坪里)를 합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각남면의 중심 마을로서 행정·교육 중심지이다.
[명칭 유래]
예리리의 본래 이름은 들 가운데 있어서 들 마을이다. 들 마을이 변해서 들 말이라고 하는데 옛 이름은 평리였다. 평리는 원래 옥요(沃饒)였는데, 옥요란 문전옥답이라서 넉넉한 살림이라는 뜻이란다. 가례는 대구와 청도의 갈리는 곳이라 해서 가례라고 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청도군 내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례와 초동면의 평리를 병합하여 예리동이라 하고 각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예리동에서 예리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통편이 좋아져서 면사무소와 지서가 주재하게 되었고, 해방 후 한때 시장(市場)도 형성되었으나 풍각 시장이 세가 커짐에 따라 폐시가 되었다. 농기구를 만들어 팔았던 풀무간이 있어서 불매간으로 불리지기도 했다. 1972년 예리 1리 마을 회관이 건립되고, 1976년 세월교가 가설되고, 1983년 도수로가 공사되었다. 예리 2리에서는 1974년 대통령 특별 지원 새마을 사업으로 지원금 90만 원을 받아 하수구 복개와 소하천을 석축하고, 1981년 새마을 복지 회관을 건립하였다. 예리 3리에서는 1972년 마을 회관을 건립하고, 1973년 안길을 확장하였으며, 1975년 보설치와 함께 하수구를 보수하였다.
[자연 환경]
청도천이 흘러오다 신당리 이실 앞에서 굽이쳐 이서면 구라리 쪽으로 물이 돌아가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청도천변에 경작지가 많이 있다. 충적토를 이루고 있는 부근에 사과 농사를 많이 하였지만, 지금은 경지 정리가 되어 문전옥답을 이루고 있다. 가례 앞들은 비교적 높은 곳으로 전형적인 다랑논을 이루고 있으나, 그 외에는 모두 평지에 논이 있다.
[현황]
예리 1∼3리로 분동되어 있으며, 가례 마을과 평리 마을이 있다.
예리리 북쪽으로 국도 20호선이 지나며, 각남면사무소와 각남 파출소, 각남 초등학교, 산서 농업 협동조합이 자리하고 있다. 각남 초등학교에는 이 학교 출신 곽예순이 설립한 운경 재단이 청도 농기구 박물관을 지어 기증하였고, 뜻있는 학부형들이 사용하던 물품을 기증하여 현재 전시하고 있다. 산서 농업 협동조합은 풍각 농업 협동조합과 각남 농업 협동조합이 신설 합병되어 만들어진 것으로,청도에서는 가장 먼저 벌초 대행과 감말랭이 사업을 하였고, 냉동 창고를 임대해서 수입을 얻고 있다.
한편 청도군지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예리(禮里) 1, 3리는 청도천변에 위치한 들 가운데에 자리한 마을로 안태(安胎)에는 남산에서 갈라져 나와 우뚝 융기한 끝등선이 일명 구복산(龜伏山)이다. 풍수학설로 자라가 물을 먹기 위해 청도천을 향하여 엎드려 있는 형국인데 이를 마중하는 뜻에서 이 곳에 취락이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로는 전형적인 전원마을로 되어 있다.
2리는 구복봉(龜伏峰) 품안에 자리하고 북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산등성에 싸여 있다. 이 마을도 취락 지형은 다른 대부분의 마을과 같이 등선을 등지고 주머니 형국으로 한 방향으로만 열려 있는 동리로 형성의 여건이 같다. 소강이 마을 일부를 막아 터의 지기(地氣)의 유실을 막고 있는 묘한 곳이기도 하다.
예리(禮里)
가례(可禮)동과 평리(坪里)동을 합동한데서 인용한 동명이다.
평리(坪里)
들 마을이다. 들에 마을이 자리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한자 표기로 평리(坪里)로 한 것이다.
갈촌(葛村), 가례(加禮), 가례(可禮)
형성된 시기는 1530년경이라 하나 확인할 수가 없어 구전으로 전하는 것을 기록한다. 충주인 석가응(石佳應) 공이 입촌하여 갈촌(葛村)이라 불렀다 한다.
이는 주위 산 일대에 칡이 하도 많아서 붙여진 마을 이름인데 1600년경에 철성(鐵城)인 이 공이 입주하여 동명을 가례(加禮)로 변경했다고 한다. 이는 예를 바탕으로 하는 유풍(儒風)을 숭상하고자 동명에 예(禮)자를 붙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가례(加禮)또는 가례(可禮)는 철성 이씨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참고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 각 재실 후손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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