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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각남면 칠성리 - 화계사

청도군 각남면 칠성리 - 화계사/ 행전 박영환

 

  2019년 3월 4일(월) 청도군 각남면 칠성리 화계사를 찾았다. 사실 이 마을은 고모가 살던 마을이기에 자주 찾던 곳이라 처음 오는 곳은 아니다. 그리고 화계사에 대해서는 고종인 장영호 씨 그리고 향교 장의인 장종호씨로부터 상세하게 들어오던 터라 매우 낯익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료를 정리하면서 종전에 듣고 느끼고 있던 이상으로 화계사가 유서가 있고 배향인물도 유림에 우뚝선 분이란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화계사 전경

 

 

 

 

화계사(華溪祠)

 

관리문중: 아산 장씨

 

소재지: 청도군 각남면 칠성리 산61

각남면 향인촌 화산(華山) 산 기슭에 좌정하고 있다.

 

건물구조: 3(, 출입문, 고방) 평대문을 들어서면 팔작지붕 5(3, 마루2,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세살문 쌍여닫이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정면에 재사의 이름인 華溪祠 현액이 있으며 대청벽에 김필호가 찬한 화계재 중건기’, 후손 장병구가 찬하고 서학균이 근서한 '화계재 중건 상량문'이 걸려 있다.

마당은 2단으로 축조되었으며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담장 밖에 양옥 관리사가 따로 있고 대문 앞에는 수령 400년이 된 보호수 은행나무가 있다.

 

 

배향인물: 장방익(蔣邦翼)과 장방한(蔣邦翰)

1)장방익: 본관은 아산(牙山)이며, 사효(思孝)의 아들로 호는 이요재(二樂齋)이다. 9세에 지은 대운암(戴雲巖) 시가 있다. 18세에는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으나 서리(書吏)가 농간을 부려 방()에 이름을 감추자 돌아와서 화계(華溪)에다 집을 짓고 학생을 가르쳤는데, 각지에서 배움을 익히러 온 문도가 50여인에 이르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북부참봉(北部參奉)에 제수되었으며, 군자감정(軍資監正)이 추증되었다. 향년 62세였다.

강고(江阜) 유심춘(柳尋春)이 찬()한 감정 이요재 장방익(監正二樂齋蔣邦翼상향축문(常享祝文)에 다음 내용이 있다.

 독실(篤實)한 행동과 선비다운 그윽하고 바른 지조를 간직하셨네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푼 뛰어난 선비로 영원토록 하늘의 뜻을 이루네.”

 

2)장방한(蔣邦翰): 본관은 아산이며, 사효(思孝)의 아들로 호는 국헌(菊軒)이며 진사이다. 타고난 자질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경적을 두루 많이 읽었다. 16세에 동당(東堂) 하고 37세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경암 장문익(釣耕庵蔣文益)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향년 76세였다.

 

연혁: 원래 이요재 장방익, 장사랑을 지낸 양헌 장방호, 국헌 장방한삼형제가 강학하던 곳이다. 1818(조선 순조18 戊寅) 건립하였으나 1868(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58년 대에 새로 지었으며 1975년에 중수했고 1998년에 도색 및 기와 번와, 이어서 2008년에 기와번와를 새로했다. 행장 및 인지당기는 참판 이정병이 찬하고 봉안문은 풍산 유강고가 찬하였으며 묘지명은 진사 밀양 박태환이 찬하고 묘갈은 중재 김황이 찬했다.

현재 칠성2(향인촌)에는 아산 장씨 20여호가 집성으로 살고 있다.  

 

 

 

 

 

 

관리사

 

<마을 전경>

 

칠성리(七星里)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는 칠성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명칭 유래]

  칠성이란 이름은 흑석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다. 대구광역시에도 칠성리가 있는데, 고인돌 유적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일러 칠성리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칠성이나 흑석을 옛 선조들은 별똥이라고도 불렀다.

 칠성리는 본동인 칠성동과 향인촌, 대밭골, 월곡을 합한 마을이다. 칠성리 본동에는 길가와 마을 안 개인의 집까지 칠성 바위인 고인돌들이 즐비하게 남아 있다. 원래 칠성동은 조들 또는 질매끝과 월곡이라고 불린다

  오산(鰲山)[남산]에서 줄기차게 내려온 갈마봉을 옛 기록에는 주마분등형이라고 적고 있다. 달리는 말에 질마를 지운 끝 부분이 질매끝인데, 이러한 모습을 일러 칠성리 본동을 질매끝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부근에 자리 잡은 마을로서 동쪽에 형성된 곳은 화양읍 서상 2리이고, 서쪽에 자리 잡은 곳은 각남면 칠성리이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에 마역리(麻亦里)였다가, 내서면(內西面) 칠성리(七星里)로 바뀌었다.

 향인촌(向仁村)은 사인촌(舍人村) 또는 샌촌이라고도 부른다. 향인촌에는 사통정(四通政) 이라는 말이 있고 사인(舍人)은 신라 때의 벼슬의 이름이다. 그러나 누가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샌촌은 사인촌이 변음된 것이다.

  죽촌(竹村)은 향인촌 북쪽 개울 건너에 있었던 마을이다. 지금은 감나무 밭으로 변해 있는데 오래된 우물이 있고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이 우물은 극심한 가뭄과 긴 장마에도 수량이 변함이 없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청도군 내서면 지역으로 6곳의 자연 마을이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칠성동이라는 이름으로 한 마을이 되어 각남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칠성동에서 칠성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칠성리는 오산에서 내려온 등줄기의 가장 짧은 골이다. 남쪽은 오산이 높이 막아 주어 태풍의 피해를 막아 주고 북쪽은 한내천[청도천]이 가로 지르고 있지만, 한내천으로 인해 얻은 혜택은 별로 없었던 마을이다. 마을 앞 둑안들과 조들, 새들은 토질이 충적토로 형성되었고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한내천이 범람을 하면 홍수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오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인 칠성천은 경사면이 급하고 얕은 건도랑이라 곧바로 흘러내려 큰 비가 오면 흙과 모래가 많이 따라 흐르기도 하는 곳이다. 비교적 넓은 면적의 경작지를 이루고 있지만 경지 정리가 되지 않은 곳은 밭으로 변화시켜 과수 영농을 많이 한다. 국도 20호선 변은 가을이면 대부분 논에 양파 재배를 하여 다음해 6월에 수확을 하고 벼를 심는 2모작을 하고 있다.

 

 

[현황]

 동쪽은 화양읍 신봉리·서상리, 서쪽은 각남면 화리, 남쪽은 각남면 사리, 북쪽은 이서면 서원리·화양읍 토평리·유등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로 칠성 1리와 칠성 2리가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칠성동과 향인촌, 대밭골, 월곡이 있다.

  애목 고개를 넘어 화양읍 신봉리로 가는 길이 예전부터 관로로 형성되어 오다가 신작로가 생기고 교통이 편리해지자 거의 폐로(閉路)가 되다시피 했는데, 최근에 확장과 포장을 해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고 있다. 풍각면을 거쳐 경상남도 창녕군으로 가는 국도 20호선이 칠성리 북쪽을 동서로 지난다.

 

  한편 청도군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산(南山)지맥중의 하나인 갈마(渴馬)봉이 굴곡도 다양하게 마을의 동쪽을 달려와 우뚝 멈추는 바람에 외묵치(外默峙)와 안산치(案山峙)등 고개 길이 마을로 이어져 있다. 칠성천과 화동천이 좁다랗게 합류하는 계천변을 따라 취락된 마을이다. 선사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가 남아 있어 아득한 옛날부터 주민이 살았음을 알 수 있으나 기록이 없음은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다. 코앞에 청도천이 흘러 남고북저의 지형구조도 대동소이하다.

  칠성리는 마역(麻亦)동과 향인(向人), 월곡(月谷)촌으로 되어 있다. 지방행정개편 시 동명은 대부분 합친 마을에서 글자를 따서 동명을 정했는데 이 마을은 그렇지 않다. 지석묘 7기가 남은 것을 별똥이라고 칠성(七星)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1리는 마역동과 월곡인데 마역리(麻亦里)는 수리가 완전치 못한 시대에 논보다는 대부분이 밭이라 의생활의 기간이 된 삼() 농사가 성행하여 인근의 화동(和同)과 같이(麻谷) 이 곳도 역시() 삼을() 주로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들마을

 조부자가 약 200여년전에 거주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나 월곡(月谷)리로도 불린다. 남산의 달밤 경치가 워낙 아름다워 이 일대를 월곡(月谷)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각종 지리지에는 기록이 없고 다만 화동 거주의 영일 정씨 세보에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향인촌(向人村)

  2리에는 1500년경에 아산인 장희윤 공이 정착하여 유교의 바탕인 인()을 숭상하는 뜻에서 동명을 정했다 한다. 그러나 오산지(鰲山誌)에는 사인촌(舍仁村)으로 표기되어 있다. 음의 잘못된 발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명 향죽(向竹)이라고도 한다. 이는 향인촌과 아래 마을인 죽촌을 합칭하는 것이다.

  2리에는 절터가 있다. 동리남쪽 1km 지점인 남산 중턱 골짜기이다. 창건연대, 절 이름, 폐사 원인, 연도도 아는 이가 없다. 절터가 규모로 보아 그리 크지는 않게 보이나 축대가 상존하고 있다. 추측컨데 1700년대에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지 않은 사찰에 대한 철거시에 철거된 것 같다 

 

참고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 재실  후손 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