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청도읍 송읍리/ 행전 박영환
2019년 3월 4일(월), 청도군 청도읍 송읍리를 찾았다. 송읍리는 안송읍과 바깥송읍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중앙 고속 도로와 국도25호선 지나고, 청도 인터체인지를 통해 두 도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추모재와 초강재가 있다.


추모재(追慕齋)
◯관리문중: 김해김씨
◯소재지: 청도군 청도읍 송읍리 산 16
국도에서 굴다리를 지나 안송읍 뒷산 기슭에 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뱃집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건너 팔작지붕 겹처마 5칸(방3, 마루2,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대리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구체부를 구성했다. 재사 보호를 위해 전면에 유리창을 달았다. 재사 정면에 재사의 이름인 ‘追慕齋’ 현액이 있으며 마당 한켠에 청도군수를 지낸 김상순의 기념식수와 김명술의 감사비가 있다. 마당에는 자갈을 깔았고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김춘업(金春業)
중시조인 판도공 판서 김첨검(金添劒)의 8대손으로 숭록대부이다.
◯연혁: 1591년 경 김춘업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는데 1900년 경 경부선 철도의 건설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 후 본 재사가 구옥으로 노후되어 뜻있는 후손들의 모금으로 1997년 4월 20일(음 3월 14일) 개축입주 상량했다.
현재 이 마을에는 김해 김씨가 10여 호 살고 있다.





초강재(草崗齋)
◯관리문중: 창원 황씨
◯소재지: 청도군 청도읍 송읍리 106
바깥송읍 뒤산 기슭에 서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철대문을 들어서면 팔작지붕 겹처마 4칸(방2, 마루2, 중당협실형) 와가 재사가 있다.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구체부를 구성했다. 마당에 ‘초강재의 실록’ 및 ‘헌성록’이 세워져 있다. 재사 뒤에 대나무가 무성하다. 2단형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블록 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송오공(松塢公) 황도흥(黃道興)
고려조에 문하시랑 평장사 회산부원군이었으며 시호가 공희(恭僖)였던 회암(檜巖) 황석기(黃石奇)의 14세손이다. 경남 함안에서 청도읍 송읍으로 이거하여 정착, 서당을 개설하여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효우에 돈독히 하였고, 산수를 사랑하고 시서를 좋아하였다.
◯연혁: 1977년 3월 13일 상량
1976년 12월 종회시에 재실 건립을 결의하고 종인들이 뜻을 모았다.
청도읍 송읍리 와우등(臥牛嶝) 하록에 창원 황씨가 세거한 지 300 여 년이 되었으며 현재 40여호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
와우등은 이름 그대로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다. 소는 풀이 있는 골짜기를 만나야 생존한다는 이치로 와우등 기슭에 있는 창원 황씨들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재실 이름을 ‘草崗齋’라 하였다.
그 이후 몇 차례 도색 및 기와 번와 등 중수를 했다.




관리사

<추모재에서 바라본 마을>
송읍리(松邑里)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는 송읍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명칭 유래]
송읍은 솥골이 변하여 속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오랜 옛날에 소나무 숲이 있어서 솔골이라고 했다 하며, 다른 일설에는 솥을 만들던 장소라고 해서 솥골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언제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한 조선 시대에 흉년이 들면 이곳에서 솥을 걸어 놓고 죽을 끓여 구휼을 했다고 해서 솥걸이라고도 한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하고, 1905년 철도가 생기면서 철둑 안에 있다고 해서 속골이라고 했다고 하기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청도군 용산면에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송읍동이라 하여 대성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대성면이 청도면으로 개명하면서 청도면 송읍동이 되었고, 1949년 청도면이 청도읍으로 승격되면서 청도읍 송읍리가 되었다. 1989년 송읍동을 송읍리로 개칭하였다.
송읍리는 선사시대부터 주거지로 쓰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 대구∼부산 간 고속 도로 공사 시 발굴조사를 할 때에 원삼국을 비롯한 전근대의 고분군이 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조선말에 만들어진 지도에는 송읍 사창(松邑社倉)이 있었고 또한 뒷산에는 1600년대부터 남산봉수대를 옮겨와 봉수대가 없어진 시기인 1891년 전국 봉수대의 역할이 폐지될 때 까지 존재했던 곳이다. 바깥송읍 앞에는 지금도 큰 느티나무 정자가 있어 도로 확장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옛날부터 마을 앞에 큰 나무는 당산나무로 지역민의 수호신으로 모셔왔고 지금도 잘 베어내려고 하지 않아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자연 환경]
마을 뒤로는 주구산이 위치하며 앞으로는 다로천이 흐르고 있다. 안 송읍과 뒷산에 봉수대가 있었던 바깥 송읍 사이를 남북으로 길게 트여 있는 다로천을 따라 긴 경작지를 가지고 있다. 북쪽으로는 무듬실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청도천이 넓게 막아서고 있다.
[현황]
동쪽과 동남쪽은 청도읍 원정리, 서쪽은 화양읍 소라리, 남서쪽은 청도읍 고수리·화양읍 범곡리, 북쪽으로는 청도읍 무등리·화양읍 진라리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용각산 줄기 자락마다 비탈 밭을 일구어 복숭아와 감나무를 식재하고 있다. 안 송읍과 바깥 송읍 사이로 경부선 철도와 국도 25호선인 새마을로가 지나며, 두 도로는 청도 인터체인지를 통해 연결된다. 안 송읍은 경부선 철도의 둑으로 인해 고립되고 바깥 송읍은 국도 25호선이 마을 앞을 가로 막아 산 쪽으로 몰려 있다.
청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청도 경찰서가 있고 예비군 관리 대대가 오래전부터 주둔하고 있다.
한편 청도군지에는 송읍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용각지봉이 완만히 뻗어 내리다가 송읍리에 이르러 쑥이 가득한 작은 비탈이 되어 힘차게 솟아 끝등이 꿈틀거리면서 멈추어 섰다.
얕은 계곡에 자리잡은 마을입구에는 노령의 괴목들이 바위의 유래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중엽 이전까지는 군대가 주둔을 했다고 하며, 훈련장이라는 구전도 있었으나 더 이상의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인지 현재의 방위대대가 있어 군사교육장으로 되어 있다. 연고지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마을 앞의 논은 문전옥답으로 군내에서는 옥답 중 옥답이다.
1400년경 즉 임란 200여 년 전에 밀성인 박현운 공이 이주하여 송읍 마을의 기초를 가다듬었다 한다. 그러나 김해김씨, 창원황씨도 뒤따라 입주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3대 성씨가 주종을 형성하고 있다. 송곡(松谷), 솔골, 소꼴, 송읍이란 것은 아마도 취락이 형성될 당시는 송림이 울창하여 붙여진 동명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동명을 곡(谷)자 대신에 읍(邑)으로 한 것 같다.
일설에는 '솥을 굽는 골'이라고 설도 있으나(요지-窯址) 발견되지 않고 있어 발음상 솥골로 변음이 된 것이 확실하다.
참고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김해 김씨 및 창원 황씨 후손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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