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인암 박선생 추모 양정계회/ 행전 박영환
2019년 5월 11일(토), 인암 박효수 선생을 기리는 추모 양정계회가 많은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척첨당에서 열렸다.



선생의 후손들이 영접하는 가운데 회원들이 입구에서 시도를 하고 있다






회원들이 좌정하고 있다


사회: 박희범(전 청도향교 수석장의)

인사말씀: 수유사 예병순(전 청도향교 전교)

인사말씀: 주손 박철규(성균관 부관장)

재무보고: 양원주 재무

인암 박효수 선생의 문집내용과 가치
발표자: 장인진(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자문위원)

인암문집 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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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계 특강 발표문(2019.5.11.)
인암 박효수 선생의 문집 내용과 가치
장 인 진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자문위원)
양정계(養正稧)
인암 박효수 선생의 문집 내용과 가치
장인진(張仁鎭)1)
서언
인암 박효수(忍庵 朴孝秀, 1906-1996) 선생은 경상북도 청도 출신의 학자이다.
선생을 위한 학계(學契)는 양정계(養正稧)인데, 선생 생전인 1960년에 계가 창설되었으니, 해수로 60년 전의 일이다.
『양정계첩(養正稧帖)』은 추연 권용현(秋淵 權龍鉉)의 서문을 받아서 학음정(鶴陰亭)에서 작은 책자로 간행하였다. 간행 당시의 계원은 87인이었는데, 그 후 추가로 입계하여 현재 195인이 되었으니, 선생을 추숭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서 다행이다.
박효수 선생의 『인암선생문집(忍庵先生文集)』은 선생의 조카인 오왕 박희명(吾徃 朴熙明)의 헌신적인 노력과 편집으로 2002년에 선장본(線裝本)으로 간행하였다. 분량은 42권 22책이다.
문집의 규모를 살펴보면 23개의 문체에 1,550편이 되는데, 문체별로 편수는 시(詩) 528, 서(書) 261, 잡저(雜著) 24, 서(序) 99, 기(記) 99, 발(跋) 17, 명(銘) 43, 잠(箴) 2, 찬(贊) 3, 자사(字辭) 4, 상량문(上樑文) 15, 축문(祝文) 17, 제문(祭文) 70, 비병(碑銘) 35, 묘지명(墓誌銘) 4, 묘표(墓表) 20, 묘갈명(墓碣銘) 280, 가장(家狀) 4, 유사(遺事) 2, 행장(行狀) 15, 전(傳) 6, 송서(送序) 1, 가례초(家禮抄) 1 등이다.
또 1,550편의 구성 비율을 살펴보면 시(詩) 34.1%(528), 장갈문(狀碣文) 23.2%(360), 서(書) 16.8%(261), 서발(序跋) 7.5%(116), 기(記) 6.4%(99), 제문(祭文) 4.5%(70), 잠명찬(箴銘贊) 3.1%(48), 잡저·자사·송서·가례초(雜著·字辭·送序·家禮抄) 1.9%(30), 축문(祝文) 1.1%(17), 상량문(上樑文) 1.0%(15), 전(傳) 0.4%(6)의 순이다.
필자는 이번에 인암 선생의 주요 행적과 문집의 내용을 간략하게 검토해보고, 교훈이 될 만한 몇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인암 선생의 행적
박효수 선생은 밀성인(密城人)으로 자(字)는 원재(源哉), 호(號)는 인암(忍庵)이다. 두촌 박양무(杜村 朴揚茂)의 후손이고, 경양재 박태고(景陽齋 朴太古 : 우암 송시열 문인)의 8세손이다. 기호 학맥을 계승한 집안으로 아버지는 자초 박정곤(紫樵 朴珽坤)이고 어머니는 의흥 예씨(義興 芮氏)로 의재 예대주(毅齋 芮大周)의 따님이다.
1906년에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족숙인 성암 박수곤(省庵 朴守坤)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20세 때에 덕천 성기운(悳泉 成璣運, 1877-1956)의 문인이 되었다. 덕천은 당시 지조 있는 선비였다. 2)그는 일제 때 호적을 반대하여 4차례 구속된 바 있는 항일 의사(義士)였다.
이후 기호 학맥을 이은 극재 송병관(克齋 宋炳瓘)에게 수학하였다. 또 같은 고을의 복암 장화식(復庵 蔣華植, 1871-1947)을 어른으로 존경하였다. 복암은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의 문인으로 학덕이 있었다.
선생은 “일찍이 집안이 가난하여 전라도 보성(寶城)에 있던 회봉 안규용(晦峯 安圭容)의 죽곡정사(竹谷精舍)에 우거(寓居)하였는데, 낮에는 족형 박민수(朴敏秀)3)와 더불어 선현(先賢) 문집의 판각(板刻) 4)일을 하였고, 밤에는 고서(古書)를 읽었다고 하였다.”5)
선생은 평생 ‘소학(小學)을 학문하는 근본[根基]’으로 삼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깊고 문장이 뛰어나서 많은 명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청도군 이서면에 학음서사(鶴陰書社)라는 서당을 열어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61세 회갑 때 ‘효제돈목 승선유후(孝悌敦睦 承先裕後 : 효도 우애하고 일가친척 간에 화목하며, 선조를 잇고 후손을 넉넉하게 할 것)’라는 8자를 가훈(家訓)으로 삼았다.
선생은 평소 몸가짐과 법도에 맞는 행동을 하였다.
規度甚嚴 : 법도를 매우 엄격히 하고
古道 而絶流俗 : 옛 도로써 세속을 끊으며
必以 靜掃一室 : 반드시 한 방을 고요히 쓸어내고
終日端坐 :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衣帶必飾 : 옷과 띠는 반드시 매무새를 가다듬고
手不釋卷 :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6)
그리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주경 이립기본(主敬 以立其本 : 敬을 위주로 하여 그 근본을 세움)’을 강조하였다.
1996년 12월에 졸하게 되니 향년 91세이다. 장례는 이듬해 1월에 유림장(儒林葬)으로 거행되었는데, 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신문, 방송사 등에서 크게 홍보를 한 바 있다.
3. 문집의 주요 내용
문집의 42권 22책에 대하여 내용 구성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권1-3에는 시(詩) 528편인데 차운(次韻), 공음(共吟), 감음(感吟), 수운(壽韻), 만사(輓詞,) 증시(贈詩), 술회(述懷), 회고시(懷古詩)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만사(輓詞)가 214편으로 41%나 된다.
권4-12와 권13의 앞부분에는 서찰 261편이 들어 있다.
첫 권인 권4에 상서(上書), 답서(答書), 여서(與書)가 있다. 상서(上書)한 서찰 가운데 선생으로 칭한 사람은 성기운(成璣運), 송병관(宋炳瓘, 克齋), 박수곤(朴守坤, 省庵) 등 3인이다.
어른[丈]으로 칭한 사람은 송철헌(宋哲憲), 송노헌(宋魯憲), 송병기(宋秉夔), 김해수(金海洙), 안규용(安圭容), 예대주(芮大周, 外祖), 장화식(蔣華植), 이임호(李林浩), 오진영(吳震泳), 전기진(田璣鎭), 박계성(朴桂晟), 유영선(柳永善), 서주현(徐周鉉), 김달(金達, 外舅), 한동유(韓東愈), 예종목(芮鍾穆), 박순열(朴淳烈), 장병기(蔣炳璣), 남병우(南秉祐) 등이다. 주로 기호학파의 사람들이다. 이어서 정기연(鄭璣淵) 등에게 보낸 답서, 박종섭(朴鍾燮) 등에게 보낸 여서(與書)가 있다. 권4에는 총 40편이 확인된다.
권5-12에는 김정곤(金定坤)에게 보낸 답서를 비롯하여 박원규(朴元圭), 권용현(權龍鉉), 김희연(金熙淵), 이병하(李秉河), 반재현(潘在鉉), 이수락(李壽洛), 최설영(崔卨永), 변시연(邊時淵), 박순직(朴淳稷) 등에게 보낸 서찰 217편이 있다. 권13의 앞부분에는 자손에게 권계(勸戒)하는 편지이다.
권13의 뒷부분과 권14는 잡저(雜著)이다. 내용은 경서(經書)의 요점과 상례, 제례 등 중요한 일들을 정리한 「간서잡록(看書雜錄)」 상·하를 포함하여 「덕천선생어록(悳泉先生語錄)」, 「인암설(忍庵說)」, 「가규(家規)」, 「학음서사규약(鶴陰書社規約)」 등 24편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인암설(忍庵說)」은 선생이 스스로 호를 취하게 된 내력을 기록하였다. 요약해 본다.
명(名 : 諱)과 자(字)는 ‘효수 원재(孝秀 源哉)’이니, 스승 성암(省庵)이 명한 바였다. 극재 송병관(宋炳瓘)이 말하기를, “대저 효(孝)라는 것은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된다(孝者 百行之源). 7) 성암이 후학들에게 정진하도록 권한 것이 참으로 거룩하도다.”라고 하면서 ‘백당(百堂)’을 별호로 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모께 효양(孝養)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마음이 생겨서 사용하지 않았다. 갑신년(1944)에 『맹자(孟子)』의 ‘동심인성훈(動心忍性訓)’을 취하여 ‘忍庵’이라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동심인성(動心忍性)은 『맹자』, 「고자하(告子下)」에,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의 힘줄과 뼈를 힘들게 하며, 그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가 행하는 일마다 어긋나서 이루지 못하게 하나니, 이것은 ‘그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게’[動心忍性] 하여 그가 능하지 못한 바를 더 잘 할 수 있게 해주려 함이다(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是故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라는 말을 취한 것이다.
권15-16은 「도주향규계안서(道州鄕規契案序)」를 포함하여 계안, 문집, 실기, 시고, 세고 등의 서문 99편이다. 권17-19는 「숭성재중건기(崇聖齋重建記)」, 「영동향교중수기(永同鄕校重修記)」를 포함한 정자, 재실 등의 기문 99편이다.
권20에는 문집, 계첩, 족보 등의 발문(跋文) 17편이 있다. 그리고 명·잠·찬·자사(銘·箴·贊·字辭)는 52편이 들어 있는데, 몇 편을 살펴본다.
「송담명(松潭銘)」은 공자가 말씀한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송백이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의 뜻을 취하였다.
「오왕명(吾徃銘)」은 『논어』, 「자한(子罕)」 편에서 “비유하자면, 산을 만들 적에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못 이루고서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과 같으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해서 점점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내가 해 나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徃也).”라는 말을 취한 것이다.
「낙와명(樂窩銘)」은 안자(顔子)의 ‘안빈낙도(安貧樂道)’8)의 뜻을 취한 것이다.
자사(字辭)는 박순옥(朴淳玉 : 敬執), 이정욱(李政煜 : 孝汝), 윤상목(尹相木 : 仁汝), 조해식(曺海植 : 學哉) 등에게 준 글인데 이름이 헛되지 않게 생활하기를 권면할 글이다.
권21에는 ; 「차산서원상량문(車山書院上樑文)」 등 상량문 15편과 「계동사봉안문(啓東祠奉安文)」, 「백원서원복설봉안문(百源書院復設奉安文)」 등 축문 17편이다.
권22와 권23의 앞부분은 제문인데 덕천선생 제문, 복암(장화식) 제문, 술당(述堂 : 李匡基) 제문, 자은(紫隱 : 金容洙) 제문 등 70편이 들어있다.
권23의 뒷부분과 권24는 「신라일성왕릉비(新羅逸聖王陵碑)」, 최경산(崔耕山)의 「충효각비(忠孝閣碑)」를 포함하여 묘정비(廟庭碑), 제단비(祭壇碑), 유적비(遺蹟碑) 등 비문 35편이다.
권25는 묘지명(墓誌銘) 4편과 묘표(墓表) 20편이다. 권26으로부터 권36의 앞부분까지는 묘갈명(墓碣銘)인데 「일봉예공[예시구]묘갈명(一峯芮公[芮時龜]墓碣銘)」을 포함하여 280편이다. 그 중에는 율암(栗庵 : 芮周伯), 야우(野迂 : 徐周鉉), 추연(秋淵 : 權龍鉉) 등의 묘갈명이 있다. 권36의 뒷부분에는 가장(家狀) 4편이 있다. 이러한 장갈문(狀碣文)은 주로 영남지역 사람들이 청탁한 것이다.
권37은 선생 선대의 유사(遺事) 2편, 선대의 행장(行狀) 및 지인들이 청한 행장 15편이다. 권38에는 전(傳) 6편, 「송 질자[박희명] 출군서(送姪子[朴熙明]出軍序)」 1편, 부편(附篇)된 선생의 가장(家狀), 묘갈명 등이 있다.
권39-40에는 「가례증해간초록(家禮增解簡抄錄)」과 발문(跋文) 2편(朴熙明, 張仁鎭)이 있고, 권41-42는 부록(附錄)으로 만(輓) 115편, 제문 52편이 실려 있다.
4. 자손 훈계와 후학 권면
선생은 늘그막에 그 형제 자질들과 함께 도산서원에 알묘하고 시를 남겼다. 「알 도산서원(謁陶山書院)」 시를 본다. (1982년, 77세)
兄弟幷行子姪携 : 형제와 자질(子姪)을 대동하고
陶山院下走臨同 : 도산서원으로 빠르게 갔네.
豆籩百世齊明地 : 제향 받들고 백대토록 정성을 다하며
江漢千秋曝濯中 : 높은 도덕 천추토록 추모한 곳이었네.9)
滿室圖書留手澤 : 광명실 가득한 도서는 수택(手澤 : 선생 손때) 남아 있고
一庭和氣帶春風 : 뜨락의 온화한 기운은 춘풍을 띠고 있네.
景慕平生今謁廟 : 평생토록 경모하여 이제 알묘(謁廟)를 하며
微軀敢曰盡丹衷 : 미천한 몸으로 감히 단심을 다하였네.
이처럼 인암 선생은 평생토록 숭모해온 퇴계 선생을 알묘하여 대동한 형제 자질들에게 퇴계 선생의 경(敬) 정신을 본받도록 체험 교육을 한 것이라고 하겠다.
자손에게 훈계한 글 1편을 요약해본다.
의절(儀節)은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의하고, 서책을 소중히 하며, 상례는 3년상으로 하고 제례는 엄숙히 하며, 묘제는 10월에 행하고 산신제는 3헌(獻)을 하도록 하였다. 자제가 부모를 뵙게 되면 반드시 절을 하며, 자제가 형편에 구애되어 신학(新學)을 하더라도 때때로 효제충신(孝悌忠信), 예의염치(禮義廉恥) 등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교육에 있어서 맏아들은 신학(新學) 졸업 후에 취직하지 말고 집에 있으면서 옛 책을 읽고 경전(耕田)을 겸하면서 가업(家業)을 지키게 하였고, 중자(衆子)는 취직하더라도 5-60세 이후에는 반드시 귀가하여 서·농(書·農)을 겸하게 하였다. 여자는 신학문을 하는 것이 부당하지만 세속으로 인해 불가피하다면 중학교 졸업 후에 집에 있으면서 여행(女行 : 여자의 행실)을 배우라고 하였다. 부자, 형제, 부부 간에는 순후하고 경근함을 갖도록 힘쓰되 만약 의리를 범하고 강상(綱常)을 무너뜨리거나 사당(邪黨 : 예수, 부처, 잡교)에 들어가면 반드시 종회(宗會)로 벌을 주는데, 만약 고쳐지지 않고 2차, 3차 벌을 주어도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치지 않으면 사당(祠堂)에 고한 후에 족보에서 이름을 지워서 친족 관계를 끊도록[割譜] 하였다. 남들과 사귐에 있어서는 언어를 신중히 하여 화(禍)를 일으키는 근본에 이르지 말도록 하였고, 무당[巫人]의 말은 믿을 수가 없으니 마땅히 정의로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10)
학문을 이루는데 어려운 장애물로는 객기(客氣 : 血氣가 넘쳐서 나타나는 용기), 사의(私意 : 사사로운 개인의 의견), 속습(俗習 : 속된 습속) 등 3가지를 지적하였다.11)
「잡저(雜著)」를 보면 대개 제자들에게 권면한 글인데, 몇 편에서 그 요점을 살펴본다.
나이가 들어서 뒤늦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순경(荀卿)12)과 주운(朱雲)13)이 만학(晩學)을 했음에도 큰 유학자가 된 사례를 들고, 비록 뒤늦게 배우지만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의 사자서(四子書)를 열심히 읽으면서 “사물을 궁구하고 실천[窮格踐履]하는 데 힘쓰라.”고 하였다.14)
「면학설(勉學說)」에서는 “어진이[賢人]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라는 『논어』의 내용을 들어서 배움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또 송나라 주희(朱熹)가 『논어』를 평생토록 읽은 것은 대개 ‘효제충신(孝悌忠信 :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공손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다.)’을 주장한 것이므로, 그대는 이 책을 열심히 읽어서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라고 하였다.15)
「인설(仁說)」을 보면 인도(仁道)는 지극히 큰 것이므로 배우는 사람들이 진실로 인(仁)을 구할 요체[求仁之要]는 본심을 잃지 않는데 있다고 전제하고, 학문의 도(道)는 다른 데 있지 않고 그 방심(放心)을 구할 뿐이니, 부디 힘쓰고 힘쓰라고 하였다.
끝으로 조카(朴熙明)에게 보인 것으로, 조선(朝鮮)에서 유교가 부진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 글을 살펴본다.
“유교의 진리는 ‘천명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의 따름을 도(道)라 하고, 도(道)의 닦음을 교(敎)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16)’라는 데 있다. 도를 닦고자 하는데도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자가 없으면 행하지 못하는 까닭이므로, 그 성(性)을 다할 수 있게 하늘이 반드시 군주[君師]를 위해 명을 내는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면 임금은 정·교(政·敎)의 겸권(兼權)이 있는데, 이는 곧 덕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처하면서 인도하고 가르쳐서 백성으로 하여금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시대와 같이 교화되게 하는 것이다. 정·교(政·敎)의 겸권(兼權)이 있는 것이 중엽 이래에는 패왕(霸王)이 전제(專制)를 하여 말끝마다 반드시 정·교(政·敎)로 자처하며 도덕을 숭상하고 절의를 주창하는 등의 일로써 농간을 부려서 몸과 자리를 보호하는 술책이 되었다. 이에 유교가 도리어 정치의 이용물이 되었을 뿐이다.
우리나라 또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이로써 그것을 행하였다. 이른 바 유교인(儒敎人)이라 하는 자는 유교의 진리를 믿지 않고 한갓 ‘임금의 도덕 숭상과 절의 주창’을 문벌(門閥)의 과장(誇張)의 자료로 삼으며, 성인(聖人)의 책을 읽는 것이 과거(科擧)를 거쳐 발신(拔身)을 소망하는데 있었다. 이른 바 유가의 류는 한갓 정부를 믿고서 거짓으로 유교인이라 일컬었으니, 급기야 정부가 도괴(倒壞)되니 유교 또한 정부와 더불어서 함께 도괴된 것이다. 비유를 하면 ‘노인이 벽에 의지하여 앉았다가 벽이 무너지니 사람도 함께 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망하던 과거제도가 이미 폐지되었으니, 이른 바 유자(儒者)라고 이름만 빌린[假名] 사람들의 독서 소리 또한 귀를 씻어도 들리지 않는다.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에 좀벌레가 갉아먹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儒敎]가 진작되기를 바라겠는가. 500년래에 독신(篤信)한 군자가 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라가 망한 후에는 유교의 닦음도 따라서 망한 것이다. 믿는 바가 과거(科擧)에 있었지, 교리(敎理)에 있지 않았던 까닭이다.”17)
이 글을 보면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윤리 도덕성의 회복과 실천 유학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5. 결어
인암 선생의 문집은 42권 22책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로서 가치가 있다. 이번에 필자는 권별로 편성되어 있는 주요 현황과 일부의 내용을 살펴보는데 그쳤다.
선생이 훈계 권면한 글의 경우는 시대 변화로 인하여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취사선택할 점이 있을 것이니, 취하여 본받아야 할 것이다.
선생은 기본 서적으로 논어를 강조하기도, 또는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사자서(四子書) 읽기를 권장하였고,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궁리실천(窮理實踐)을 제시하였으며,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다.
선생의 글 중에 만사(輓詞)가 214편이다. 만사는 망인이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려 좋은 곳으로 갈 것을 인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생은 평소 당색 불문하고 교유하던 사람들을 예로써 대하면서 품성을 파악해 두었기에, 사후에도 그들을 칭송하며 명복을 빈 것이니, 선생의 애인정신(愛人精神)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지인, 후학들이 지어 올린 만사 115편, 제문 52편 또한 의미가 있는 표상이니, 사표(師表)가 된다고 할 것이다.
우리 양정계(養正稧) 계원들은 선생을 추모하고 계원 간에 정의를 나누면서 특히 『주역』의 「몽괘(蒙卦) 단(彖)」에 “어렸을 때에 바르게 교양됨이 성인의 공부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는 말을 잘 새겨서 이 정신을 자손들에게 잘 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양정계 계원의 현황을 살펴보니 195인이었다. 성씨와 본관(本貫)은 29개 성씨에 41개 본관으로 파악되었다.
「부록」 양정계원 성씨 본관 현황 1960년 창계(創稧)
성씨 | 본관 | 인원 | 비고 | 성씨 | 본관 | 인원 | 비고 |
姜 | 晉州 | 1 |
| 李 | 固城 (鐵城) | 13 |
|
郭 | 玄風 (苞山) | 5 |
|
| 驪州 | 2 |
|
權 | 安東 | 1 |
|
| 月城 | 5 |
|
金 | 慶州 | 2 |
|
| 載寧 | 3 |
|
| 金海 | 6 |
|
| 全義 | 1 |
|
| 義城 | 2 |
|
| 全州 | 2 |
|
南 | 宜寧 | 3 |
| 林 | 平澤 | 3 |
|
閔 | 驪興 | 1 |
| 蔣 | 牙山 | 5 |
|
朴 | 密陽 (密城) | 87 |
| 張 | 昌寧 (夏山) | 2 |
|
潘 | 岐城 | 3 |
| 全 | 玉山 | 1 |
|
卞 | 密陽 | 2 |
|
| 玉川 | 1 |
|
徐 | 達城 | 4 |
| 鄭 | 東萊 | 1 |
|
石 | 忠州 | 1 |
|
| 淸州 | 1 |
|
成 | 昌寧 | 3 |
|
| 草溪 | 3 |
|
梁 | 南原 | 2 |
|
| (미상) | 1 | 정창석 |
楊 | 昌寧 | 2 |
| 曺 | 昌寧 | 2 |
|
廉 | 坡州 | 1 |
| 車 | 延安 | 1 |
|
芮 | 義興 | 7 |
| 崔 | 慶州 | 6 |
|
劉 | 江陵 | 1 |
| 許 | 金海 | 2 |
|
尹 | 坡平 | 4 |
| 玄 | 延州 | 1 |
|
李 | 京山 | 1 |
| 29 姓氏 | 41本貫 | 195人 | 고인(故人) 71인 |
<주석>
1)양정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자문위원, 문학박사
2)덕천 성기운은 12세에 회산 반동락(晦山 潘東雒 : 晩求 李種杞의 문인)에게 배우다가 24세 때 간재 전우(艮齋 田愚)의 문인이 되었다. 덕천은 스승 회산이 졸하자 회산의 행장(行狀)을 지은 바 있다.
3)어릴 때 스승으로 모셨던 성암 박수곤(省庵 朴守坤)의 아들이다.
4)죽곡정사에서 판각한 책으로 『주문지결(朱門旨訣)』, 『동몽수지(童蒙須知)』, 『향례합편(鄕禮合編)』, 『이자학칙(李子學則)』 등을 살펴볼 수 있다.
5)박희명 찬, 「인암선생 가장(忍庵先生 家狀)」
6)위의 「인암선생 가장(忍庵先生 家狀)」
7)『어제백행원(御製百行源)』에 “효(孝)라는 것은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되는데, 오륜 가운데서 효를 우선으로 하였다(孝者 百行之源 五倫之中 孝爲先).” 라는 말이 있다.
8)구차(苟且)하고 궁색(窮塞)하면서도 그것에 구속(拘束)되지 않고 평안(平安)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9)공자의 인품은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의 물에 깨끗이 세탁해서 따가운 가을 햇볕에 말리면 그보다 더 하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는 『맹자』의 「등문공상(滕文公上)」을 인용한 것임
10)「가규(家規)」
11)「학음서사 규약(鶴陰書社 規約)」
12)순자(荀子)를 말하며, 50세에 시학(始學)을 하였다고 함
13)주운(朱雲)은 漢나라 成帝 때 忠臣으로 40세에 시학(始學)을 하였다고 함
14)「증박효현윤상목이군(贈朴涍鉉尹相木二君)」
15)「증서병국(贈徐秉局)」
16)『중용장구』의 수장(首章)에 나오는 말이다.
17)「조선유교부진원인설,시질자사강희명(朝鮮儒敎不振源因說,示姪子士强熙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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