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읍 부야리 금광굴/ 행전 박영환
2019년 5월 8일(수) , 우리문화바로알기 회원들이 청도군 청도읍 부야리 쇠실마을, 금광굴을 찾았다.
다음은 김태호 선생(청도고에서 퇴직, 향토사학자)이 '우리문화바로알기(2019, 청도문화원)'에 소개한 내용을 옮긴 것이다.

<폐광가는 길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폐광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산중턱에 폐광이 자리잡고 있다>
유적지 관련 자료
1) 부야리
부야리는 곰티재 아래의 쇠실(所也)과 부곡(釜谷)을 합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부야리에는 쇠실, 가마실, 연곡, 날끝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2) 쇠실(所也洞, 所也谷洞)
능동과 삼매등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부터 마을 뒷산에 철 광맥이 있었기 때문에 '쇠실'로 부르고, ‘금곡(金谷)’으로 쓴다. 지금도 마을 뒤산에는 쇠를 채굴하기 위해 시굴했던 굴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1970년대 쇠를 채굴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하였으나 채산성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고 한다.
쇠실에는 근·현대까지 옹기를 굽던 옹기 가마가 있었지만 1950∼1960년대에 양은그릇이 나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어 지금은 그 터전도 찾기 힘든다.
'쇠실(所也)'은 옛날에 쇠를 생산한 소(所)가 있었기 때문에 붙인 마을 이름이다.
3) 가마실(釜谷)
시루봉을 등지고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골짜기 사이를 흐르는 개천을 따라 취락한 마을이다. 옛날에 토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가마실'로 부르고 한자로 ‘부곡(釜谷)’이라 했다. 가마실에는 고려 때까지 있었던 토기 생산지인 가마가 있었고, 지금도 그 부근에서는 토기 파편과 슬러지가 출토되고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군의 동쪽 북곡리(北谷里)에 있는 자기소에서 하품의 자기를 생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4) 연곡(鷰谷), 제부동(諸富洞), 도동(棹洞, 쥐비실), 지비실
이 마을은 옛날에 수리(水利)가 안정되지 못하여 밭에 지비(조, 黍)를 많이 심은 곳이기 때문에 '지비실' 로 불렀다고 전한다. 따라서 '지비'에 해당하는 한자로 표기하면서 음이 비슷한 한자를 빌어 '제부동(諸富洞)', '제비실(鷰谷)', '도동(키-치이실, 棹洞)'으로 표기했다.
마을 뒷산인 대호암바위에서 뻗어 나온 여러 등성이 사이의 골짜기 안쪽에 취락한 마을이란 뜻에서 '안마실', '안마을'로 불렀다 한다. 또한 마을 앞산의 모양이 제비와 비슷하기 때문에 '제비실'로 마을 이름을 바꾸고 '연곡(燕谷)'으로 표기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5) 날끝(낫끝, 日末)
국도 20호선(청려로)에서 운산리로 들어가는 길과 가마실로 들어가는 길이 나눠지는 길목을 중심으로 국도변을 따라 취락한 마을이다. 마을이 산의 끝자락에 자리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옛날에는 산을 ‘달’로 부르고, 음을 취하여 한자로 ‘달(達)’, 혹은 ‘월(月)’로 표기하였다. 마을 이름은 산의 끝자락에 있는 마을의 위치를 표기하여 ‘달끝’으로 불렀으나 뒤에 음운이 변하여 ‘날끝, 낮끝, 낫끝’으로 불렀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낫끝'을 '일말(日末-날끝)'로 표기하고 있다.
6) 범재비, 범잽이
부야리(釜也里)와 운산리(雲山里)의 경계에 있는 마을로 부야지와 국도 20호선(청려로) 도로 바로 아래쪽에 취락하고 있다. 지난날 이 곳에서 범을 발견한 포수가 총을 쐈으나 범은 맞지 않고 포수에게 덤벼드는 것을 포수가 앉은 채로 범을 잡았다고 붙인 마을 이름으로 전해 온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호계(虎溪)로 기록되어 있다. 호계(虎溪)과 범재비의 상관관계는 알 수 없다.

<땀을 흘리며 올라가고 있다>

8. 청도 관련 부곡
1) 古買部曲
李佑成은 김정호가 大東輿地圖 청도군 지도에 청도군 동쪽 경주와의 접경지에 「密陽古買部曲」이라고 표시한 지역을 중심으로 古買部曲을 연구하였다. 이 지역은 청도 땅에 있는 上東京과 下東京, 경주 땅에 있는 每日谷을 합쳐서 옛날에는 東京里라고 했으며, 東國輿地勝覽에 「청도군 東村과 경주 西村에 越入해 있다.」라고 한 古買部曲은 東京里 일원이라고 보았다. 慶尙道地理志에서 豆也保部曲의 東村에 속한 한 취락이었던 古旀里가 東國輿地勝覽에서는 古買部曲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慶尙道地理志가 작성된 1425년과 東國輿地勝覽이 완성된 1530년 사이에 古旀里를 중심으로 어느 시기에 다른 몇 개의 취락과 합쳐져서 하나의 部曲인 古買部曲으로 독립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部曲이 해체되는 추세 속에 古買部曲이 面里制로 바뀌면서 古旀里로 환원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古買部曲은 조선 초기에 잠깐 만들어졌다가 해체된 곳이라고 한다. 買部曲이 해체된 뒤에는 古旀面으로 밀양에 직속되었다고 한다.
密州誌의 豊角縣 古㫆面 조에는 「東國輿地勝覽에서 말하는 古買部曲은 청도군의 동북쪽 10여리에 넘어 들어가 있으며, 本府 密陽郡에서 80리가 떨어져 있다. 杜谷은 일명 伊士也로 경산 남촌과 경계를 이룬다. 自勿也는 청도군의 동북쪽 50리에 넘어 들어가 있으며, 本府인 밀양부에서 90리가 떨어졌다. 阿乙邑은 경주 서촌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으며, 본부인 밀양부에서 120리가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古買部曲은 杜谷里, 自勿也, 阿乙邑을 중심으로 있었던 부곡이다. 위 기록에서 杜谷里가 곧 伊士也라는 密州誌의 기록은 잘못되었다. 杜谷은 현재 매전면 두곡리며, 伊士也는 伊士里로 불리는 매전면 金川里이다. 自勿也는 四勿里로 불리는 금천면 四田里 일대이며, 阿乙邑은 운문면 芝村里 일대를 말한다. 위에 열거된 지역은 현재 청도군의 매전면과 금천면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따라서 密州誌에 의하면 古買部曲이 古旀面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古買部曲은 豆也保部曲의 越境處로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慶尙道地理志에는 豆也保部曲에 속한 越境處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豆也保部曲東村上谷里人戶四田地十六結, 郡西向仁村越入右部曲, 東村古㫆里人戶九田地四十五結, 郡東村井亦里越入右部曲, 東村露赤自勿亦知村等三里人戶二十六田地一百二十七結, 東村北谷里巾峴里等處片片越入
「豆也保部曲의 동쪽의 上谷里는 人戶 4, 田地 16결이며 청도군의 서쪽에 있는 向仁村은 豆也保部曲의 越入地다. 동쪽의 古旀里는 人戶 9, 田地 45결이며, 청도군의 동쪽에 있는 井亦里는 豆也保部曲의 越入地다. 동쪽의 露赤里, 自勿亦, 知村 등 3개 마을은 人戶 26, 田地 127결이다. 청도군의 동쪽의 北谷里, 巾峴里 등은 越入地다.」
이 기록을 보면 각 마을의 위치를 豆也保部曲과 淸道郡(동헌)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豆也保部曲을 중심으로 기록한 부분은 上谷里, 古旀里, 露赤, 自勿亦, 知村, 北谷里, 巾峴里로 각각 人戶와 田地를 기록하고 있다. 청도군을 중심으로 기록한 부분은 向仁村, 井亦里가 있다. 각 마을의 위치를 豆也保部曲이나 淸道郡 어느 한 곳을 기점으로 하여 기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누어 기록한 까닭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淸道郡을 중심으로 기록한 向仁村과 井亦里는 豆也保部曲에 越入되어 있다고 하며, 豆也保部曲을 중심으로 기록한 부분에는 越入이란 말이 없으며, 끝에 전체적으로 설명한 부분에 片片越入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곧 向仁村과 井亦里는 豆也保部曲에 속한 촌락이고 나머지는 豆也保部曲과는 다른 지역을 나타내고 있으며, 古買部曲이라고 추정된다.
위의 각 마을은 기록된 단위별로 하나의 작은 권역을 이루고 있다. 마을 뒤에 기록된 人戶나 田地가 이를 확인해 준다. 人戶나 田地의 기록이 없는 向仁村, 井亦里, 北谷里, 巾峴里는 지역 자체가 아주 작았기 때문에 人戶나 田地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上谷里의 경우 4가구(人戶)가 경작하는 田地가 16結이라면 가구당 평균 4結을 경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토지 1結은 3등척 기준으로 고려시대에는 2,879평, 조선 시대에는 약 3931평에서 4,200여평이 된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기준으로 기록을 했다면 가구당 평균 약 12,000평 정도 田地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있어서 1가구가 12,000평의 田地를 경작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위 기록에 나타난 人戶는 촌락 소속의 人戶를 기록했다기보다는 신분적으로 평민 이상의 가구를 기록한 것으로, 일반 부곡민들은 위 기록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 기록에 나타난 지역을 자세히 검토하고자 한다.
豆也保部曲의 동쪽에 있는 촌락인 上谷里는 오늘날 角南面 華里로 추정된다. 華里는 淸道文獻考에 의하면 九郞과 馬谷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上谷의 「上」은 「머리, 마리, 위」의 뜻 가지고 있으며, 馬谷의 「馬」는 「말」로 연음으로 나타내면 「마리」이다. 따라서 「上谷」이 「馬谷」으로 바뀌었으며, 馬谷은 麻谷, 磨谷으로 표시하기도 하였다.
向仁村은 각남면 七星里이며, 向仁村을 「舍人村」, 「샌촌」으로 부르기도 한다. 「上谷里」와 豆也保部曲에 속한「向仁村」이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에 있는 촌」이란 의미로 「舍人村」, 「샌촌」으로 불렀다고 본다.
古旀里는 이서면 興善里이다. 古㫆里의 위치에 대해 密州地理人物文獻誌는 古稱面(古旀面의 誤記) 조에 「古旀里는 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하는 古買部曲으로 청도군의 동북쪽 10여리에 있다」고 한다. 密陽郡誌에는 「古旀面은 청도군의 동북쪽 10여리에 있다」고 한다. 또한 輿地圖書 청도군의 堤堰 조에는 古㫆堤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골미못」이라고 한다. 古旀里는 청도 사람들이 「골미」로 부르는 이서면 興善里로 마을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는 古眠里라고 불렀다. 古買部曲과 古旀里의 관계를 音韻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古買部曲의 「古買」와 古旀里의 「古㫆」는 서로 발음이 비슷하며, 「고미」로 읽을 수 있다. 청도지역에서는 「古旀里」를 「고미리」라 한다. 「고미」는 「구미, 굼, 곰」을 표기한 것으로 「구미」는 물이 굽어드는 곳, 구석진 곳을 의미하며, 「굼, 곰」은 구덩이, 오목한 곳, 구석진 곳을 뜻한다. 따라서 「古買部曲」은 구석진 곳에 해당하는 청도군 「변두리에 있었던 부곡」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古買部曲」이 「古旀面」으로 바뀌었으며, 「古旀面」을 청도 사람들은 「고미면」, 「골미면」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古旀里는 「골미」로 부르는 이서면 흥선리이며, 이곳에 古買部曲의 本府를 두었다. 그 후 古買部曲이 古旀面으로 바뀌면서 古旀面의 중심지는 매전면 관하리로 옮겨졌으며, 「古旀里」는 청도군 次北面에 속했다가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伊西面 古眠里가 되었다. 이곳이 부곡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듯 흥선리 주변에는 토기를 만든 요지가 남아있으며, 철담이라 부르는 마을도 있다.
井亦里는 청도읍 雲山리로 추정된다. 먼저 마을 이름이 井亦里인 까닭은 이미 井村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亦(다시 역)을 사용하여 마을 이름을 표기하였다. 「井」은 우물을 뜻하며 우물의 옛 발음은 「움물, 움믈」이다. 따라서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미로 「움촌」으로 불렀으며 井村으로 표기하였을 것이다. 뒤에 가서 「움촌」을 발음하기 편하게 「운촌」으로 부르고, 음을 취하여 「雲山」으로 동명을 정했다고 추정된다. 실재로 마을이 위치한 곳도 현재 청도읍에서 가장 깊숙한 용각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古旀面의 일부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雲山 1리는「밀양 구미」, 雲山 2리는「청도양 구미」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에서 매전면 덕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곰태, 곰티」는 「古旀面에 있는 고개」란 뜻의 「고미태」를 줄여서 부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露赤里는 매전면 관하리, 금천리 일대로 추정된다. 露赤의 「露」는 「이살(속언), 이슬」, 「赤」은 「붉다, 불, 벌」로 뜻을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露赤」은 「이살벌, 이살, 이사리」로 읽을 수 있다. 주민들은 매전면 금천리를 「이살, 이사리, 伊士也」로 부르고 있으며, 이는 금천리가 곧 「露赤」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관하리 일대에는 고려 고분이 많이 남아있으며, 「옛 관아가 있었다」 하여 「관하실」로 부르며, 행정구역 명칭은 관하리이다. 옛날에 관아가 있었다는 것은 古旀面의 관아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自勿亦은 금천면 四田里로 추정된다. 「自勿亦」을 密州地理人物文獻誌에는 「自勿也」로 바뀌어 있다. 「自勿亦」의 「自」는 옛말의 「위, 산, 산마루」를 나타내는 「잣」에서 ㅅ이 탈락한 「자」이며, 「勿 - 말 물」에서 뜻을 나타내는 「말」을 취하여「自勿亦」은 「산말, 산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마을이 위치한 곳은 골이 좁아 주로 산비탈을 의지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붙인 이름으로 생각된다. 「自勿亦」은 「四勿里」로 바뀌었다가 「藍田」마을과 합쳐져서 「四田里」가 되었다.
知村은 현재 운문면 芝村里이다. 密州誌에는 「阿乙邑」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阿乙」은 우리말의 「알읍, 알다 - 知」에 해당한다. 따라서 「阿乙邑」은 「알골 - 아래에 있는 골, 마을」로 이해할 수 있으며, 「知村」으로 표기하였다. 뒤에 좋은 글자를 써서 「芝村」이라 했다. 한편 知村을 「上東京」, 주변의 공암리 일대를 「下東京」으로 표기 한 것은 이 지역이 청도 중심지를 기준으로 동쪽 경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東境」으로 표기했으나 뒤에 「東京」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北谷里는 매전면 杜谷里로 추정된다. 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北谷部曲은 청도군에 있었던 部曲으로 古買部曲에 속했던 北谷里와는 서로 다르다. 北谷里의 「北」은 뜻에 따라 「뒤」로 읽으면 「北谷里」는 「뒤마을」이 된다. 「뒤마을」의 「뒤」에서 「ㅣ」가 탈락하면 「두」가 된다. 따라서 「杜谷里」가 곧 「北谷里」임을 알 수 있다. 마을의 위치가 청도에서는 「곰티」를 넘어 용각산 깊숙한 자락에 자리하기 때문에 「뒤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北谷里」가 되었다고 추정된다. 「杜谷里」는 마을 이름과 달리 골짜기 입구에 위치하여 谷內가 상대적으로 넓고 마을 이름처럼 꽉 막혀있는 곳은 아니다. 또한 杜谷里 입구를 삼거리라고 부르며, 교통이 편리한 곳이기도 하다. 密州誌에는 杜谷里를 「露赤, 伊士也」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露赤, 혹은 伊士也는 매전면 金川里로 杜谷里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巾峴里는 매전면 松元里로 추정된다. 청도읍 원정리에서 매전면 송원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巾峴」, 「건티」로 부르며, 그 뜻은 「큰고개」이다. 건티 고개 마루에 있었던 마을은 「웃건티」라 부르며, 고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아랫건티, 송원」이라 부른다. 두 마을의 중간에 있는 마을은 「중마」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주로 「점마」로 부른다. 이곳에 「店」을 만들고 각종 옹기나 토기를 생산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古買部曲과 豆也保部曲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古買部曲의 기록과 豆也保部曲의 越境地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다. 古買部曲에 관한 밀주지의 기록이 훨씬 후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한다면 古買部曲이 이미 古旀面이 된 후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慶尙道地理志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向仁村과 井亦里는 豆也保部曲에 속했으며, 上谷里, 古㫆里, 露赤, 自勿亦, 知村, 北谷里, 巾峴里 등은 古買部曲에 속한 것으로 추론된다. 豆也保部曲이 해체되면서 부곡으로 있었던 지역이 정리되면서 豆也保部曲에 속했던 向仁村과 古買部曲에 속했던 上谷里, 巾峴里는 청도군에 속하고 나머지 지역인 古㫆里, 井亦里, 北谷里, 露赤, 自勿亦, 知村은 古買部曲에 속하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豆也保部曲과 古買部曲은 처음부터 다르게 형성되었으며, 어느 시기에 古買部曲을 豆也保部曲이 관할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豆也保部曲이 먼저 해체되어 풍각현에 속하게 되면서 부곡이었던 지역이 재편성되어 古買部曲만 남았다고 추론된다. 豆也保部曲과 古買部曲에 관한 각종 지리지의 기록은 豆也保部曲이 해체된 이후의 기록으로 볼 수 있으며 그 과정에 기록상 혼란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 部曲이 해체되어 面里制가 시행되면서 古買部曲은 古旀面이 되어 밀양에 속한 越境地로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古旀面은 해체되어 청도군의 雲門面, 錦川面, 梅田面에 나뉘어 속하게 되었다.




<김태호 선생이 굴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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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北谷部谷
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 大東地志, 청도군읍지(1879)에 의하면 北谷部曲은 군 동쪽 25리에 있었다고 한다. 청도군의 동쪽에 있었던 北谷部曲은 오늘날 청도읍 釜也里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北谷部曲을 설치한 목적은 알 수 없다.
北谷部曲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釜也里는 일제 때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所也里와 가마실로 부르는 釜谷里를 합쳐서 생긴 행정 구역 명칭이다. 특히 부야 1리인 所也는 일찍부터 각종 철기를 생산한 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주변 산지에서는 최근까지 철광을 채굴하였으며, 옹기를 만든 옹기굴이 있었던 곳이다. 부야 2리에 해당하는 가마실은 주변에서 토기나 옹기를 만든 가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慶尙道續撰地理志에 군의 동쪽 北谷里에 있는 陶器所에서는 下品의 陶器를 생산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에서 陶器를 만들었다고 추정된다.
北谷部曲은 新增東國輿地勝覽이 편찬될 당시인 16세기경에 부곡이 해체되는 일반적 추세에 따라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면리제에 따라 청도군 下南面, 혹은 內終道面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청도군 大城面에 속했다. 광복 이후 청도군 청도읍 釜也里가 되었다.
3) 所
所는 여러 가지 공산품을 생산하던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이다. 지명에 직접 所로 기록된 곳은 청도읍 부야리 쇠실 마을인 所也마을이 있다. 所也마을에서는 주뱐에서 생산된 철광을 이요앟여 철기를 만들었거나 옹기와 같은 陶器를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까지 이 마을에서는 옹기가 제작되었으며, 철광을 채굴한 광산의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청도군에서는 삼한시대 이래로 여러 지역에서 토기를 생산했던 요지가 여러 곳에 많이 남아있다. 기록으로는 慶尙道地理志(1448) 청도군 土産 貢物 조에 陶器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도 陶器의 생산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陶器所나 磁器所가 있었던 곳은 대부분 가마실로 부르며, 도자기를 만들던 낮은 신분의 匠人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역을 부담하였다. 世宗實錄地理志(1454)의 土産 조에는 군의 북쪽 대곡리에 陶器所가 한 곳 있는데 下品을 생산했다고 한다. 慶尙道續撰地理志에는 군의 북쪽 大谷里의 陶器所에서는 下品의 陶器를 생산했으며, 군의 동쪽 北谷里의 磁器所에서는 下品의 磁器를 생산했다고 한다. 군의 동쪽 北谷里의 磁器所는 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 大東地志, 청도군읍지(1879)에 기록된 北谷部曲으로 추정된다. 陶器所가 있었던 大谷里는 현재 청도군 伊西面 大谷里이다.
陶器所가 있었던 大谷里의 上大谷에서 최근 도자기를 구운 요지를 발견했다. 이 곳에서 구운 도자기는 품질이 下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官需品보다는 일반 백성들이 주로 사용한 생활 도자기를 만든 곳으로 추정된다. 大谷里 陶器所는 16세기경 부곡이 해체되는 시기에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면리제에 따라 청도군 次北面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과 함께 청도군 伊西面 大谷里가 되었다.


마치 금맥을 발견한 기분으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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