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난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2018년 2월 20일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를 찾았다.
구만산 아래 자리잡은 유서깊은 마을인 장연리는 통일신라대의 절터인 장연사지가 있는가 하면 근래에는 자연생태공원 및 학생 야영장이 들어선 곳으로 예스러움과 새로움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또 이 마을은 청도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2017년 2월 15일에 '청도군 최초 매전면 장연리 기미년 3.11 대한독립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공동 위원장, 이순주, 이원희) 창립총회'를 열고 건립비를 추진하고 있다.
시위를 주동한 인물은 이 마을에 살던 김집이, 노이만, 이선이, 이작지, 이용술, 최두천, 이학천, 배돌이 님이다. (자세한 내용은 뒷 부분에 정리하였다)
이 마을은 장수골, 계땅, 길명, 고방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사원재 편입니다.


사원재(思遠齋)
◯관리문중: 고성 이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169번지
국도 58호선을 따라가다가 온막리와 호화리를 지나 장연 1리 마을로 진입하면 장연생태공원 뒤편 장수골 마을 경로당 옆에 동북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물구조: 와가 3칸(방1, 고방1, 출입문)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팔작와가지붕 5칸 전퇴(온돌방 3칸, 대청 2칸,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등 세살문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대청 뒤에는 판문을 설치했고 방과 대청 사이에는 사분합들문을 달아 필요시에는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툇마루를 두어 마루와 연결시켰다. 대청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思遠齋’가 현액되어 걸려 있으며 그 옆에 ‘九淵亭’ 편액이 있으며 김재화가 쓴 ‘구연정기’가 있다. 재사 주변에는 토석담장을 둘렀다.
마당에 당간지주 및 확 등이 있는데 이는 근처 절터에서 옮겨온 듯하다. 재사 좌측에 양옥 관리사가 있으며 철대문을 달아 출입을 하고 있다.
◯배향인물: 이광두(李光斗)
본관은 고성이며 자는 천추(天樞)이다. 용헌 이원의 후예이며 모헌 이육의 5세손으로 충의위(忠義衛)를 지냈다.
◯연혁: 1954년에 창건했으며 1963년 2011년, 2015년 등 여러 차례 새로 중수했다. 이 재사 앞에는 동창천의 구곡청담이 흐르고 주변에는 육화산 등 유서 깊은 봉들이 둘러싸여 초목이 우거진 동천의 승지라 하여 ‘九淵亭’이라고도 한다.
장연1리 장수골 마을은 고성 이씨 집성촌으로 전에는 80여 호가 살았으며 현재도 15호가 살고 있다.





절에서 사용되었던 것을 옮겨 놓은 듯하다


마을 전경




장연리 이주호(李周虎) 비 편입니다

길명에서 고암으로 가는 숲속 큰 바위 위에 이 마을 사람인 철성 이씨 이주호의 구휼비가 서 있다.
장연리 이주호(李周虎) 비
본관은 고성이며, 모헌 육(育)의 후손으로 호는 죽남(竹南)이다. 고종(高宗) 병자년(1876)에 큰 기근이 나자 한 지역의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정축년(1877)에는 한 마을에서 밀린 호세(戶稅)를 대신 내었으며, 해마다 연말이 되면 음식을 마련하여 노인들에게 드렸다. 동네 사람들이 동창천(東倉川) 세심대(洗心臺)에다 비를 세워 칭송하기를,
"곡식을 팔아서 기근을 구제하고, 돈을 내어 호구를 부지하게 하였으니 그 후의(厚誼)가 오히려 남음이 있다. 오로지 남은 여생을 노인들을 봉양하고자 했으니 그 은혜라는 것은 산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깊었다. 세심대(洗心臺) 우뚝하게 서 있으니 그 이름 만대까지 전하리라.”
라고 하였다. 순상(巡相)과 암행어사가 아름답게 여겨 포상을 청한 글이 있다.
“빈한한 백성을 의휼함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하물며 설찬을 줄이면서까지 마을의 호포전을 체납(替納)하는 어려운 일을 이주호 공이 서슴없이 행하였으니 향당의 선인이라. 이를 예조에 계장(啓狀)하여 그 선행을 기리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장행(獎行)되는 일이라 마땅히 사인(士人)의 수범이라 할 수 있다.”
- 위의 내용은 국역 청도문헌고의 내용을 옮겨온 것이다.

큰 바위를 배경으로 이주호비가 자리잡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연화석- 비가 올 때 개울에 떠내려 온 것을 동리 사람들이 끌어 올려 세워둔 것이다.
장연사지(長淵寺址) 편입니다

청도장연사지(淸道長淵寺址)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108-1(장연리 142)
국도 58호선을 따라가다가 구 매전 초등학교가 있는 온막리를 지나 장연 1리 마을로 진입하여 청도 학생 야영장 방향으로 들어간다. 2㎞ 앞 호화교를 지나 장연사 방향으로 우회전 후 왼쪽으로 접어들어 가면 낙동강 지류인 동창천 건너편의 낮은 구릉 지대에 조성된 감 밭 내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입구에 장연생태공원도 있고 청동기 시대의 비파형 동검 출토에 대한 알림 모형 및 대한 불교 조계종 장연사 표석도 있다.
◯탑의 형태: 청도 장연사지 동·서 삼층 석탑(淸道 長淵寺址 東·西 三層 石塔)은 1980년 9월 16일 보물 제677호로 지정된 통일 신라 시대의 쌍탑으로 장연사지 내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 삼층 석탑은 모두 상·하 이중 기단의 3층탑이다.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기단부 탑신 받침의 형태와 지붕돌인 옥개석의 낙수면 경사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서탑의 경우 도괴된 후 복원할 때 기단부에 다수의 부재가 새로 추가되어 원래의 형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동탑과 서탑 모두 기단에 1주씩의 탱주와 지붕돌인 옥개석 하부에 4단의 받침석을 두는 등 9세기 초반 신라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탑 표면에는 부조나 기타 장식이 없다.
동탑과 서탑 모두 우선 지대석(地臺石)과 하층 기단을 하나의 돌로 한 8장으로 구성하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모각하였다. 기단 위 얹은 갑석(甲石)은 4장으로 상면에는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굄이 있다. 상층 기단은 4장으로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고 그 위에 2장의 갑석을 얹고, 탑신을 받치기 위한 각형의 2단 굄을 두었다.
탑의 몸돌인 옥신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지붕돌인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옥개석 받침 수는 5단으로 낙수면 상면에는 옥신을 받치기 위한 각형의 2단 받침이 모각되어 있다.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의 예와 비슷하다. 동탑의 상륜부는 없어졌고, 서탑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지면에서 상륜까지 전체 탑의 높이는 동탑 4.29m, 서탑 4.53m이다. 서탑 옆으로는 서탑 기단부 복원 전 부재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건립 경위 및 현황: 사찰의 이름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장연사 또는 홍경사로 전해올 뿐 정확한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절터 서편 동창천의 소(沼)를 장연(長淵)이라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세워져 있으며, 서탑은 일찍이 무너졌던 것을 1979년 12월 원래의 자리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동탑에서는 1984년 해체 및 보수 과정에서 1층 탑신석 윗면에서 목제 금칠 사리합과 그 내부에서 녹유리 사리병이 봉안된 사리 장치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사리는 새로운 용기에 넣어 재 봉안되었다.
청도 장연사지 삼층 석탑은 상층 기단의 탱주가 1개로 줄어든 점과 옥개석의 층급 받침이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9세기 통일 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절터에서는 기와 조각이 다수 확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쪽의 실개천 너머 과수원에는 당간지주가 일부 파손된 채 남아 있다. 지주가 있는 장연리(장수골)내 사원재(장연리 169)에도 당간지주가 있다. 이와 연관이 된듯하다.
현재 동탑은 기단부의 침하 현상으로 인해 기단 부재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다. 상층 기단 모서리 부분이 파손되어 있고, 하층 갑석에도 부분적인 파손이 보인다. 기단 면석 일부분도 크게 파손되어 떨어져나간 상태이다. 상륜부는 노반석만 있고, 노반 받침석은 보이지 않는다.
서탑의 기단부는 복원을 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상층 기단부의 부분 파손이 보이며, 노반석은 복원되었다. 옥개석 모서리 부분이 동탑보다 파손 정도가 심하며, 2층 탑신부는 상당히 마모되어 있다.
위의 내용은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집필자 오정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당간지주

독립 만세운동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
청도군 최초 매전면 장연리 기미년 3.11 대한 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 창립총회가 2017년 2월 15일(목) 오후 2시에 장연리 마을회관에서 열렸다.
다음은 추진위원회가 밝힌 내용이다.
◯장연동 만세 시위의 개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작성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평화적인 시위운동은 조직적으로 일시에 전개되었으나, 우리 고장 청도는 교통과 통신의 격오지(隔奧地)인 지역적 여건으로 인해 즉시 전파되지 않고 있다가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산동 지역에서부터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중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이 매전면 장연동 만세시위입니다.
1919년 3월11일에 장연동에 있는 고성이씨 문중 이원당(李元塘) 조상의 제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농민 김집이(金集伊, 28세)는 이씨 문중의 제례에 참석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부터 전국 독립의거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의분을 참지 못하고 같은 마을에 사는 노이만(盧二萬,34세), 이선이(李善伊, 32세), 이작지(李作之, 30세), 이용술(李龍述, 31세), 최두천(崔斗千, 27세), 이학천(李學千, 29세), 배돌이(裵乭伊, 30세) 등과 함께 이날 오후 9시와 다음날 오후 9시 야간에 2차례에 걸쳐 연인원 100여 명의 주민을 동원하여 동네를 누비면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인 후 이 마을 이동기(李東基) 씨 집 앞에 다시 모여 해산하였습니다.
당시 경찰 주재소에서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인지하고 주동 인물을 탐문하여 주동자 이선이, 이작지, 이용술, 최두천, 이학천, 배돌이 등 6명을 검거하여 고문 후 대구지방 검찰청으로 이송하였다가 불기소로 석방하였고 김집이와 노이만은 도주하였다가 후일에 노이만만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 법원에서 징역 4월을 선고받아 복역하였고 김집이는 이후부터 행방불명입니다.
◯건립취지
위 사건은 지금까지 역사 속에 묻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잊혀가던 중 최근 역사적인 근거가 속속 밝혀졌고 특히 일본의 우경화 정책으로 일본 관원들의 독도 영유권, 종군위안부 문제 등 끝없는 망언으로 인해 온 국민의 울분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이때에 일제하에 일어난 우리 고장 장연리 만세시위는 청도지역 항일 운동의 효시가 된 사건임을 밝히고 다시는 잊히지 않도록 우리의 후손에게 기념비로 남겨야할 당위성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추진방향
먼저 장연리 주민 매전면민과 전국 매전면 향우들이 중심이 되어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설치 규모나 장소, 표기 내용, 소요 경비, 건립 일정 등을 논의하여 자비로 ‘청도군청 및 보훈청과 협의하여 관계규정에 따른 지원을 받아 설치할 수 있습니다.(현재 청도군청에서는 예산 문제로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 단 마을에서 주도할 경우 보훈청에서 30%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함)
◯근거자료
‘청도의 독립운동사’, 권대웅 외, 청도군 185,197, 198/ ‘독립운동사’ 제20권 국내 3.1운동 Ⅱ-남부, 金珍皓 외 2명/ ‘독립운동사 자료집’13: 학생독립운동사 자료집 1977.12.26.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대구지방법원 ‘노이만 판결문(1919년 6월 21일)’/ 대구지방검찰청, ‘불기소 사건목록(1919년 5월 16일’/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경찰요사’, 33/ 조선총독부, ‘조선소요사건관계 서류’ 7권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49보
◯1919년 5월 16일자 대구지방 검찰청의 형사사건부 불기소 사건 목록에 나오는 주동자의 인적사항입니다.
1)김집이: 28세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665번지/ 보안법 위반, 기소중지 *행방불명
2)노이만:34세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674번지/ 보안법 위반 징역 4월
3)이선이: 32세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674/ 보안법 위반, 기소 유예
4)이작지: 30세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65번지/ 보안법 위반, 기소유예
5)이용술: 31세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67번지/ 보안법 위반 기소유예
6)최두천: 24세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14번지/ 보안법 위반 기소유예
7)이학천: 29세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74번지/ 보안법 위반 기소유예
8)배돌이: 30세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74번지/ 보안법 위반 기소유예
*주동자의 주소를 살펴보면 김집이, 노이만, 이선이는 길명마을 남쪽, 지금의 길명 둑 부근에 살았고 이작지는 길명마을 안 동쪽 개울 언덕 위에, 이용술은 시위 집결지인 이동기 집 옆에, 최두천은 깃당마을 입구에, 이학천, 배돌이는 길명 마을 북쪽 끝에 각각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 문서에 기록된 김집이의 주거지 장연동 665번지(답 772평)를 폐쇄등기부에서 확인해보니 1917년 경남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406번지 김정하(金正河) 명의로 최초 보존 등기되었다가 1942년 청도의 만석꾼인 청도군 화양읍 토평동 213번지 김경곤(金景坤, 모계학원 설립자)에게 이전되었습니다. 김정하의 손자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오경농장(주) 회장 김중경(金重經, 83세, 전 양산 상공회의소 회장) 선생은 김집이는 자신의 가문에서 보낸 농장 관리인으로 추정되나 상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장연리(長淵里)
디지털 청도문화 대전(집필자: 박윤제)에 소개된 장연리를 요약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동쪽 구만산 아래 서향으로 자리 잡은 장연리는 앞으로 운문천이 흐르고 있다. 운문천은 충적토를 많이 밀고 와서 강 건너 온막에 넓은 농경지를 선사하고, 물은 장연리 앞에서 휘돌아 예전리를 향해 흘러간다.
신라 때의 큰 사찰이었던 장연사가 있었던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서 마을 이름을 장연리라고 한다. 또는 운문천[동창천] 가운데 장연이라는 넓고 깊은 소가 있어서 장연(長淵)이라 하였다고 한다. 한때 구만산 골짜기마다 암자가 있어서 절골이라고도 한다.
본래 청도군 상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장연동이라 하고 매전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장연동에서 장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쪽은 매전면 남양리·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 서쪽은 매전면 예전리, 남쪽은 매전면 내리, 북쪽은 매전면 온막리·호화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길명동(吉明洞), 계당동(桂塘洞), 고암동(考岩洞), 합산(合山)이 있으나, 합산은 외딴 집이 있고 고암은 서너 집이 살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보물 제677호로 지정된 청도 장연사지 동·서 삼층 석탑이 위치한다
다음은 청도군지에 소개된 내용이다.
억산(億山)의 연봉들이 좌절우곡(左折右曲)하면서 구만산이라는 험한 준령을 솟게하고 다시 남으로 뻗어 고수봉, 꼬불산 등으로 각양의 모습을 자랑하면서 마을 뒤 중천까지 솟고 있다. 경사가 급한 계곡변의 마을이다. 동창천이 홍수때마다 마을로 잠식해 들어오고 마을 뒤는 고산이라 이 사이의 좁은 입지에서도 수 백년을 잘 견디어 온 마을이다.
산과 계곡, 제방 없는 하천, 자연 그대로의 고산(高山) 밑의 계천변인 이런 곳에 어떻게 택리 하였을까 의문시 된다. 1600년 중엽에 철성인 이 민(李珉)공이 마을의 터전을 잡았다 하나 장연사(長淵寺)지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공 이전에도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곡(長水谷)에는 기성 반씨가 동기를 잡았고 고방에는 전주 이씨가 입촌했다 한다.
길명(吉明)이란 철성인 이 공이 마을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 즉 후손의 발복(發福)을 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철성인 이씨들이 택리한 동명에는 한결같이 후손을 위한 소망에서 명(明), 길(吉), 호자(好字)를 쓰고 있다. 그런 탓인지 위선심(爲先心)이 강하고 일가간의 우애 우의는 타성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고도 복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장수곡(長水谷), 장수곡(長壽谷), 장연(長淵)은 계곡이 깊고 길다는데서 유래되어 장수곡(長水谷)이 되었고 이 골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장수하므로 장수곡(長壽谷) 또는 절이 있었다고 절골이라고 한다.
장연(長淵)은 동창천이 마을 모퉁이인 산밑을 감아 돌면서 생긴 소(沼)가 깊고 넓어 못 같다하여 장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하나 확실치는 않다.
고암(高岩),고방(考方)은 마을이 높은 곳에 있고 그 곳에 큰 바위가 있다고 고암이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부르기 쉽게 고방(考方)으로 되었다는 설과 옛날 이곳에 피난한 사람이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고바위(거바위)라고 대답하여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계당(桂塘)은 당목인 계수나무와 못(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참고자료
-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택리지(1978, 최장영 외)
-장연리 대한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비 추진위원회 자료
-관리 문중 및 주민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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