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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경산과 청도의 경계지역 금천면 소천리

경산과 청도의 경계지역 금천면 소천리/ 행전 박영환

 

  2018년 2월 21일(수), 경북 경산시와 청도군의 경계 지역에 있는 마을인 소천리를 찾았다. 이 마을은 좁고 가는 작은 개천 즉 소천(小川)이 있는 마을이기에 소천이라고 불려지는 곳이다. 이마을에도 영소재를비롯한 재실 및 교회와 절이 있는 곳이다. 

  우선 소천1리 장전마을의 영소재를 찾았다. 사실 이 마을도 처음 찾은 곳이라 달리 아는 사람이 없어 다른 동리에서 한 것처럼 금천면 전화번호부를 펼쳐놓고 영소재의 후손이라 짐작되는 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마침 바깥어른은 들에 나가시고 아주머니께서 나오셨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다른 분도 더 달려왔다. 또 들에 나가셨던 분도 연락이 닿아 급히 오셨다. 정말 문중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집안 간에도 무척 돈독해보였다. 

  계속 영소재가 문화재로 등록 되는 길이 없느냐고 묻는 통에 우리가 답해 줄 수 있는 사항이 아닌지라 상당히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문중의 정성만큼 영소재는 깨끗하게 보존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영소재(永昭齋)

 

관리문중: 파주 염씨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 1297번지

소천1리 장전마을 경로당에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조곡산 기슭 푸른 대나무를 뒤로 하고 남향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건물구조: ‘숭도문(崇道門)’이 현액된 전면에 세운 맞배지붕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팔작지붕 5(마루 2, 온돌방3, 좌당 우실형)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머름중방 위에 쌍여닫이 세 살문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마루 좌측과 후면에는 판문을 달았다. 전면과 후면 퇴에 툇마루를 설치했으며 청과 방 사이에는 4분합들문을 달아 필요시 공간을 넓게 쓸 수 있게 했다. 재사 주변에 토석담장을 둘렀다.

재사 뒤 경사진 언덕 위에 팔작와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인 구연사(龜淵祠)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데, 3칸 규모의 내삼문(內三門)을 세워 사당에 출입하게 하였다.

대청에는 박효수가 쓴 영소재기가 있고 사당에는 송재성이 쓴 구연사 중수기가 있다. 그리고 공민왕이 그린 총신 염제신상이 있었으나 도난당하고 현재는 복사본이 남아 있다.

 

배향인물: 충경공(忠敬公) 매헌(梅軒) 염선생(廉先生)을 비롯하여 우정승(右政丞) 국파(菊坡), 공조참의(工曹參議) 경은(耕隱), 권무지평(權務持平), 훈련원 정(訓練院 正) 염말경(廉末卿) 다섯 분을 배향하고 있다.

 

연혁: 1953년에 건립하였으며 1975년에 기와를 번와하는 등 중수했다.

소천1리 장전마을에 파주 염씨가 입향한 것은 1592년 전으로 추정된다. 입향조는 염말경(廉末卿)으로 자는 경옥(慶玉)이다. 그는 어모장군(禦侮將軍) 행훈련원정(行訓練院正)이었는데 임진왜란때 진주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이 되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충북 옥천을 떠나 잠시 자인에 머물다가 소천에 들어와 시거했다. 아들 3명이 있었는데 한성(漢成), 귀성(貴成), 준성(俊成)이다. 장손의 후손은 청도에 세거하고 그 외는 김해, 경산, 대구, 영천, 경주, 창녕 등에 흩어져 산다. 9세손 중묵(重默)은 호가 성암(誠庵)인데 정성이 각별하여 구연사 중수를 독담하였다. 14세손 호인(鎬仁) 묘우 및 영소재 증축에 노력했다.

 

 

 

 

안내를 해준 염연식씨 부부 및 집안 분 

 

 

 

 

 

 

 

고려말 공민왕이 그린 총신 염제신상 - 눈썹, 머리카락, 수염 등 외모를 섬세하고 사실적 필치로 그렸다.  

 

 

영소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소천교회가 있었다. 마침 2011년부터 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님이 계셔서 교회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소천교회

 

소속: 장로교

 

소재지: 금천면 소천대종길 17-8

 

건물구조: 본당(80), 수련관(60), 사택2(40)

 

연혁: 1958년 소천2리에서 출발하였으며 1965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그 이후 1996도에 개축을 했다. 교직자 수는 1명이며 신도는 40여 명이다.

 

 

다음은 소천 3리의 경모재 편입니다.

 

 

경모재(敬慕齋)

 

관리문중: 수원 백씨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 1698번지

소천 3리 신당마을 뒤편에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를 뒤로 하고 동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목조강판 기와 팔작지붕의 4(3 마루1, 중당 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 둥근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 살문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툇마루를 설치하여 마루와 연결하였으며 좌측 방은 정면에 문을 내지 않고 측면에 세살문을 내었다. 정면에 재사의 이름인 敬慕齋가 편액되어 걸려 있다. 재사 주변에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백씨문중의 선대를 모시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연혁: 1910년에 건축했으며 2005년 경에 강판기와로 번와하고 기둥을 수리하는 등 중수를 했다. 수원백씨가 이 마을에 입향한 것은 500년 정도 되며 세거하고 있다

 

 

 

<김전초등학교 소천분교 - 한 때는 많은 학생들이 재학하였으나 지금은 폐교가 된 상태다>

 

다음은 소천 2리 생미마을의 영모재 편입니다.

 

 

 

 

영모재(永慕齋)

 

관리문중: 전주 이씨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 939

소천 2리 생미 마을 뒤편 산기슭에 동북향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재사 마당에 큰 은행나무가 있다.

 

건물구조: 마당에 들어서면 목조와가 팔작지붕의 4(3 마루1, 중당 협실형)인 재사가 있다. 시멘트 기단 위 자연석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 살문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툇마루를 설치하여 마루와 연결하였다. 정면에 재사의 이름인 永慕齋가 편액되어 걸려 있으며 마루에 박효수가 찬한 영모재 중건기가 있다. 재사 주변에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효령대군의 후예인 청천(聽川) 이동구(李東九)를 배향하며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장소이다.

 

연혁: 1959년에 건축했으며 1962년 등 중수했다. 현재는 관리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다.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생미마을 전경 

 

영모재 옆에 생미교회가 있었다. 

 

 

 

 

 

생미교회

 

소속: 장로교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생미길 31-37

금천2리 생미마을 가운데 있다.

 

건물구조: 본당 및 수련관, 사택

 

연혁: 1990년에 건축했으며 교직자 수는 1명이며 신도는 20여 명이다.

 

 

 

다음 찾은 곳은 비로암입니다.

 

 

 

비로암

 

소속: 임재종

 

소재지: 금천면 생미길 58-4

소천2리 생미마을 마을 산기슭에 있다.

 

건물: 5칸 맞배지붕

 

연혁: 1997년에 지었으며 신도수는 80여 명이다.

 

 

소천리(小川里)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는 석현(돌고개), 장전(긴 밭)생미신당(新堂)이란 자연부락이 묶여 이루어진 마을이다자연부락 사이가 많이 떨어져 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 소개된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경산시와 청도군의 경계 지역에 있는 마을로서, 좁고 가는 소천(小川)에 위치한 마을이라 소천이라 불린다. 1500년경 경주 이씨가 이곳 산세에 마음을 빼앗겨 입향했다고 전해진다.

  소천이라는 말은 동쪽에 있는 대천과 대비되는 이름이다. 길이나 너비로 보면 대천보다는 짧고 좁으나 상당히 긴 골을 이루고 있어서 소천이라고 했다.

 소천리는 돌고개, 긴 밭, 생미, 신당(新堂)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돌고개 마을은 경산시 용성면 대종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로, 큰 바위가 있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해서 돌고개이다. 한자로는 석현(石峴)이라고 표기하였다. 긴 밭 마을은 장전(長田)이라고도 하며, 소천에서는 가장 넓은 평지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위와 아래에 길고 넓은 밭과 농토가 있어서 긴 밭이라고 했다.

 생미 마을은 산양(山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마을이 동향으로 앉아 있는 형국이다. 산에 양지바른 곳이라는 뜻에서 산양(山陽)이라 하고, 음이 변하여 생미(生美)라고 했다고 전한다. 신당 마을은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새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동일위면에 속해 있었다. 1832년 동일위면이 일위면으로 개칭되었고, 1840년에 다시 외종도면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06년 종도면으로 바뀐 후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산양동, 신당동, 장전동, 석현동 일부를 병합하여 소천동이라 하고, 금천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소천동에서 소천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산시 용성면 부일리에서 발원한 부일천을 따라 내려온 물이 용전리, 용천리, 대종리를 지나서 소천리에 이른다. 이후 동곡리에 이르러 대천(大川)과 합해져서 운문천을 이루어 동창천에 닿는다. 돌고개와 장전 사이에 크게 굽은 내[]가 흡사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해서, 용천리와 용전 등 이 주변의 지명들이 용과 관련되어 있다. 부일천을 따라 약간의 경작지가 있으나 대부분 밭으로 활용되고 있는 편이다.

  동쪽은 운문면 서지리·대천리, 서쪽은 금천면 갈지리·사전리, 남쪽은 금천면 방지리·운문면 방지리, 북쪽은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부제리·대종리·용천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로 소천 1리부터 소천 3리까지 있으며, 돌고개, 긴 밭, 생미, 신당 등 네 곳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산비탈을 일구어 밭농사와 논농사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지방도 919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이 길을 따라 동곡 공용 버스 터미널에서 대천 공용 여객 자동차 터미널로 가는 동곡 순환 버스가 지나간다.

  용전 주변 소()를 이루고 있는 바위에 박영수가 일신탕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첨앙대(瞻仰臺)라는 정자를 세웠다. 장전과 생미의 앞들에는 고인돌이 있어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청도군지에 소개된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운문면의 구룡산(九龍山), 발백산(髮白山) 봉우리들이 그 힘을 한층 뿜어낸 이곳, 산길이 평평하지 않고 험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다. 마을 주변이 태산이고 골 안엔 아득하리 만큼 깊으며 계천을 따라 뚫린 산길은 양의 창자와 유사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런 산촌에 어떻게 많은 주민들이 살고있는지 의문스럽다. 아마도 살기 좋은 곳이며 세상의 더러움이 미치치 않는 그 무엇이 숨어있는 비경이 아닌가 싶다.

  1530년경에 서원인 염호봉 공이, 1500년 중엽에는 수원인 백삼룡 공이 그리고 1500년 말경에는 경주 이씨가 이곳 산세에 마음을 빼앗겨서 입촌하여 각각 마을을 열어 나갔다 한다. 후손의 복을 바라고, 또한 부귀현달(富貴顯達)을 기원도 하였거니와 이 곳 형국을 믿고 의지한 것이 더 큰 비중을 점유하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석현(石峴), 장전(長田)을 돌고개, 돌밭이라 부르며 석현(石峴)마루에 취락된 마을이다. 계천(溪川)이 야() 형으로 흐르고 일자로 뻗은 구릉에 자리한 마을로 암반을 뚫은 길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산촌의 그림과 같은 풍취다. 이런 풍취에 마음을 사로잡혀 선경임을 자처하면서 선유(仙遊)한 자취가 계변(溪邊)에 남아 있다.

  마을 입구 계천 가운데 큰바위에 있는 소나무는 천년만세간에 풍우설상에도 수절한 듯 마디마디가 고초를 말해 주는 것 같고 입암(立岩) 전면에는 석정(石亭)이라 암각되어 있다. 석정 주변 석벽에도 만송정(晩松亭), 담앙대(膽仰臺), 일신탕(日新湯)의 제목하에 풍경과 인격도야 시가 새겨져 청절표천추(淸節漂千秋)를 읊고 있다.

 돌밭, 돌고래란 지면일대가 암반이다. 즉 돌뿐인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동명이다. 죽장망혜(竹杖芒鞋)의 시인 묵객들이 과연 이런 곳이 있는 줄을 알았는지? 알았다면 어떤 표현을 했을까?

 긴밭, 진밭(長田)은 산기슭을 등고선에 따라 개간하였기 때문에 사래가 긴 밭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를 장전으로 표기한 것이다. 지난날에는 목화 농사를 많이 했으나 현재는 수리로 인해 논으로 많이 전환되었다.

  생미(生美), 산양(産孃)은 경주 최 공이 처음 동네터를 잡고 식수로 한 우물을 파고난 뒤 이상하게도 이 마을에서 미인이 많이 태어나서 생미(生美), 산양(産孃)이라 불렀다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별명이고 지리지에는 산양리(山陽里)라 기록되어 있다. 산양(山陽)이라 하게 된 것은 마을이 산 중턱에 있어 동향이라 양지 바른 곳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신당(新當)은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로 새로 취락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소천리는 세 마을(石峴, 山陽, 神堂)이 합쳐진 이름이다.

 

   

  이상 두 문헌에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마을들 역시 마을 내력의 설이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자연 부락이 평지에 있는 곳도 있고 상당히 가파른 언덕에 있는 마을도 있다. 유풍에 따른 재실이 있는가하면 교회도 있고 또 절도 있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으나 마을 특유의 공동체 힘이 있어 오순도순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참고

-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택리지(1978, 최장영 외)

-도주지(1958, 김석봉 편)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