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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황강서원이 있는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

황강서원이 있는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 행전  박영환

 

  2018년 5월 24일(목),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의 황강서원 및 진불사, 갈지교회를 찾았다. 

시원하게 뚫린 국가 지원 지방도 69호선를 따라 올라가면 경산시 남산면 남곡리·용성면 용산리·곡란리와 경계를 접한 마을이다. 

  땅이 메마르다고 해서 갈지(渴地)라고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혀 메마른 느낌을 주지 않는 아늑한 마을이었다. 

 

  먼저 들린 곳은 황강서원이다. 화산군의 후손인 천기찬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문중의 어느 분과 연락이 닿아 미리 기다려 문을 열어주고 서원을 안내해 주셨다. 

 

 

 

 

황강서원(皇岡書院)

 

 관리문중 : 영양 천씨(潁陽 千氏) 황강서원보존회(皇岡書院保存會)

 

 소재지 :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 삼성(三聖)마을 763번지

 

 건물구: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팔작지붕 목조와가 정면 4칸 강당(온돌방3 대청1, 중당협실형)이 있다.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 살문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대청 앞 정면에 서원의 이름인 皇岡書院 현액이 있으며 대청에 황강정사 상량문이 걸려 있다. 마당 우측에 하당( 3)이 있다.

강당 뒤 언덕에는 연화 봉두로 장식한 팔작지붕 3칸 사당인 충장사(忠壯祠)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3칸 규모의 내삼문을 세워 사당을 출입하게 하였다. 사당의 정면 문에는 흔치 않은 상인방이 휘어져 있는데, 중국 명나라 출신의 장수가 모셔져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전체 배열은 전학후묘(前學後廟)양식이다. 하당 뒤편에 중문이 하나 더 설치되어 있다. 마당에는 자갈을 깔았고 주변에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화산군(花山君) 천만리(千萬里)

  본관은 영양이며 1543(癸卯), 명나라 가정(嘉靖)  8월 초1일에 태어났다. 자는 원지(遠之)이고 호는 사암(思庵)이며 명나라 말기 무과에 장원급제했다.

1592(선조 25) 4 임진왜란(壬辰外亂) 때 왜병이 조선을 침공(侵攻)하여 서울을 점거하고 평양(平壤)까지 이르자 조선 조정에서 명() 나라에 원군(援軍)을 요청(要請)하였다. 이때 천만리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더불어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참전하여 부하 철기(鐵騎) 2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평양을 탈환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다시 원군(援軍)을 거느리고 직산(稷山)현 충남 천안(天安). 울산(蔚山) 등지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고 적()을 완전히 격퇴시켜서 임진난을 승전(勝戰)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울산(蔚山)의 서생진성(西生鎭城) 전공 개선문(凱旋門) 층암(層岩)에 각자(刻字)되었으며 또 무술년(戊戌年)에는 조선(朝鮮)의 지리적 여건에 적합한 사로진군(四路進軍)의 전로(戰略)을 세웠던 기록이 확연하다. 그리고 영양사(領糧使)로서 군량미(軍糧米)를 해운(海運)으로 수송 보급하여 전투수행과 재민구호(災民救護)에 책무를 다하였던 공훈 또한 지대하였다.

  전란이 평정된 후 같이 전투에 참여했던 명나라 원군(援軍)은 회군(回軍)하였으나 천만리는 휘하 장수(將帥)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들 둘과 함께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하였다. 큰 아들 천상(千祥)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1597년 선조30)에도 공을 세워 벼슬이 한성좌윤에 이르렀다. 둘째 아들 천희(千禧) 역시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에 전공을 세워 벼슬이 장령에 이르렀고 뒤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화산군 천만리는 조선 숙종 때 창덕궁 후원에 설치한 대보단(大報壇)에 배향(配享)되어 황단망배지열(皇壇望拜之列)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대보단배향은 당시의 제도에서 극히 드문 예우였다. 조정에서의 이 은전은 자헌대부 벼슬에 화산군에 봉군(封君)된 이후 두 번째 특전이었으며 그 뒤 순종 임금 때 충장공(忠壯公) 시호(諡號)도 내렸다.

  황강서원에 이어 고성의 호암사()  10여 서원에 배향되고 있으며 부산진성 지성(자성대)에 세운 천 장군 기념비 앞에 후손들을 중심으로 유림들이 매년 10 3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연혁: 황강서원은 학봉 김성일, 한음 이덕형, 백사 이항복,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등의 안()으로 그가 살던 정사(精舍)에 사당을 세우고 향사했다. 그 뒤 1833(순조 33, 癸巳)에 천만리의 10세손 천석규(千錫奎)의 집에서 비장의 문서와 천만리의 영정이 발견되었는데, 이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사당을 건립하고 1835(헌종 원년, 乙未) 대황산(大皇山)줄기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마침 산의 명칭에도 자가 들어가고 천만리도 명나라 출신 장수이기 때문에 서원의 명칭을 황강이라고 하였다. 1846년에는 사암실기가 이 서원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1868(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그 뒤 갈지리에 경모당(景慕堂)을 건립하여 향사하다가 1924(甲子) 현 위치로 옮겨 영당을 복원하고 영정을 봉안했다. 이후 마침 1952년이 임진년이었기에 후손과 유림이 의논하여 경모계를 결성하고 서원을 복원하였다. 1998(戊寅) 3월 초3일 사당을 중수하고 위패를 봉안했다. 서원 뜰에는 선생의 12세손인 천병하(千炳夏)가 찬한 묘재비(墓齋碑)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서원 뒤편 산기슭에 선대의 제단비가 있다.

  ‘화산군 천만리선생 영정(花山君 千萬里先生 影幀)’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 중이다.

 

    1991년 청도군지가 발간될 당시만 해도 갈지마을 100호 중에 영양 천씨가 마을의 성씨 중 가장 많이 28호나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타지로 흩어져 한 집만 살고 있다고 한다. 그 한 집이 오늘 안내를 해준 분이다. 

 

 

 

 

 

 

 

 

 

사당 충장사

 

 

화산군 영정

 

 

 

서원 옆에 선대들의 단비를 세웠다 

 

 

다음 찾은 곳은 진불사이다.

 

 

 

 

진불사(眞佛寺)

 

소재지: 금천면 갈마리길 96

갈지리 마을 뒤편 저수지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소속: 조계종

창건연대: 2016.4.23.

신도수: 250여 명

주지스님: 古佛스님

 

대웅전에서 내려다보이는 저수지

 

 

 주지 고불스님이 내어놓은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한담을 나눈 뒤 이번에는 갈지교회를 향했다. 진불사는 새로 생긴 절인데 비해 갈지교회는 역사가 오래된 교회이다. 

 

 

 

 

 

지교회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구터길 7

소속: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소속

연혁:

- 1906 5 5: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 732번지에 설립(1906 3 1일부터 김내은 조사를 중심으로 처음 개척)

- 1908 5 15: 금천면 갈지리 741번지로 이전

- 1947 1 1일에 다시 금천면 사전리 1408번지로 이전

- 1955 1 1일에는 금천면 갈지리 427번지로 이전

- 1967 5 5일에 금천면 갈지리 797번지에 예배당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택은 협소하고 오래된 한옥을 헐고 교회 곁에 면적 66의 붉은 벽돌 건물을 지었으며, 1991 5 30일에 착공, 3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현재 신도수는 50여 명이다.

 

 

 

 

갈지리(葛旨里)

 

  갈지리에는 고인돌이 남아 있어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서 깊은 마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필자: 박윤제)에 소개된 갈지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갈지리는 삼성과 갈마리라고 부르지만 표기는 갈지(葛旨)라고 한다. 산이 높지 않아 계곡이 깊지 않으며, 따라서 땅이 메마르다고 해서 갈지(渴地)라고 한다고도 전하고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에도 갈지리가 있는데 옛날에 면리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이곳이 한 마을로 불렸다고 전한다.

조선 말까지 밀양군 고미면에 속해 있었고, 1896년 청도로 이관되면서 일위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삼성(三聖)과 갈지(葛旨) 그리고 구복(龜伏)을 합해서 갈지동이라 하여 종도면에 편입되었다. 1919년 종도면이 폐지되어 금천면에 편입되고, 금천면 갈지동이 되었다. 1988년 갈지동에서 갈지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쪽과 서쪽이 산으로 막혀 있고, 남쪽으로 펼쳐진 긴 계곡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동쪽은 금천면 소천리, 서쪽은 경산시 남산면 평기리, 남쪽은 금천면 김전리·사전리, 북쪽은 경산시 남산면 남곡리·용성면 용산리·곡란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삼성, 갈마리, 구복 마을이 있다. 구복은 길이나 개울이 구부러진 곳을 구복이라고 하는 곳이 많다. 갈지리 구복은 동곡천이 마을 앞을 흐름에 크게 굽어서 지나가므로 구복이라고 했다.

 

  한편 청도군지에 소개된 내용은 이러하다

 

  발백산(髮白山)이 굽이치면서 수많은 산령을 융기시켜 지력을 북돋우어 마을 동쪽을 막으면서 분기된 지맥이 남주(南走)하고 갈현(葛峴)에서 힘을 다한 것 같으나 다시 용력(龍力)을 다하여 뻗어 대왕(大王)산을 이루었다. 갈현(葛峴)에서 분기된 줄기가 마을 서쪽을 달려 둔치령과 태산고봉(泰山高峰)을 이루면서 많은 장등(長嶝) 대등(大嶝) 소등(小嶝)을 거느리고 멀리 동창변에서 떨어지기도 다시 용처럼 이어져 가기도 하였다.

  이 마을도 인근마을처럼 동명을 그대로나 면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앞들에 지석묘가 있는 것을 보아 선사시대부터 주민들이 산을 등지고 계천변에 주거지로 정하여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구터, 구기(舊基)는 갈지리에서는 마을의 기틀이 먼저 잡혔다고 부르는 마을 이름이라는 것이다.

현재도 갈지리의 중심 마을이 되어 있다. 갈마루(葛峴) 갈고개(葛峙)는 경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길을 닦을 당시 칡이 하도 무성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귀복(龜伏), 구복(九伏)에는 두 설이 있다. 하나는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거북이와 엎드려 있는 형국과 같아 풍수지리설에 따라 구복(龜伏)이라 부르는 것이고 구복(九伏)은 마을 앞에 큰바위(지석묘)가 아홉 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시대적 입장에서 보면 후자가 먼저라고 생각된다.

  갈말(葛里) 갈마리(葛馬里) 갈지리(葛旨里)는 깊숙히 마을의 곡내(谷內)에 취락하고 있으며 마을 앞산이 풍수상으로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이라고 동명을 정했다 한다. ()을 동음인 갈()로 고친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마른 말보다 칡()을 뜯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라는데는 이의가 없다.

  또 한 설은 다른 마을이 갈()자를 쓰는데 이 마을만 갈()로 하기가 무엇해서 갈()로 했음은 충분한 수긍이 간다. 그러나 갈자(渴字)보다는 갈자(葛字)가 넉넉한 감이 가고 풍성함이 있어 좋은 것 같다. 삼성(三姓, 三聖)에도 두 설이 있다.

  셋 성인(聖人)이 살았다고 붙여졌다는 설과 천씨, 박씨, 김씨의 삼성(三姓)이 산 곳이라고 삼성(三姓)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도 후자의 삼성(三姓)을 미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점으로 보야 후자가 옳은 것이 아닌가 믿어진다.

 

  이상 두 곳에 소개된 내용이 공통점이 있기도 하지만 다른 점이 많다. 다만 군지에 소개된 내용은 좀 추상적인 내용이 많아 현실성이 떨어지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명의 경우 순수한 우리말로 출발한 경우가 많은데 뒤에 사람들이 한자화 시키면서 이상한 유래나 내력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구복'이란 경우가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