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각이 있는 청도군 매전면 북지리/ 행전 박영환
2018년 2월 20일(화) 청도군 매전면 북지리 경모재와 효자각을 찾았다. 용산리를 거쳐 마을에 들어섰기에 해가 뉘엿뉘엿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경모재와 효자각의 정씨 후손들께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셨다.
역시 효자각의 후예들의 예절 바른 심성은 여느 마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비록 바깥 날씨는 추웠지만 이곳은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경모재(敬慕齋)
◯관리문중: 영일 정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북지리 240-3
매전면 내에서 남쪽 국도 58호선을 타고 가면 북지 마을로 진입하는 표지석이 있다. 도로에서 북쪽으로 난 마을 진입로로 약 300m가량 들어간 마을 복판에 있는 마을 회관 맞은편에 있다. 효양산을 배경으로 자미산을 바라보며 동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동쪽에 난 일각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팔작지붕 4칸(온돌방2, 대청2,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우고 벽을 치고 세살문, 쌍여닫이 세살문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주상부는 장혀를 수장한 장혀수장집이다. 전면으로는 길게 퇴에 툇마루를 설치했다. 청과 방 사이에는 4분합들문을 달아 필요시 공간을 넓게 쓸 수 있게 했다.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정원교(鄭元僑)
본관은 영일이며 자는 시중(時中), 호는 경모이다. 1708년(숙종 34)년에 청도에 입향했다.
◯연혁: 1895년에 건립하였으며 그 동안 사분합들문을 교체했고 2015년 경에 강판 기와로 번와 하는 등 중수했다.
북지 마을은 속칭 ‘북지 연일 정씨 마을’로 정원교가 입향한 후 약 300년 동안 그 후손들이 세거해 오고 있다. 연일 정씨는 오천 정씨로 일컫기도 하며 시조는 동하 정습명이다. 그는 고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냈다.



정내헌 효자각(鄭乃憲孝子閣)
◯관리문중: 연일 정씨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북지길 26 (북지리 502)
◯건물구조: 비각은 단칸[單間]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우측 담장 사이에는 일각문을 세워 비각으로 출입케 하였다. 비각의 4면에는 판벽을 설치한 후 상부에는 홍살을 세웠으며, 전면에는 쌍여닫이 울거미널문을 달아 내각 내부로 들어가게 하였다. 가구는 3량가의 초익공(初翼工)집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배향인물: 정환주(鄭煥冑)
본관은 연일이며 자는 내헌(乃憲)이고 호는 양심재(養心齋)이다. 포은 정몽주의 후예이다. 정동채(鄭東采)의 아들로 기품이 순수하고 재지가 총명하여 학문에 전력하고 가훈을 이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이 들자 주야로 간호하고 정성을 다하였으나 끝내 별세하자 아버지의 봉양에 지성을 다하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참새고기를 원하였다. 그가 빈 방에 그물을 치고 있으니 매가 새들을 몰아와 십여 마리를 얻어 봉양하였다. 또 겨울철에 물고기를 원하여 그가 겨울 냇가에 통발을 설치하고 있으니 수달이 물고기를 몰아넣어 한 광주리가 되었다. 아버지가 70세에 병을 앓으니 주야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완치케 하였고, 80세에 돌아가시자 3년을 시묘하였다. 완의문(完議文)을 내리고 포상하였다.
◯연혁:
정환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10년(순조 10)에 연일 정씨 문중에서 비각을 건립하였다.



<마을 전경>

<북지리 경로회관>
북지리(北旨里)
마을 북쪽에 효양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 경계를 따라 동창천이 쉼 없이 흐르고 있는데 자미산이 마을 앞을 가로 막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제미산으로 부르기도 하고 더러는 애를 먹이는 산이라고 애미산이라고도 한다. 마을은 언덕 위 골짜기에 형성되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집필자 박윤제)에는 소개된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조선 후기 까지 상남면에 소속된 마을이다.
북마리, 북말, 북지라 불렀던 것을 북지동이라 하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매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8년 북지동에서 북지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북지’는 뒷마을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수군통제사를 지낸 이운룡 장군의 출생지가 바로 앞 매전면 온막리 명대 마을이다. 명계 서원(明溪書院)이 있었던 곳에서 뒷마을이기 때문에 북지(北旨)가 되었다고 한다.
동북쪽은 매전면 동산리, 동남쪽은 매전면 호화리, 서북쪽은 매전면 용산리, 서남쪽은 매전면 온막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매전면 용산리에 있는 불령사 전탑의 문전(紋甎)이 만들어진 기와굴이 있는 조탑골이 있다. 탑을 만든 곳이라고 해서 조탑(造塔)이다.
마을 앞에는 도로 확장 때 돌도끼와 돌화살촉이 나온 고인돌이 있다. 지금은 돌만 도로 위에 세워 놓았지만, 아직도 정월이면 그 앞에 과일과 과자가 놓여 있었다.
한편 ‘청도군지’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용각산계에서 뻗어 나온 한 산계가 어쩌면 이렇게도 두텁게 넓은 곳을 차지할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된다. 그 중에도 매전면의 덕산(德山)에서 하평(下坪)을 거친 산마루는 효양산이란 험준한 산의 등허리가 높다랗게 이 마을을 안고 있다.
마을 앞을 용산리에서 달려온 구릉이 눈 아래로 보이나 그래도 경사로 인해 흘러 빠지는 지령(地靈)을 막아주는 고마운 산릉이기도 하다.
이 마을의 택리는 그 어느 마을보다 앞서고 있다. 서기 1350년경에 연일인 정환주(鄭煥周) 공이 영천에서 입향하여 후손의 번영할 곳을 택리하고자 이 곳을 정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주위 산세를 바탕으로한 풍수지리에 따른 것이라 생각된다.
북지(北旨)는 한자로 표기한 동명(洞名)이고 애당초는 ‘북마을’이 ‘북말’로 변하여 ‘북마리’등으로 불리다가 들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북지(北旨)라고 한 것이다.
‘무심암(無心岩)’이란 북지(北旨) 마을 앞으로 흐르는 동창천변의 별바위 모퉁이에 있는 바위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 부부가 난리가 끝나고 평화가 되면 이 바위에서 만나자는 언약을 하고 각자 피난길에 올랐다가 전쟁이 끝나자 부인은 이 바위에서 기다렸으나 끝내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지혈(指血)로 무심(無心) 이라고 혈서를 남기고 투신 자살한 데서 유래한 바위다.
*북지리의 내력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소개되었다. 하나는 명계서원의 뒷마을로 보는 가 하면 또 하나는 들의 북쪽이라고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아무튼 어느 기점으로 북쪽이란 뜻은 공통점이다.
*참고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국역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도주지(1958, 김석봉 편)
- 문중 후손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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