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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2) 지석묘, 운림고택 및 재실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2) 지석묘, 운림고택  재실/ 행전 박영환

 

 

  1편에서는 임호서원과 영모재 방문기를 올렸습니다. 이번  2편에서는 임당리의 지석묘, 운림고택(내시가)및 강림서당, 식호당, 근수재, 은구정을 올리려 합니다. 그런데 지석묘 및 김씨고택은 청도문화연구회, 우리문화지킴이 활동 거기에다가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안내를 해주기도 하는 등 여러 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제 까페에 사진과 함께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올렸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 몇 장면만 올리려 합니다.  

 

 

1)임당리 입구 조그마한 언덕에 있는 청동기 시대 지석묘 편입니다.

 

 

 

 

 

청도문화 지킴이 회원들이 해마다 고인돌 주변에 벌초를 합니다.(2017.7.8)

 

편히 쉬소서 - 벌초를 하고 난 뒤 회원들이 술 한잔을 올리고 있다

 

 

우리문화 연구회 회원들이 답사를 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2018.4.8)

 

우리문화 연구 회원들이 김구균 삼한문화재연구원장으로부터 고인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청동기 시대 거석 건조물의 일종이다주로 무덤으로 쓰이고 있지만 공동 무덤의 무덤 표지석 혹은 제단이나 기념물로 사용된 것도 있다.

 

지석묘에서 바라본 임당1리(2017.10.29)

 

폐교된 임당초등학교 - 고인돌이 있는 언덕 아래에 있다

 

 

2)임당리 운림고택 편입니다.

 

운림고택 전경

 

 

 

  

 

안채 - 담장과 건물로 완전히 폐쇄되어 있으며 북향이다

 

 

사랑채 - 안채에 출입하는 사람을 잘 관리할 수 있게 배치되어 있다 

 

 

바깥을 살필 수 있는 구멍이 있는 문

 

사당

 

청도문화원 청도문화 지킴이 회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강사: 박희상)

 

400여 년 내시(內侍) 가문이며 거부(巨富)였던 운림고택(雲林古宅)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林塘里), 국가민속문화재 제245호인 운림고택을 찾았다.

이 고택은 조선중기부터 400여 년간 내시 가문이 살았으며 이 집이 여기에 자리 잡은 것은 당시 유명한 지관이 명당을 찾아 두루 답사한 결과 이곳을 최고의 길지(吉地)로 꼽았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이 집은 긴 세월 동안 큰 부잣집으로 이름을 날렸다.

내시가(內侍家)는 근본적으로 혈손을 둘 수 없었기에 입양으로 대를 이었는데 그 동안 다른 성씨가 부자와 조손의 연을 맺어 가계를 이어갔다. 이때 16대까지는 생가의 성과 이름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16대에는 2명이 입양되었고 17대와 18대에 오면서 성씨도 김씨로 통일한 것 같다.

현재 건물은 구한말 내시로 상선(尙膳)의 품계를 받은 15대 운림(雲林) 김병익(金秉翼, 18421925)이 건립했다고 전한다. 이 집에서 나온 가계 문서에는 2대부터 16대까지 이름과 실제 관직, 부인의 본관, 산소의 위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집은 큰 사랑채, 중 사랑채, 안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사당,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대궐 쪽 방향인 북향으로 놓여 있다. 큰 사랑채에서는 대문부터 안채로 들어가는 동선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중 사랑채 좌측 문을 통해서만 안채로 드나들 수 있다. 안마당에는 곡식을 나르는 등 특수한 때를 제외하고는 남자가 출입하는 것은 금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옥 구조는 보통의 사대부 가옥보다 더욱 엄격하게 안채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구조이다. 청도 운림고택은 서울, 경기 지역 외에 남아있는 유일한 내시 가옥으로 조선 시대 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일설에는 이 집 만석지기 재산은 2대 이세륜(李世倫)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내려올 때 임금님께 받은 시업인 새들 논 30마지기가 그 시작이었다고 하는데 대가 내려가면서 계속 재산이 불어나 마침내 청도 지역은 물론이고 밀양, 대구, 경주 등 100여 리 밖에까지 광범위하게 논밭이 있었다.

그런데 이 집은 재산만큼 인심도 넉넉하여 배고픈 걸인이나 과객이 오면 내치지 않고 대접을 잘 했다. 한 번은 어느 과객이 돌연사하자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는데 그 땅이 명당이었다고 한다. 또 동리 앞 하천이 휘어져 비만 오면 홍수 피해가 막심했는데 막대한 사재(私財)를 출연(出捐), 냇물을 직선으로 흐르게 하여 이를 해결하는 등 동리의 숙원사업에 적극 나섰고 그리고 나라가 일제의 압박에 시달릴 때 거금의 독립운동 자금을 흔쾌히 내어놓은 애국심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의 재산도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토지개혁'이 전격 시행되면서 만석지기 시대도 끝이 나고 말았다.

 

이란 시제로 몇 줄 적었다.

문은 언제나 무겁게 닫혀 있었다/ 그 무서운 헛기침의 기압이 담장을 누르던/ 햇살 없는 북향의 안방을 밀고나오던 문은/ 또 다른 문에 덜미가 잡혀 주저앉았다/ 문들은 모두가 자기편이 아니라는 비애를 안고/ 늘 서로를 두려워하며 제 몸을 줄여 어둠과 마주했다/ 문은 서로를 모른 체 했고 열려는 힘보다는 닫으려는 힘의 편에 섰다/ 깊은 성곽/ 문풍지가 무심한 달빛 따라 울어 주어도/ 안방 문은 하얀 창호지만 어루만질 뿐 문풍지처럼 울 수 없었다.

  

  

  내시는 고려시대 국왕의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직이다.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자제(世族子弟)  또는 시경에 능통한 문신 중에서 임명했다. 뒤에는 환관이 등용되었다. 918년(태조1년) 내시 서기라는 직명이 있었으며 모든 의식의 집행과 어가를 수행하는 일과 유학자적 자질을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왕의 제사(制詞, 글)를 기초하였으며 국가기무를 관장하기도 했다. 또한 고려 지배관료의 중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내시부 - 고려시대 환관을 맡아보던 관청. 내시부 정원은 140명으로 알려져 있다.

환관 - 거세된 남자로 궁궐에서 일하는 내관. 이 환관 제도는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내시위 - 조선초기 궁궐 경비와 왕의 경호를 맡아보던 시위군.

내시 교관 - 조선시대 내시들을 교육하고 훈도하고 책임을 맡았던 관리.

상선 - 조선시대 내시부에 소속된 종2품 관리. 궁중에서 식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상온 - 조선시대 내시부에 소속된 정3품 당상관. 술 담그는 일 관장.

상전 - 정4품의 관직. 궁중 내 명령을 전달하는 일을 맡아 봄.

그외에도 의약관계에 종사한 상약, 서책을 관장한 상책 등이 있었다.  

 

3) 강림서당 편입니다

 

 

 

 

 

강림서당(講林書堂)

 

관리문중: 밀성박씨 정국군파 임당문중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622

임당리 북쪽에 서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3(출입문1, 화장실, ) 규모의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팔작 골기와 4칸의 강림서당(2, 마루2, 중당협실형)이 있다. 시멘트 기단에 초석을 놓고 두리 기둥에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형성했다. 마루에는 강림재’, ‘강림재서’, ‘강림재운’, ‘聖慕堂등이 걸려 있다.

대문 정면에는 따로 3(2, 마루1,좌실 우당형) ‘式好堂이 있다. 마루에 '식호당기'가 걸려있다.

별도의 공간에 永慕門이 편액된 문으로 출입하는 곳에 뱃집 건물 안에 밀성 박씨 정국군 10세손 承善派 祭壇이 있다.

 

배향인물:

1)강림재(講林齋) 박후종(朴厚種)

 본관은 밀성이며 자는 성배(聖培), 호는 강림재이다. 여말의 박위 장군의 12세손으로 조선 숙종 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헌대부 행 동지중추부사(正憲大夫 行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에 올랐으며 천성이 효우하였다. 경덕보민(敬德保民)의 정신으로 1787(정조11, 丁未) 대한재시(大旱災時)에 창원 굶주리는 백성 800명에게 1,000 여석의 곡식으로 구휼하는 등의 선행을 베풀어 그곳 사람 김익삼외 33인이 다섯 차례에 걸쳐 상소하여 포상케 하였다.(창원 자선편 수록)

 

2)박덕종(朴德種), 박창종(朴昌種)

강림재의 형제이다. 박덕종의 자는 천배(天培)이고 호는 남계(南溪)이며 벼슬은 통덕랑을 지냈고 형제들과 함께 임당리에 들어와 정착 세거하였다. 박창종은 호가 동계(東溪)이다. (식호당을 지어 두 분의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연혁: 1872(고종 9, 壬申) 창건했다. 처음에는 강림재로 편액하여 위선(爲先)과 교육의 도장으로 받들어 왔으며 그 후 1984 강림서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문중의 파조인 박위 장군은 경상도 도순문사로 고려 창왕 2(1389),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인 대마도 정벌로 공적을 이룩했으며 판자혜부사(判慈惠府使)로서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 등 9인과 함께 중흥공신에 올라 忠義伯에 피봉되어 지문하사부참찬문하부사 친군위 도진무(1)’ 등을 지냈다. 정국군을 봉향하는 華南書院은 밀양시 무안면에 위치하며 또한 정부가 박위 장군의 공훈을 기려 해군의 네 번째 잠수함을 박무함으로 명명하였다. 또 서북면 도순문사 재임시에 쓴 평양성 대동문 揖灝樓 현판은 북한 국보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정국군의 정신이 호국정신이 강림재는 물론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정국군파가 임당에 입향한 것은 1800년대이다.

  강림재공이 후손들에게 유명을 남겨 그 동한 세거하였던 창원을 떠나 밀양으로 환향하라고 하였던 바 이에 후손들이 본향으로 이거하고자 하였으나 같은 관향인 신지리 문중의 권유로 그곳 인근 오봉리에 잠시 이거한 후 산자수명한 이곳 임당리에 입향하게 되어 오늘날 밀성박씨 정국군파 임당문중을 이루게 되었다.  

  

 

 

 

 

 

제단

 

 

 

 

 

 

 

 

4)근수재 편입니다

 

 

근수재(近水齋)

 

관리문중: 경주 최씨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135

임당리 마을 중앙에 위치하며 앞에는 하천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구조: 문을 들어서면 3(2, 마루1, 중당협실형) 규모의 재사가 있다.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창호를 달고 구체부를 구성했다.

마루 전면에 재사 보호를 위해 창문을 달았다. 마당은 자갈을 깔았으며 벽돌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최남철(崔南喆)

본관은 경주이다.

 

연혁: 1582년에 창건했으며 그 동안 많은 중수를 했고 2007 丁亥에 중건했다. 해마다 방학이면 경주 최씨 후손들이 찾아와 충, , 예를 체험하는 교육장으로 활용한다.

경주 최씨들이 임당에 입향한 것은 400년 이상이 된다. 현재는 10 여호가 집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임당1리 마을회관

 

 

5)임당2리 명포마을에 있는 은구정 편입니다

 

 

 

 

은구정(隱求亭)

 

관리문중: 충주 석씨 문중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1889-4

임당2리 명포 마을 입구 큰 느티나무 아래 북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철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5(3, 마루2, 중당협실형)이다. 시멘트 기단 위에 두리 기둥을 세워 창호를 달았다. 홑처마이며 재사보호를 위해 정면 툇마루 앞에 유리문을 설치했다. 주변에 석축 시멘트 담장을 둘렀다.

 

연혁: 오래된 건물이라 허물어져 1975년에 새로 중건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했다.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뒤에서 바라본 모습

 

임당2리 명포마을

 

참고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문중 후손

-박희상님 외 마을 주민 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