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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신지리(2) 운강고택 및 만화정 그리고 여러 고택

청도군 신지리(2) 운강고택 및 만화정 그리고 여러 고택

 

                                               행전 박영환

 

 

운강고택(雲岡故宅)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74

금천면 소재지인 동곡리 남쪽의 금천교를 건너면 신지리다. 다리를 건너 250m를 걸으면 도로 왼편 골목 안쪽에 운강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연혁: 이곳은 원래 이서면 수야리에서 금천면 신지리로 택거한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이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11대 후손인 성경당(誠敬堂) 박정주(朴廷周,1789~1850) 1809(순조 9, 己巳) 분가하면서 살림집을 건축한 것이 이 고택의 시작이다. 재산이 천석지기에 이르렀던 그는 형과 아우의 집을 각각 신축해주고 자신의 집을 이개구자형(二個口字形) 8채를 갖추었다. 집을 지을 당시 대장간을 지어 자재를 다루었으며 목수가 숙식을 하며 3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이어서 그 뒤 박정주의 아들인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黙,1814~1875)이 고택을 크게 중건하였는데 그 이후 그의 호를 따서 운강고택이라 불려졌다. 그 뒤 1905년 운강의 증손자 박순병이 다시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주손인 박성욱이 이를 관리하고 있다.

건물 배치는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고 큰 사랑채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2개의 큰 자형을 이루고 있다. 짜임새 있는 건축 구조와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空間構成) 등으로 조선 후기 상류주택(上流住宅)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106호이다.

 

건물구조: 주택 전체의 건물 배열은 평평한 대지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튼 자형 건물군이 앞에 나서고 그 왼쪽 뒤편으로 안채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튼 자형 건물군이 이어지며 사당채가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다. 합하면 집채가 9동에 80칸이나 되는 큰 규모이다. 대지도 1,700여 평이나 되어 두 개의 넓은 마당과 사당 앞의 백류원(百榴園), 안채와 사랑채의 뒤뜰 등 널찍한 공간을 여유 있게 두었다.

 

 

*대문채: 솟을대문 상단에 雲岡古宅이 현액되어 있으며 대문을 들어와 내부에서 보면 곳간 등이 있는 6(소마굿간, 소 관련 창고, 2, 출입문, 고방)이다.

 

 

*큰 사랑채: 사랑채는 정면 5(좌로부터 대청2, 큰사랑방 2, 청지기방 1)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주두 위에 보머리가 올려졌고 창방 위에 소로가 3개씩 놓여 장혀와 도리를 받고 있다. 대청으로 난 사분합문에는 넉살무늬 불발기가 단정하며 대청벽에는 誠敬堂 편액과 성경당기가 걸려있다.

 

 

 

誠敬堂’ 편액은 운강 박시묵이 아버지 성경당 박정주를 기리는 마음에서 걸어둔 것이다.

 

 

 

 

운강집(雲岡集)

 

1908년 목판본 3

운강 박시묵(1814-1879)의 문집. 박정주의 아들로 정재 류치명의 문인이다. 이원조, 류후조, 류주목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1866년 병인 양요 때는 청도군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활약을 펼쳤다. 만년에 만화정을 짓고 운문산 아래 버려진 절을 학당으로 개조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중사랑채: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있으며 강학 장소로 활용됐던 곳이다. 4(좌로부터 서고, 2, 서당 1)이다. 서고는 마루방이며 통상 좌측방은 결혼한 남자, 우측방은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가 머물었다. 중사랑채는 백류원(百榴園)’으로도 불린다. 조선 중기 유학자 한강 정구 선생이 성주에 매화 100그루를 심어 세운 백매원의 이름을 따 백류원이라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과거 중사랑채 뒤뜰에는 수많은 석류나무가 심겨 있었다고 한다. 중사랑 정면에 백류원기가 걸려있다.

 

 

 

진계선생언앙소 - 언앙(偃仰)이란 편안하게 한가로이 쉰다는 뜻이다.

 

 

 

 

 

진계 박재형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그는 조선 헌종 4(1838, 戊戌), 운강 박시묵의 아들로 태어났다. 첫 이름은 박재성(朴在誠)이었으며 자는 백옹(伯翁) 호는 진계(進溪)이다. 어려서는 정재 유치명에게 배우고 뒤에는 조선 말엽의 유학자 성재 허전에게 학업을 닦았다.

그는 고종 7(1870)에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미더운 벗들과 사귀어 경사자집(經史子集)을 강론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인격을 도야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고종 광무 4(1900)세상을 떠났다.

그는 문집 아홉 책을 남겼는데 그 중에 해동속소학이 있다. 이 책을 편찬한 경위는 그의 발문에서 명시되었듯이 중국에서는 송나라 주희가 소학책을 만들어 훌륭한 교양서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책이 없으므로 그 체제를 본떠서 선조들의 사적과 그 아름다운 말과 행실 등을 삼국사기’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선인들의 저서 중에서 가려 모아 우리나라 것을 만든 것이다.

 

 

 

*광채: 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왼쪽 네 칸이 모두 광이고 오른쪽 한 칸이 마구간이다. 사면을 돌아가며 모두 널벽을 만들고 마구간을 제외한 정면 네 칸에는 칸마다 두 짝 여닫이 널문을 달았다. 문마다 네 귀에 거멀쇠를 대어 실용과 멋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마구간 앞쪽에 가로 걸린 말구유는 소의 여물통과 달리 중간 중간 칸을 질렀다.

 

 

*사당:4칸 뱃집이다.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일주문을 세워 출입하게 했다.

 

 

 

 

중문채

 

*꽃담: 사랑채와 중문간채 사이에 있는 담으로 기와조각을 이용하여 자와 간단한 꽃무늬를 만들고 그 위아래로는 귀갑문 비슷한 기하학적인 무늬를 장식했다.

 

*중문채: 광채라고도 한다. 왼쪽 한 칸을 비워 중문으로 쓰고 나머지 네 칸은 광으로 이용한다. 앞면의 모양은 곳간채나 고방채와 비슷하다.

 

*안채: 안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여자 가족이 거처하는 장소이다. 잘 다듬은 네모난 돌을 3벌대로 쌓고 세 개의 계단을 만든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방형 기둥을 세운 팔작지붕이다.

정면 7(왼쪽으로부터 부엌 2, 큰방2, 마루2, 작은방1) 측면 3칸의 남북으로 긴 건물로 안방에는 찬마루와 찬방이 부설되어 있고, 대청에도 여름철을 위한 찬광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왼쪽 끝에는 전면 안마당 앞의 기단을 1단 줄여 함실아궁이를 둔 건넌방이 배치되어 있다. 두 칸의 방과 대청마루 앞으로는 툇마루를 두었다.

이 안채는 디딤돌을 놓지 않고 직접 마루 귀틀에 나무로 계단을 만들었다. 건넌방 동쪽으로 둔 띠살무늬 문 앞에 쪽마루로 연결되는 특별한 문이 있다. 뒤편에는 방마다 후원이 보이는 광창을 두고 있는 점도 특색이다. 대청마루 후면에 있어야 할 바라지창을 한 칸에만 두고 한 칸은 바닥에서 높게 들어 만든 판벽에 통판 널문의 저장 창고를 만들어 놓았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의 모습으로 두 칸의 방마다 각각의 굴뚝을 세우지 않고 수평으로 빼내어 놓았다불어오는 골바람을 막기 위한 형태이다.

 

*행랑채: 맞배지붕의 5(왼쪽부터 방앗간 1, 알곡창고 1, 마루1, 침모방1, 부엌1) 자집이다 

 

부엌문- 판자에 네모꼴을 크고 작게 뚫어 부엌 벽에 낸 봉창과 부엌문 위의 넉살창이 있다.

 

디딜방아

 

화장실

 

화장실 벽의 조각된 난

 

 

*뒷사랑: 곳간 옆 사랑채와 연결된 2칸 방이다. 내당 여인들이 친가에서 온 남자들을 상면하기도 했다. 뒷사랑과 곳간채가 이어져 있는데, 이어지는 곳의 마루 아래를 터서 출입문을 내었다. 안채에서 사랑채 뒤뜰과 내외문을 지나 대문에 이르는 통로로서, 내외문과 마찬가지로 부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마련된 문이다. 안으로 출입할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어 주인이 안채로 드나들거나 주안상을 들일 수 있다.

 

*곳간채: 정면 6칸 측면 2칸에 벽면을 모두 널벽으로 처리한 건물이다. 널문에는 역시 거멀쇠 장식이 두드러진다. 뒷면 벽은 아래와 위를 구분하여 아래는 통나무를 적당히 다듬어 세로로 길게 이어 맞췄다.

 

 

광 내부

 

광 뒤편과 사랑 뒤편에 있는 후원

 

 

*칠성바위: 중사랑 뒤편은 석류를 많이 심었던 곳이다. 그 터에 일곱 개의 바위가 있어 칠성 바위라 하는데 고인돌로 추정된다. 옛날에 이 바위 앞에서 소원을 기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음은 만화정 편입니다.

 

 

 

 

 

만화정(萬和亭)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7-12

동곡리에서 919지방도를 타고 금천교를 넘어서는 지점 왼쪽 강 언덕위에 동창천(東倉川)을 바라보며 서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전면의 토석 담장 사이로 난 일각 대문인 유도문(由道門)을 들어서면 높은 축대 위에 자형의 정자가 배치되어 있다. 정자의 우측에는 고직사와 곡간채를 두었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자형 건물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온돌방 2칸을, 좌측에는 온돌방 1칸을 연접시켰는데, 좌측 온돌방의 전면으로는 헌함이 있는 누마루 2칸을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마루는 정자의 방과 앞뒤로 통하는 통로이다. 처마를 받치는 활주가 보통 4개인데 누마루를 지탱하기 위해 하나를 더 둬 모두 5개의 활주를 두었다.

만화정은 정자 주변의 바위와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자연을 그대로 살려 지은 정자다. 정자 앞에서 큰 그늘을 만들어내는 수 그루의 떡버드나무가 있다.

만화정에 소장된 현판은 모두 25점이다. 만화정의 정문(正門) 유도문(由道門)’이 편액되어 있다. 이는 ()를 근본(根本)으로 한다.’라는 뜻이다. 박시묵의 아들 박재형(朴在馨)이 지은 유도문 중수기(由道門 重修記)도 있다.

정자 정면 위에 만화정(萬和亭) 현판이 있다. 강당 내부에는 둘러가며 편액들이 들보에 걸려 있다. 이들 현판들은 대부분 꽃이나 새, 나무들의 그림을 넣어서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주옹만영(主翁謾詠) 편액은 박시묵이 지은 시()를 새긴 것이다.

만화정 중수 소지(萬和亭 重修 小識)는 박시묵의 증손자인 박순병이 1905년 만화정을 중수한 후에 그 사실을 1923[계해 9]에 기록한 것이다.

만화정에 걸려 있는 현판들 가운데에는 당대의 석학들로 이름난 만귀(晩歸) 이주현(李周賢),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성재(性齋) 허전(許傳) 등의 기문(記文)들도 있다.

옆에 별도의 출입문을 통하는 공간에 5칸 관리사(3 마루1, 부엌1) 3칸 창고채가 있다.

 

연혁: 이 정자는 이곳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운강고택의 별서로 소요당 박하담의 12대손으로 통정대부, 좌승지에 오른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黙)[18141879] 1856년 건립하여 강론하던 곳이다.

만화정의 명칭: 운문 들녘의 이름이 만화평(萬花平)인데, 박시묵은 정자가 만화평을 굽어보는 점을 감안하여 화()를 화()자로 바꾸어 만화정(萬和亭)이라 이름 지었다.

()의 뜻은 중용(中庸)에서 ()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는 천하에 통용되는 도()’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중화(中和)의 도리에 근본을 두고자 했던 것이다.

만화정은 6.25전쟁때 피란민 20여만명이 동창천에 몰리자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청도를 방문했다가 하룻밤 묵고 간 곳이기도 하다.

 

 

 

 

 

 

 

 

증 통정대부좌승지운강선생박공지비

 

 

청도문화연구회 회원들이 편액 및 정자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있다

 

 

다음은 여러 고택의 이모저모입니다.

 

1)섬암고택

 

 

 

<섬암고택 사랑채앞 - 김기한(좌), 박희상(가운데)님을 맞아 담소를 나누는 섬암고택 박성규님>

 

섬암고택(剡巖故宅)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73

금천면사무소에서 신지리 방향으로 난 지방도 919호선을 따라 오다, 신지 1리 새마을 회관 부근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구조: 가옥의 전체적인 배치는 자형의 안채를 제외한 중문채, 도장채 등은 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 중문사랑채, 헛간채, 고방채, 대문채 등이 일곽을 이루는 전형적인 양반주택의 공간구성을 이루었으나 1990년 대구-청도간 2차선 국도 도로확장공사로 정면 5, 측면 3칸인 사랑채와 정면 4, 측면 1칸인 대문채가 철거되어 경역이 축소되었다.

사랑채와 안채의 통로는 돌아서 통행하게 하여 양반 가옥 안채의 폐쇄성이 나타난다. 또한 안채에 비하여 기단과 지붕을 높게 하여 집 전체를 화려하게 꾸며서 이 지방에서는 격식을 갖춘 집으로 알려졌다.

외부공간은 안마당·사랑마당·바깥마당으로 구성되었는데, 안마당은 생활공간으로서 부엌 맞은편에는 약 50년 전에 판 우물이 있다.

 

연혁: 19세기 중엽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의 둘째 아들 박재소(朴在召)[1840-1873]가 분가하면서 건립하였는데 아들인 섬암(剡巖) 박병현(朴秉鉉)[18651929]이 거주하면서 섬암 고택이라 하였으며 현재는 후손인 박성규(朴性奎)가 거주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1992 11 26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2)운남고택

 

안채

 

 

사랑채

 

 

운남고택(雲南故宅)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76

금천면사무소에서 신지리 방향으로 난 지방도 919호선을 따라 오다 신지리 새마을 회관 근처 운강고택앞에 위치하고 있다.

1992 11 26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70호로 지정되었다.  150년 전인 조선시대 말기에 운강 박시묵(朴時默)의 셋째아들 박재충(朴在忠)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 서쪽에 인접해 있다. 후손인 박성림이 소유, 관리한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자형의 맞배기와집인 사랑채(정면 6칸 측면 1칸 반)와 안채(정면 6칸 측면 1)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의 좌측에는 4칸 규모의 우진각집인 헛간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 자형의 배치를 이루게 하였다. 대문채는 3(대문, 1, 고방1)이다. 서쪽에 철대문이 하나 더 설치되어 있다.

원래 안마당 동쪽에 중사랑채가 있었으나 1935년경 불타 없어졌다. 안채의 대청은 툇마루 정도의 공간을 두고 문을 달았으며, 사랑채는 대청 끝의 보괴임에 태극문양을 그려넣어 멋을 부렸다. 사랑채 대청의 보와 보 괴임의 구조가 특이하고 아름다운 고택이다.

헛간채를 제외한 안채·사랑채·대문채는 남남서향으로 배치되었고, 헛간채 뒷마당에서 대문채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 가옥 전체를 감싸면서 텃밭이 형성되어 있다.

 

연혁: 조선 후기에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의 셋째 아들인 박재충[18501869]이 분가를 하면서 건립한 가옥(家屋)이다. 1865년에 착공하였으나 박재충이 이듬해에 요절하자 중단되었던 것을 양자인 운남(雲南) 박좌현(朴佐鉉)[18701947] 1892년에 완공하였다.

 

 

3)명중고택

 

 

 

명중고택(明重故宅)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80

운강고택 앞, 운남고택 옆에 위치한다.

 

건물구조: 전체적인 배치는 자형의 사랑채, 안채, 방앗간채, 곳간채가 튼 자형을 이루게 하였다. 안채는 정면 5(2, 마루2, 부엌1, 중당협실형)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건넛방 1칸을, 우측에는 안방과 정지를 각각 연접시킨 후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방앗간채는 좌측에 위치하며, 정면 3, 측면 1칸 규모의 우진각기와집이다. 평면은 전면 좌측으로부터 각각 방앗간[안대문], 찬간[고방], 아랫방 1칸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곳간채는 정침의 우측에 직각으로 가로놓여 있으며,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우진각 기와집이다. 출입문은 푸른 철대문이다.

 

연혁: 명중고택은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18141875]의 손자인 지암(旨巖) 박내현(朴內鉉)[18611896] 1881년 별서(別墅)로 건립하였다. 그 뒤 박내현의 둘째 아들인 명중(明重) 박순희(朴淳憘)[18961934]가 입주하면서 명중 고택(明重 古宅)이라 하였다.

1992 11 26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69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 4 8일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173호로 승격되었다.

 

 

 

4)도일고택

도일고택(道一故宅)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1 237(선암로 465)

금천면사무소 앞의 지방도 919호선을 따라 매전면 방향으로 약 1,100m 정도 이동하면 길가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운강고택을 비롯한 섬암고택 등이 있다.

 

건물구조: 동향 대문채를 들어서면 영남 평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구조인 자형의 사랑채, 안채, 별당채, 헛간채가 튼 자형의 배치를 취하면서 좌정했다.

안채는 부엌, , 마루, 방으로 구성된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대청의 전면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뒷마당 쪽으로 쌍여닫이 판장문이 두 곳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안방 전면의 쪽마루 위쪽에는 시렁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 중심에 위치한 기둥은 원주를 세웠다.

사랑채는 광, 중문, 작은 사랑방, 큰 사랑방, 대청으로 구성된 정면 5, 측면 1칸 규모이다.

별당채는 전면 4, 측면 1칸의 규모로 좌로부터 1칸의 도장, 1칸의 방, 2칸의 광을 두고 있으며 사방이 담으로 막혀 있다. 헛간채는 정면 5, 측면 1칸 규모인데 좌로부터 헛간, 외양간, 방앗간이 일렬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간채는 정면 3(출입문, 초당방1, 고방1)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혁: 이 건물은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18141875]의 동생인 운서(雲西) 박기묵(朴起默)[18301911]이 광무(光武) 3년 합천 군수로 재직하던 1899(己亥)에 건립한 가옥이다. 1900년 이후 박시묵의 손자 박채현의 소유로 되어 있다가 다시 시묵공의 삼종질(9)인 박재수(朴在守)[18941973]의 소유가 되면서 그의 자()를 따라 도일 고택이라 하였다. 이 가옥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주택이며 사랑채, 안방, 별당, 대문채 등 원래 규모의 배치 형태를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어 마을 전통 경관 조성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1992 11 26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참고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디지털청도문화대전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운강고택과 만화정(2010, 경인문화사)

-조선후기 상류 주거공간에 관한 연구(정진희, 울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해동속소학(김종권 역주, 명문당)

- 면담: 고택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