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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1) 선암서원 및 여러 재실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1) 선암서원 및 여러 재실

 

                                  행전  박영환 

 

   금천면 신지리에는 마을을 감싸는 어성산과 임진왜란 때 의병의 절의가 숨쉬는 봉황애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운문천에서 흘러온 맑은 물줄기가 세심대(洗心臺)며 용두소 등 절경을 이루며 부지런하게 흐르고 있다

  이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을 지키고 가꾼 사람들의 혼을 담은 풍성한 유무형 문화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어느 곳부터 먼저 찾아야할지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지석묘가 흩어져 있는가 하면  돌칼돌도끼토기 파편 등 선사시대와 삼한시대의 유물의 흔적이 있고 서원이며 재실 고택들이 즐비하고 근래에는 마을 중간에 신지생태공원까지 조성되어 이곳에서 문화활동이 활발하다. 

   선암서원은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79호이며 청도 운강 고택 및 만화정은 중요 민속 문화재 제106호, 섬암 고택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68 명중 고택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69 ,운남 고택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70 , 도일 고택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71호이다.

  여기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6호인 해동 속소학』 판목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108호인 십사 의사록』 판목 보물 제917호인 배자예부 운략』 판목이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은 다른 마을과 달리 4부 정도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 

 1)선암서원 및 여러 재실

 2)운강고택, 만화정 및 또  다른 고택

 3)자연 속의 사람, 사람 속의 자연

 4)운천서원, 옥련암, 신지리 교회

 

 1)선암서원 및 여러 재실

 

  선암서원에 배향된 소요당 박하담은 청도 밀양 박씨 소고공파를 열었던 소고공 박건의 손자이다. 박건의 생몰연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의 이주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조선 세종 후반기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때가 대략 20세 전후가 될 것 같다. 

  소요당 박하담은 아버지 부사직 박승원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 아래 박하청, 박하징 두 동생이 있다. 형제의 이름에 모두 '河'가 들어간 것은  외조부 하숙부 은혜를 잊지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들 소요당을 비롯한 3형제는 외할아버지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출중한 학문적 기반 위에 인품이 높아 청도 유림을 이끌어가는 구심이 되었다.  

  소요당은 일찌기 산수가 아름다운 운문산과 동창천 주변에 관심이 많았다. 19세에 운문산에서 삼족당과 맹자를 읽었고 33세에 운문과 눌연에서 산책하고 독서를 했다. 39세에 김대유 공과 사창을 건립했으며 42세에 사창 인근에 운수정을 지었다. 43세에 입암 눌연 위에 소요당을 짓고 아호로 삼았으니 이때가 이서면 수야에서 이주를 한 것 같다. 그 때 3형제 중 박하청도 같이 왔고 막내 동생인 박하징은 고향을지켰다. 이때 아들과 손자 중에는 수야에 남아 있거나 뒤에 다시 수야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본인도  64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을 지키기 위해 수야리 이화(귀일)에 돌아왔다가 시묘를 마치고 돌아가기도 했다. 

  아무튼 박하담이 이곳 신지에 터전을 잡은 이래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신지가 밀성 박씨 소요당파의 터전이 되었다. 

                                       

 

선암서원(仙巖書院)

 

 관리문중 : 밀성(密城)박씨 소요당파(逍遙堂派)

 

 소재지 : 경북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557-27

 

 건물구조 : 대문(고방채: 박공지붕9)을 들어서면 왼편에 안채(팔작지붕 정면5칸 전퇴홑처마)가 있고 오른편에 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 : 팔작지붕 정면4, 2칸 마루2)이 있는데, 이두 건물은 낮은 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고방채(박공지붕8)이고 이 네 건물이 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고방채 너머로 선암서원(仙巖書院 : 팔작지붕 전면5칸 전퇴홑처마)이 있으며, 강당에 소요당(逍遙堂)’현판이 있다. 선암서원 뒤로는 여러 서책이나 목판을 보관하였던 장판각(藏板閣3)이 있다. 서원의 건물배치는 상류층의 주택에 서당(書堂)건물이 첨가된 흥미롭고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배향인물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 14791560)

자는 응천(應千)이요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송은 박익(朴翊)의 현손(玄孫), 우당 박융(朴融)의 증손, 입청도 선조인 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의 손자이다 성종 10(1479, 己亥)에 이서면 수야리에서 출생하여 중종조(丙子)에 생원, 기묘(己卯)에 현량과에 피천(被薦)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정암 조광조(14821519)등 신진사류가 피화(被禍)한 기묘사화(1519)이후 그동안 자신이 지었던 글을 모두 모아 소각(燒却)하였다.

갑신(甲申)에 사산감역(四山監役), 을유(乙酉)에 사재감봉사(司宰監奉事), 무자(戊子)에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불취(不就)한 삼징불기(三徵不起)의 징사(徵士)이다. 김삼족당, 조남명, 곽경재, 박송당과 교의가 깊었으며 풍월자오(風月自娛)로 승경(勝景) 가처(佳處)에 정사(亭榭), 사암(寺庵)을 건립하였다.

삼족당 김대유와 산간지대로서 화물유통이 어렵고 교통이 불편한 청도의 웅현(熊峴) 동쪽 지방인 이곳 동산동(東山洞: 청도군 매전면) 주민들의 조세공납의 편의와 천재에 따른 구휼(救恤)과 위민의 방책으로 사창(社倉)인 동창(東倉)을 설치하여 향민들에게 큰 공덕을 지었다.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등 여러 시문이 많으며 찬오명(撰五銘) 오잠(五箴) 춘추대일통론(春秋大一統論) 가훈십조(家訓十條)등의 일작과 도주객관상량문(道州客館上樑文) 향노당상량문(鄕老堂上樑文)등이 문집에 실려 있다. 명종(庚申)에 팔십이세로서 종로 임천하였다. 선암서원과 우연서원에 제향 되었다.

 

 연혁 : 1521(中宗16, 辛巳 )소요당 박하담이 눌연(訥淵) 위에 대()를 모아 정사(亭榭)를 짓고 소요당이라 게액(揭額)하였다. 선조 10(1577)에 군수 황응규(黃應奎)의 주선으로 운수정(雲樹亭)의 향현사(鄕賢祠) 위패를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선암사라 묘호(廟號)를 고치고 소요당 일대를 선암서원(仙巖書院)이라 하였다. 1676(숙종2)에 군수 서문중(徐文重)은 사우(祠宇)를 중창하여 묘호(廟號)를 숭경사(崇敬祠)라 고치게 하고 선암서원 강당을 중수하여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춘추로 봉향(奉享)하던 중 1868(고종5) 훼철(毁撤)되었다. 1878(고종15) 선암 옛터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소요당(逍遙堂)을 새로 짓고 이를 별구로 구획하여 정랑, 행랑, 고방, 득월정을 자형으로 배치 원형대로 중건하였으나 사우(祠宇), 쌍청루(雙淸樓)등 몇몇 건물은 복원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을 배향하던 사우였으나 지금은 박하담 한 분만 모시고 있다.

 

 선암서원의 문화재

 

1) 선암서원(仙巖書院) 수량 5,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79

 

번 호

명 칭

재료

구조 형식 형태

규격

수량

1

仙 巖 書 院

목조

八作지붕 正面5間 前退홑처마

18.5

1

2

안 채

〃 〃

13.4

3

사랑채(得月亭)

正面4間 房2마루2

8.4

4

고 방 채

박공지붕 9

20.5

5

8

16.2

 

 

2) 14의사록 판목(14義士錄 板木) (104206),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08

임진왜란 당시 청도지역 밀성박씨 소고공파일문(嘯皐公派 一門) 14의사의 창의사적을 기록한 책판, 1867(고종 4) 제작

 

3) 해동속소학 책판(海東續小學 冊版)(64 128),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08

아동의 윤리교육을 위한 교재. 자주적 입장에서 우리나라 명유(名儒)들의 가언(嘉言), 선행(善行)등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1884(고종 21) 제작.

 

4) 배자예부운략 책판(排字禮部韻略 冊版)( 83162), 보물 제917

송나라 정도(丁度)가 편찬한 책으로 시나 운문을 지을 때 음[]을 찾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초서, 당시 예부(禮部)의 과거 시험을 위하여 간행된 운서(韻書)이다. 1615(광해군 7) 제작.

 

 * 위의 판목 및 책판들은 도난을 우려하여 안동 국학진흥원에 기탁하여 보관하고 있다.

 

 

 

다음은 도주지(1958, 김석봉 편)에 수록된 내용을 옮겨온 것이다.

 

仙巖書院錦川面 薪旨洞 淸流曲廻한 곳에 자리잡고있으니 三足堂 金大有先生 逍遙堂 朴河淡先生 享祀하던 곳이다 始建 東倉에서 建立 雲水亭에서 兩先生 歿後 戊辰年 (西紀一五六八年) 位版 安置하여 鄕賢祠로서 享祀를 받들던 것을 丁丑年(西紀一五七七年) 郡守 黃應奎 周旋으로 仙巖으로 옮기어 仙巖書院(仙巖祠)으로 奉享하였고 高宗朝毁撤令  仙巖書堂 逍遙亭 懸板으로서 至於今日하다 肅宗丙辰(一六七五年) 郡守 徐文重 一次重建하였으나 現建物 後孫 朴衡黙 朴在馨 主管下 戊寅(一八七八) 三次重建한 것이다 院前 淸潭曲流 眺望 景致 佳麗하여 春秋季節에는 遊興探客 不絶 하여 可謂妥靈之所라 아니할 수 없으며 郡誌 有巖如龍渡水半江而止 高危奇俊視如畵屛 多勝景이라 하였다 그런데 此地 本來 逍遙堂生前 四十三歲時 建立 亭宇로서 晩年에는 講堂 常在하여 家禮周易等 講義하여 後進 敎導  이며 또다시 特記할 것은 院內倉庫에는 松隱 憂堂 逍遙堂 悌友堂 十四義士等 文集木版 保管되어 있으며 또 黃尨村 大拜時 內賜物 食盤 成聽松 揮毫 屛風 木版等 珍寶 保管되어 있으며 더욱이 禮部韻 原版 保管되어 있으니 學界에서도 重要視 하는 材料이다

逍遙堂 行略 松隱公 朴翊 玄孫으로서  應千 成宗朝 己亥年 伊西面 水也里에서 出生하고 中宗朝 丙子 生員 甲申 四山監役 不就 乙酉 司瞻奉事 不就 戊子 掌隸院 司評 不就 三徵不起 道學者로서 三足堂 曺南冥 成聽松 郭警齋 朴松堂 의가 깊었으며 風月自娛 勝景佳地 亭宇寺庵 建立하고 三足堂金先生 東倉 設置하여 郡民 稱頌이 높았으며 鄕土儒生들과 더불어 詩墨仙境 終老林泉하니 明宗庚申年 八十二歲였다 著詩文이 많고 撰五銘五箴 春秋大一統論 家訓十條等 晩年作 文集二卷 收錄 되어 있다 南谷 權瑎先生이 쓴 崇敬祠上樑文 逍遙堂 朴公 志高以確 性寬以莊 居家著百行之源 鄕黨咸服 其讀書 窮六經之奧 縉紳交薦 其賢束帛之招屢勤 踰垣之志 難奪物表 皎皎箕 穎之高踪 雲際冥冥 指鴻鴣之 라 하여 先生 德望 推仰하였다 墓在 伊西面 七葉洞 三聖山 葛庵 李玄逸 有撰文

 

 

 

 

 

 

장판각

 

 

 

 

 

14의사록 판목 탁인

 

배자예부운략

 

 

 

 

 

 

 

 

 

 

청도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제1회 박훈산 시인 기념 백일장 장소로 활용되었다.

 

 

 

근래에는 이곳이 개방되어 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관리사

 

 

 

선암서원 앞에 용두소가 있다

 

 

 

 

 

 

다음은 월호재 편입니다.

 

 

 

 

월호재(月湖齋)

 

관리문중: 밀성 박씨 성와공파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죽전길 18

금천면 남쪽으로 난 지방도 987호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신지 2리 죽전 마을 내에 있다. 마을 뒤를 나직하게 감싸는 얕은 구릉을 배경으로 남향이다.

 

건물구조: 와가 일주문을 들어서면 홑처마 맞배지붕에 한식기와 4(마루2 2, 좌당우실형) 재사가 있다. 온돌방 뒷벽에는 벽장이 부설되어 있고, 2칸 온돌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달아 서로 통하게했다.

자연석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창호를 달았다. 주상부는 간략한 장혀수장집으로 꾸몄다. 주변에 토석 담을 둘렀다.

 

배향인물: 성와(城窩) 박하청(朴河淸)[14811541]

본관은 밀성. 자는 응도(應圖), 호는 성와(城窩). 송은(松隱) 박익(朴翊)의 현손이며, 박융(朴融)의 증손, 밀양 박씨 청도 입향조 박건(朴乾)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박승원(朴承元)이고, 어머니는 경절공 하숙부(河叔溥)의 딸 진주 하씨이다. 소요당 박하담(朴河淡)의 동생이자, 병재(甁齋) 박하징(朴河澄)의 형이다

그는 13세에 맏형 박하담과 함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포기하고 두문불출하면서 삼족당 김대유·청송 성수침·경재 곽순·남명 조식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효행이 뛰어나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을 증직 받았다.

묘소는 이서면 수야리 관음곡에 위치한다.

 

연혁: 후손들이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에 건립했으며 근년에 지붕을 개량하고, 부식이 심한 서까래를 교체하는 등 부분 수리가 있었다.

 

 

박하청 증직 교지- 성와 박하청을 '통훈대부사헌부지평'에 증직하는 교지 - 13세에 맏형 박하담과

함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포기하고 두문불츨하면서 삼족당 김대유, 청송 성수침, 남명 조식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다음은 입암재 편입니다

 

 

 

 

 

 

 

입암재(立巖齋)

 

관리문중:밀성 박씨 국헌공파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339

선암서원 좌측에 있으며 동창천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에 바라보이는 바위는 박경선(국헌 박경윤의 동생)이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적과 싸우던 중 왜장을 끌어안고 떨어져 장렬하게 전사한 천척절벽인 봉황애이다.

 

건물구조: 목조와가 팔작지붕의 정면4(3, 마루1, 중당협실형)이다. 좌측방은 퇴까지 방으로 설치하여 앞쪽과 마루를 통하는 우측에 사분합들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헌함을 설치하여 정자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배향인물: 국헌(菊軒) 박경윤(朴慶胤)[1555-1626]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효중(孝仲), 호는 국헌이다.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아버지 장사랑 박이(朴頤), 어머니 만호 예신충(芮信忠)의 딸 의흥 예씨(義興芮氏) 사이에서 사형제 중 둘째로 출생했다. 조부는 소요당 박하담(朴河淡), 이며 부인은 장사랑 김응권딸이다.

임진란 의병창의에 여러 형제, 종반과 자질들 열네 분이 싸움터로 나아갈 것을 맹세하고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국헌은 전쟁을 맹렬히 전개 중인 선조 25년에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 선무원종 2등공신(宣武原從 2等功臣)에 녹훈되었.

무예로 사적(仕籍)에 올랐으나, 문필로 스스로를 즐겨 선암사 곁에 퇴거하여 시를 짓고 살았다. 제우당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예부운략(禮部韻略)의 판본을 영동까지 가서 복각하여 공전(公傳)하게 하였다. 1816년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자로 증직한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묘소는 금천면 박곡동 독방산(獨防山)에 있으며 용강서원의 충렬사에 춘추 제향하고 있다.

장남 행와(杏窩) 박린朴璘) 선무원종공신 2등공신(宣武原從 2等功臣)에 녹훈된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에 제수되었으며 둘째 아들박구(朴球) 역시 선무원종 3등공신(宣武原從3等功臣)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에 제수었으니 그야말로 임진란 3부자 공신이 된 것이다.

 

 

연혁: 일명 국헌정(菊軒亭)으로도 불리는 이 재사는 1901년에 창건했으며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했다. 이곳은 소요당 박하담이 운명(殞命)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박경윤<국헌 유집, 14의사록 수록>

 

 

 

임란 창의 청도 14의사 합전(좌)과 박경선 공 순절 표석(우)

 

봉황애

 

여기 선암에서 서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이 어성산이며 그 우편이 방응봉, 좌편이 봉황애이다.

임란 당시 이 천척 절벽에서 천성만호 박경선공이 왜장을 안고 떨어져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다. 그의 충혼을 기리어 순절추모비를 이곳에 삼가 세우다.

 

 

다음은 황연재 편입니다.

 

 

 

 

 

 

 

 

 

황연재(黃硯齋)

 

관리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263-1(금천면 섶마리 2 15)

금천면 내에서 남쪽으로 난 지방도 987호선을 타고 동창천을 건너면 신지 1리 네거리 마을이 나온다. 이 네거리 마을 남쪽 끝의 마을 복판에 골목길 안에 남동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장방형 대지에 목조와가 정면 4(3, 마루1, 중당협실형)의 오래된 재사가 있다. 시멘트 기단 위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사방으로 퇴를 두고 여기에 툇마루를 시설한 것은 보기 드문 구성이다. 우측편에 고직사가 위치해 전체적인 배치는 자형이다. 황연재 현판이 편액되어 있으며 완산 유연즙(柳淵楫) 완연재기가 마루에 걸려 있다. 주변에 토석 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경암(敬庵) 박규(朴珪)

본관은 밀양이며 자는 계헌(季獻) 호는 경암이다.

소요당 박하담의 증손으로 학문과 덕행이 높았으나 명리를 바라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여 후학의 계도에 힘썼다. 뒤에 사림의 천거에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연혁: 1853년 후손들이 추모지소로 건립하였다. 그 뒤 몇 번 중수했으며 재사 일곽 전방에 부속채가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다음은 만학재 편입니다

 

 

 

 

 

 

만학재(晩學齋)

 

관리문중: 밀성박씨

 

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654(금천면 죽전길 18)

 

건물구조: 일주문을 들어서면 홑처마 팔작지붕 와가의 정면 4(2, 마루2, 좌실우당형) 측면 2칸 규모의 재사가 있다. 시멘트 기단에 초석 위 두리기둥을 세우고 세살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재사 전면에 晩學齋가 현액되어 있다. 방 전면에 툇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시켰다. 좌측에 4(2, 마루1, 부엌1)의 하당이 있으며 마당에는 자갈을 깔았고 토석담장을 둘렀다.

주변에 은행나무 등 정원수가 잘 가꾸어져 있다.

 

배향인물: 만학(晩學) 박순덕(朴洵德)[1836-1915]

본관은 밀성이며 호는 만학이다. 박필로(朴必魯)의 아들로 후산(後山) 박성묵(朴星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평생을 처사로 살며 정헌(定軒) 이종상(李種祥),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송라(松羅) 이긍연(李兢淵) 등과 학문적 교유를 하였다

 

 

연혁: 1982년에 창건했으며 그 뒤 몇 차례 중수했다. 만학재는 해마다 후손들이 모여 조상의 유덕을 추모하고 방학 때는 자녀들의 충효교실로 활용된다.   

 

 

박순덕의 문집 '만학재집'

 

 

신지리

 

 행정리로 신지 13리가 있으며 신지는 선마리라고 부르고 섶마리라고 쓴다. 자연부락은  선호(仙湖), 선바위사거리[네거리], 죽전(竹田), 신목정어성지부골이 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집필자: 박윤제)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선호 : 임당리에서 내려오는 운문천이 감돌고 있는 마을로 선바위가 있어서 선호라고 한다. 선호는 선암 서원 작은 문 앞에 있는데, 옛 기록에는 용이 물을 건너다 강 중간에서 멈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959년 태풍 사라 때 용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이 부러져서 떨어져 나가 지금은 밑둥치가 남아 있다. 이 바위 아래 깊은 소가 있으며 그곳이 바로 선호(仙湖)이다. 박하담은 옛날 작은 절 곁에 소요당을 짓고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하며, 그의 후예들이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선바위: 봉황애 앞 마을이며, 봉황애 아래 마치 바위가 서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선바위라고 한다

죽전: 대밭골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뒤에 있는 언덕 위에 대밭이 크게 형성되어 있어서 죽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네거리:  울산, 경주, 경산, 밀양으로 가는 길이 동서남북으로 나 있어서 네거리라고 한다. 네거리에는 시장이 있었는데 1일과 6일이 장날이며, 뒷날 동곡장의 전신이기도 하다.

신목정: 옛날에 있던 정자(亭子)[나무 아래 쉬는 장소] 나무가 죽고 새로 정자 나무가 생겨서 신목정이라고 했다. 이곳은 네거리 장날에 사람들이 쉬어서 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어성:  선호, 즉 섶마리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뒷산이 어성산에는 어성산성이라는 작은 성이 있다. 어성산성의 길이는 약 100m이며 높이는 불과 1m 미만이어서 성이라기보다는 돌담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성산은 보기보다 험악한 산으로 임진왜란 때 산동의 의병들이 숨어서 활동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길부: 질부(), 즉 길 옆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이 길이 운문사를 거쳐서 언양이나 울산으로 가던 길목이 되는데 길부가 길 입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옥녀봉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옥녀에게 좋은 지아비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길부(吉夫)라고 한다는 말도 전한다.

 

 

한편 청도군지에는 신지리(薪旨里)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신지동(薪旨洞), 길부동(吉夫洞)을 합친 마을이다. 지석묘가 흩어져 있는 죽전(竹田) 마을 뒷편 구릉(土城)에서 발견되는 석도, 돌도끼, 토기 파편 등 선사시대와 삼한시대의 유물로 보아 주민이 정착한 것이 선사시대이나 구명이 되지 않음이 못내 아쉽다.

 

 신지(薪旨)를 선호(仙湖), 섶마리, 섶말, 선마리 등으로 부른다. 처음에는 용두소(龍頭沼) 소요대(逍遙臺)와 같은 절승지에 선인(仙人)이 우유(優遊)할만한 곳이라 선호(仙湖)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섶마리에는 두 설이 있다. 하나는 선호(仙湖) 부근에 숲이 울창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과 밀양 박씨가 입촌하여 잡목 숲인 섶을 벌채하여 마을을 일구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두 설이 다 섶(잡목)에서 기인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섶마을이 구개음화로 섶마리, 선마리로 충분히 발음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박은 섶을 따라 올라가야만 많이 달린다는데서 박씨(朴氏)의 후손이 번창하라는 뜻에서 섶마을로 동명을 했다하나 과연 그런 뜻이 함유되었는지는 의문이 간다. 섶마을이 섶마리로 변하자 신지(薪旨)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진다.

 

입암(立岩)은 선방우, 선바위로 박하담 공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인데, 마을옆 하천변에 용두 모양의 바위와 물결이 굽이치면서 이루어진 소()가 있어 용두소(龍頭沼)라 이름 붙였는데 이 소()의 맞은편에 우뚝 선 바위가 있어 박 공이 초당의 이름을 입암정사(立岩情舍)라 명명한데서 유래하여 마을 이름도 입암(立岩)이라 했다 한다.

 

죽전(竹田), 대밭은 박공이 동생(박하청)을 이곳에 이주하게 했는데 대밭을 일구어 마을을 열었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이다.

 

길부(吉夫), 자부골은 동명에 두 설이 있다. 하나는 마을 뒷산의 모양이 옥녀가 머리를 빗는 형국이라 옥녀에게는 좋은 지아비()가 있어야 한다는 속설에 따라 길부(吉夫)라고 붙였다는 설과 또 하나는 이 마을 남자들이 단명이라 지아비가 오래 살고 좋은 지아비가 되어 달라는 뜻에서 붙여졌다는 설인데 전자가 이치에 맞지 않나 믿어진다.

 

어성(御城), 어성(漁城)은 임란 당시 의병들이 마을 뒷산에 축성하여 왜병과 싸웠다. 이 때 성 이름을 어성(御城)이라 하여 동명도 어성(御城)또는 어성(漁城)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설로는 냇가에 고기가 많이 잡혀서 어성(漁城)이라 했다하나 확실치는 않다.

 

금천(錦川)을 원래 선천(線川)이라 했다. 일제에 합병되어 1914년 행정구역 조정시 박시묵 공이 금천(錦川)으로 개명했다.

 

  이상 신지 마을 지명 유래를 옮겨보았다. 아무튼 '선마리'인지 '섶마리'인지 현재도 그렇게 불려지고 있는데 우리 고향 수야쪽에서는 '선마리'라고도 하지만 '선마루'라고도 한다.  이때 '선마루'는 '先마루'로 느끼며 불렀던 것 같다.  '先마루' 이는 '先'과 마루=우두머리, 으뜸'의 의미가 결합된 말이다.이는 '큰집'이란 뜻이 된다. 원래 소요당 박하담, 성와공 박하청, 병재 박하징 3형제가 수야에서 태어나 같이 자랐는데 어느 날 소요당과 성와공이 이곳으로 택거하여 옮겨갔으니 수야쪽 병재 자손들은 이곳이 '큰집' 이 있는 마을 즉 '선마루'가 되는 것이다.

  아니면 이곳 사람들이 먼저 '큰집'을 의미하며 으뜸의 긍지와 의지를 담아 불렀을 수도 있다. 만일 이쪽이 고증될 수만 있다면 '섶'쪽에서 풀어오는 것보다는 더 의미가 있을 듯하다.  

  

 

*참고 

-선암서원(1986, 문화재 선암서원 보존회)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2015, 한국국학진흥원)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택리지(1978, 최장영 외)

- 청도지역의 임진란사 연구(2017, 임진란사 학술대회)

-청도향교지(2018, 청도향교)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청도문학신문 및 한국서원이야기(다음 까페)

-동양연표(2013, 이현종)

-역주 오산지(2003,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병재 박하징 연구(2006, 박홍갑)

-문중 파보 및 후손 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