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수) ‘우리문화 바로 알기 모임’에서 수헌 이중경(李重慶)의 오대(梧臺) 유허지를 찾았다. 이날 안내 및 강좌는 장인진(張仁鎭) 박사(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자문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께서 맡아주셨다. 장 박사님은 이미 80년대 초에 이곳을 답사하여 고증했으며 수헌 이중경의 ‘오대어부가(梧臺漁父歌)’에 대하여 1983년에 학계에 최초로 발표했다.
이 오대 지역은 지금은 비록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밀양군 상동면 신곡리(양지마을) 지역이지만 옛날에는 청도 지역이고 또 수헌이 바로 청도인이기에 청도 사람이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하다.
다음은 장인진 박사의 강의 내용이다.
수헌 이중경의 오대 유적과 오대어부가(梧臺漁父歌)
장 인 진1)

<장인진 박사>

회원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머리글
우리나라 선비들의 문집을 살펴보면 송나라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영향 받아서 구곡을 경영하고 구곡에 대한 작품을 남긴 사례가 많다.
대구 근교만 보더라도 청도의 박하담(朴河淡), 영천의 이형상(李衡祥), 영천의 정만양(鄭萬陽)・정규양(鄭葵陽), 대구의 최효술(崔孝述) 등이 구곡의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구곡 작품은 대개 한문으로 지어졌다.
이중경(李重慶, 1599-1678)의 자(字)는 경숙(慶叔), 호는 수헌(壽軒)·봉옹(鳳翁)·오계산인(梧溪散人)이고,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그는 주희의 무이구곡의 영향을 받아서 중년에 오대구곡(梧臺九曲)을 경영하고, 「오대어부가 구곡(梧臺漁父歌 九曲)」 9수를 한글로 지었다. 구곡 어부가 외에도 「어부사 오장(漁父詞 五章)」 5수, 「어부별곡 전3장(漁父別曲 前三章)」 3수, 「어부별곡 후3장(漁父別曲 後三章)」 3수 등 총 20수나 되는 한글 가사를 남겼는데 이 작품을 통틀어서 「오대어부가」라 하였다. 이를 분석하면 주희의 무이구곡 외에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어부단가(漁父短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수헌 이중경의 「오대어부가」에 대해서는 필자가 1983년에 학계에 발표한 것이 처음인데2) 이중경의 고본(稿本) 문집인 『잡훼원집(雜卉園集)』(1667년)에 실려 있다.
『잡훼원집』 2책에는 858편의 시문이 실려 있는데, 내용은 수헌이 오대 구곡을 경영하였던 1648년부터 1662년까지의 문학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강호생활의 즐거움이 담겨있다.3)
본고에서는 수헌 이중경의 삶을 조명해 본 후 조선시대 선비들의 구곡 문화의 유입과 수헌의 오대구곡의 경영에 대하여 살펴보고, 수헌이 지은 「오대어부가」를 송나라 주희의 무이구곡, 농암의 어부단가, 퇴계의 도산십이곡 등과 관련해서 구명해 보기로 한다.
2. 수헌 이중경의 삶
이중경은 조선 세종 때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효정공 이정간(孝靖公 李貞幹)의 8세손이다.
이후기(李厚基) 등이 편한 『전의이씨성보(全義李氏姓譜)』(1634년, 목판본)에 의하면 그의 증조 이흥지(李興智)는 경상도 청도의 명유(名儒)인 소요당 박하담(朴河淡)의 따님을 취(娶)한 인연으로 경기도 금천(衿川)에서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로 우거(寓居)하였다. 아버지는 두암(竇巖) 이기옥(李璣玉)인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양문(兩門)에 사사(師事)하여 문장과 학덕에 뛰어 났으나, 정여립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으며, 39세에 졸하였다. 어머니는 경상도 예천 고평리(高坪里)에 세거하였던 반몽벽(潘夢壁)의 따님이다. 이 족보에는 이중경, 이중영(李重榮) 형제까지 수록되어 있다.
수헌 이중경은 1599년 4월 15일 출생하였다. 6세에 부친을 여의고, 외가가 있던 예천 고평리로 이사를 하였다. 이곳은 일찍이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우거하여 동민을 위해 「고평동계약문(高坪洞契約文)」을 지어 교화에 힘썼으므로, 유풍(儒風)이 크게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7세에 외조부 반몽벽에게 글을 배우고, 다시 외숙부 반로(潘潞 : 호 東洲)에게 자학(字學)을 배웠다. 그 후 약포 정탁의 아들인 정윤위(鄭允偉 : 호 東湖)를 사사(師事)하였다.
17세(1615년) 때는 그 아버지의 스승인 한강 정구 선생을 배알하였는데, 이 때 아버지가 연루된 기축옥사의 전말을 듣게 되고, 그 내용을 포함한 문답 내용을 수록하여 「사빈문답(泗濱問答)」이라 이름을 붙였다.
20세에 예천에서 청도로 환고(還故)한 후, 황폐되었던 가묘(家廟)를 중수하고 선산을 수치(修治)하였으며, 당시 청도 정촌(井村)에 거주하던 죽산인(竹山人) 박형(朴炯)의 따님을 취(娶)하였다. 그 후 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 고촌(孤村) 이심홍(李心弘), 동고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조경암(釣耕庵) 장문익(蔣文益) 등 이름난 유학자의 문하에서 종유하거나 교유하였다.
44세(1642년)에는 장인 박형 등과 청도 운문산을 유람하였다.
49세(1647년)에 청도 오대에 봉서정(오대정)을 짓고 이듬해에 우거(은거)하였다.
58세(1656년) 때 우거지인 오대에서 시조로 된 「오대어부가」 20수를 지었다.
66세(1664년) 때 그 아들 이호징(李祜徵)이 자신의 시문을 2권2책으로 수습(收拾)한 것을 본 후, 책 이름을 ��잡훼원집(雜卉園集)4)��이라 붙이고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어서 완성하였다.
75세(1673년) 때는 당시 청도군수 권일(權佾)의 청으로 청도의 최초 읍지(邑誌)인 ��오산지(鰲山誌)��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유일(遺逸)로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다.
80세(1678년)에 청도 상북면의 수여촌(壽餘村) 정사(精舍)에서 졸하였다. 2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호징(祜徵), 우징(祐徵)이고, 딸은 현풍인 곽경탁(郭慶卓), 광주인(廣州人) 이성로(李星老), 계림인 김서(金瑞), 밀양인 박수장(朴遂章), 성주인 배홍욱(裵弘郁), 영천인 이영후(李永後) 등에게 출가하였다.
수헌 이중경은 『청도향안정명록(淸道鄕案正名錄)』에 입록되어 있는 선비 가문의 출신이다. 이 청도향안에는 13성씨 24문중의 사람들이 입록되어 있다.5) 전의이씨 가문에서는 1645년에 이중경 본인 입록 외에, 그 아버지 이기옥(李璣玉, 1600년 입록), 아들 이호징(李祜徵, 1657년·1661년 입록), 이우징(李祐徵, 1661년 입록) 6)등 3대 4인이 수록되어 있다.
3. 조선시대 구곡 문화의 유입
조선시대 구곡 문화는 남송의 성리학자인 주희(1130-1200)가 경영한 무이구곡에 영향을 받았다. 주희는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제자를 양성하며 산수의 아름다움을 한시로 표현하였다. 그는 1184년에 무이산에 구곡을 설정하여 배를 타고 구곡을 따라 유람한 후, 곡(曲)마다 시를 읊은 9수와 서시(序詩) 1수 등 10수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 武夷櫂歌)를 지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선비들은 특히 주자학을 신봉하였으므로 자연히 주자학적 세계관이 확립되어 구곡 문화를 동경하게 되었고, 은거하며 생활하는 곳에는 그 나름대로 구곡을 설정하여 창작 또는 차운시(次韻詩)를 남기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구곡의 경영 사실을 살펴보면 소요당 박하담의 운문구곡, 퇴계 이황(李滉)의 도산구곡(陶山九曲), 율곡 이이(李珥)의 고산구곡(高山九曲), 한강 정구(鄭逑)의 무흘구곡(武屹九曲),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화양구곡(華陽九曲) 등 전국에 150여 개의 구곡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경상북도가 40개가 넘어서 구곡 문화가 가장 성행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구곡을 경영하면서 남긴 주요 작품을 열거해보면, 이중경의 오대어부가(九曲, 漁父詞, 漁父別曲) 외에도 박하담(1479-1560)의 운문구곡가(次武夷櫂歌韻), 이이(1536-1584)의 고산구곡가(한글),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성고구곡시(城皐九曲詩), 정만양(鄭萬陽, 1664-1730)・정규양(鄭葵陽, 1667-1732)의 횡계구곡시(橫溪九曲詩), 이야순(李野淳, 1755-1831)의 도산구곡시(陶山九曲詩),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의 옥산구곡시(玉山九曲詩), 이한응(李漢膺, 1778-1864)의 춘양구곡시(春陽九曲詩), 송달수(宋達洙, 1808-1858)의 화양구곡시(華陽九曲詩) 등이 남아 있다. 대구에서는 최효술(崔孝述, 1786-1870)의 농연구곡시(聾淵九曲詩), 우성규(禹成圭, 1830-1905)의 운림구곡시(雲林九曲詩), 채준도(蔡準道, 1834-1904)의 문암구곡시(門巖九曲詩) 등을 확인할 수 있다.7)
4. 수헌의 오대 개기(開基)와 은거
수헌 이중경은 44세가 되던 1642년 9월 21일에 장인 박형(朴炯)을 비롯하여 이심홍(李心弘), 곽홍습(郭鴻習), 박선장(朴宣章) 등과 청도 운문산을 유람한 일이 있다. 유람한 행로(行路)를 보면 거주지였던 청도군 하남면(下南面) 동정(東井 : 수헌의 처가곳으로, 지금의 청도읍 원정리)에서 시작하여 4일째 되던 25일에 청도군 하남면 오대(烏臺 : 현재 밀양군 상동면 오곡·신곡 일대)에 도달하였다.
동정(東井) → 노암(魯巖) → 원동(院洞) → 거연(巨淵) → 유천(楡川) → 조야(趙野) → 박 연정(博淵亭 : 亭主 : 金太虛) → 마전연(馬轉淵) → 오대(烏臺 : 梧臺)
이중경은 오대의 경관이 마전연에서 가장 으뜸으로 지목하였다. 그 뛰어난 경치를 매우 사랑한 나머지 장차 이곳에 정사(精舍)를 구축하여 일생을 보내기로 작심하고,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에서 오대의 경관을 세심하게 표현하였다.
한 골짜기를 넘어서 오대에 올라보니, 오대의 경관이 마전연에서도 가장 으뜸이 된다. 흰 물가와 푸른 물굽이는 위아래로 이어지고, 물결은 출렁이며 연못을 이루고 더 넓게 물결이 일어나며, 마애병(馬崖屛)은 앞에 열리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오산(烏山)은 뒤에서 너울 너울 춤추듯이 모양이 기이하다. 대(臺)의 형세는 높으면서도 위험하지 않고, 외지지만 한쪽 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대(臺)를 바라보니 멀리까지 트이어서 끊어짐이 없고 가까이서도 협 소하지 않았다. 동쪽에는 작은 개울이 있는데,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쟁쟁하니 마치 패옥의 소리와 같다. 서쪽에는 산성이 있는데, 험하게 쌓은 것이 긴 구름의 형세와 같 고, 좌우로는 확 틔어있고 앞뒤에도 아름다우며, 그 사이의 빼어난 모습은 손가락으로 가리 키면서 다 기록할 수 없다. 대(臺) 주변의 몇 길 사이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것 같은 바위가 있고, 그 등 위에 구멍이 있어서 네모진 기둥을 세울 수 있겠는데 그 깊이는 몇 자 (尺)가 되겠다. 신라왕이 이곳에서 놀기를 좋아하여 깃발을 세우는 구멍으로 삼았는데, 매년 봄가을로 반드시 밀양(密陽)의 이궁(離宮 : 行宮)으로 행차하였으니, 이 이야기는 옛일을 잘 알고 있는 노인들이 서로 전해오는 말이다. 대(臺)의 뒷산은 오치(烏峙)이고 동쪽의 골짜기 는 오촌(烏村)이니 대(臺)의 명칭이 이로 인함인가. 나는 그 뛰어난 경치를 매우 사랑하였기 에 정사(精舍) 하나를 얽을 만하다고 여기고,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터를 살펴 보니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돌계단으로 그 좌우에 보완하면 작은 정자(亭子) 세 기둥은 들어갈 것이다. 이어서 뒷산에 올라가 열 걸음 사이로 바라보니, 산세와 지맥도 다 정(情)이 있었고, 한 개의 돌이나 한 그루의 나무도 진귀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참 동안 머뭇거리면 서 차마 내버려두고 가지 못하였으니, 앞으로 가야할 길은 아직도 먼데 날은 저물어가고 있 었다.8)
그는 5년 뒤인 1647년에 이곳에 봉서정(鳳棲亭 : 梧臺亭)을 짓고, 이듬해인 1648년에 오대(烏臺)를 오대(梧臺)로 이름을 바꾸어서 은거한 후로 약 15년간 오대정사와 오대 구곡 등을 경영하며 생활하였다. 봉서정을 중심으로 동쪽은 안령(鴈嶺), 남쪽은 부용석(芙蓉石), 서쪽은 연봉(蓮峯), 북쪽은 오산(鰲山)이 있었다.

<수헌의 오대구곡 경영지(오대)>
오대(梧臺)에 오동나무와 봉(鳳)이 없는데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桐江非有桐 : 강에 오동나무 있지 않으니
蓬島豈多蓬 : 봉도에 어찌 쑥이 많겠는가.
莫道無梧樹 ; 오동나무 없다고 말하지 마라
長松碧半空 ; 큰 소나무 반공에 푸르렀네.
無梧臺作號 : 오동나무 없는데 오대(梧臺)로 이름 지어
非鳳我來棲 : 봉(鳳)이 없는데도 내가 와서 살았네.
棇假虛名字 : 모두 거짓의 허명이니
從他世怒擠 : 세상 화나는 대로 밀쳐보네.9)
수헌 이중경은 이곳을 일컬어 “어찌 당나라 왕유(王維)의 망천(輞川)의 별장을 부러워하며, 진(晉)나라 도연명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승구(勝區)에 비기겠는가. … 완화계(浣花溪) 위의 당나라 두보(杜甫)의 임당(林塘)을 생각하고, 무이산(武夷山) 중의 송나라 주희(朱熹)의 천석(泉石)을 듣는 곳.”이라 하였다.10)
오대정(봉서정)의 규모를 살펴보면 초가 3칸으로, 동·서·중앙의 3가(架)에 장졸와(藏拙窩), 한벽당(閑僻堂), 수운사(睡雲舍) 등을 게시하였다.11)
오대 바위에 새긴 ‘閑僻堂’ 이중경 친필(16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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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청도문화원 소장) | 閑僻堂(한벽당) 탁본 (청도문화원 소장) |
현재 오대의 유적지를 답사해 보면 봉서정(오대정)을 짓기 1년 전인 1646년에 수헌 이중경이 오대의 바위 한 면에 한벽당(閑僻堂)을 새겨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위에 새긴 전체 글은 “閑僻堂 / 崇禎後丙戌年 / 逸人12)李重慶書”이다. 숭정 병술년(1646)에 일인(逸人) 이중경이 친필로 쓴 것이다.
오대정(봉서정)을 완성하고 3가(架)에 이름을 게시한 후 「장졸와가(藏拙窩歌)」 1수를 단가로 지어서 자신의 은일적 지조를 표출하였다.13)
窩(와) 내 집이오 拙(졸)은 내 병이라
내 집의 누어서 내 병으로 늘거시니
世上(세상)의 無病(무병) 君子(군자)을 블올줄리 업세라.14)
그리고 동쪽의 문호(門戶)를 포함하여 서, 남, 북쪽의 창(窓) 위에 간송(看松), 臨波(임파), 완월(翫月), 청계(聽溪), 의암(倚巖)이라 이름을 붙이고 7언 절구 1수씩 지었다. 이 가운데 남쪽 두 번 째 창 위에 붙인 ‘청계(聽溪)’의 시를 본다.
瀉琴鳴玉小溪聲 : 거문고 쏟는 듯 옥 울리는 듯한 시냇물 소리
靜聽林間耳自淸 : 고요히 산림 사이에서 들으니 귀가 스스로 맑네.
噴石眷崖寒動色 : 돌 뿜은 절벽을 바라보니 차가운 빛 발동하여
欲將氷雪洗襟靈 : 얼음과 눈으로 가슴 속을 씻고 싶네.15)
오대정 주위에는 소나무, 버드나무가 있었고, 이 외에 대나무, 모란, 화초 등을 심었다. 이처럼 봉서정(오대정)을 지은 것은 주희(朱熹)가 은거한 운곡(雲谷), 퇴계 이황이 은거한 도산(陶山)의 암서헌(巖棲軒) 등의 지취를 본받아서 자연을 벗 삼고자 했을 것이라 하겠다.
수헌 이중경은 퇴계 이황의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수용한 것으로 짐작되는 오대잡영(梧臺雜詠) 48詠을 지었다.16) 오대잡영의 시제 명칭을 살펴보면 오대구곡의 경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곡(柴谷), 산성(山城), 야점(野店), 연봉(蓮峯), 광석(廣石), 금담(金潭), 구촌(龜村), 가려 (佳麗), 북잠(北岑), 오곡(梧谷), 안령(鴈嶺), 남악(南岳), 신봉(神峯), 마애(馬崖), 석볃(石屛), 장탄(長灘), 유계(柳溪), 매평(梅坪), 사주(沙洲), 석뢰(石瀨), 벽담(碧潭), 반암(盤巖), 표암(瓢 巖)
수헌은 『잡훼원집』에서 858편의 시문을 남겼는데, 대부분이 오대에서 생활할 당시의 작품이다. 그 가운데 오대어부가(구곡, 어부사, 어부별곡) 20수는 그의 나이 58세가 되던 1656년에 지었다.
5. 단가로 지은 오대어부가
수헌 이중경은 「오대어부가 자서(梧臺漁父歌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오대에 있으면서 항상 고기잡이배에 올라 푸른 물결 위에서 노닐고 연하(烟霞)의 물 가를 들락거리면서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으니, 즐거움이 어떠하였겠는가. 이에 도산 어부사(陶山漁父詞)를 취하여 노래를 부르니 또한 선현이 산수에 득의하여 그 진락(眞樂)을 즐김을 볼 수 있었다. … 그 체(體)를 본받고 그 곡(曲)을 모방하여 스스로 「오대어부가」 구 곡과 「어부사」 오장(五章)을 지었다. 「어부별곡」 전・후 삼장(三章)으로 나란히 육장(六章)을 지은 것은 「도산전・후육곡(陶山前・後六曲)」에서 합한 십이곡을 덜어내어 그 절반을 취한 것이다. 우리말(俚語)을 사용하여 알기 쉽게 하였으며 단가의 율성(律聲)에 맞추어서 노래 부르게 하고 듣게 하면 비록 어옹(漁翁)이나 초부(樵夫), 비복(婢僕)이나 어린이 등이 있다고 해도 모두가 깨달아서 알게 될 것이다. 존귀한 사람들이 이 노래를 듣고서 침 뱉고 비웃는 다 하여도 나는 마땅히 혐의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17)[하략]
이처럼 「오대어부가」는 ‘오대어부가 구곡(梧臺漁父歌 九曲)’ 9수, ‘어부사 오장(漁父詞 五章)’ 5수, ‘어부별곡 전삼장(漁父別曲 前三章)’ 3수, ‘어부별곡 후삼장((漁父別曲 後三章)’ 3수 등 전체 20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가로 지었다.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오대구곡 어부가 (계명대 동산도서관 소장)

오대구곡 어부가, 어부사 5장 전반부

어부사 5장 후반부, 어부별곡 전3장

어부별곡 후3장
오대어부가 20수 가운데, 먼저 ‘오대구곡 어부가’ 9수를 살펴본다.
一曲 勝溪山(승계산)의 生涯(생애) 브텨두고
漁樵(어초)을 일을삼아 百年(백년)을 보내리라
어즈워 武夷九曲(무이구곡)이 예도 긘가 노라
二曲 釣漁舟(조어주) 碧波(벽파)의18) 워가쟈
아야 놀저어라 石齒(석치)19)예 걸릴셰라
뎌우희 綠苔磯頭(녹태기두)의 白鷗(백구) 가리라
三曲 一竿竹(일간죽)을 夕陽(석양)의 빗기들고
淸江(청강)을 구어보니 白魚(백어)도 하고할샤
이마 世上人間(세상인간)의 제 뉘라셔 알리오
四曲 貫柳魚(관류어) 예담아 돌아오니
白沙(백사) 汀洲(정주)의 櫓聲(노성)이 얼의엿다
아야 酒一盃(주일배)브어라 漁父詞(어부사) 브로리라
五曲 任所如(임소여)니 淸灘(청탄)의 흘리가
래목 도라드러 碧潭(벽담)의 머믈거다
아야 놀저어내여라 石屛下(석병하)의 가쟈
六曲 如遺世(여유세)니 身心(신심)도 閑適(한적)샤
魚鰕(어하) 버삼고 水石(수석)을 지블삼아
기 다 니즌후의 놀고노쟈 노라
七曲 芙蓉石(부용석)이 波中(파중)의 躍出(약출)20)니
太華峯(태화봉) 玉井(옥정)의 十丈花(십장화) 픠엿21)
此間(차간)의 太乙眞人(태을진인)이 蓮葉舟(연엽주) 타인22)
八曲 恣回沿(자회연)니 江光(강광)이 無際(무제)23)
淸風(청풍) 徐來(서래)니 水波(수파) 不興(불흥) 엿도다24)
이 中洲(중주)에 머므러 風景(풍경)보기 죠해라
九曲 泝流光(소류광)여 溪亭(계정)에 도라가쟈
滿江(만강) 風月(풍월)을 이 예 시러시니25)
가다가 뎌근 머므러 다시놀고 그티쟈
이중경은 그가 지은 「오대봉서정상량문(梧臺鳳棲亭上樑文)」에서 오대를 “무이산(武夷山) 중의 주희(朱熹)의 천석(泉石)을 듣는 곳”이라 하였다. 따라서 오대구곡 어부가는 주희의 「무이구곡」을 취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동향(同鄕)이면서 외고조부(外高祖父)가 되는 소요당 박하담(朴河淡)의 운문구곡가 영향도 받았다고 본다.
주희가 설정한 무이산의 구곡을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중심으로 살펴보면 1곡 승진동(升眞洞), 2곡 옥녀봉(玉女峯), 3곡 선기암(仙機巖), 4곡 금계암(金鷄巖), 5곡 철적정(鐵笛亭 : 武夷精舍), 6곡 선장봉(仙掌峯), 7곡 석당사(石唐寺), 8곡 고루암(鼓樓巖), 9곡 신촌시(新村市) 등이다. 그런데 시에 나타난 1곡부터 9곡까지 중심어를 보면 만정봉(慢亭峰), 옥녀봉(玉女峯), 가학선(架壑船 : 절벽에 걸친 배), 금계암(金鷄巖), 평림(平林), 창병봉(蒼屛峰), 선장봉(仙掌峯), 고루암(鼓樓巖), 별유천(別有天 : 딴 세상)임을 알 수 있다.
이중경의 오대구곡 어부가에서 보인 9곡의 의미는 어떠한가? 차례로 살펴본다.
一曲 = 勝溪山(승계산) : 산과 개울의 아름다움
二曲 = 釣漁舟(조어주) : 고기잡이 배
三曲 = 一竿竹(일간죽) : 하나의 낚싯대
四曲 = 貫柳魚(관류어) : 버들가지에 꿴 물고기
五曲 = 任所如(임소여) : 가는 대로 맡겨둠
六曲 = 如遺世(여유세) : 세상을 벗어남
七曲 = 芙蓉石(부용석) : 부용 바위
八曲 = 恣回沿(자회연) : 제멋대로 감돌아 있음
九曲 = 泝流光(소류광) : 물결 거슬러 오름
1곡에서는 ‘산과 개울의 아름다움’을 제시하면서 무이구곡임을 설정하였다. 구곡 전체를 표현한 중심어는 한결같이 한문(漢文) 3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연을 형용한 것은 부용석 한 곳 뿐이다. 나머지는 자연의 경물이 아니고, 어옹(漁翁)이 배를 타고 지나면서 본 대로의 느낌이나 주변 사물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어옹(漁翁)으로서 지락(知樂)하는 작자 심중의 승경(勝景)을 담고 있다.
2곡의 고기잡이 배(釣漁舟)는 무이구곡의 절벽에 걸친 배(架壑船)와 조어가 통하고, 6곡의 세상을 벗어남(如遺世)은 무이구곡의 딴 세상(別有天)과 조어가 통한다.
9곡 중장의 “滿江(만강) 風月(풍월)을 이 예 시러시니”는 농암 이현보의 어부 장가 9장의 종구(終句)인 “滿江風月屬漁船(만강풍월속어선)”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26)
단가의 내용 가운데는 중국 문인들의 시문을 인용하거나, 한문 구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싣기도 하였으니, 예컨대, 송나라 소식(蘇軾)의 「적벽부」의 구절 ‘淸風徐來(청풍서래) 水波不興(수파불흥)’, ‘如遺世(여유세)’, ‘泝流光(소류광)’ 등이 보이고, “太華峯(태화봉) 玉井(옥정)의 十丈花(십장화) 픠엿 此間(차간)의 太乙眞人(태을진인)이 蓮葉舟(연엽주) 타인”의 구절은 당나라 한유(韓愈)의 「고의(古意)」에 보인 ‘太華峯頭玉井蓮’과 송나라 한구(韓駒)의 「제태을진인연엽도(題太乙眞人蓮葉圖)」에 보인 ‘太乙眞人蓮葉舟’를 인용한 것이다.
다음으로, ‘어부사 5장’ 5수를 살펴본다. 이 어부사 5장은 오대구곡 어부가와 함께 지은 것으로, 농암 이현보의 어부단가 5장의 형식을 수용한 것이다.
漁父(어부) 漁父(어부)들하 네 내오 내 네로라
네 버지 내어니 내 너 모소냐
此中(차중)의 閑暇(한가) 生涯(생애) 너와 나가 잇도다
白鷗(백구) 白鷗(백구)들하 내 네오 네 내로다
내 버지 네어니 네 나 모소냐
此中(차중)의 閑暇(한가) 溪山(계산)의 나와 너와 놀리라
靑山(청산)은 언제나며 綠水(녹수)은 언제난고
前萬古(전만고) 後萬古(후만고) 져나히 언매언고
내 몸도 此中(차중)에 놀아 를글주리 업세라
功名(공명)도 내몰래라 富貴(부귀)도 내몰래라
虛浪(허랑)27) 人生(인생)이 世事(세사)도 내몰래라
아마도 이 江山(강산) 아니면 내 몸 둘 업세라
前溪(전계(예 고기낫고 後山(후산)의 菜(채)을여
잇거나 업거나 굴머시나 머거시나
此生(차생)의 근심이 업니 그 즐겨 노라
농암 이현보의 어부단가 5장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강호에서 유유자적하는 즐거움과 함께 강호에서도 여전히 임금을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이다.
수헌 이중경의 어부사 5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1장과 2장은 자연과의 합일을 보인다. 즉 초장에서 어부(漁父)인 자신과 백구(白鷗 : 갈매기)를 동일시(同一視) 하였고, 중장에서는 동일한 형식을 취하여 벗으로 여기고 있으며, 종장에서 한가롭게 산수의 즐거움을 백구와 함께 누리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이 1, 2장은 농암의 어부단가의 4장 “山頭(산두)에 閑雲(한운)이 起(기)고 水中(수중)에 白鷗(백구)이 飛(비)이라, 無心(무심)코 多情(다정)니 이 두 거시로다, 一生(일생)애 시르믈닛고 너를조차 노로리라.”28)와 의미가 상통한다.
또 농암의 어부단가의 “이듕에 시름업스니 漁父(어부)의 生涯(생애)이로다,”(1장)이나 “구버 千尋綠水(천심녹수) 도라보니 萬疊靑山(만첩청산),”(2장)은 수헌이 농암의 유유자적한 삶을 수용한 것이다. 4장에서는 유학자인 작자로서 세상에 대한 우려와 걱정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끝으로, ‘어부별곡 전3장’ 3수, ‘어부별곡 후3장’ 3수를 살펴본다. 이 어부별곡은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의 영향을 받고 지었다. 즉 도산 12곡의 언지(言志) 6곡, 언학(言學) 6곡에서 각각 반(半)을 취하여 전3장, 후3장이라고 하였다.29) 따라서 도산십이곡의 형식을 취한 오대육곡(梧臺六曲)인 것이다.
어부별곡 전3장
아이고 애올샤 아이고 셜올셰고
罔極(망극) 天地(천지)예 내 혼자 사라이셔
녜잇던 魚采(어채)보니 내 안 둘 업세라
처엄의 못각여 詩書(시서)을 일삼도다
中間(중간)의 妄(망)녕되여 名利(명리) 라도다
物外(물외)예30) 風月江山(풍월강산)이 내 분인가 노라
이런들 뉘 올타며 져러 뉘 외다31)료
올거나 외거나 나도 내 일 모노라
世上(세상)이 是非(시비)마라 漁父(어부)ㅣ 므슴 그리
어부별곡 후3장
經綸(경륜)을 내 아더냐 濟世(제세)리 업슬러냐
太平(태평) 時世(시세) 언메나 머런고
匹夫(필부)의 爲國忠心(위국충심)을 내여뵐 업세라
내 나히 만커니나 머리도 셰거니나
少年時(소년시) 은 32) 아니 늘건노라
日日(일일)에 兒戱(아희)니 윗줄을 모다
蒼山(창산)은 놉고놉고 流水(유수) 길고길고
山高(산고) 水長(수장)니 긔아니 죠소냐
山水間(산수간) 一閑人(일한인)되여 허믈업시 사노라
어부별곡 전·후 3장에서는 수헌 이중경이 현실적 불우와 자위를 표출하고, 강호생활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전 3장의 세 번째 단가는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 가운데 ‘도산육곡지일(陶山六曲之一)’(言志)의 기일(其一)에 “이런ᄃᆞᆯ 엇다며 뎌런ᄃᆞᆯ 엇다료, 草野愚生(초야우생)이 이러타 엇다료, 며 泉石膏肓(천석고황)33)을 고텨 므슴료.”와 의미가 통하고, 후 3장의 세 번째 단가는 ‘도산육곡지이(陶山六曲之二)’(言學)의 기오(其五)에 “靑山(청산)ᄂᆞᆫ 엇뎨야 萬古(만고)애 프르르며, 流水(유수) 엇뎨야 晝夜(주야)애 긋디 아니고, 우리도 그치디마라 萬古常靑(만고상청)호리라.”34)와 부합된다.
한편 이중경의 오대어부가 20수를 중심으로 후대에 간행된 『수헌선생문집(壽軒先生文集)』(연활자본, 1959년)의 내용과 비교하면 단어 또는 문장에서 69곳이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35)
6. 결어
수헌 이중경은 경상도 청도를 기반으로, 경향의 문사들과 교분을 쌓았던 재지 사족(在地士族)의 처사였고, 고본(稿本)에 858편의 시문을 남긴 문인 학자였다.
우리나라 구곡 문화는 남송의 성리학자인 주희(朱熹)의 영향을 받았다. 주희는 일찍이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하면서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지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주자학을 신봉함에 따라 그들이 생활하는 곳에 구곡을 설정하여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선비들이 경영한 구곡을 살펴보면 경상북도 지역이 가장 성행하여 40개가 넘었고, 구곡시가가 가장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중경은 1647년에 오대에 봉서정(오대정)을 짓고, 이듬해인 1648년에 은거한 후로 약 15년간 오대정사와 오대 구곡 등을 경영하며 생활하였다. 오대에 찾아와서 수창(酬唱)을 하였던 주요 인물은 고촌(孤村) 이심홍(李心弘), 기암(畸庵) 이광의(李光義), 취옹정(醉翁亭) 이광례(李光禮), 성현찰방(省峴察訪) 박민행(朴敏行), 이광지(李光智), 시승(詩僧) 일청(一淸), 박동흠(朴東欽), 유천에 적거(謫居)하였던 심총(沈棇 : 休翁 沈光世의 아들), 이로(李櫓), 박문도(朴文度), 수옹(睡翁) 목래선(睦來善 : 淸道郡守), 박자장(朴自章), 박동량(朴東梁), 장시걸(張時傑), 운문 승(雲門僧) 수엄(秀嚴) 등이다.
오대구곡 어부가는 주희의 무이구곡가, 이현보의 어부가,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 등의 영향을 받고 지은 것임을 작품 비교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오대어부가」의 후대에 끼친 영향은 미미하였다고 본다. 왜냐면 고본(稿本)이 집안에 간직되어 오다가 1727년에 삼도수군통제사 이복연(李復淵)이 처음으로 베껴간 일 외에는 오랜 세월동안 주손(冑孫)의 집에 있었고, 간행본도 1959년에 처음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끝으로, 수헌 이중경은 오대에 은거 하면서 각종 소문이나 유언비어 등이 난무했던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1659년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로써, 해인사 금신(金身)이 땀을 흘린 일, 금호강이 단류(斷流)한 일, 개구리(蛙)가 무리를 지어서 언양성(彦陽城)으로 들어간 일 등이 있었는데, 지난 임진, 병자란 때와 같은 조짐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였다고 하였다. 또 머리에 뿔난 충주 사람의 일, 안악(安岳)의 적수(赤水), 청주의 신구(神駒), 부평(富平)의 백발(白髮)에 흰 눈을 가진 어린이 등이 나타났음을 들었다고 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이 해에 북벌(北伐)을 추진한 효종대왕이 승하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시사(時事)에도 관심을 가진 선비였다.
1)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자문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 문학박사 (injin0222@daum.net)
2)張仁鎭, 「새로 발굴된 李重慶의 梧臺漁父歌」(한국도서관학회 편, ��圖書館學��, 제10집, 1983), pp.149-188.
3)이중경의 『잡훼원집』은 필자가 「잡훼원집의 문헌적 특성」이라는 이름으로 해제를 하여 계명대학교출판부에서 2008년에 영인본을 발간하였다.
4)이 ��잡훼원집��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5)신 향안(新 鄕案)에는 서흥김씨가 포함되어 전체 13성씨 25문중이 되었다.
6)이호징(李祜徵)을 이우징(李祐徵)으로 잘못 표기하였다. 1661년의 신 향안을 보면 동일한 입록 년도에 李祐徵의 이름이 두 번 나온다.
7)구곡 경영에 대해서는 주지하는 내용 외에,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유학과 현대』, 18집, 「[특집 1] 대구 구곡문화」(2017년), 영남일보, 「구곡 기행」(2017) 등에서 인용하였음
8)이중경, 『壽軒先生文集』(1959년, 연활자본), 권4, 「遊雲門山錄」, “越一洞壑登烏臺 烏臺之勝甲於馬轉 白渚靑灣上下相連 溶溶成潭浩浩生波 馬崖屛開于前而異其觀 烏山翔舞 于後而奇其形 臺之勢 高不危僻不偏 臺之望 遠不疎斷近不隘迫 東有小溪 自谷而注鏘然 若環佩之聲 西有山城 據險而築矗乎若長雲之勢 左右通敞前後明麗 其間絶特之狀 不可指數而盡記也 臺邊數丈之間 有巖如龜伏背上有穴 可容方柱其深數尺 新羅王好遊此地 以爲樹旗之穴 每歲春秋 必至因幸密陽之離宮 此古老之相傳云 臺後山爲烏峙 東谷爲烏村 則臺之名因是歟 余酷愛其勝 以爲可搆精舍終老於此 審度基址 則雖不有餘 以石砌補其左右 可容小亭三柱矣 仍登後岑十步之間而望之 山勢地脈亦皆有情 一石一木無不瑰奇 良久夷猶不忍捨去 而前程尙遙日將晩矣.”
9)이중경, 『잡훼원집』(1667년), 卷2, 28面, 「答客問梧臺何無梧」
10)위의 책, 卷1, 78面, 「梧臺鳳棲亭上樑六偉」, “豈羡輞川之別業 自擬桃源之勝區 … 浣花溪上 想子美之林塘 武夷山中 聞晦翁之泉石.”
11)李達三이 지은 壽軒의 家狀(『수헌선생문집』 부록)에는 이곳에 건물 2棟이 있는데 동쪽에는 강습 장소인 閑僻堂, 서쪽에는 휴게 장소인 鳳棲亭이라 하였다. 이곳은 장소가 협소하므로 과장된 표현이라 하겠다.
12)은거하는 선비 즉 은사(隱士)를 뜻함
13)이 시조는 1959년 간행 『수헌선생문집』에는 삭제되어 있다.
14)이중경, 『잡훼원집』, 권2에 실려 있는 이 단가는 「藏拙窩記」의 한 내용이다. 원문을 옮기면 “惟余 志拙言拙學拙行拙 拙吾病也 抱病行世 奚得焉 遂藏于此 以名吾窩 乃歌曰.”이라 하고, 단가를 지었다.
15)위의 책, 卷2, 32面, 「南第二間窓曰聽溪」
16)위의 책에는 42수가 실려 있다.
17)위의 책, 卷1, 「梧臺漁父歌自序」, “余在梧臺 常登漁艇 浮遊乎碧波之上 出沒乎烟霞之渚 扣枻興歌 爲樂如何 於是 取陶山漁父詞而歌之 亦足以見先賢之得意於山水而樂其眞樂也 … 師其體而倣其曲 乃自製九曲五章 而其前後三章並六章 則省其六曲之合爲十二者而各取其半也 用以俚語之易知 諧於短歌之律聲 使其歌者聽者 雖在漁翁樵夫婢僕童稚 皆可得以曉解 而貴者之聞此 縱有唾笑 余當不以爲嫌也.”
18)李穡, 『목은시고』, 「암관음(巖串吟)」에 “푸른 물결에서 아름다운 고기를 낚아 올려(碧波釣出錦鱗魚)”라는 詩句가 보인다.
19)돌이빨
20)원본에는 ‘濯出’로 되어 있는데 誤記인 듯 하다.
21)韓愈, 『韓昌黎集』, 卷3, 「고의(古意)」에 “태화봉 꼭대기 옥정의 연은, 꽃 피면 직경이 열 길 둘레가 배 같다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라고 하였다.
22)宋代의 명화가(名畫家)인 이공린(李公麟)이 「태을진인연엽도(太乙眞人蓮葉圖)」를 그렸다. 그 내용은 태을진인이 하나의 큰 연잎 위에 누운 채로 서책을 펴서 쳐다보고 읽는 모습이었는데, 한구(韓駒)가 이 그림에 제(題)한 시에 “태을진인이 연잎 배를 탔는데, 두건 벗고 머리털 내놓아 찬바람에 날리네. 가벼운 바람을 돛으로 삼고 물결을 노로 삼아, 누워서 옥자를 보며 중류에 둥둥 떠 있구나(太乙眞人蓮葉舟 脫巾露髮寒颼颼 輕風爲帆浪爲楫 臥看玉字浮中流).”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조물주가 연을 보내 주었다는 뜻이다.
23)끝이 없음
24)蘇軾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임술년 가을 7월 16일에 소자가 손과 더불어 적벽 아래 배를 띄우고 노는데, 맑은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고 물결이 일지 않는지라(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라 하였다.
25)李荇, 『용재집(容齋集)』, 「조천록(朝天錄)」에 “풍월이 가득한 강 어선을 꼭 잡아 타야지(滿江風月趁 漁船)”라는 구절이 있다. 또 聾巖 漁父歌 9章 중의 제 7章에서도 한문 구절이 보인다.
26)李賢輔 著, 李滉 筆, 『漁父歌(附)陶山六曲』. 탁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d13610-15), 漁父歌 九章.
27)허황하고 착실하지 못함
28)李賢輔(朝鮮) 著, 앞의 책, 漁父短歌
29)張仁鎭, 앞의 논문, pp.149-188 참조.
30)사물 밖(세상 밖)에
31)그르다
32)이내 인생
33)천석(泉石)을 좋아하는 고질
34)李賢輔(朝鮮) 著, 앞의 책, 陶山六曲之一 및 陶山六曲之二
35)李賢輔(朝鮮) 著, 앞의 책, 陶山六曲之一 및 陶山六曲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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