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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매전면 송원리

청도군 매전면 송원리/ 행전 박영환

 

 

  2017년 3월 22일(수), 청도군 매전면 송원리를 찾았습니다. 송원리에는 경주 이씨 재사인 송강재가 있습니다. 마침 송강재의 후손인 이재관 님의 안내를 받아 재사 및 마을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송강재>

 

 

송강재(松岡齋)

 

관리문중: 경주 이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송원리 731번지

마을 뒤편에 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3(2, 출입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높은 축대위에 정면 5( 3, 마루 2, 중당협실형) 팔작지붕의 송강재가 자리 잡고 있다. 마루 벽에는 국한문 혼용 송강재기기 걸려 있다. 재사주변에는 블록 담장을 둘렀으며 마당에는 자갈을 깔았고 서쪽에 중문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배향인물: 이종부(李宗富, 1791, 정조15 신해- 1852, 철종3 임자)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일서(一瑞)이다. 신라 개국공신 알평의 후예이며 선대인 송암 세기는 예문관 대제학 검교정승이며 국당 (菊堂 蒨)은 예문관 춘추관 월성부원군(藝文館春秋館 大提學 月城府院君)이었다  제정 이달충은 호부상서 정당문학 계림부원군이었다.

  입청도조는 만송(晩松) (李翬)이며 송원리 입향조는 송언(松彦) 영규(榮奎)인데 공은 송언의 증손이다.

  순후한 품성에 타고난 재질이 총명하였으며 항상 책을 가까이 하며 정주지학(程朱之學) 효제지의(孝悌之義)로 생활했고 스스로 송림지은사(松林之隱士)라하였다. 61세에 졸하였다.

 

연혁: 선대가 졸한지 140 여년 뒤인 1995년 후손들의 종의에 의해 재사를 신축했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경주 이씨 입향 선조 송언(松彦)( 榮奎) 공후 세거지, 및 경주 이씨 국당공파 휘 春男 후 제단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경주 이씨 후손이 약 20여 호 살고 있다.

 

 

 

 

 

 

 

 

 

 

 

 

 

<송원리 전경>

 

송원리(松元里)

 

 송원리는 청도읍 원정에서 매전면 지전리로 넘어가는 우측 오례산성 중턱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옛날에는 건티[건치(巾峙)]로 불려지기도 했다송원 마을은 상송원(윗건티), 중송원(중마), 하송원(아랫건티)이 있는데 상송원은 현재 사람이 살지 않고 중송원에는 3가구하송원에 40여호가 살고 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집필자: 박윤제)에는 다음과 같이 송원리를 소개하고 있다.

 

 

  청도군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 마을이다.

 

 

[명칭 유래]

  명칭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전하는 말은 없다. 다만 옛날부터 내려오던 이름은 건치(巾峙)라 쓰고 건티라고 불렀다. 1832년의 청도군 읍지(淸道郡邑誌)에는 건치리(巾峙里)로 표기되어 있으나 1912 구한국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는 송원동(松元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4년의 기록인 속오산지(續鰲山志)에는 상건치(上楗峙)와 하건치(下楗峙)를 합하고 송원으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윗건티, 아랫건티로 불리던 송원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었고 그 중간에 있는 마을을 중마라 불렀다.

 

 

[형성 및 변천]

  적암면(赤巖面)에서 1896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중남면(中南面) 지역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송원동이라 하여 매전면(梅田面)으로 편입되었다. 1988년 송원동에서 송원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오혜산성(烏惠山城) 배후 계곡에 위치한 송원리는 청도에서는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북이 산이고 동쪽으로만 열려 있는 계곡,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논농사가 어려운 지역 중 하나이다. 그러나 지난날 산동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청도에 볼 일이 있을 때는 원정에서 건티재를 통하여 넘나들었다. 지전리에서 윗건티까지는 약 5 정도이고 본 마을인 아랫건티까지는 약 2가 넘는다.

 

 

[현황]

  2012 7월 현재 면적은 8.90이고,  50가구에 91[남자 44, 여자 47]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매전면 예전리, 서쪽은 청도읍 월곡리·거연리, 남쪽은 매전면 구촌리·지전리, 북쪽은 청도읍 원정리·부야리·매전면 용산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윗마을과 아랫마을, 중마로 이루어져 있다.

  오혜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답게 논은 없으며, 대부분 비탈진 밭을 이용하여 감나무를 심고 감 수확이 경제의 주를 이룬다.

 

한편  청도군지(1991, 청도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험준하게 이어지는 용각산계는 이곳에서 더욱 등등하게 분기되어 오리봉(梧里峰)을 내어 보내고 다시 양재산(兩載山)을 솟게 하고 그래도 한이 덜 차서인지 부성산(扶城山-烏禮山)을 형성시켜 경사를 따라 계곡 물을 숨 쉴새도 없이 토해 내게 하여 마을의 숨통을 겨우 놓아주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보이는 것은 산령(山嶺)과 백운(白雲)뿐으로 실로 반공유촌(半工有村)을 실감나게 하며 성내봉은 말없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말로는 오례산성보다 앞선 마을이라 하며 성하(城下)촌으로 그 책임은 성실히 수행하였을 것이다.

  후삼국시대에 '견훤'이 오례산성에 머물 때 마을 사람들을 강제 모병해 갔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어 산성으로 인한 피해가 많았던 것 같다. 피난한 곳이 산성(山城)이기 때문에 난리 때마다 어김없이 희생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태산 허리에서 산 아래까지 경전(耕田)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산성이 준 영향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규명할 방법이 없고 1600년 중엽경에 경주인 이인기 공이 청도 냉정(高樹里)에서 이거 택리하였다. 그 후에 김해인 김문경 공도 우록(友鹿-達成)에서 이거해 왔다. 이건(移居), 퇴거(退去)가 무상하여 일일이 기록하기도 곤란할 정도이다

* 이인기 공의 아버지 이영규 공이 이거하였다고 마을앞 표석에 기록되어 있음.

 

  건현(巾峴), 건치(巾峙), 송원(松元), 송원(宋圓), 송서(松西) 등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건현(巾峴), 송원(松元)이다. 건현 또는 건치는 같은 뜻으로 마을 주위에 우뚝 솟은 산의 생김새가 묘하게도 수건()형이다. 그리고 마을 뒷산에는 높은 재(, )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수건을 두른 듯이 마을을 산이 둘러져 있다고 붙여진 이름은 아닐 것이다.

  송서니 송원이니 하는 것은 조선시대 헐벗은 산이 많아 청도, 화양등지에서 이곳까지 땔감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로 인해 소나무가 많아 땔감 채취산으로는 으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같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땔감이 무연탄으로 대체되기 전까지는 이 마을 주민들의 농외 소득원으로 땔감을 매각하여 얻어진 것으로 보면 송원이라는 동명을 낳게 할 만하다고 본다.

 82호 중

경주 이씨 40, 김해 김씨 7, 우륵 김씨 7, 기타 28

 

  마을이 깊은 산중에 있고 계곡의 경사가 심하여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머무를 여유가 없이 흘러가 버리고 밤과 낮의 기온차도 다른 마을에 비교하여 많아서인지 모기가 없다는 것이 특이하다. 무엇보다도 지대가 높은 탓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다. 계곡의 경사가 심한 증거는 계곡에 용소(龍沼)가 무려 7개나 있다는 것이다.

 

 

 

참고

- 관리문중 후손 면담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역주 오산지(2003, 청도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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