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이서면 각계리/ 행전 박영환
2018년 2월 23일(금), 청도군 이서면 각계리를 찾았습니다. 이곳에는 각산재, 각계재, 도림재가 있습니다.


각산재(角山齋)
◯관리문중: 의흥 예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각계리 303번지
이서면 소재지 학산2리에 있는 이서시장에서 서쪽 포장길로 약 1.1㎞ 지점에 각계리가 있다. 이 마을 남쪽 끝 마을 회관 옆에 동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3칸(화장실1, 고방1, 출입문)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온돌방 3칸, 마루 2칸,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둥근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대청 뒷문 밖에는 쪽마루가 시설되어 있고 정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角山齋’가 현액되어 있으며 주변에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예난지와 예극양을 배향하고 있다.
1)예난지(芮蘭지)
본관은 의흥(義興)이고 자는 방보(芳甫)이며 시조 예낙전(芮樂全)의 10세손으로 생원 참봉을 지냈으며 의흥 예씨 입청도조(入淸道祖)이다.
2)예극양(芮克讓)
본관은 의흥이고 자는 극겸(克謙)이다. 도사 예난종(芮蘭宗)의 아들이고, 생부는 예난지(芮蘭지)이다. 한성부 우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수몽헌(守夢軒) 예승석(芮承錫)의 증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 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연혁: 1902년 창건한 묘재이다. 본채 대청 마룻대 아래의 장혀에 ‘숭정 기원 후 오임인사월(崇禎紀元後五壬寅四月)’이 명시된 상량문이 있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대청 좌측에 2칸 온돌방으로 분리되었던 것을 통칸으로 수리했으며 천장은 코팅 합판으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지붕도 칼라 강판으로 개량했다. 솟을대문 역시 붉은 벽돌조로 근년에 신축한 것이다.
의흥 예씨들이 청도에 정착한 것은 1500년 초이다. 당시 예난지와 무과에 급제한 예자양(芮自讓), 진사에 오른 예처양(芮處讓), 그리고 예극양 4부자가 청도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후손들은 이서면 대전, 각북면 율정, 매전면 지전 및 내리 화양읍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도주지의 '각산재' 기록은 다음과 같다
*▲角山齋〓 角溪洞 角溪山下에 있는데 義興人 芮克訓의 墓齋이다 守夢軒의 四世孫으로 字는 克謙이며 御侮將軍 이고 始居淸道하다 墓在 角溪山 坐酉
청도문헌고의 '각산재'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각산재(角山齋)
군의 북쪽 이서면 각계산(角溪山) 아래에 있다. 선비 예극양(芮克讓)의 묘각이다.

다음은 도림재입니다.


도림재(道林齋)
◯관리문중: 전의 이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각계리 104번지
학산2리 시장에서 서쪽으로 1킬로미터 지점에 각계 마을이 있고 마을 좌측 산기슭에 청도의 진산인 남산과 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동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맞배지붕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팔작지붕 와가 5칸(온돌방 3칸, 마루 2칸, 중당협실형) 재사가 있다.
시멘트 기단 위 둥근 초석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벽을 치고 네 짝의 미닫이 문을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툇마루를 설치하여 마루와 연결하였으며 전면에는 재사의 보호를 위해 유리창을 달았다. 마루 후면에도 유리창이 있다. 정면에 재사의 이름인 ‘道林齋’가 편액되어 걸려 있으며 마루에 풍산 류석우가 쓴 ‘도림재기’가 있다. 재사 주변에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두암(竇巖) 이기옥(李璣玉)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의보(儀甫)이며 호는 두암(竇巖)이다. 1566년(병인, 명종21) 아버지 이득록(李得祿)과 어머니 고성 이씨 사이에 태어났으며 참봉을 지냈다. 고려 태조를 도와서 관직이 삼중대광태사에 이른 이도(李棹)의 후예이며 그의 조부 이흥지(李興智)가 청도에 입향하였다.
박광형, 한강 정구와 동강 김우옹에게서 사사하였고 문장과 학덕이 뛰어났다.
1586년 도회시에 입격한 여러 유생들 가운데 뛰어난 이를 뽑아서 다시 고시를 치르며 ‘독서여연단부(讀書如鍊丹賦)’를 어제로 내렸는데 유성룡이 그가 지은 부를 보고 “참으로 문장과 기개가 있다”고 하고 서책을 하사하였다.
1592년 4월 23일, 선암사 묘정에서 있었던 청도 14의사 의병 창의시, 의병장 박경신의 장서기 소임을 맡아 1592-1594(2년간) 의병을 일으킨 사실과 일자별 전투 내역을 기록한 창의일록(倡義日錄)을 남겼다. 1593년 7월 5일 장서기 이기옥은 박경신 조전장의 심부름으로 화왕산에 진치고 있는 곽재우 장군에게 철환과 군기를 요청하는 편지를 가지고 갔다. 1596년(병신 선조 29) 학행으로 천거되어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 때는 친정소(親征疏)를 올려 왕이 직접 전지에 나가 왜적의 불의를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명과 일본의 화의가 진행될 때는 중국 정강(靖康)의 고사를 들어 강화를 반대하였다.
1598년(기축, 선조22), 정여립 모반 사건의 함정에 얽혀 종성에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스승 동강도 화망에 걸려 회령에 있어 수시로 찾아뵈었다.
1599년 집경전(集慶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당시 영남지방의 대학자인 장현광, 김부륜, 박성 등과 도의 교유를 맺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1604년(갑진, 선조37) 졸하니 향년 39세였다.
1827년(정해, 순조 27년) 도내의 선비들이 위패를 모시는 일을 의논하여 도림사(道林祠)에 봉안하였다. 뒤에 도림서원이 되었으나 고종 때 훼철되었다. 공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 1599-1678)이다. 수헌은 오대에서 연시조인 오대어부가(梧臺漁父歌)를 지었으며 수야리 수헌정사(壽軒精舍)에서 1673년(현종 14) 75세에 청도 최초의 역사서인 ‘오산지(鰲山志)’를 편찬했다.
공조판서 장석용은 “아! 공은 깊은 학문과 남다른 재주와 돈독한 행실과 굴하지 않는 지조와 평탄한 마음을 일찍이 만의 하나도 펼치지 못하여 벼슬이 침랑에 그쳤고 수는 불혹의 나이에 이르지 못했다. 먼저 재능을 주었다가 뒤에 인색하게 빼앗아 갔으니 하늘의 이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
◯연혁: 1979년에 지었으며 그 뒤 몇 차례 중수했다.
도주지 에는 도림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道林祠는 伊西面 水也洞에 道林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이는 道林書院을 가리키난 地名이다 道林書院은 純祖丁亥에 建立하였고 全義人 參奉 竇巖 李璣玉을 享祀하던 祠宇였으나 高宗五年辛未에 毁撤되고 物有興亡의 世俗에 亭子하나 建立치 못하고 後孫들은 他鄕에 于居하니 遺址에는 柱礎와 老木이 옛날을 말할 뿐이다.”


다음은 각계재입니다.


각계재(角溪齋)
◯관리문중: 고령 김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각계리 100번지
각계리 마을 중간에 동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3칸(방2, 마루1) 하당 옆에 있는 철문을 들어서면 4칸(온돌방 3칸, 마루 1칸,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둥근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정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角溪齋’가 현액되어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각계재기’가 걸려있다. 마당에는 사철나무 등 정원수가 있으며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김홍한과 그 아들 김상휘를 배향하고 있다.
1)의재(義齋) 김홍한(金弘漢, 1568- 1592)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여남(汝南) 호는 의제이다.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 김남득(金南得)의 9세손으로 임진왜란 직전에 고령에서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로 이거한 청도지역 고령 김씨 청도파의 입청도조(入淸道祖)이다. 공은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창의하여 청도와 고령에서 크게 활약했다.
우선 청도에서는 의병군 유사(有司)를 맡았으며 7월 9일, 청도조전장(淸道助戰將) 박경신(朴慶新)이 이끄는 청도읍성 탈환 작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작전에 들어가기 전 집결한 곳이 이서면 이화리(耳火里, 현재 수야 4리)였다.
고령 지역에서의 활동은 그의 재종숙인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송암(松菴) 김면(金沔) 진영의 선봉장으로서의 활약이다. 우선 그는 4월 15일 밤에 송암에게 달려가 왜구침략의 급보를 전했으며 이 소식을 접한 송암이 유림에 통문하여 의병군단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4월 26일 송암이 참모장을 숭산동에 보내어 군사들을 훈련한 것도 실질적으로는 의재의 역할이 컸다.
그 후 초계, 마진, 함안, 죽현 등지에서 누차에 걸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6월 초순 고령군 성산면 무계진에서 수많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 두 척을 포획하는 데 앞장섰다. 이때 빼앗은 물품은 궁중에서 사용되는 진귀한 것들이었다.
그 뒤 7월 말경 왜적은 이 패전을 설욕하고자 대군을 끌고 왔는데 이 때 군사들은 목숨을 걸고 결사 분전했는데 빠져죽은 왜적의 시신에 막혀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2차 무계전투는 경상우도 지역의 보전은 물론 경상도를 통해 전라도로 침공하려던 왜군의 작전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전투 최전선 선봉장이었던 의재는 25세 젊은 나이로 순절하고 말았는데 전란 중이라 시신도 거두지 못하고 처가의 선영인 양산 범곡에 초혼장을 치르게 되었는데 2009년 11월, 양산시 산막공단 계획으로 이서면 각계리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2013년 12월, 충남 보령시 임란공신 충의호국사(護國祠)에 위패를 봉안했다.
2)김상휘(金商輝)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군해(君晦), 호는 春岡이며 김홍한의 아들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에 증직되었다.
춘강(春岡)은 어머니 영산신씨(靈山辛氏)도 공의 장례 뒤 순사(殉死)하고 숙부인 김홍간(金弘幹)도 전쟁 중 순절 한 터라 외숙부 신지수(辛志壽)가 신씨 가문도 몰살할 지경이 되어 산속으로 피신시켜 목숨을 부지했다.
11세 때 박찬 의병장(박경신의 조카)의 고명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박씨 부인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예몽진 의병장이 50세 홀아비에게 어린 딸을 주어 4남 3녀를 낳아 후손을 잇게 했다. 동지의 아들을 이렇게 거두어 준 우의가 감동적이며 또한 의재의 큰 인품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연혁: 1949년에 창건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중수했다.


<각계리 전경>
각계리(角溪里)
청도문화대전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명칭 유래]
이서학산 주변의 산들이 모두 나지막한 산인데 비해, 각계리 남쪽에 있는 중칭산이 약간 높은 산이라서 뿔처럼 생겼다고 각(角)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각계리는 곡식을 까불이는 칭이[키]처럼 생긴 형국이라 이 마을에서 재물을 모아서 다른 곳으로 가야 그 재물을 보존한다는 구전이 전하며, 다른 곳으로 가야 되므로 객기(客基)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각계리는 작은 마을이지만 변함없는 동명(洞名)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 시대 말에는 상북면 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중리동 일부를 병합하여 각계 마을을 각계동으로 고쳐 이서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각계동에서 각계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삼성산에서 발원하여 수야리를 거쳐 흘러온 물은 각계리 앞개울이 되고, 서원리 뒷산을 돌아 자계리에 이른다. 수야리를 거쳐 흘러온 하천 위로 각계교가 위치하고 있다. 이서면에는 점점이 떠있는 듯한 작은 똥뫼산이 많은데, 각계리도 그 중의 하나로 뒤는 작은 산이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개간하여 과수원으로 이용하고 있고, 마을 앞은 모두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문전옥답이다.
[현황]
2012년 7월 현재 면적은 1.34㎢이며, 총 44가구에 111명[남자 51명, 여자 6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이서면 학산리, 서쪽은 이서면 대전리, 남쪽은 이서면 구라리·서원리, 북쪽은 이서면 수야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각계동 단일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남서쪽에는 고려 시대의 고분군이 있는데, 일부는 도굴되고 해체된 모습으로 남아있다. 서쪽으로는 대전리와 각계리에 걸쳐 그레이스 컨트리클럽이 들어서 있다.
한편 청도군지(1991, 청도군)에 소개된 내용은 이러하다.
이 마을도 태봉산봉이 내룡이 되어 중치산을 이루고 다시 뻗다가 너무 힘이 들어 멈추면서 용두(龍頭)로 형상 지은 용각(龍角)사이에 취락한 동리다. 마을 옆으로는 실낱같은 수야(水也)천이 흐르고 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흡사 소쿠리 같은 형국으로 명(名) 동기(洞基)의 감이 돌며 면소재지가 된 적도 있다.
동리옆의 노목은 말없이 수백년의 마을 형편을 알고 있겠으나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어 답답하기만 하다. 1700년대 말경에 영양인 천치조 공이 입촌하였다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각계라면 국회의원(박숙현)을 배출한 박참봉댁 가문이 군내에서 더 알려진 마을이다.
각계 이전의 동명은 알 길이 없다.
각계(角溪)란 마을 뒷산의 형국이 용각(龍角-용의 뿔)같고 마을 옆으로는 시내가 흐른다고 각계라고 동명을 정했다고 한다. 일설에 풍수상으로 마을이 들어선 자리가 ‘소쿠리’터라 치재(治財) 또는 치산(治産)을 하여도 당대에 그치므로 치부(致富) 즉시 마을을 떠나야 된다고 하나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의 여부는 잘 알 수 없다. 또 일설로는 마을 좌우의 산등이 사람의 양팔에 비유하면서 양팔로 마을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보나 한계가 있다. 위의 소쿠리터와 일맥 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설은 어디까지나 구전에 불과하다.
성씨별로 보면 다성 마을이다. 이서면은 군내에서도 종족마을과 유풍이 가장 많이 남아있고 글을(古學) 하는 이가 끊이지 않는 면이지만 이 마을에는 주종을 이루는 성씨가 없다.

<각계리 마을 회관>
참고
- 관리문중 후손 면담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역주 오산지(2003,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 청도문헌자료집,2013, 청도문화원 향토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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