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절의 거룩한 정신이 서린 용강서원 등 재실
-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
행전 박영환
청도군 학산1리의 용강서원 및 재실을 탐방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이곳은 제 선대를 배향하는 곳이고 또 입청도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이기에 춘향이며 추향 그리고 시제를 드린다든지 문중의 대소사 논의를 위해서 늘 찾는 곳입니다. 용강서원의 여충사와 충렬사의 제향 및 소고공 산소의 시제 사진을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찍어서 까페에 올리기도 했고 또 문중전 사진도 올린 적이 있는데 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산 1리에 있는 용연정이며 영모재, 동산재, 모선재 재실도 같이 담았습니다.

숭절문


용강서원(龍岡書院)
◯ 관리문중 : 밀성(密城) 박씨 소고공파(嘯皐公派)
◯ 소재지 :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 모산마을 450번지
◯ 건물구조 : 전면에 숭절문(崇節門)이 현액된 3칸 규모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인 강당(온돌방 2칸, 대청 3칸의 중당협실형)이 있고 마당 우측에 동재 보인당(輔仁堂, 4칸)이 있다. 강당에 ‘용강서원기(龍岡書院記)’, ‘상의당(尙義堂)‘, ’소고선조시액(嘯皐先祖詩額)‘. ’자정당(自靖堂)’, 이 걸려 있다. 강당 뒤 언덕에는 사당인 여충사(麗忠祠, 3칸)가, 강당 동쪽에는 또 하나의 사당인 충열사(忠烈祠, 4칸)가 각 각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전면에는 3칸 규모의 내삼문을 세워 사당을 출입케 하였다.
높은 석축담장이 있으며 그 옆에 또 다른 별도의 공간에 마련된 용강재(龍岡齋,5칸)에는 하당(4칸), 관리실(4칸)이 있으며 중문을 배치하여 강당과 연결 하였다, 서원 전면에 또 하나의 별도 영역인 14의사묘정비(14義士廟庭碑)와 비각이 있다.
◯ 배향인물 : 여충사는 송은(松隱) 박익(朴翊)을 주벽으로 우당(憂堂) 박융(朴融)을 배향하고 있으며 충렬사는 14의사를 모셨으며, 용강재는 시거 입청도(入淸道)한 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의 묘재이다.
1) 송은(松隱) 박익(朴翊)(1332 ~ 1398)
본관은 밀성(密城)이며 자는 태시(太始),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으로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등제하여 한림문학(翰林文學), 사재소감(司宰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역임했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했으며 왜구와 호적을 정벌하는데 진충보국(盡忠輔國)하였으나 고려의 운수가 다하여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기미를 보이자 포은 정몽주에게 “聞見先天事(지난날의 일들을 듣고 보니), 榮名辱世間(영화롭던 이름이 세간의 욕이 되고 있구려), 莫言心內思(마음 속 깊은 생각 말할 것 없이), 不似早還山(일찍이 산으로 돌아감만 같지 못하리) 라는 시를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杜門不出) 자정(自靖)하면서 시(詩)와 서(書), 교우(交友)들과 세월을 보냈다.
그 후 1395년 조선 태조가 공조, 형조, 예조, 이조 판서에 이어 좌의정의 벼슬로 다섯 차례 불렀으나 왕명을 거절하는 죽음을 각오하고 천무이일(天無二日) 신무이군(臣無二君). 즉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으며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는 충절을 지켰다.
사후 600여년이 지난 2000년 9월 22일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묘소에서 태풍으로 인한 보수 작업 중 도굴흔과 함께 지석(誌石)과 화문석(花紋石)이 발견됨에 신고를 접한 문화재청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석실내부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고려시대의 풍속벽화이며 양식과 채색, 인물과 매죽(梅竹)이 함께 그려진 점 등, 조선 초기 무덤에서 고려시대 양식은 처음 발견되고, 특이한 양상과 화려함은 사료적 가치가 많아 국가 사적지(史蹟 제459호)로 지정되었다.
2)우당(憂堂) 박융(朴融)(? ~ 1428)
송은 박익의 장남으로 자는 유명(惟明) 호는 우당(憂堂)이다. 포은 정몽주의 제자로서 조선 초기에는 벼슬을 하지 않다가 아버지 송은의 조선 벼슬 유명을 받은 10년 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수찬(修撰), 전한(典翰), 형조좌랑(刑曹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금산군수(金山郡守),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역임했다. 진주 촉석루에 제영운(題詠韻) 시가 있다. 1424년(세종6년) 경상도 도사로 재임 시에는 청도향교 및 각 고을의 향교를 중수하고 제례제법을 고증하여 정비 제정하고 제기를 일신 보완하는데 힘썼다.
3)14의사(14義士)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13일에는 부산, 20일에는 청도가 함락되자 청도에 거주하는 밀성 박씨 일문(송은선생의 6세손, 7세손) 부자, 형제, 숙질, 종반 열네 분이 창의하여 청도지역을 방어하였다. 이는 전국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의병활동이다. 그 중 두 분은 전사하고 열두 분이 공신록에 녹훈되었다. 14의사는 다음과 같다.
삼우정 박경신(三友亭 朴慶新) 贈兵曹參判 宣武原從 1等功臣
용연 박경인(龍淵 朴慶因) 贈司憲府持平
제우당 박경전(悌友堂 朴慶傳) 贈兵曹判書 宣武原從 2等功臣
국헌 박경윤(菊軒 朴慶胤) 贈兵曹判書 宣武原從 2等功臣
박경선(朴慶宣) 贈承政院左承旨
계애 박지남(溪崖 朴智男) 同知中樞府事 宣武原從 2等功臣
운애 박철남(雲崖 朴哲男) 忠武衛部將 宣武原從 2等功臣
괴정 박선(槐亭 朴瑄) 漢城府右尹 宣武原從 3等功臣
운옹 박찬(雲翁 朴璨) 訓練院僉正 宣武原從 3等功臣
행와 박린(杏窩 朴璘) 訓練院僉正 宣武原從 2等功臣
기포 박우(杞圃 朴瑀) 贈戶曹參議 振武原從 1等功臣
죽와 박근(竹窩 朴瑾) 成均館進士 宣武原從 2等功臣
용암 박숙(龍巖 朴琡) 軍資監奉事 宣武原從 3等功臣
박구(朴球) 訓練院判官 宣武原從 3等功臣
박씨 일문의 의병활동은 삼창삼순팔의(三倡三殉八義)로 불려지고 있다. 즉 박경신, 박경전, 박경윤은 창의삼충(倡義三忠)이며 임란 때 순절한 박경인, 박경선과 병자호란 때 순절한 박우는 순절삼충(殉節三忠)이고 박지남, 박철남, 박선, 박찬, 박린, 박근, 박숙, 박구는 거의팔사(擧義八士)인 것이다.
∙14義士錄 板木(104板∼206枚) (선암서원 보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08호
◯ 연혁 : 1590년(선조23년, 庚寅) 용강재(龍岡齋)를 창건했고, 1819년(순조19년) 충렬사(忠烈祠)를 용강재 경내에 창건하고, 14의사 위판을 봉안, 익년에 숭의사(崇義祠)‘로 개편했다. 1835년(헌종 원년) 송은(松隱) 박익(朴翊)의 영정이 발견되어 숭의사에 주벽으로 봉안하고, 14의사를 배향하던 중 1868년(고종5년)사당이 훼철되었다. 1876년(고종13년) 14의사묘정비와 비각을 건립했으며 1913년 송은선생 영당을 복원하고, 용강재를 용강서당으로 개편했다. 1960년 강당을, 익년에 숭절문(崇節門)을 중건했으며, 1986년 숭의사를 복원하여 충렬사로 환원했다. 1992년 송은선생 영당을 여충사(麗忠祠)로 환원하고 용강서당을 용강서원(龍岡書院)으로 개편했으며, 1998년 향중 공의로 여충사에 우당선생 위판을 함께 봉안(奉安)하여 춘추로 사림봉사(士林奉祀)하게 되고, 충렬사와 14의사 묘정비가 문화재(경상북도 기념물 129호)로 지정되었다.


순천 김철희가 근기한 용강서원기

소고공 박건이 화를 입어 귀양살이 할 적에 그 적소에서 지은 시에 형 감헌 박진, 아들 박승원, 삼족당 김대유, 남명 조식, 손자인 박하담, 박하징의 차운을 편액하였다.

한국일보 내용 (1993.9.9.)

송은 박익 영정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산 134에 위치한 충숙공(忠肅公) 송은(松隱) 박익(朴翊) 선생(先生) 벽화묘(壁畵墓)- 사적지 제459호

동아대학교 박물관 조사 보고서 제35책 - 밀양 고법리 송은선생 벽화묘를 다시 용강서원에서 재발간했다.

북서쪽 장벽의 벽화

남서쪽 단벽 우측의 마부와 말
이 벽화묘는 1420년(세종2년)에 축조된 것으로써, 1999년 9월 태풍으로 침하된 봉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지석(誌石), 유물과 함께 조선시대 벽화묘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굴된 채색 벽화묘(壁畵墓)이다.
봉분의 규모는 가로 605cm, 세로 482cm, 높이 230cm의 고려식 방형묘이다.
석실은 봉분 정상부에서 410cm 깊이에 풍화암반층을 굴착하여 남북으로 장방형 토갱(土坑)을 설치 그 속에 토갱을 따라 화강암 판석을 길이 234cm, 높이 80cm, 폭 90cm의 장방형 석실을 조립한 뒤 먼저 판석 내면을 석회로 도장하고 그 위에 채색 벽화를 그렸다.
이 벽화묘의 특징은 그 시대에 흔히 그려진 일반적인 벽화와는 달리 인물, 도구, 말 등의 생활풍속도와 장벽 양쪽 가장자리에 매죽 그림을 배치한 것이 주목된다. 또한 벽화내용 가운데 양쪽 장벽 그림 속 인물들이 4인 1조를 이루면서 피장자의 두향 쪽으로 이동하고 있고, 남서 단벽의 그림은 모두 상호 대칭관계의 구도로 그려져 있다.
이 벽화묘에 그려진 매죽은 고려 태조 왕건릉의 사신도와 함께 인물풍속도에서 세한삼우가 교대해서 그려진 것은 국내에서는 유일한 벽화로서 고려말 조선초 벽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000년 12월 2일, KBS 역사 스페셜 프로그램에 '발굴 밀양 고분 벽화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방영된 적도 있다.

14의사 비각


가슴 한가운데
감격을 쏟아놓는 푸른 소나무가 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더욱 뚜렷하게
발자국을 꾹꾹 찍으며 아래와 위 또 옆으로
장엄하고 웅장하게 자라 하늘로 뻗고 있습니다
송은이란 소나무
고려를 향한 단심은 충의의 표상
그 길을 지켜 명예도 권좌도 뿌리쳤습니다
그 솔 그늘의 충의를 이어받은 14의사
나라가 짓밟히는 국난을 당했는데 어찌 목숨을 아끼리오
부자, 형제, 숙질, 종 형제
분연히 창의하여 선봉에 서서 적진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삼창삼순팔의(三倡三殉八義)라
가슴 한가운데
그 솔과 솔 그늘 감격의 역사가
오늘도 푸른 물이 뚝뚝 듣는 교훈을 쓰고 있습니다.
(박영환 '솔과 솔 그늘')


향사를 올릴 집사자들


송은 박익과 우당 박융을 향사하는 여충사

향사를 올리고 있다

여충사 마당에 도열을 했다

제수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창의했던 14의사를 배향하는 충렬사

향사를 올리고 있다

제수

헌관이 잔을 올리고 있다

삼가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다

용강재

용강서원 전경

밀양 박씨 소고공파 청도 입향조인 소고(嘯皐) 박건(朴乾) 공 묘소
봉사 박건(朴乾) 묘갈명(墓碣銘)
墓碣銘
鷄林之朴祖於新羅赫居世後貴顯愈多降及麗代銀山塊峨相于本朝位德俱嘉以至將軍道州移家雄姿武藝虎榜名華才優官薄時命何差退居鄕里身間壽遐毓慶傳光遺裔修姱有墓於玆百年己過追先墓古瞻彼山阿短碣殘缺丘陵坡陀諸孫捿感行路咨嗟更樹豊碑坏土且加貞珉不杇永示無涯
外後孫 從仕郞 前恭陵參奉 李重慶 謹識
계림 박씨는
시조가 신라 때부터 비롯되었다.
박혁거세의 후손으로써
귀인과 현달한 사람이 많았다.
고려시대에 내려와서는
은산공이 가장 빼어났으며,
본조에까지 이르고 있다.
자리에 맞는 덕을 아름답게 갖추어,
이로써 장군에까지 올랐다.
도주(道州)에 이사 와서는
웅대한 모습과 무예로써
용맹스러움에 맞는 화려한 이름을 얻었다.
재능에 비해 낮은 관작을 받았으니
시간과 운명은 어찌 이같이 다른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돌아오니
몸이 한가하니 목숨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렸다.
좋은 일을 많이 쌓아 빛나는 이름을 전하니
남겨진 자손들에게는 훌륭한 분이셨다.
묘가 여기 있으니
백년 세월이 이미 지나 갔다.
조상을 추모하고 옛 일을 그리워하면서.
저 산기슭을 우러러 본다.
작은 비석하나가 온전하지 못하게
언덕이 고르지 못한 굽어진 곳에 있다.
모든 자손들은 이를 처연하게 생각하며,
가는 길이 애석하게 여겨 탄식할 뿐이다.
나무를 바꿔 심고 좋은 비석을 세우고
한 움큼의 적은 흙을 더해본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이 영원히 썩지 아니하고,
넓고 끝없이 영원히 나타낼 것이다.
외후손 종사랑 전공릉참봉 이중경 근지

소고공 박건 묘소에서 후손들이 시제를 올리고 있다
밀양 박씨 청도 입향조인 소고공은 송은 박익의 손자이며 무과를 통해 입사했다. 공은 세조 초기에 설립된 용양위 소속 장군으로 있다가 그후 세조 11년(1465)부터 두 차례 정도 귀양 간 것으로 보인다.
소고공이 청도에 정착한 이래 그의 손자 대에 이르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림의 위치에 서게 되었고 그 손자의 후손들 역시 임란을 당하여 일문에서 14명의 의병장을 배출하여 청도 고을을 지켰다. 이러한 바탕이 되었기에 조선 후기에서 한말에 이르기까지 재지 사족으로서의 다양한 활동 등을 펼칠 수 있었다.
이같이 밀양 박씨 소고공파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다양한 종족 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그들의 청도 이주가 성공적으로 정착하였기 때문인데 우리나라 동족 부락 중에서도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다음은 2015년 10월 26일(월)부터 2016년 1월24일(일)까지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이란 주제로 전시되었던 문중전의 일부를 옮겨놓았습니다.


송은집

14의사 묘정비(탁본)
壬亂倡義十四義士合傳碑文
淸道郡義士朴氏者凡十四人曰 慶新慶因慶傳慶胤慶宣 瑄璨瑀璘适瑾智男哲男 球 壬辰四月 倭渡海十四日 陷 釜山十五日 陷東萊 十八日 陷密陽二十日 陷本郡於是朴氏聚謀倡義慶傳先匿其母於雲門山以 二十五日起兵禦賊慶胤曰吾屬聚族以戰敗則塗地請分軍爲三以相救衆從之慶傳 慶新屯上東慶胤璘屯中東吉夫山 慶宣屯鳳凰崖 且戰且守賊遇之輒敗相戒勿犯由是大邱以東得勉殘滅百姓耕作如平日皆朴氏力云慶因書生淸吏力疾討賊中創病益甚囑其子瑄而死瑄由是戰甚力以哀麻每讓功慶宣遇賊鳳凰崖斷右臂度不得免慮禍及母以左臂抱賊投崖同死慶新得賊首輒矛其下故益奮用命慶傳功旣多郡守裵應褧欲攘之士皆憤怒慶傳泣喩止之迎入城中卒歸以功慶胤前後斬首或千數上功只二級瑀在上東軍戰輒先登槍陷於面丸陷其足不報功當是時朴氏軍其勇而禮如此瑀後登武科李适之亂從南以興禦賊猪灘有功及丙子罷官家居馳詣忠淸兵使李義培軍遇虜於雙嶺死之及論宣武功慶新一等慶傳慶胤球 智男 哲男 二等 璨瑄琡 三等 瑀振 武功一等 皆原從也 慶因慶宣以夭柱不錄朴氏皆出自逍遙堂河淡 河淡長子穎 穎長子慶廷 慶廷子璨瑀琡 穎次子慶新慶新二子卽智男哲男 穎第三子慶因 慶因子卽瑄穎弟頤 頤長子卽慶傳次子卽 慶胤慶胤二子卽璨球頤次子卽慶宣 惟瑾爲逍遙堂 昆弟之外孫史氏曰 余讀宣祖大王褒諭西川府院君鄭崑壽曰 國事一歸朝臣皆竄身自活或初不從或中路托事而遁其事有不忍盡言者未嘗不三復流涕及讀朴氏諸義士事及昌寧公慶傳亂中日記卽又爽然自失矣君子曰 壬辰亂嶺南多義兵朴氏人最多倡最先地最要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驪江 李家煥 撰

밀성 박씨 세보
다음은 '용연정'에 관한 내용입니다.

용연정(龍淵亭)
◯관리 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학산1리 570-1
용강서원 앞 용연지 내에 좌정했다.
○건물구조: 정자로 통하는 다리를 지나 맞배지붕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목조와가 팔작지붕, 겹처마 이익공 정면 4칸, 측면 4칸의 정자가 있다.
구조는 시멘트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중앙에 방 한 칸, 사방에 마루를 설치하였다. 방의 문도 합들문으로 필요에 따라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하여 연못과 넓은 평야며 청도의 진산인 남산의 풍광까지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배향인물: 용연(龍淵) 박경인(朴慶因, 1542∼1592)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희중(禧仲), 호는 용연이다. 조부는 박하담(朴河淡)이며 아버지는 참판에 증직된 박영(朴潁)이다. 처는 참봉 송경(宋璟)의 딸 여산 송씨이며, 아들은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된 박선(朴瑄)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서지산(西芝山)에서 전사하였다. 아들에게 상을 치르지 말고 왜적을 끝까지 격멸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러한 일이 1804년(순조 4) 도신(道臣) 계문(啓聞)에 의해 조종에 전달되어 1812년(순조 12)에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었고, 1819년(순조 19) 청도군 이서면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
○연혁: 1968년대 창건했으며 몇 차례 중수했다. 정자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 친필 제액(題額)이 걸려있다.


다음은 영모재에 관한 내용입니다.


영모재(永慕齋)
◯관리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학산1리 363-1번지
학산1리 모산마을을 들어서 용강서원 가는 길을 따라가다 우측 중간 지점에 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3칸(방1, 고방1, 출입문)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4칸(온돌방 2칸, 마루 2칸,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목조와가 부연목이 있는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둥근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여 마루와 연결시켰으며 대청과 방 사이에는 사분합들문을 달아 필요시에는 공간을 넓힐 수 있게 했고 대청 뒤는 판문을 설치했다. 방 뒷면에 벽장을 돌출시켜 공간을 넓혔다. 정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永慕齋’가 현액되어 있고 대청마루에 박효수가 쓴 ‘영모재기’가 걸려 있다. 대문 오른쪽에 취사장이 따로 설치되어 있으며 마당은 자갈을 깔았고 주변에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박병한(朴屛漢)
본관은 밀성이며 소고공 박건의 7세손이다. 증조는 용연(龍淵) 박경인(朴慶因)이며 조부는 괴정(槐亭) 박선(朴瑄)이며 아버지는 참방공 박동온(朴東溫)이다.
◯연혁: 1985년에 건립하였다. 대청마룻대 아래 장혀에 서기 1985년 을축(乙丑) 2월 12일 경오(庚午) 오시(午時)에 상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동산재에 관한 내용입니다.


동산재(東山齋)
◯관리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학산1리 394번지
학산1리 보리미마을을 들어서 우측 길로 접어들면 하건지들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목책 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온돌방 2칸, 마루 1칸, 우당좌실형)의 재사가 있다.
목조와가 골기와 팔작지붕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여 마루와 연결시켰다. 정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東山齋’가 현액되어 있으며 기둥마다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마당 우측에 3칸(방2, 주방1)의 관리실이 있다. 특히 마당 가운데 연못을 만들고 향나무 등으로 조경을 하여 운치가 있다. 주변에 목책담장 및 블록담장을 둘렀다.
◯연혁: 1700년 경에 창건되었으며 40년 전에 크게 중수했다. 이 재사는 밀성 박씨 일문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서당의 용도로 건축된 것이다. 광복 후에는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일족들이 이곳에서 한학을 배우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1년에 두 차례씩 일족들이 모여 우리의 전통가례와 예절공부를 하고 있다. 현재 이 재실을 운영하는 계원은 20여 명 된다.

다음은 모선재에 관한 내용입니다.


모선재(慕先齋)
◯관리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학산1리 407번지(보리미길 42)
학산1리 보리미마을에 들어서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동산재를 지나서 100미터 지점에 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붉은 철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4칸(온돌방 3칸, 마루 1칸,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목조와가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등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전면과 우측에 툇마루를 설치하여 마루와 연결시켰으며 재사 보호를 위해 전면에 유리창을 달았다. 정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慕先齋’가 현액되어 있고 대청마루에 박효수가 쓴 ‘모선재기’가 걸려 있다. 마당에 감나무 몇 그루가 있으며 주변에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눌재(訥齋) 박영희(朴詠熙)
본관은 밀성이며 소고공 박건(朴乾)의 9세손으로 자는 성민(聖民)이고 호는 눌재이다. 1699년 기묘(己卯)에 태어나 1740년 경신(庚申)에 42세로 졸하였다. 증통훈대부사복시(贈通訓大夫司僕寺)였다.
◯연혁: 1925년 경에 지은 주택을 사들여 1984년에 재사로 꾸몄다. 그 뒤 강판기와로 번와하는 등 여러 차례 중수했다.


학산리(鶴山里)
디지털 향토문화대전(집필자 박윤제)에는 학산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14년 병합된 학암(鶴巖) 그리고 모산(牟山)에서 ‘학’ 자와 ‘산’ 자를 따서 학산리라 하였다. 모산(牟山), 학암(鶴巖), 주암(珠巖) 등의 마을이 있다. 주암 마을은 중심 부분에 붉은 바위가 있어 주암이라고 한다. 이 붉은 바위는 고인돌로, 주민이 집을 짓기 위해서 개석을 들추는 과정에서 돌칼이 발견되었다. 학암은 지금 이서면사무소가 있는 장소에 학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어서 학암이라고 했다. 모산은 산을 의지하고 앉은 마을로 보리미라고 하는데, 높은 지역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1914년 이전에는 상북면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주암과 학암, 모산을 병합하여 학산동이라 하고 이서면에 편입하였다. 또한 각계리에 있던 상북면사무소와 신촌리의 상당 마을에 있던 차북면사무소를 합해서 학산리에 면사무소를 설치했다. 현재의 학산 2길 부근이 면사무소 자리였다. 또한 양원에 있던 시장(市場)과 경찰서도 옮겨 왔다. 이후 이서 초등학교와 이서 중학교, 이서 고등학교가 건립되면서 이서면의 교육 중심지로도 역할을 하고 있다. 1988년 학산동에서 학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삼성산에서 내려온 한줄기의 지맥이 학산리에서 끝을 맺으며, 북쪽의 일부분만 빼고 모두 들이다. 옛날 이 주변에는 물이 귀해서 메추리 두 마리가 오면 한 마리는 굶고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논농사 짓기가 어려웠다.
2012년 7월 현재 면적은 1.62㎢이며, 총 376가구에 885명[남자 450명, 여자 43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화양읍 토평리, 서쪽은 이서면 각계리·수야리, 남쪽은 이서면 서원리, 북쪽은 이서면 금촌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모산, 학암, 주암 등이 있다.
국가 지원 지방도 30호선이 학산리 동쪽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학산리 한가운데로 수야리로 통하는 길이 있고, 학산에서 풍각으로 가는 길이 있어서 칠성리로 돌아가지 않고도 풍각, 창녕으로 갈 수 있다. 또한 신기 교차로에는 화양읍 토평리로 갈 수 있는 길이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이서 초등학교가 있으며, 이서 보건 지소, 119 이서 지역대, 이서 우체국이 있다. 그린피스 버섯 농장이 있어 팽이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29호인 용강서원 충렬사 및 14의사 묘정비가 있다.
한편 청도군지(1991, 청도군청)의 학산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멀리 삼성산(三聖山) 지능이 생동하면서 내려와 목발산(木發山)을 솟게하고 다시 떨어진 곳에 분지등(盆池嶝)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 모산(牟山)으로 산능선의 우아하고도 수려함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지형이다. 추경산에서 뻗어 나온 매화낙지(梅花落地) 형국이고 마을 가운데에는 두 개의 암강(岩岡)이 있어 그 사이로 길을 닦아서 구슬을 꿴 것 같다하여 주암(珠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모산에는 1560년경에 밀성인 박경인 공이 입촌하여 동기를 다졌고, 학산에는 임란 종전 해인 1600년경에 경주 이씨가 입촌했다하나 고증이 되지 않고 1800년초에 밀성인 박윤덕 공이 정착하였다.
1리를 부리미(浮鯉尾),모산(牟山)(보리미)라 부르고 2리를 주암(珠岩), 학암(鶴岩)이라 부른다.
부리미(浮鯉尾)
마을 뒷산의 형상이 마치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의 힘찬 꼬리 같다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모산(牟山)
부리미가 발음상 "부"보다는 "보"가 발음하기 쉬워서 보리미라 부르기에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학암(鶴岩)
학이 날아와서 살았다는 "학바위"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동리는 조선시대는 모산동, 학암동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각각 한자씩을 따서 학산리라 칭하게 된 것이다.
*1리 총 71호 중 밀성 박씨 59호, 기타 12호 - 박씨 종족 마을로 유풍(儒風)이 대단하다.
2리 총 216호 중 밀성 박씨 40호 경주 이씨 10호 기타 166호 - 면 소재지로 면, 지서, 학교, 시장 등 이서면의 행정, 종교, 교육, 상업의 중심지로 여느 면소재지와 마찬가지로 다성(多姓) 마을 특성이 있다.
참고 자료
-밀성박씨 소고공파 세보
-송은 박익선생 벽화묘 (2012,용강 서원)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박홍갑: 병재 박하징 연구(2006, 경인문화사)
-청도군지(1991, 청도군청)
-선무원종 공신록 및 충효마을지
-역주 오산지(2003,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서원이야기, 박성진
-청도문헌자료집(2003, 청도문화원 향토사학회)
-문중 후손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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