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행전 박영환
2018년 2월 10일(금)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를 찾았다. 억산(億山)에서 갈라진 지봉들이 다시 갈라져서 많은 산봉 사이사이에 10개 마을이 넘게 지형과 계천을 따라 형성된 동리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아음동, 임곡동을 합해서 남양리라 하였다.
이 마을에는 영사재, 일심재, 아산재, 우헌재, 영모재, 지산정, 리유재 정효각 등 여러 재실과 효자각이 있다.
마침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있는 박희상(제우당 박경전 후손) 씨가 당신 집안의 재실인 일심재는 물론 1리부터 2리까지의 재실. 효자각 및 동네 곳곳을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 덕분에 많은 것을 얻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영사재(永思齋)
◯관리문중: 고성이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남양1리 1450번지(서복마을)
매전면 사무소가 있는 동산리를 지나 삼족대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우측다리를 건너 도로 우측에 있는 남양리로 들어서면 경로당 뒤편 50여미터 지점에 있다.
◯ 건물구조: 청기와로 단장한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팔작지붕 청기와 3칸 전퇴(온돌방 2칸, 대청 1칸)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연결시켰으며 방과 대청사이에는 사분합들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툇마루를 위에 재사 이름인 ‘永思齋’가 현액되어 걸려있으며 이우기가 찬한 ‘永思齋小識’가 있다.
재사 앞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우측에 소나무 등으로 가꾼 넓은 잔디 정원이 있으며 불록 담장을 둘렀다. 정원 앞에는 마을로 통하는 별도의 철제 출입문이 있다.
◯배향인물: 고성인 이한용(李漢龍)의 덕을 기리며 향사를 지내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연혁: 1928년에 창건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했다.
언론인이며 문공부 장관을 지낸 이진희(李振羲), 과학기술처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희(李祥羲) 형제가 이 재실의 후손이다.



인기 연예인 박중훈의 아버지가 살던 집이다. 지금은 그의 고모가 거처하고 있다. 아버지 박일상은 의병장 제우당 박경전의 16대 종손이며 형 박도훈은 17대 종손이다. 특히 이 제우당 종손 집은 한 번도 대가 끊겨 양자를 들이는 일이 없이 계속 이어졌다니 자랑할만한 집안이다.


일심재(一心齋)
◯관리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1리 1201번지(서복마을)
경로당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마을 중간에 위치한다.
◯ 건물구조: 철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팔작 와가지붕 4칸 전퇴(온돌방 3칸, 대청 1칸,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연결시켰다. 대청 중앙에 재사 이름인 ‘一心齋’가 현액되어 걸려있으며 좌우에 ‘晩悔堂’ ‘杏塢齋’ 등 당호도 있고 만회당 8대 사손 박순복(朴淳復)이 쓴 ‘일심재기’가 걸려있다.
마당은 잔디를 심었으며 양옆에 감나무, 가운데는 큰 사철나무가 있고 주변에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만회당(晩悔堂) 박사겸(朴思兼)
본관은 밀성이며 숙종조 이서면 수야리 행정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숭덕전 참봉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의 증손 박흥묵이 이곳 남양리에 터를 잡아 이거했고 박흥묵의 아들 행오 박재화가 장련, 웅천, 창녕 군수로 이름을 떨쳤다.
◯연혁: 1955년에 창건했으며 1976년(丙辰) 등 여러 차례 중수했다. 박순복은 기문에 조상인 고려 문하시중 박언부, 은산부원군, 여말 충신 박익, 입청도 선조 소고공 박건, 소요당 박하담, 모재공, 임란 창의 의병장 제우당 박경전 등의 공적을 열거한 뒤, 8.15 해방을 맞아 고향을 지키던 자손은 해외에서 돌아온 후손과 합심하여 불과 기년에 재사 신축을 이루었으니 이는 오로지 조상 대대의 음덕이라 아니할 수 없는지라 우리 자손들은 더욱더 일심재를 가꾸고 산업에 진력하여 고향 발전에 이바지 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산재(牙山齋)
◯관리문중: 서흥 김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1리 1921
남양리 골마마을 산기슭에 동북 방향으로 좌정하여 남양 들판을 바라보고 있어 전망이 좋다.
◯ 건물구조: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팔작 와가지붕 4칸 전퇴(온돌방 3, 대청 1,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대리석으로 단장한 기단 위에 둥근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방과 대청 사이에는 사분합들문을 달아 필요시에는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툇마루를 두어 마루와 연결시켰다. 대청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牙山齋’가 현액되어 걸려 있으며 그 옆에 ‘아산재기’가 있다. 재사 주변에는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서흥 김씨 문중의 종사이다. 해마다 한 차례씩 서흥 김씨 후손들이 모여 조상의 유덕을 추모하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장소로 활용한다.
◯연혁: 1965년에 창건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 중수했다.
*재사 밖 별도 공간에 ‘寒暄堂金先生祠版奉安遺趾碑’가 건립되어 있다.
김굉필의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주부(主簿)·감찰·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가범(家範)》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총장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김희옥이 이 재실의 후손이다.




골마 마을 전경



정효각
◯관리문중: 분성 배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1900-5 번지
당호리에서 신지리 방향의 지방도 919호선을 따라 가다 우측에 있는 골마 마을에서 안골 마을로 통하는 도로변에 있다.
◯건물구조: 단칸[單間]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주위에는 붉은 벽돌로 방형의 담장을 둘렀으며, 전면 담장 사이에는 일각문을 세웠다. 정효각의 4면에는 홍살을 세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였다. 뒤쪽 벽에는 ‘효자 학생 배세중지려 영조 정사 삼월 정려(孝子學生裵世重之閭 英祖丁巳三月 旌閭)’라고 쓴 정려 현판이 걸려 있다. 가구는 3량가의 초익공(初翼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배향인물:배세중, 세두(裵世重, 世斗)
부모를 봉양함에, 겨울에 잉어가 튀어나오고 눈 속에서 죽순을 구해드린 이적(異蹟)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는 애통하여 성묘를 다녔는데 골짜기에 큰 길이 생겼다. 영조(英朝) 때 두 사람 모두에게 정려(旌閭)가 내렸는데 세두는 생존해 있었으므로 좌랑(佐)의 벼슬이 내려졌다. 정재 유치명(定齋柳致明)이 지은 정려각 중수 기문이 있다.
◯연혁: 1737년 베세중 형제의 효행을 칭송하기 위해 분성 배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현재 내부에는 비는 없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 있다. 정효각의 주변에는 보호 시설과 표지판은 설치되어 있지 않으나, 주변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당산나무(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당제를 지낸다. 2019년 6월 5일)


우헌재(愚軒齋)
◯관리문중: 김녕 김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2리 345번지
남양2리 마을 중간에 위치하며 앞산을 바라보며 아담하게 자리 잡았다.
◯ 건물구조: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팔작지붕 3칸 전퇴(온돌방 2칸, 마루 1칸)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재사보호를 위해 마루 앞에 유리문을 달았다. 정면에 재사 이름인 ‘愚軒齋’가 현액되어 걸려있다.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주변에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김녕인으로 입청도 선조인 김우헌의 유덕을 기리며 후손들이 향사하고 있다.
◯연혁: 1975년에 창건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 중수했다.



영모재(永慕齋)
◯관리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남양2리 491-1
남양 2리 임실 마을의 마을길로 새마을 회관 쪽으로 가다 갈림길에서 우측 길로 150m가량 가면 민가 사이로 난 시멘트 길로 다시 북쪽 산 쪽으로 100m가량 간 산 기슭에 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맞배지붕인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팔작와가지붕 5칸 전퇴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재사 평면은 사분합들문이 달린 2칸통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 2칸, 우측에 온돌방 칸 반이 배열된 5칸 중당 협실형이다. 대청 앞에 문을 설치한 것은 다른 일반적인 재사에서 잘 볼 수 없는 구조이다. 마루방 상부 가구는 건실한 5량가이며 2칸 온돌방과 마루방 앞쪽에도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다. 전면에 재사 이름인 ‘永慕齋’가 현액되어 걸려있으며 토석담장을 둘렀다.
재사 앞에 3칸의 관리사가 있다.
◯배향인물: 박숙(朴琡)
본관은 밀성. 자는 이헌(而獻), 호는 용암(龍巖). 소요당 박하담(朴河淡)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공조 참의에 증직된 박경연(朴慶延)이고, 어머니는 부정(副正) 강경우(姜景愚)의 딸 진주 강씨이다. 기포(杞圃) 박우(朴瑀)의 아우이며, 이반(李礬)의 딸 고성 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셋을 두었다.
다섯 형제 중 넷째로 어릴 때부터 장대하고 큰 뜻을 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겨우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밀성 박씨 일문에서 창의한 청도 의병진에 가담하여 여러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군자감 봉사(奉事)에 올랐다.
문한(文翰)이 뛰어나 여러 제현들과 교의로 사귀었으며, 『남정록(南征錄)』을 저술하였다.
◯연혁: 1800년에 용암 박숙의 묘소 아래 묘재로 창건하여 향사하고 있다. 몇 차례 중수하였다.
도주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永慕齋〓 南陽洞 二區에 있는데 密城人 朴琡의 齋舍이다 逍遙堂의 曾孫으로서 字는 而獻이고 號는 龍岩이며 從諸父兄으로 倡義한 功으로 授軍資監奉事 宣武原從三等勳 享 龍岡祠



남양2리 느티나무(2019.6.5)

옛날에 사용하던 연자방아(남양2리 청년회관앞에 있었다고 한다)

남양2리 경로회관


지산정(智山亭)
◯관리문중: 경주 김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2리 904번지
남양 2리 임실 마을 동편에 위치한다.
◯ 건물구조: 비교적 양지바른 경사지를 2단으로 조성했다.
3칸(출입문, 고방1, 방1)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아랫단 좌측에 3칸 관리사가 있고 위쪽 높은 언덕 위에 별도의 출입문을 둔 팔작지붕 정면 5칸 재사가 있다.
시멘트로 마감한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뒤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았다. 중앙 2칸 대청에 좌측으로 온돌방 1칸, 우측으로 온돌방 2칸을 배열시킨 5칸 중당 협실형이다. 전면 전체에는 툇마루에 헌함을 돌려 마치 누마루 형태로 꾸몄다. 청과 방 사이에는 사분합들문, 온돌방 앞문은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전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智山亭’이 편액되어 걸려있으며 대청마루에는 1891년(고종 28)에 관찰사 엄세영(嚴世永)이 쓴 「정효각기(旌孝閣記)」와 이재즙(李在楫)의 「지산정기(智山亭記), 두 아들이 쓴 글이 걸려 있다.
◯배향인물:김희찬(金熙瓚)
본관은 경주, 자는 평원(平元), 호는 지산(智山)이며, 월간(月澗) 김처형(金處衡)의 후예이다. 어릴 때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병상의 부친을 10년 동안 간호하고 보살펴 정성을 다하였다. 시묘하는 3년 동안 호랑이가 매일 나타나 김희찬을 보호하였다고 전한다. 벼슬은 참봉(參奉)에 올랐고, 사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이 증직되었다.
◯연혁: 1905년에 창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했다.
도주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智山齋〓 壬谷洞(南陽二區)에 있는데 慶州人 金熙瓚의 齋舍이다 月澗公 處衡의 十一世孫으로서 字는 平元이고 號는 智山이다 廬墓三年의 孝行卓異로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表旌閭 하다 記文은 觀察使 嚴世永撰이고 智山亭記文은 渠庵 李在緝의 撰하다






리유재(履有齋)
◯관리문중: 아산 장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2리 821
남양2리 동편 산기슭에 있다.
◯ 건물구조: 철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양옥형 관리사(20평)가 있고 우측에 강판 기와 3칸 전퇴(온돌방 2칸, 대청 1칸,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대청 앞에도 사분합들문을 달아 내부를 보호하고 필요시에는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툇마루를 두어 전체를 연결시켰다. 정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履有齋’가 현액되어 걸려 있으며 대청에 장병기가 쓴 ‘리유재기’가 있다. 그 옆에 ‘齋成識感’이 있다.
◯배향인물: 아산인 장형재(蔣亨在)의 재사로 후손들이 모여 조상의 유덕을 추모하고 향사를 지내며 방학 때는 자녀들이 전통예절을 익힌다.
◯연혁: 1955년에 창건했으며 그 이후 2008년 등 몇 차례 중수했다.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904번지에 있는 비석이다. 원래 이곳은 고성이씨 이관선의 재사인 진암재(眞岩齋) 자리였으나 2017년 7월 풍우에 훼손되어 헐었다. 거기에 비석을 세우고 제단을 만들었다.

임실교회

마을 앞 구만산(2019,0605)
다음은 2019년 6월 5일(수), 청도문화연구회회원들이 찾은 임실마을 도요지 편입니다.

도요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강사 김태호 향토 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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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지에 대한 김태호 선생 설명(동영상)
7. 유적지 관련 자료
1)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임곡동(壬谷洞)과 사곡동(沙谷洞), 아음동(牙音洞)을 합쳐 만들어진 남양리(南陽里)는 매전면(梅田面)에서는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동리로 남쪽이 높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으나 양지바르고 따뜻한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는 상바위(象巖), 서복이(鼠伏), 밤밭, 골마, 안골, 사곡(沙谷), 임실(壬谷), 아랫마, 점뒤, 동평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남양리(南陽里)에는 산등성이를 따라 옹기종기 작은 마을이 골짜기 마다 취락하고 있다. 서복이 마을은 동창천을 앞에 두고 있는 마을로 강이 굽이치는 곳에 위치하며,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골마, 안골, 사곡이 있다. 서복이 마을을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곡 마을이 있다. 사곡마을에서 나지막한 임실고개를 넘으면 임실이 있다. 임실에서는 도자기 만드는 흙이 많아 조선 후기에 백자를 만든 큰 요지가 있다.
2) 상바위[상암(象巖)]
상바위는 동창(東倉)에서 남양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산비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 앞에는 코끼리 바위가 있어서 상암(象巖)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느 해인지 산사태가 나서 마을이 피해를 입고 난 뒤에 지금은 몇 집이 남아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마을 앞의 낮은 땅을 돋우어 새로 마을이 들어서고 있다.
3) 밤밭[율전(栗田)]
밤밭은 동창천의 옛 들을 앞에 두고 있는 마을로 마을 앞을 흐르는 동창천변에 밤나무밭이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동창천의 강둑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동창천의 범람으로 마을 앞의 벌판은 자주 물에 잠겼다. 동창천의 범람을 막고 강둑을 보호하기 위해 밤나무를 많이 심어 마을 앞에는 밤나무 밭인 밤밭이 있었다고 전한다.
‘밤밭’은 ‘굴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밤을 뜻하는 한자인 율(栗)과 밭을 합한 ‘율밭’은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귤밭’ 혹은 ‘굴밭’으로 부르게 되었다.
3) 서복(鼠伏)이, 서보기,
서복(鼠伏)이 마을은 남양 1리의 중심 마을로 도로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서복(鼠伏)이는 진흙땅으로 이루어져 있어 물이 쉽게 빠지지 않는 수렁을 뜻하는 시비기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다.
마을 앞에 있는 들판은 옛날에 동창천이 구부러져 흐르던 곳이었으나 동창천의 흐름이 바뀌면서 동창천의 하상(河上)이 높아져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시비기가 되었다. 시비기를 한자로 기록하면서 비슷한 음을 취하여 서복(鼠伏)이라 불렀다. 한편 마을 앞에 있는 바위는 그 모습이 마치 쥐가 곡간 앞에서 엎드려 있는 모양으로 쥐바위라고 부른다.
4) 사곡(沙谷), 골마
사곡(沙谷)은 남양리에서 가장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조선시대에 사기그릇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곡(沙谷)으로 부른다. 지금도 마을 안쪽에는 사기그릇을 만들던 가마터가 세 곳에 남아 있고, 마을 주변에서는 사기그릇 조각과 도지미[받침]가 많이 발견된다.
골마는 골짜기 깊숙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5) 아음(牙音), 애암(崖巖)
옛날에 이 마을 앞에는 동창천이 휘돌아 흐르면서 깊은 소(沼)가 만들어지고, 바위가 침식되어 생긴 층암절벽 위에는 풍우대(風雩臺)가 있었다. 이 마을에 ‘바위절벽’이 있었기 때문에 ‘애암(崖巖)’으로 불렀다. ‘애암(崖巖)’을 보다 운치가 있는 비슷한 발음의 ‘아음(牙音)’으로 부르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뒷산이 마치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으로 ‘거문고의 우아한 소리인 옥음(玉音)이 들리는 곳’이라는 뜻으로 아음(牙音)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6) 임실(壬谷)
임실(壬谷)은 구만산(784m)과 복정산 사이에 있는 큰 골짜기라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다.
한편 골짜기가 동, 서, 남의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오직 북쪽 방향인 임좌(壬坐)만 열려있어 임실(壬谷)로 불렀다고 한다. 임실(壬谷)에 있는 마을은 행정 구역으로는 매전면에 속해 있으나 생활 영역은 금천면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실(壬谷)에는 큰마(큰마을)과 아랫마(아랫마을), 동편의 세 마을이 있으며, 넓은 곡간 평야를 중심으로 논농사가 발달하며, 골짜기의 낮은 산지를 개간하여 과수 농업이 활발하다.
큰마(큰 마을)는 임실(壬谷)의 중심 마을로 가장 큰 마을이다. 북쪽을 제외한 삼면이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주변의 산기슭을 활용하여 과수원을 많이 조성하여 다양한 과수를 재배하고 있다.
아랫마(아랫마을)는 큰마의 아래쪽인 개울가의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임실의 넓은 곡간 평지를 중심으로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동편은 아랫마와 마주한 동쪽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동편으로 부른다.
점뒤(점되)는 원래 임실 안쪽에 있는 마을이었으나 광복 이후 6.25전쟁 당시까지 공비들의 출몰을 피하여 마을을 현재의 자리인 옹기점으로 옮겨오면서 ‘점뒤’로 부르게 되었다.
7) 만의보(巒衣洑)
아음보(牙音洑)를 만의보(巒衣洑)라고 부르며, 아음보(牙音洑)의 입구인 양수장 암벽에는 산자락의 바위를 깨어 보(洑)를 내면서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각자(刻字)가 있다. 보(洑)를 만든 시기는 1701년(辛巳年0이며, 공사비가 500량 소요되었다고 한다.
8) 풍우대(風雩臺)
남양리 애암(崖巖) 마을의 도로변에 있는 풍우대(風雩臺)는 동창천이 흐르면서 침식에 의해 형성된 층암절벽이다. 옛날 풍우대(風雩臺) 아래에는 동창천의 깊은 소(沼)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창천의 흐름이 바뀌면서 소(沼)는 메워져서 전답으로 바뀌고 절벽에는 커다란 잡목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청도문헌고』에는 풍우대(風雩臺)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在郡東梅田面牙音村前層巖懸壁斷如隆準川水抱臺而流可以浴可以風恰如曾點舞雩故三足堂金大有嘗遊賞于此
(풍우대(風雩臺)는 군의 동쪽 매전면(梅田面)의 아음촌(牙音村) 앞에 있다. 층암절벽에 우뚝한 코를 떼어다 벽에 붙여 놓은 것 같다. 강물은 대(臺)를 감싸고 흐른다. 목욕을 할 만하고, 풍경이 흡사 일찍부터 기우제(祈雨祭) 제단으로 점찍어둔 듯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이 일찍부터 노닐던 곳으로 이곳을 칭찬하였다.)
9. 도자기와 도요지
1) 도자기의 정의
일반적으로 도자기는 점토·장석·규석·등으로 점력(粘力)이 있는 태토(胎土)로 형태를 만들고 열을 가하여 경화(硬化)시킨 제품을 말한다. 도자기에는 토기, 도기(陶器), 석기(炻器), 자기(磁器:瓷器) 등의 4종류로 크게 나눈다.
가) 토기
토기는 일반적으로 점토로 만들며 시유하지 않은 것이 많다. 토기를 구워내는 불의 온도는 600℃ 이상에서 800℃ 정도로 비교적 낮은 온도로 소성한 것으로 다공성이며 기계적 강도가 낮다. 인류가 처음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서기전 1만년에서 6000년경 사이이며, 우리나라에서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서기전 6000∼5000년경이었다. 처음에는 토기를 불에 굽지 않고 햇볕에 말리거나 600℃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가마 없이 구워내어 사용했다. 사람의 지혜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수비(水飛 앙금짓기)를 하여 태토를 만들고 토기를 구워내었다. 토기를 만들 때의 온도에 따라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연질토기(軟質土器)에서 더욱 발전하여 1,100℃ 이상 1,200℃의 높은 온도로 경질토기(硬質土器:炻器)를 만들게 되었다.
나) 도기
도기는 점토질의 원료에 석영·도석·납석 및 장석질 원료를 배합하여 900∼1,000℃ 내외의 화도에서 산화번조(酸化燔造:가마에 불을 땔 때 산소를 많이 들여보내는 방법)로 구워서 만든 것으로 토기는 황색· 갈색· 적색을 띠며,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가 있으며, 도기에는 연질 도기, 경질 도기, 반자기 도기 등 다양하다. 청자와 백자는 황색이나 갈색을 띠게 되며 표면에 유약(釉藥)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다) 석기
석기는 석영 ․ 철 화합물 ․ 알칼리토류 및 알칼리염류 등의 불순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점토를 배합하여 만든 소지를 1,100℃ 이상의 높은 화도에서 주로 환원번조(還元燔造:가마의 온도가 1,100℃ 이상일 때, 땔감을 많이 넣고 산소를 막아 불완전연소가 되게 하는 방법)로 구워서 만든 것으로,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기 때문에 태토 속에 포함된 장석이 녹아 유리질로 변해 태토 속으로 흘러 들어가 그릇의 몸체가 돌처럼 단단해 진 것을 말한다. 토기는 통일신라시대의 회색·회청흑색의 경질 토기가 있다. 백자는 담청색을 머금고, 청자는 아름다운 비색을 띠게 되며 자연유(自然釉)나 인공회유가 입혀진 것이 있다.
라) 자기
자기는 백토(白土:高嶺土)로 태토를 만들어서 1,300∼1,500℃의 높은 온도로 소성하여 만든 것으로, 태토가 유리질화 되어 그 조직이 치밀하고, 강도가 매우 높으며 흡수율이 낮다. 태토는 점력이 적어서 성형을 할 때 어려움이 많다. 조선시대의 백자가 여기에 속한다.
2) 시기별 도자기
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우리나라는 7,000∼8,000년 전경인 신석기시대로부터 흙을 빚어 불에 구운 토기(櫛目文土器)를 사용하였으며, 삼국시대는 높은 온도에서 토기를 만들었다. 삼국 토기 중에서도 신라· 가야토기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하였으며, 1,2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표면색은 회청, 흑색으로 단단하였다. 당시에는 후장(厚葬)의 풍습으로 인하여 많은 토기들이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이들 토기는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부장용(副葬用)보다는 주로 실생활용으로, 삼국시대의 높은 받침은 낮은 굽으로 변하고, 둥근 바닥은 편편한 바닥이 되고, 목이 낮아져서 안정감 있는 토기를 만들었다. 또한, 삼국시대부터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녹유토기(綠釉土器)와 갈유토기(褐釉土器)가 발달하면서 토기가 세련미를 가지게 되고, 9세기경부터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토기에서 자기(청자)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나)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이미 통일신라 말기에 청자와 일부 백자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의 청자기술이 한반도에 전파되어 제조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청자와 함께 백자, 철유, 흑유 등의 고려자기가 발달하였다. 한편에서는 신라 이후의 회청색 토기들과 경질회유(硬質灰釉)와 연질연유(軟質鉛釉) 토기들이 꾸준히 양산되었다. 12세기에는 상감(象嵌)청자의 기법이 개발되면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고려청자가 만들어졌다.
다) 조선시대
조선조 도자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려청자의 맥을 이은 조선청자와 분청사기 종류이고 또 하나는 초기의 고려의 백자, 원(元)· 명(明)의 백자, 청화(靑華)백자의 영향으로 발달된 백자 종류이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에서 발전하였으며 조질 태토의 표면에 백토로 문양을 상감, 인화, 박지, 조화, 철화, 귀얄, 담금 등의 방법으로 분장하고, 투명한 담청색의 유약을 시유한 새로운 형태의 자기이다. 분청사기는 16세기 후반 백자 기술이 보편화되어 실용적인 제품이 만들어지면서 질이 덜어지고 소멸되었다.
백자는 15세기 후반부터는 광주분원을 중심으로 순백의 태토로 맑고 투명한 유약이 입혀져 설백자(雪白磁)라고 부르는 백자가 만들어졌다. 조선의 자기를 대표하는 순백자는 조선사회의 지도적 이념이었던 성리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색체나 사치스러운 장식을 지양하고 간결하고 단아한 형태와 흰색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순백자 외에도 청화백자, 철화백자, 진사백자 등이 만들어졌다. 백자에 산화철로 문양을 나타낸 철화백자는 15세기 후반부터는 번조하기 시작하였으며, 17세기 중엽에는 초화문과 대나무 문양, 용문, 국화문 등으로 시문하여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내었다. 진사백자는 산화동 성분의 안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문양을 나타내었으며, 청화나 철화를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3) 도요지의 일반적 특징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태토를 구하기 쉽고, 특히 자기의 태토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비(水飛 앙금짓기) 하기에 적당한 물이 있어야 한다. 또한 높은 온도로 소성하기 위해서는 불을 들이기 쉬운 약간의 경사지에 가마를 설치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도자기를 구울 충분한 양의 나무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도요지를 만들게 되며, 주변에 나무가 충분하지 않으면 가마를 자주 옮기게 된다. 우리 고장의 도요지가 분포한 곳의 특징도 어느 정도 위와 같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청도 지역의 토기요지는 특히 산서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나, 자기 요지는 각북면 남산리 요지를 제외하고는 운문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동 지방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도자기의 특성상 운문산 부근은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태토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높은 온도로 자기를 소성하는데 필요한 나무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일반적인 도요지와 가마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가마는 도자기 ․ 유리 ․ 벽돌 등을 굽는 시설물로 원시적인 토기를 만들 때는 특별한 가마를 만들지 않고, 그릇을 쌓아 풀이나 나무로 덮거나 진흙을 발라 굳힌 후 불을 붙여 태우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경질의 토기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점차 열의 손실이 없도록 가마를 고안하게 되었다.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 된 가마는 BC 6000년경의 이라크 테페 유적에서 발견된 가마이다. 중국에서도 BC 6000~BC 5000년경 신석기시대에 지면을 파서 만든 소형 횡혈식 가마가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사군(漢四郡) 설치를 전후로 언덕의 경사면에 길게 만들어진 터널형의 등요(登窯)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때의 토기 요지는 여러 곳에서 발굴 조사되었는데 그 특징은 소형 가마는 반(半)지하식 등요이고, 대형 가마는 지하굴식 등요였다. 지하식 가마는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반지하 ․ 반지상의 등요로 발전했다. 고려시대의 가마는 자연경사를 이용한 등요로 초기에는 칸막이가 없는 통가마였으나 중기부터 칸가마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가마는 지면을 약간 파서 긴 구덩이를 만들고 구덩이의 좌우 위턱에서 점토로 벽과 천장을 둥글게 쌓아올린 칸가마가 많이 사용되었다. 후기로 갈수록 가마의 규모는 커지며 계단식의 경사진 칸가마로 발전되었다.
현재까지 청도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도요지는 옥산리 도요지이며, 따라서 도요지와 관련된 자료도 충분하지 않다.
10) 임실 자기 요지
가) 위치 :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264번지 일대, 233번지 일대
나) 시기 : 조선 후기
다) 현황
이 지역에는 주변에 풍부한 산림 자원과 자기 생산에 가장 필요한 태토의 원료인 고령토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일상생활에 필요한 저급의 백자(사기 그릇)가 많이 생산되었다. 특히 264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 자기 파편들이 산재해 있다. 자기요지는 경사지의 산록을 중심으로 대규모 등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지목이 대지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요가 없어진 것이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다. 233번지의 요지는 264번지의 요지에서 약 300여 미터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는 요지로 매우 큰 규모의 백자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변에는 많은 백자(사기)가 흩어져 있다. 요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깨어진 백자기의 파편들이 대규모로 쌓여있으며, 현재는 주변이 농경지로 개간되어 있다.
임실 백자요지 주변에는 조선 후기의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봉백자요지, 신지백자요지 등의 대규모의 요지가 남아있다. 이러한 요지에서는 생활용품으로 사용되는 낮은 품질의 다양한 형태의 백자기를 생산하여 지역의 수요를 충족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판매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곳에서 생산된 백자의 유통 경로와 생산 과정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규명된 바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 조선 후기 지역사회 경제 활동과 관련하여 이곳에서 생산된 백자의 생산, 유통 경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단체촬영

도자기를 빚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흩어진 도자기 조각들 - 이 근처 산등성이에 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양리(南陽里)
디지털 향토문화대전(집필자 박윤제)에는 남양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아음동, 임곡동을 합해서 남양리라 하였다. 마을로는 상바위, 서복이, 밤밭, 골마, 안골, 사곡, 큰 마, 아랫마, 점뒤, 동편 등이 있다.
상바위[상암(象巖)]은 동창에서 남양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산비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코끼리 바위가 있어서 상암이라고도 한다. 밤밭[율전(栗田)]은 동창천의 옛 들을 앞에 두고 있다. 마을 입구 들판에 방천이 완벽하지 못했던 예전에 강가에 밤나무를 많이 심어 방천을 대신했고 밤나무 밭이 되어서 밤밭이라고 했다고 한다.
서복(鼠伏)은 남양 1리의 중심 마을로 도로에 위치하며, 물이 빠지지 않는 논이라는 뜻의 시븨기라는 순수한 우리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운문천에서 내려오는 강바닥의 높이가 논바닥보다 높고, 남양천에서 내려오는 물도 역시 아래를 막아 주기 때문에 들이 항상 늪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시븨기를 한문으로 기록하면서 서복이라고 했다. 한편 마을 앞 바위가 쥐가 곡간 앞에서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쥐바위라고 부른다.
사곡(沙谷)은 남양 1리 가운데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지금은 정자나무 쪽으로 모두 이거하고 있지만, 1982년 폭우가 있기 이전에는 안쪽에 있었다. 사곡이란 사기(沙器) 그릇을 만들었던 곳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마을 안쪽에는 세 곳의 사기 가마터가 남아 있고, 사기 조각과 도지미[받침]가 많이 발견된다.
애암은 지금 아음(牙音)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옛 지명에는 애암(崖巖)으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마을의 뒷산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이라고 하여 ‘우아한 옥음’이라는 뜻으로 아음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음 뒤쪽에는 아음보라 불리는 양수장이 있는데, 만의보라고도 불린다.
큰 마는 임실[壬谷]의 가장 중심 마을이다. 아랫마와 점뒤 마을보다 크기 때문에 큰 마라고 불리고 있다. 점뒤 마을은 원래 당목이 있는 안쪽 골에 있었으나 해방 후 시국이 어지러울 때 지방에 자생한 공비들을 피해서 지금의 동리로 옮겨오면서부터 점[옹기] 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아음동이 상남면(上南面)에 속해 있었고 임곡동이 외종도면(外終道面)에 속해 있었다. 이후 1896년 외종도면(外終道面)을 동산면(東山面)으로 고쳤고, 1906년에 동산면은 종도면(終道面)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상남면과 종도면, 중남면을 합해서 매전면이라 하였고, 아음동, 임곡동, 사곡동을 합해서 남양동이라 하여 매전면에 편입하였다. 이후 1952년에 남양 1동과 남양 2동을 나누었으며, 1988년 5월 1일 남양동을 남양리로 개칭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억산에서 갈라진 지봉들이 다시 갈라져 산봉우리 사이에 지형과 계곡을 따라 10개 이상 자연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각 자연 마을 앞쪽과 뒤쪽으로는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있는데 옥녀봉, 서복산 등으로 불린다. 서복이 마을은 운문천이 굽이치는 곳에 위치한 곳에 위치하며, 뒤쪽으로 구만산이 높이 솟아 있다. 오봉리를 지나서 임실 쪽의 마을과 서복 마을이 위치하며, 서복 마을 앞쪽 길로 해서 들어가는 남양길을 따라 골 안으로 들어가는 깊숙한 골짜기에 아음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서곡지가 있는 아음 마을의 길을 따라 넘어가면 장연리 장수골 마을로 들어가서 장연사지 앞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면적은 12.83㎢이며 동쪽은 금천면 신지리·오봉리, 서쪽은 매전면 호화리·장연리, 남쪽은 산내면 봉의리·가인리, 북쪽은 매전면 당호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로 남양 1리와 남양 2리가 있다. 남양 1리는 상바위, 서복이, 밤밭, 골마, 안골, 사곡 등 6개의 자연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남양 2리인 임실[壬谷]에는 큰 마, 아랫마, 점 뒤, 동편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한편 청도군지(1991, 청도군)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억산(億山)에서 갈라진 지봉들이 다시 갈라져서 많은 산봉 사이사이에 10개 마을이 넘게 지형과 계천을 따라 형성된 동리다. 높고 낮게 이어진 봉우리들은 옥녀(玉女)봉, 옥녀타금등(玉女打琴嶝), 鼠伏山(서복산)등 갖가지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미화되고 숭앙되어 산곡촌의 특징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각 골마다 마을이고 마을마다 계천이다. 취락은 오래 되었으나 마을의 기록은 16세기부터다. 1500년대초에 성주인 배 공이 1리에 자리를 잡아 한 시절은 배씨 촌을 형성할 정도로 후손들이 번창하기도 하였다 한다. 뒤를 이어 서흥 김씨, 철성 이씨들이 입촌하여 각각 가풍을 세우고 예를 바탕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리에는 1530년경에 창녕인 성조용 공이 이거 정착하고 동기를 새로이 굳혔다.
아음(牙音)이란 동명은 당초에는 배 공이 애암이라 하였는데 뒷산에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이라 거문고에는 우아한 옥음이 나와야 대국(對局)이 됨으로 아음(牙音-애암)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풍류적인 마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사곡(沙谷)은 천변이라(溪川) 좁은 곡야(谷野)이고 지형상 자갈과 모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암(象岩)은 처음 성 공이 마을 주위를 살펴보니 코끼리(象) 형상의 큰 바위가 있어 코끼리 바위 즉 상방우라 한 것을 상암(象岩)으로 표기한 것이다.
곡리(谷里-안골, 골마을)는 옥녀봉 기슭 골 안에 자리잡은 탓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이 마을은 서복(鼠伏)마을과 같이 인재가 많이 나와 명당촌이라는 별칭도 있다.
서복(鼠伏)또는 시비기는 마을 앞산의 형상이 마치 쥐가 엎드린 듯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쥐가 머무는 곳에는 항상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풍수설처럼 서복산이 멈추는 곳에서 들이 펼쳐져 식생활이 풍족하고 인재가 많이 나는 마을이다.
임곡(壬谷-임실)은 3면이 산에 둘러싸여 있고 북쪽만 열려 있어서 임곡(壬谷)이라고 처음 입촌한 성 공이 붙였다는 것이다.
기타 작은 마을인 율전(栗田), 큰마, 동편(東便), 아랫마, 점뒤 등이 있다.
1리 109호 중 서흥 김씨 23호, 고성 이씨 15호, 밀성 박씨 14호, 기타 57호
2리 81호 호중 김해 김씨 15호, 고성 이씨 14호, 경주 김씨 10호 기타 42
* 아음보(牙音洑)에 관한 기록이 남양리 천변 암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辛巳石邊 成功
一金 五百兩 都監 裵命佐
신사석벽 성공 일금 500냥, 배명좌
만의보(巒衣洑)
위치는 아음보(牙音洑) 입구 양수장 암벽(岩壁)이다. 신사(辛巳)는 1701년이며 공사비가 500냥이나 소요되었고 석변성공(石邊成功)이라는 구절은 공사가 얼마나 난공사였나를 말해주고 있다. 분명히 만의보(巒衣洑)라 했는데 어찌하여 아음보(牙音洑)라 했는지 알 수 없다. 배명좌 공의 후손이 현재 마을에 살고 있다.
참고
-관리문중 후손 면담
-관리문중 파보
-청도군지(1991, 청도군)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도주지(1958, 김석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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