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매전면 동산리/ 행전 박영환
매전면 동산리는 매전면의 중심지다. 국도 20호선[청려로]와 국도 58호선의 갈림길이 있어 삼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매전면사무소, 매전 파출소, 매전 보건소, 매전 우체국, 매전 중학교, 동산 초등학교, 매전 농업 협동조합 등이 모여 있다.
운문이며 금천에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자주 지나가는 곳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 마을을 찾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효양재 및 청수재를 찾은 것은 2018년 1월 16일(화)이었고 운수정을 찾은 것은 2월 9일(목)이었다. 이곳에는 '운수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둘이 있다. 하나는 고성 이씨 문중에서 또 하나는 밀성 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매화밭 동쪽 산자락에
처진 소나무 하나 있다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늘어졌다고
유송(柳松)이라고도 부른다
신분이 천연기념물이기에
보호선 밖에서 잠시 뵈올 수 있다
어쩌면 귀한 몸이라 뽐낼 수도 있으련만
오히려 고개를 잔뜩 숙이고 있다
휘어진 바람의 가시를 감당하느라
늘 어깻죽지가 무겁다
더 깊게, 아주 깊게
200년 그렇게 살았으니 천년인들 견디지 못하리
(박영환 처진 소나무)

매전면 사무소

서유민(徐有民)
병술년(1826) 6월 25일 정기 인사에서 삼등 현령(三登縣令)으로 있다가 제수 받고, 8월 12일 도임하였다가 무자년(1828) 3월 5일 가산 군수(嘉山郡守)로 옮겨 임명되었다.


운수정(雲水亭)
◯관리문중 : 고성 이씨
◯소재지 : 경북 청도군 매전면 동산리 152-4 번지
매전면사무소가 있는 동산 1리에서 처진 소나무 옆 골목으로 약 100m가량 들어간 동창천변에 유유한 강물을 바라보며 동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온돌방), 측면 2칸(마루)의 ㄱ자형 아담한 정자가 있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연결하였고 대청은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좋다.
구조는 얕은 시멘트 기단 위에 둥근 초석을 깔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온돌방에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았다. 또한 방의 문은 삼분합들문을 설치하여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정자 보호를 위해 전면과 측면에 유리창을 달았다.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토석담장을 둘렀다.
김재화가 쓴 ‘운수정 중건기’, 황응규 군수가 쓴 ‘운수정 소서’가 대청 벽에 걸려 있다. 정자 옆에 관리사가 있다.
◯연혁: 1577년(丁丑)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 군수의 지시로 용헌(容軒) 이원(李原)의 5세손인 동추공(同樞公) 이반(李礬)이 감독하여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병화로 허물어진 것을 기묘년에 중추공의 후손들이 선조의 유적이라 하여 정자를 새로 세워 옛 이름 그대로 운수정이라 하였다.
도주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雲水亭⇒梅田面 東山洞 東倉川絶壁上에 있는데 淸道邑에서 四十里地点 梅田面事務所의 東쪽 淸溪蒼벽上 風景佳麗한 勝地에 位置하고 있다 當初는 亭은 宣祖丁丑에 郡守 黃松澗公應奎의 指示로 相國容軒 李先生의 五世孫中樞公 礬이 監董하여 倉廳으로 建立하고 淸名함으로 黃松澗이 曰 潭水가 自雲門山而出故로 定名을 雲水라 하였더니 歲久頹廢한 것을 往年 己卯에 中樞公의 後孫이 祖先의 遺蹟이라하여 亭을 建立하고 古名되로 雲水라 하였다 (黃松澗 雲水亭 小敍 黃松澗文集參照)
2013년 및 2014년에 기와를 번와하는 등 중수를 했다.






운수정(雲水亭)
◯관리문중 : 밀성 박씨
◯소재지 : 경북 청도군 매전면 동산리 167 번지
매전면사무소가 있는 동산 1리 동곡 마을에서 농업 협동조합 맞은편 골목으로 약 50m가량 들어간 동창천변의 암반 위에 동창천과 그 건너 산을 바라보며 동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소로수장집의 정자가 있다. 평면은 가운데 온돌방 1칸에 양측으로 마루를 대칭으로 들인 중실협당형이다. 전면에는 퇴와 툇마루를 두어 마루와 연결하였고, 마루와 툇마루 사방으로는 헌함(軒檻)을 돌려 누마루로 꾸몄다.
구조는 시멘트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온돌방에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았다. 대청과 방 사이에는 사분합들문을 설치하여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고, 방안에서도 시냇물과 자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전면에는 쌍여닫이 세살문, 후면에는 외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마루 상부 가구는 5량가이다. 큰 백일홍 한 그루가 있어 운치를 더한다. 후면에도 일각문을 내어 출입할 수 있으며 토석담장을 둘렀다.
이가원이 근찬한 ‘운수정 중수기’, 송준필이 쓴 ‘운수정 중건기’가 대청 벽에 걸려 있다.
정자 뒤편에 4칸(온돌방2, 마루1, 주방)의 관리사가 있다.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一’자형 살림집 형태이다. 그 옆에 작은 보조관리사도 신축하였고 블록담장에 철대문이 있다.
◯배향인물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의 덕을 기리기 위한 정자이다.
1)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 1479∼1560)
자는 응천(應千)이요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송은 박익(朴翊)의 현손(玄孫), 우당 박융(朴融)의 증손, 입청도 선조인 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의 손자이다 성종 10년(1479, 己亥)에 이서면 수야리에서 출생하여 중종조(丙子)에 생원, 기묘(己卯)에 현량과에 피천(被薦)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정암 조광조(1482∼1519)등 신진사류가 피화(被禍)한 기묘사화(1519)이후 그동안 자신이 지었던 글을 모두 모아 소각(燒却)하였다.
갑신(甲申)에 사산감역(四山監役), 을유(乙酉)에 사재감봉사(司宰監奉事), 무자(戊子)에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불취(不就)한 삼징불기(三徵不起)의 징사(徵士)이다. 김삼족당, 조남명, 곽경재, 박송당과 교의가 깊었으며 풍월자오(風月自娛)로 승경(勝景) 가처(佳處)에 정사(亭榭), 사암(寺庵)을 건립하였다.
삼족당 김대유와 산간지대로서 화물유통이 어렵고 교통이 불편한 청도의 웅현(熊峴) 동쪽 지방인 이곳 동산동(東山洞: 청도군 매전면) 주민들의 조세공납의 편의와 천재에 따른 구휼(救恤)과 위민의 방책으로 사창(社倉)인 동창(東倉)을 설치하여 향민들에게 큰 공덕을 지었다.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등 여러 시문이 많으며 찬오명(撰五銘) 오잠(五箴) 춘추대일통론(春秋大一統論) 가훈십조(家訓十條)등의 일작과 도주객관상량문(道州客館上樑文) 향노당상량문(鄕老堂上樑文)등이 문집에 실려 있다. 명종(庚申)에 팔십이세로서 종로 임천하였다. 선암서원과 우연서원에 제향 되었다.
2)삼족당 김대유(1479-1552)
자(字)는 천우(天祐)이며, 호(號)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직제학 동창공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고, 탁영 김일손의 장질(長姪)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 1507년(중종 2)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한 이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정언(正言), 칠원현감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史禍)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며 자호(自號)를 “계산(溪山)이 족(足)하고, 풍월(風月)이 족(足)하고, 음아(吟哦)가 족(足)하다”에서 삼족(三足)을 취해서 삼족당(三足堂)이라 하고, 1519년(중종 14) 삼족대(三足臺)를 건립하여 후진을 교육했다.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도의심교(道義深交)를 하였으며, 증직(贈職)은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이다. 현량과(賢良科)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 『삼족당 유고(三足堂 遺稿)』가 있다.
도주지에 소개된 ‘운문구곡가’의 제6곡은 이러하다.
六曲은 어데메요 東倉의 운수사라
三足逍遙 뜻이맞아 雲水亭이 세워지고
黃松澗의 周旋으로 中樞公이 重建하니
鄕賢祠는 옮겨져도 百姓稱頌 끝이없네
◯연혁: 1518년(조선 중종13)에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이 주 문공의 사창지규(社倉之規)에 따라 산간지대로서 화물유통이 어렵고 교통이 불편한 청도의 웅현(熊峴) 동쪽 지역인 이곳 매전면 동산동 주민들의 조세공납(租稅貢納)의 편의와 천재(天災) 따른 구휼(救恤)과 위민(爲民)의 방책으로 이곳에 사창(社倉)을 설치하였다.
이 사창(社倉)을 설치 2년 후인 1520년(중종 15)에 수간(數間)의 아담한 정사(精舍)를 마련하여 운수정(雲樹亭)이라 편액(扁額)을 달고 때로는 여기에서 두 분이 기거하면서 도학을 논하고 유생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니 두 분의 경륜이 위대함과 위민구휼(爲民救恤)의 방책에 위정관인 군수나 향민(鄕民)이 그 덕을 흠앙(欽仰)하였다
그 후 소요당 졸후 8年 뒤인 1568년(선조 원년) 향중에서 두 분의 고명한 행적과 도의사표(道義師表)의 덕을 추모하여 이곳에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향사를 받들어 향현사(鄕賢祠)라 하고, 향화(香火)가 계속 유지되었다.
그런데 1577년(선조10년) 당시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 군수가 사우(祠宇)가 사창에 너무 가까워 화재에 위험이 있다하여 사우는 소요당 박하담의 유소(遺所)인 금천면 신지동 선암(仙巖)으로 이건하여 선암사(仙巖祠)라 하고, 스스로 이건기(移建記)를 짓고 정자는 사창과 가까이 경치 좋은 곳 매전면 동산동에 기공하여 다음해인 선조 11년에 완공하였다. 또한 황 군수가 소서(小叙)를 지었으며 이때부터 정자 이름을 운수정(雲水亭)이라 고처 부르게 되었다.
그 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병화에 소진되었는데 두 분의 후손들이 1938年(戊寅)에 이를 복원(復元) 건립하였다.
그 이듬해(己卯)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서 도회를 열어 광범위한 유림들의 참여하에 수계(修契)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일제 말기 전쟁 중이라 년차 계회를 갖지 못하다가 일제 패망 후 1974년(甲寅)에 향중 유림들의 공의(公議)로 수계(修契)하고, 1977년(丁巳) 계회(契會) 시에 도유림(道儒林)까지 합류하여 도유림수계(道儒林修契)로 복구 확대되어 지금도 4년에 한 번씩 유림초청 시회를 열고 있다.
1923년과 1975년에 중건과 중수를 했으며 2008년에도 관리사 등을 중수했다.






청수재(淸修齋)
청도 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청도군 매전면 동산리 동창마을 232-5번지에 위치한다. 매전면 사무소 뒤에 있는 매전중학교와 동산초등학교 뒤편 토함산(통내산) 아래 남향으로 좌정했다.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져 있고 멀리 동창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전면에 세운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면4칸(중앙에 온돌방2칸, 양옆에 마루1칸) 재사가 있다. 전면 중앙에 ‘淸修齋’ 현판이 걸려 있으며 마루에 ‘청수재기’와 ‘청수재운’이 있다.
청도 김씨 선대의 유덕을 추모하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종사로 활용되고 있다. 청도 김씨들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약 300년 정도 되며 전에는 3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10여 호가 살고 있다.






효양재(孝養齋)
청도군 매전면 동산2리, 효양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김면(金沔)과 김귀천(金貴千) 선생이다. 두 분은 문간공(文簡公) 매천(梅川) 김시(金蓍)의 주손으로 2품 벼슬에 올라 공신들에게 주는 채읍을 물려받았다.
김면은 조선 중종 때 정국공신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뜻이 맞아 개혁에 적극 동참했는데 조광조 등 신진사류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변을 당할 때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귀양지에서 돌아온 뒤 청도에 내려왔다.
아들인 광천공(光川公) 김귀천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참전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김천일이 순사(殉死)하자 분함을 참지 못하고 충청도 방어사, 경상도 방어사 등을 역임한 충의공(忠毅公) 권응수(權應銖)의 진영으로 달려가 참전하여 공을 세워 도총부 부총관 직책에 올랐다. 부친상 뒤 3년 간 시묘살이를 했다.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은 효양재기(孝養齋記)에 “ (전략) 두 분의 선생은 자손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조상이다. 광천공(廣川公)이 청도에 들어오신 것이 조선 중종 기묘년(1519)에서 신사년(1521) 이후이다. (중략) 하늘이 이미 효양산 한 구역에다 두 선생이 숨어서 수양할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가 마침내 묘소를 쓸 자리까지 허락해주었는데 지금은 ‘효양’으로써 재실의 편액을 만들어 거니 ‘효양’ 두 글자는 진실로 김씨의 백대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소중한 자산이다. ‘중용’에 이르기를 ‘효도’란 것은 사람의 뜻을 잘 계승하고 사람의 일을 잘 기술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여러 군자들이 능히 두 분 선생의 뜻을 잘 계승하고 사적을 잘 기술한다면 어진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나라에도 공훈을 세울 수가 있으며 또한 효양산의 산신령에게도 사례할 수 있다고 이르노라.” 했다.
효양재는 전면 대문 위에 ‘孝養齋’가 편액되어 있으며 팔작지붕 4칸이다. 사손(嗣孫) 종환(鍾煥) 등이 지은 시 2편과 ‘예빈관기’, ‘중건기’, ‘효양재기’가 마루에 걸려 있고 마당 오른편에는 양옥 3칸인 ‘예빈관禮賓館)’이 있다. 1910년에 창건했으며 1979년에 중수하고 2014년에 ‘예빈관’ 구 건물을 헐고 새로 양옥으로 지었다.
이 마을을 구 동창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1518년(중종 13)에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가 옛절을 이용하여 주민 구휼(救恤)을 위해 동창(東倉)을 설치했고 뒤에 매전 농협 뒤쪽으로 옮겨가면서 그곳이 신 동창이 되고 이곳이 구 동창이 된 것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보아 광천군(廣川君)과 소요당, 삼족당이 이곳에서 도학을 논하며 교유를 했을 것 같다.







동산2리 봉산 경로당

동산2리 봉산 마을


동산교회
장로교 소속이며 매전면 청려로 3686번지에 소재한다. 매전 면소재지 큰 도로가에 있으며 본당과 부속건물이 있다. 부지는 618㎡이며 1947년에 창건했다. 신도수는 약 60명이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필자 박윤제)에 소개된 '동산리'의 내용을 발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이서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 산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며, 고려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원이 있었던 곳이다. 옛 이름은 솔이산성 소산현이었다. 마을 뒤에 토함산[통내산]이 있다.
동산리는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동창동, 매전동, 봉산동을 병합하고 동창과 봉산의 이름을 따서 동산동이라 하였다. 마을로는 동창(東倉), 신기 마을, 매화 마을, 쇳골안이 있다.
동창은 신 동창(新東倉)과 구 동창(舊東倉)이 있다. 동창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조선 전기에 박하담과 김대유의 권유로 옛 절을 창고로 만들어 곰티재 동쪽에 있는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 세곡(稅穀)을 보관하였다가 이른 봄에 구휼에 사용하였으므로 동창(東倉)이라 하였던 것이 구 동창이다. 뒷날 창고의 자리를 옮긴 곳이 신 동창이다.
신기 마을은 하평리에서 동산리로 가는 길 오른쪽 등성이에 형성된 마을이다. 매화 마을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전역(買田驛)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매전 중학교가 자리한 이곳은 오랫동안 역촌으로 알려져 있다. 쇳골안 마을은 동산 기도원이 있는 부근으로, 지금은 학명으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에 옛날에 자철이 생산되었기에 쇠골안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동산 기도원 바로 앞에 토기 가마터가 있었다. 또한 바위에 성혈이 새겨진 곳이 다섯 곳이 있다.
토함산을 배산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로 동쪽으로는 동창천이 흐르고 있고, 서쪽으로는 관하천이 흐르고 있다. 동산 2리 뒤에는 효양산이 높이 솟아 있다. 마을 앞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어서 생활의 터전을 만들고 있다. 토함산 앞자락[남쪽] 나지막한 곳에는 산지를 개간하여 계단식 밭을 경작하고 있다.
관하천과 동창천이 만나는 곳에 무심교가 있고 무심교 옆에는 무심디미가 있다. 무심디미에는 임진왜란 때 헤어진 신혼부부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부부는 난리가 끝이 나면 이 바위 아래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는데, 아내가 바위 아래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오지 않았다. 이에 손가락을 깨물어 바위에다 무심(無心)이라는 글을 적고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해서 무심디미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바위에 막걸리를 부으면 소독할 때처럼 끓어오른다고 한다.
청도군지(1991, 청도군청)에 소개된 동산리(東山里)는 다음과 같다.
대왕(大王)산에서 연봉들이 분기되어 둔치령(嶺)을 이루고 다시 학일산(鶴日山)에서 통내산(筒內山)으로 태산 준봉들이 수 없이 뻗어온 가운데 높고 낮은 산등이 무엇이 그렇게도 급했던지 동창천에 가로막혀 천변을 절벽으로 버티면서 산기슭에 겨우 운신할 정도의 비탈을 구성해 놓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춘천(春川-管下川)을 따라 저 멀리 선의산(仙義山)에서 용각산으로 다시 효양(孝養)산이 험상궂게 위엄을 뽐내면서 대하고 있다. 이런 협곡 사이로 관하천을 합류시킨 동창천이 흐르고 있어 산수의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이서국에서 솔이산현으로 다시 소산현 소재지로 고려시대부터는 매전역으로 군림했던 교통의 요충지가 약 2000년의 시공을 공동화가 되었는지 심히 의문스럽다. 인위적인지 자연적인지 몰라도 문헌 없는 시공이 너무나 길기만 하기 때문이다. 1리에는 1500년대에 밀양 박씨가 입촌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구전일 뿐이다. 매전역이 설치되어 있었을 때인데도 어떤 성씨의 주민이 살았는지 분명치 않다.
2리인 구(舊) 동창의 봉산리(奉山里)에도 1리의 박씨와 동대인 1590년경에 김해인 김귀천 공이 입주했다. 또한 매전에도 김해인 김명한 공이 창촌(創村)했다하나 창동(創洞)이 아닌 입촌(入村)이다.
구동창(舊東倉)이란 중종 15년(1520년)에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공과 소요당(逍遙堂) 박하담 공의 주도로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동헌(郡廳 華陽邑 東上里)의 동쪽이라고 동창(東倉)이라 불렀던 것이 마을 이름으로 변했던 것이다. 사창이 들어선 70여년 후에 김 공이 입촌하였는데 당시에 주민들이 없는 곳에는 사창을 설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규명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창이 있던 자리가 현재는 밭이 되어 창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동창(舊東倉)을 봉산리(奉山里)라 부른다.
이는 마을 뒷산이 험준하여 마을에 무슨 피해가 있을까봐 김 공이 산을 받든다는(奉)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이 산을 효양(孝養)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후부터 이 마을에는 효자 효부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산명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신기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매전(買田), 매전(梅田)은 김명한 공이 택리하고 마을 주변을 살펴보니 매화낙지형국(梅花落地形局)이라 매전(梅田)이라고 마을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으나 각종 지리지에 매전(買田)으로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김 공이 매전(梅田)으로 동명을 정했다는 설이 신뢰성이 있다. 또 1914년 행정구역 조정시의 동명에 매전(梅田)리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그 때 매전(買田)을 매전(梅田)으로 개명을 했다는 설이 있다.
새터, 신기(新基)란 봉산리(奉山里-구동창) 서쪽에 새로 터를 잡아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하고 표기는 신기(新基)라 했다. 동창은 매전면 소재지다. 사창(社倉)을 동창(東倉)이라 합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東山)리는 신동창, 구동창, 매전동을 합친 동리다.
* 참고
-관리문중 파보 및 종원 면담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택리지(최장영 외)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역주 오산지(2003,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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