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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 행전  박영환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를 찾았습니다. 온막리는 고성 이씨와 의흥 예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2017년 3월 23일(목)은 명대대묘, 월간재, 경의당, 용송, 온막교회를 찾았고 2018년 2월 20일(화)은 경사재에 들렀습니다.

 

 

 

<명대 대묘>

명대 대묘(明臺大廟)

 

관리문중: 고성 이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218-3번지

 

건물구조: 온막리 명대마을 가운데 자리 잡은 고성 이씨 종가집의 대묘이다. 맞배지붕 3칸이며 사당 내에는 불천위인 용헌 이원의 신주를 비롯하여 종손의 부, 조부, 증조, 고조 신주가 모셔져 있다.

대묘 앞에는 종가집이 있는데 몸채는 6(2, 마루3, 부엌1)이며 사랑채는 3(2, 마루1) 목재와가이다. 대묘와 종가 주변에 토석담장을 둘렀는데 전면에 3칸 솟을 대문이 있다.

 

배향인물: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 1430)

  고려 후기 고성이씨가 문과에 급제한 후 중앙무대에 처음 진출한 이는 이진(李瑨)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계기는 이존비(李尊庇)에게서 비롯되며 이후 그의 아들 이우(李瑀), 손자 이암, 이교 형제, 증손자 평재 이강을 거치면서 명문세족으로 성장해갔다.

  이강의 아들 용헌 이원은 3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5세부터 자형인 양촌 권근에게 수학하였다. 18(우왕11)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지만 25세 때(1392) 조선이 건국하자 새 왕조에 출사하여 왕조의 기틀을 닦는데 도움이 되는 소를 많이 올렸다. 그는 태조, 태종, 세종 세 조정을 섬겨 정승의 자리에 올라 당대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그는 고려말기부터 문명이 알려져 조선 초기에 국기를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외교에 능숙하여 여러 차례 사신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그가 추구한 학문사상 중에 중요한 작품이 상십조소(上十條疏)’이다. 이원은 이 상소문에서 수양철학의 핵심인 을 제시한 뒤 정치실천의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원리를 제시하였다. 또한 이강과 이원 부자는 문장에도 뛰어났다. 사가 서거정이 철성연방집 서문에서 권람의 말을 인용하여 평재와 용헌의 시법은 행촌이 문정공에세서 나왔고 용헌은 또한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양촌의 양육을 받아 사우의 바른 연원을 얻었으니 시가 평재와 용헌 두 분에 이르러 또한 불후되기에 충분하였다.”고 하였다.

 

 

찰방 김상우(金商雨) 명계서원 상량문(明溪書院上樑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가 생각건대, 용헌(容軒)선생은

큰 이륜과 덕업, 구슬 같은 문장은

행촌(杏村)선생이 조부시고 평재(平齋)선생이 부친이라서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풍성히 받았고,

삼세(三世)에 걸쳐 헌릉(獻陵 : 태종)을 도우고 삼묘(三廟)를 보좌하였으며 우뚝한 주석(柱石)과 같이 네 조정을 섬겼네.

학문의 연원은 포은(圃隱)과 목은(牧隱)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문단에 이름이 높아 춘정(春亭)과 가정(佳亭)이 그 이름 높였네.

그 위대한 생애와 풍성한 공로는 절로 훌륭한 사관(史官)의 기록에 있네.

 

세월 따라 차례로 관직에 올라 높이 정승의 자리에 올랐고

천자가 만나보고는 자주 황염재상(黃髥宰相)이라 불렀네.

 

 

연혁: 원래 용헌 이원과 망헌 이주를 향사하기 위해 1782년 유호서원(柳湖書院)이 창건되었다가 이후 1787년에 명계서원(明溪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다시 안동시 강남동에 명호서원(明湖書院)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옮겨졌다. 그 뒤에 명대대묘를 건립하였으며 1980년대 중반에 새로 중수했다

  용헌공은 불천위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해마다 기일 6 19()에는 전국의 용헌공파 후손 120명 정도가 모여 선대의 유덕을 기린다. 현재 용헌의 19대 종손 이동석(李東碩, 73)이 종가를 지키고 있다.

 

*고성 이씨 중 안동에 정착한 입향조는 이증이다. 그는 용헌 이원의 여섯째 아들이다.

이증은 5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이 이평이다. 이평은 5 4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이 쌍매당 이윤이요, 둘째 아들은 망헌 이주요, 셋째 아들은 이전이요, 넷째 아들은 모헌 이육이며 다섯째 아들은 이려이다. 그 중 모헌 이육이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이다.  

 

 

종가집과 명대대묘

 

 

 

 

 

 

 

<월간재>

 

 

월간재(月澗齋)

 

관리문중: 고성 이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온산길 31-5(매전면 온막리 642) 명대 앞 국도에서 100미터 지점 월봉산 산기슭, 울창한 대나무와 솔숲을 배경으로 마을을 굽어보고 있으며 시야가 넓어 전망이 좋다.

 

건물구조: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면 6(4, 마루2)의 중당 협실형 평면에 좌단부로 누마루 1칸을 돌출시킨 동향 건물이다.

4 (헛간1, 도장2, 출입문) 솟을 대문을 재사 정면에 배치하지 않고 4칸 관리사 앞에 배치하여 중문을 통해 재사를 통하게 한 것이 여느 재실과 다른 점이다. 마당에 목련 등 조경수가 심어져 있으며 토석담장을 둘렀다. 재사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으며 큰 은행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한다.

 

배향인물: 경재(敬齋) 이광익(李光翼)

  본관은 고성이며 모헌 이육의 5세손이다. 1653(효종 4)에 태어나 명리를 쫒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여 학문을 익히며 풍월을 벗 삼아 즐기다가 1711년 향년 59세로 졸하였다.

 

연혁: 1920년에 건축했으며 1980년 중반에 기와를 번와하는 등 중수를 했다.

 

 

 

 

 

 

 

 

 

 

 

 

 

 

월간재 앞

 

월간재 원경

 

 

 

 

 

<경의당>

 

 

경의당(景義堂)

 

관리문중: 고성이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755번지

온막리 입구 국도 왼편에 동창천을 바라보고 동향으로 우뚝 자리 잡고 있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3(출입문을 중심으로 도장1, 1)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목조와가 팔작지붕의 5(3, 대청2,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대청 벽에는 경의당기’, 경의당 상량문이 걸려 있다.

 

배향인물: 경의당은 고성인 이장( )이 수학하고 강론하던 곳으로 후손인 승규(承圭), 승철(承喆), 승복(承馥)의 소구이다.

  그의 자는 하수(遐壽)이고 용헌 이원의 후예이고 모헌 이육의 현손이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이하()와 더불어 준마를 타고 창의하여 한성으로 치달아 싸웠으나 싸움이 불리하자 죽기를 결심하고 절시 한 수를 남기고 전사하였다.

 

당당하도다! 형과 아우

나라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듯 죽음을 맞노라

네 발은 능히 천리를 가니

거의 살아 돌아갈 수 있겠지

 

 

  아무튼 이장은 병란이 일어나자 동생과함께 말을 타고 권율 원수의 진을 찾아 가서 분전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시를 지어 집으로 돌아가는 말에 부쳤다. 부인 파평 윤씨가 애마에 매어 돌아온 절명시를 보고 전사했음을 알고 그의 의관과 유물로 장례를 치르고 단식하다가 또한 세상을 떠났다. 매전면 묘소에 애마총이 있다.

  뒤에 군자감(軍資監) ()이 증직되었다.

 

연혁:1956년에 건축되어 재숙지소(齋宿之所)로 이어오던 중, 재사 앞의 전면 도로가 지방도에서 국도로 승격됨과 동시에 시행한 확장 성토 공사로 재사의 지반이 낮아지게 되어 풍수해의 위험 등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300여 종원들이 조상을 숭모하는 마음으로 재원을 마련하여 2007 8월 착공, 2008 10월에 준공하게 되었다. 이를 알리는 경의당 중건 표성기가 마당 좌측에 있다. 또한 우측 담장 옆에는 증 가선대부 이공 숭모비 의마비 표석이 세워져 있다.

 

 

 

 

 

 

 

 

 

 

 

 

 

 

경의당 전경

 

 

광명대 용송(光明臺龍松), 박윤손(朴閏孫) 효자비

 

  용송은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778-3, 국도변에 소재했던 소나무이다. 명대마을 출신인 재령인 식성군(息城君) 이운용 장군(1562-1610)이 심은 소나무이지만 현재 현장에는 소나무는 사라지고 대신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식재되어 있다. ‘식성군 동계 이 선생 수식 용송 유지 기념비(息城君東溪李先生手植龍松遺地紀念碑)’ 광명대 용송(光明臺龍松)’이라 새긴 돌이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 박윤손(朴閏孫) 효자비가 있다. 그는 수군 박동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빨래하러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가자 왼손으로 어머니를 붙들고 오른손으로 돌을 던지며 5리 남짓 쫓아갔다. 이웃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구했으나, 호랑이에게 많이 물린 어머니는 그날 밤에 사망하였다. 박윤손은 슬퍼하면서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고,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旌閭)와 복호(復戶)가 내렸다.

  그 정려와 복호를 받은 박윤손의 효성을 기리고자 조선 후기 효자비를 세운 것이다. 효자 박윤손지려(孝子朴閏孫之閭)라 새겼다. 농대석(籠臺石) 위에 비갓 없는 비신만 있다. 화강암 재질이며, 높이 110, 너비 35, 두께 20이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많이 진행되었다.

 

 

식성군 이운룡 장군이 심었다는 용송

 

 

 

  선무공신 식성군 이운룡장군이 어릴 때 심었다고 알려진 4백여년된 세칭 용송(龍松) 일명 용백(龍栢)이다. 나무중심에서 사방 16()횡과 높이가 55()이나 되는 오래된 소나무로써 1986년까지 살아 있었으나 현재는 도로와 인가로 고사되어 흔적이 없어진 나무이다.

명대의 옛 상충사(尙忠祠 옆에 있었다. 특히 이 나무는 둥치가 아름이 넘고 구불구불하게 굽어 마치 이 꿈틀거리는 것 같이 자라서 龍松이라 불렀다 한다.

  또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당글에서 龍松사이들 息城君이 하사 받은 들이라 임금들이라 부르고 185m 높이의 임금산()은 달팽이山陵 下端部分으로 壬亂後 息城君 下賜받은 이라 임금이라 한다.

  현재 이마을에는 대부분 철성(고성)이씨와 의흥예씨(芮氏)가 살고 있다(사진과 글: 동창벌 73년 

 소띠 블로그)

 

 

 

 

용송이 고사하고 난 뒤 그 자리에 심은 은행나무 

 

 

 

 

<경사재>

 

 

경사재(景四齋)

 

관리문중: 의흥예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865-5

마을 앞 58번 국도에서 150미터 지점, 동리 가운데 남향으로 좌정하여 멀리는 육화산을 가까이는 임금들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구조: 벽돌 기둥 위에 겹처마 와가 일각형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4(3, 마루1,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며 자연석 기단 위에 난간이 있고 그 안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세살문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방과 대청 사이에는 두 개의 문을 겹쳐 열 수 있는 4개의 문을 달아 필요시에는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대청 뒷벽에는 두 쪽 널판문을 설치했다. 툇마루를 두어 마루와 연결시켰고 재사 보호를 위해 유리창문을 달았다. 전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景四齋가 편액되어 걸려 있으며 대청 벽에는 이종기가 찬한 경사재기가 있다.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주변에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 인물: 의흥인 예시용(芮時庸)의 재사이며 후손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며 향사하고 문중의 대소사 논의 장소로 활용한다.

 

연혁: 1931년 창건했으며 1965, 2008년에 중수했고 대문은 2017년에 개축했다. 주변에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온막 마을 전경

 

온막리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집필자 박윤제)에는 온막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개설]

상남면에서 매전면으로 편입된 마을로 상온막과 원전 그리고 당걸 마을이 합하였다.

 

[명칭 유래]

원래의 명칭은 명대동(明臺洞)이었고, 당시 만석꾼이 마을 중심에 살고 있었는데 측량을 하고 마을 이름을 어떻게 짓겠느냐는 관리의 물음에 온막(溫幕)이라 하자 해서 온막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상온막이 원래의 온막인데, 명대 대신 온막이라고 한 이유는 당시 도둑이 들끓어서 소문이 나면 도둑떼에게 당할까 봐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청도군 상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온막동이라 하여 매전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온막동에서 온막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용당산(龍塘山) 줄기가 불쑥 튀어나와 덕택으로 운문천[동창천]이 장연리 쪽으로 밀려가면서 형성된 원전들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은 모두 소하천을 끼고 형성되었으며 경작지는 대부분 운문천의 물을 이용하였다. 원전들은 넓은 곡창지대여서 일찍이 경지 정리를 하였으나 벼농사는 경제적 이익이 적은 관계로 서서히 경제적 이익이 많은 과수 쪽으로 돌리고 있어 지금은 많은 전답이 대추밭으로 변해 가고 있다. 반면 산비탈 지역의 밭에는 감나무를 많이 심어 감 농사를 함께 하고 있다. 용당산과 강 건너 구만산이 높이 감싸고 있어 바람 피해는 없을 뿐만 아니라, 운문천이 곁으로 흐르고 있어 한해(旱害)를 모르고 사는 곳이다.

 

 

[현황]

2012 7월 현재 면적은 4.01이며,  189가구에 352[남자 157, 여자 195]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매전면 호화리, 서북쪽은 매전면 용산리, 서남쪽은 매전면 예전리, 남쪽은 매전면 장연리, 북쪽은 매전면 북지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온막(溫幕), 명대(明臺), 원전(院前)과 당걸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원전은 명대리 뒷산인 자미산에 명계 서원(明溪書院)이 있었는데 서원의 토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원전(院田)이고, 쓰기는 원전이라 하였다. 당걸은 예전리[용전리]와 경계 지점에 큰 당나무가 있어 당걸이라 하였다. 매년 당제를 지내왔으나 지금은 당제도 지내지 않고 당나무도 없어졌다. 온막은 운문천이 가져다준 충적토를 토대로 현재는 산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농경지를 가지고 있고, 일찍이 경지 정리를 한 곳이다.

 

상온막은 용연동(龍淵洞) 아래 용당산 기슭 중산천(中山川) 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옛 지도에는 명대동과 온막동을 함께 표기하였다. 명대동에는 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 이운룡(李雲龍)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이운룡이 직접 심었다는 용송이 있었는데 수령이 오래되어 죽었으며, 그 자리에 대신 은행나무를 심고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곁에는 효자 박윤손의 비석도 함께 서 있다.

 

원전들 가운데에는 별집 바위가 있었는데 경지를 정리할 때 땅에 묻어버려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이 바위에 성혈이 무수히 많아서 별집 바위라고 불렀다.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별집 바위 곁에 달집을 지어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

 

온막리의 중심부를 남서북동 방향으로 국도 58호선이 지나고 있다. 매전 초등학교도 2011년을 폐교가 되었고, 오일장도 없어졌다. 명계 서원이 있었던 곳 뒤편 자미산 양지바른 곳에 전원 주택지를 개발하였으며, 전원생활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서 새로운 마을을 이루어 가고 있다.

 

 

 

<옛날 온막리 모습> 

 

 

한편 청도군지(1991, 청도군청)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온막리(溫幕里)

 

용각산에서 분기된 연봉들이 산동 산서로 분계령을 이루면서 남주(南走)하다 중산봉을 거쳐 600고지의 용당산이 되고 다시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을 사방으로 거느리면서 자미구릉을 형성케 하여 마을을 포근하게 품고 있다. 동창천의 덕()으로 온막들은 면내 제일의 곡창이다. 비룡계곡 하단부에 취락한 여건 좋은 반 산촌이요 반 농촌이라 할 수 있다. 짙은 유풍이 풍기고 예를 기조로한 종족마을이다. 자미산(紫嵋山)릉의 남향 상부 지점에 신라 고찰 터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마을이 취락된 시대는 오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도 1600년경 입촌한 철성인 이 담 공이 터전을 잡고 마을의 융성을 도보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명대(光明臺), 명대(明臺)란 이 담 공이 마을의 발전을 위해 항상 밝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오늘날 적중된 것으로 선견지명의 동명이라 생각된다.

 

원전(院前)이란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인 1782년에 명계서원(明溪書院)이 건립되고 마을이 형성되어 원전이라 불렀다.

 

온막(溫幕)이란  동명에는 두 설이 있다. 하나는 경사를 따라 오르막에 있다고 '올막'이 변화하여 온막(溫幕)으로 미화 표기되었다는 설과 자미산(紫嵋山)릉 용당산 하록이 막을 둘린 것처럼 마을을 감고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當谷(당골)은 당나무가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철성 이씨 159호, 의흥 예씨 15호, 경주 김씨 6호, 기타 12호

 

용송(龍松)은 당골에 있었던 소나무다. 임란 공신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 장군의 태생지에 이 장군이 심은 소나무가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둥지를 감아 돌면서 자랐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약 400여년된 이 고목이 고사되고 말았다. 부근의 산을 임금산, 들을 임금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신에게 하사된 토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추정된다.

 

 

  옛날 미국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난 이곳 출신 한 노인의 망향편지 속에 나오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풍경마을 중앙에 온막교회가 있고바로 뒷산이 상월봉좌측 계곡 사이로 삼밭내가 흐른다. (글 및 사진: 대한민국 월남참전 인터넷 전우회 블로그)

 

 

  구 매전초등학교  - 온막마을에 있다. 1924년 9월 19일 개교했으며 2012년 3월1일 폐교했다. 졸업생 4207명을 배출했다. 현재는 매전학원 영농조합 법인으로 사용하고 있다. 

 

2018년 정월 대보름 도주 줄다리기를 하기 위해 주민들이 합동으로 줄을 제작하고 있다. 

 

 

<온막교회>

 

온막교회

 

  매전면 온산길 18(매전면 온막리 1233-13)에 남향으로 소재한다. 1906년에 설립되어 111주년이 되는 전통 있는 교회이다. 현재 건물은 1996년 신축한 것이며 본당(100), 교육관 및 사택이 있고 대지는 965이다. 온막교회는 지전교회의 모교회이며 현재 김형민 목사가 담임을 맡고 있다

 

 

 

참고 자료

 

-영남 고성 이문 선비의 길을 가다(윤용섭, 2018, 고성이씨 안동입향조 탄신600주년 기념사업회)

-영남지역 고성이씨의 학문과 문화(권지호 외, 고성이씨안동입향조 탄신 600년 기념사업회)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청도군지(1991, 청도군청)

-역주 오산지(2003,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도문헌자료집(2003, 청도문화원 향토사학회)

-청도지역의 독립운동사(박환)

- 73년 동창벌 73년 소띠 블로그

- 대한민국 월남참전 인터넷전우회 블로그

-문중 후손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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