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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향교 석전대제 춘향

청도향교 석전대제 춘향/ 행전 박영환

 

  2018년 3월 26일(음 2월 10일)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청도 향교에서 석전대제 춘향이 있었다.

 

 

◈ 석전대제(釋奠大祭)

 

  향교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제사(祭祀)인데 성균관(成均館)을 비롯한 전국 향교(鄕校)에서 석전(釋奠)을 봉행한다.

  석전(釋奠)이란 원래 산천(山川)이나 사당(祠堂),그리고 학교에서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하기 위해 드리던 제사(祭祀) 의식(儀式)말한다. 하지만 산천이나 사당에서 드리는 제사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학교에서 드리는 것은 석전(釋奠) 하나 뿐이었으므로 점차 학교의 제사(祭祀) 의식(儀式)만을 말하게 되었다

  석전대제(釋奠大祭)는 매년 봄, 가을에 성균관(成均)을 위시한 전국의 향교(鄕校)에서 일제히 경건하게 봉행()하고 있다.

  그밖에 지방 향교마다 유림(儒林)들이 모여 매달 초하루와 보름,한 달에 두 번 분향례(焚香禮)라는 간단한 제사를 봉행(奉行)하고 있는데 청도향교도 이를 따르고 있다.

 

 

 

 

 

 

 

 

 

청도향교 대성전 배향 성현

 

五聖

1.대성지성 문선왕 공자(기원전 551-479)

2복성공 안자(기원전 521-490) 공자의 애제자

3.종성공 증자(기원전 505-436) 공자의 제자

4.술성공 자사(기원전 483-402) 공자의 손자

5.아성공 맹자(기원전 372-289년 경)

 

宋朝 二賢

1.낙국공 정이천(1033-1107) 북송대의 성리학자

2.휘국공(徽國公) 주자(1130-1200) 남송대 성리학의 집대성자

 

 

東國 十八賢

1.홍유후 설총(650-740 ) 신라 경덕왕 때 유학자. 원효대사의 아들

2.문창후 최치원(헌왕왕 1 -857?) 신라 헌강왕 때의 유학자

3,매헌 안향(고종 30, 1243 - 충렬왕 32, 1306)고려 충렬왕 때 유학자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한 분

4.포은 정몽주(충숙왕 복위6, 1337- 공양왕 4,1392) 고려 공양왕 때성리학자,

5.한훤당 김굉필(단종2 , 1454- 연산군 10 1504) 조선 성종, 연산군 때 성리학자, 오현

6.일두 정여창(세종 20, 1450- 연산군 10, 1504) 조선 연산군 때 성리학자. 오현

7.정암 조광조(성종 13, 1482- 중종 14, 1519) 조선 중종 때 성리학자. 오현

8.회재 이언적(성종22, 1491- 명종8, 1553) 조선 중종 때 성리학자, 오현

9.퇴계 이황(연산군 7, 1501- 선조 3, 1570) 조선 중종때 성리학자 주자학을 집대성, 오현

10.하서 김인후(중종5, 1510- 명종15, 1560) 조선 명종 때성리학자

11.율곡 이이(중종 31, 1536 - 선조 17, 1548) 조선 명종, 선조 때 성리학자

12.우계 성혼(중종 30, 1535 - 선조 31, 1598) 조선 선조때 성리학자

13.사계 김장생(명종3, 1548 - 인조 9, 1631) 조선 선조, 광해군때 성리학자, 예학자

14.중봉 조헌(중종 39, 1544 - 선조 25, 1592)조선 선조때 의병장, 유학자

15.신독재 김집(선조 7, 1574 - 효종 7, 1656) 조선 효종 때 예학자, 성리학자

16.우암 송시열(선조 40, 1607- 숙종16, 1689) 조선 숙종 때의 성리학자

17.동춘당 송준길(선조 39, 1606 - 현종 13, 1672) 조선 현종 때의 성리학자

18.현석 박세채(인조9, 1631- 숙종21, 1695) 조선 숙종때의 성리학자  

 

석전대제 제관 및 제 집사

1. 초헌관(初獻官) : 대제를 드릴 때 오성위(五聖位)에 술을 세 번 올리는데그 중 첫 번째로 올리는 제관이다.

2. 아헌관(亞獻官) : 두 번째로 술을 올리는 제관이다.

3. 종헌관(終獻官) : 세 번째로 술을 올리는 제관이.

4. 분헌관(分獻官) : 오성위(五聖位이외의 배향(配享)한 분들께 술을 올리는 제관(祭官)으로 동종향분헌관(從享分獻官),서종향분헌관(西從享分獻官)이라 한다.

5. 도제관(都祭官) : 제례를 주관하여 준비하고 제례행사를 주관()한다.

6. 집 례(執 禮) : 홀기를 불러서 행사를 진행하는 제관이다.

7. 대 축(大 祝) : 축문을 읽는 제관이다.

8. 진 설(陳 設) : 제수즉 제사 음식을 배치하는 제관이다.

9. 봉 향(奉 香) : 향을 드는 제관으로 봉로와 함께 입장한다.

10. 봉 로(奉 爐) : 향로를 드는 제관으로 봉향과 함께 입장한다.

11. 사 준(司 樽) : 술을 따라 봉작에게 넘겨주는 제관이다.

12. 봉 작(奉 爵) : 술잔을 사준에게 받아 초헌관아헌관종헌관에게 올리는 제관이다.

13. 전 작(奠 爵) : 초헌관아헌관종헌관에게 잔을 받아서 5성 신위에 잔을 올려놓는 제관이다.

14. 알 자(謁 者) : 헌관을 도와 길을 인도하는 집사이다.

15. 찬 인(贊 人) : 대축을 인도하는 집사이다.

 

 

 

예병순 전교 인사

 

 

 

 

 

 

집례- 홀기를 읽으며 의식을 진행하는 제관 - 3량관을 쓰고 제복을 입는다.

 

◈ 향교석전의 진행

1. 전폐례(奠幣禮) : 초헌관이 신위전에 폐백(幣帛)을 올리는 의식.

2.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신위전에 첫 술잔을 올리고 대축이 고축

하는 의식

3. 아헌례(亞獻禮) : 아헌관이 신위전에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

4. 종헌례(終獻禮) : 종헌관이 신위전에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

5. 분헌례(分獻禮) : 분헌관이 각 종향위 신위전에 잔을 올리는 의식.

6. 음복례(飮福禮) : 초헌관이 음복위에서 음복잔을 마시는 의식.

7. 철변두(徹邊豆) : 대축이 제물를 거두는 의식.

8. 망료례(望燎禮) : 초헌관이 망료위에서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의식.

 

 

 

해설집례 - 양관을 쓰고 제복을 입는다. 

 

 

 

 

 

전교

 

 

 

 

 

우로부터 초헌관(5량관), 아헌관(4량관), 종헌관(3량관), 동종향분헌관(3량관), 서종향분헌관(3량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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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대제 장면 동영상

 

 

다음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동종헌 서종헌관의 순으로 제를 올리는 장면입니다.

 

 

 

 

초헌

 

 

대축- 축문을 읽는 제관 - 2량관을 쓰고 제복을 입는다.

 

 

사준 - 술잔에 술을 따르는 집사(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으며 목화를 신는다.

아헌이 두 번째 술잔을 드린다. - 봉작(술잔을 헌관에게 드리는 집사), 전작(헌관에게 술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는 집사) 

 

 

종헌 

 

 

 

동종향분헌관

 

 

서종향분헌관

 

 

 

음복

 

 

 

분축

 

 

 

 

 

 

청도향교

 

소재지: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48

설립연대:1568

건물구조: () 공간(좌측)-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서무(西廡내삼문(內三門). () 공간 -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 사락루(思樂樓). 그외 지인재(智仁齋), 중문(2), 하당, 유림회관, 정문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주두에 익공을 짜고 초각 없는 화반을 네모 판으로 하여 전체적으로 검소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명륜당은 정면 5, 측면 2칸에 전퇴가 있다. 어칸과 좌우 협칸 3칸이 대청으로 우물청판을 깔았고, 좌우 툇간은 통칸이며, 구조는 이익공집이다. 명륜당 앞에 있는 사락루는 2층 누각 건물로, 아래층에는 출입문이 있고 위층은 누()로 되어 있다.

관리: 청도 유림

배향인물: 공자를 정위로 5성과 송조(宋朝) 2, 우리나라 18현을 배향하고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연혁

향교는 조선 시대 청도 지역에 유학을 교육하기 위한 관학 교육 기관으로 1568(선조 1)에 군수 이의경이 화양읍 고평동에 초창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485(성종 16)에 탁영 김일손이 쓴 중수청도학기가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향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처음에는 고평동에 설립하여 60년간 존속하다 1626(인조 4)에 군수 송석도가 화양읍 합천 2리의 마을 뒤 구릉에 이건하였다. 1683(숙종 9)에 군수 홍수량이 중수하고 그로부터 51년 후인 1734(영조 10)에 군수 정흠선이 지금의 화양읍 교촌동에 청도 향교를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5 10 15일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전>

 

 

다음 내용은 청도향교지(2018, 청도향교지) 내용을 전재한 것입니다.

 

淸道鄕校 沿革攷

 

 

文學博士 朴洪甲

 

국가에서 고을 단위로 세운 교육기관이 鄕校이니,  官學이다. 나라에 成均館을 두었듯이 지방엔 鄕校를 두어 棟樑을 길러냈던 것이다. 이 땅에 학교를 설립한 유래를 따지자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나, 鄕校란 명칭으로 세워진 것은 고려 이후였다. 고려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3 12을 위시한 각 郡縣 博士 敎授를 파견하여 生徒를 교육시켜 왔고, 이것이 鄕學의 시초였다. 西京에다 鄕學을 둔 이래 점차 확산되어 가긴 했으나 이것을 향교 전신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고려 仁宗 5(1127)에 각 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린 바 있고, 여타 郡縣에도 학교가 설립된 사례들이 나타남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에 와서 鄕校가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삼국 이래로 儒敎를 정치 이념으로 내 세워 왔고, 또 고려 光宗 이래 실시된 科擧制度 儒學 교육성과를 수렴하는 제도였다. 특히 고려의 科擧에는 지역별 薦擧에 의존하는 鄕貢이란 게 있었는데, 이는 鄕校를 통한 인재 배출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했다.

고려 이래로 독립된 郡縣으로 존재해 왔던 淸道에도 鄕校가 설치되었을 것이나, 그 시기를 명확하게 알기란 어렵다. 淸道 文獻이 성대한 곳이라, 옛날 英憲公 이후로 聞人 達士 史籍에 끊이질 않았으니, 어찌 家學에만 의존한 결과이겠는가? 다만, 초창기 淸道 鄕校 寺刹 건물을 빌려 의존한 채 이리저리 옮겨 다녔으니, 思樂樓移建實記 重建記文 八遷이라 하였음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그 위치 批正이 어려운 것 또한 昨今의 현실이다.

思樂樓移建實記에 의하면, 刱初三遷世遠未詳이라 하였듯이, 초창기 3차례 옮긴 위치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며, 그 후로는 古坪에서 시작하여 隆慶 2(선조 원년) 邑 下天老上 癸坐 移建 했다고 한다. 四遷 古坪 鄕校가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다행히 濯纓 金馹孫 先生 成化 21(1485)에 남긴 鄕校重修 記文이 남아 있어 추정은 가능하다.

당시 불교 사회가 유교 사회로 넘어오면서 절터나 建物들이 鄕校 書院으로 탈바꿈한 사례가 많았는데, 淸道 鄕校도 예외는 아니었다. 濯纓 先生 重修淸道學記에 의하면,

왕씨가 나라를 세운 후 학교를 일으키지 않은 것은 아니나, 무너지고 나서 수축하지 못했다. 父老에게 들으니 本郡의 학교는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지만 자리를 정하지 못해 寺刹 건물을 빌려 학교로 사용하는데 이르렀다 한다. 國初에 학교를 지을 때 비로소 이곳으로 옮겨지었다고 했는데, 당시 경상도 都事 朴融 先生이 이 일에 큰 힘을 썼고, 郡守 李實이 감독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의 일이다.”

라고 한 바가 있듯이, 鄕校 창립 이래 寺刹 건물을 빌려 쓰면서 다섯 차례나 옮겨 다닐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朝鮮朝에 들어와 대대적인 정비를 가할 때 淸道 鄕校 憂堂 朴融 선생과 郡守 李實의 노력으로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니, 이때가 永樂 22(1424년 세종 6)경이었고, 濯纓 先生 父老에게 들었던 五遷 鄕校였다.

이로부터 60년이란 세월이 흘러 건물이 허물고 담장이 무너지자 成化 21(1485년 성종 16)에 새롭게 重修하였는데, 당시 頹落 鄕校 重修를 주도한 인물은 鐵城後人이자 郡守로 있던 李鈞이었다. 절을 짓기 위해 승려들이 구워놓은 기와와 응당 허물어야 하는 절의 材木들을 뜯어와 지붕도 갈고 祠宇를 단장하였으니, 李郡守의 토목공사는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나라의 佛敎 시책에 부응하여 儒敎 文明의 초석을 다진 것이다.

朝鮮朝에 들어와 지속적인 抑佛政策으로 많은 절들이 廢寺되는 과정을 겪었다. 특히 儒敎政治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成宗朝에 들어오면 강제로 허물어야 할 절들이 많았는데, 淸道 邑治와 가까운 남산골 절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곳에 있던 沙林寺 靈隱庵[永恩寺?]을 강제 解體하여 그 材木들을 古坪 鄕校 重創 使用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조선조 1424년경 慶尙都事 朴融 先生의 지원 아래 重創 鄕校 1485년에 李鈞 重修를 거쳐 1568 下天老上 癸坐(합천리) 移建할 때까지 講學의 중심지요, 濯纓 선생이 重修記에서 언급한, 모습을 제대로 갖춘 鄕校였다. 따라서 그 이전의 鄕校 重修記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절집을 빌려 사용했을 것이며, 郡守로 부임한 李實 朴融 先生 도움으로 고평리 일대에 터를 닦아 儒敎國家에 부응하는 규모로 重創하였음이 自明하다. 고평리 鄕校址로 전해지고 있는 곳의 당시 우물은 매몰되었지만 아직까지 솟아나는 샘물의 흔적은 그대로이다.

 

이렇게 유지되어 오던 淸道 鄕校 隆慶 2年 戊辰(1568년 선조 원년) 무렵에 下天老(현 화양읍 합천 2 127-4번지) 癸坐 移建하여 약 60년간 존속되었다. 고평리 鄕校 本邑에서 河川을 건너야 하기에 祭物 운반 도중 강물에 희생되어 간 사람이 발생하는 등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李宜慶 郡守의 지원 아래 移建되었는데, 지금도 옛적에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 있고, 瓦片들도 산재해 있다. 鰲山志》〈學宮편에서 鄕校 설명 아래 덧붙이기를 平時舊基在郡北一里 許敦阜處 其來舊矣라 한 바와 같이, 향교 옛터는  북쪽 1리쯤 되는 곳의 나지막한 언덕에 있었다고 했으니, 합천 2리 언저리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어 此基 古鄕吏五子 登科之私基也라 하였듯이, 그 터는 옛적에 鄕吏 다섯 아들이 及第 했던 명당이었다. 校生들의 염원이던 登科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한 터잡이였던 셈이다. 鰲山志에서는 濯纓先生集에서 다섯 번 옮겼지만 자리를 정하지 못했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고 한 바가 있는데, 이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八遷 중에 五遷에 해당하는 합천 2리 일대는 지대가 낮고 서쪽으로 東川이 자주 범람하는 단점이 있었다. 이리하여 부득이 鰲山 北麓으로 移建하게 된 곳이 竹村 竹林 서편 小岡(작은 산등성이) 午坐이며, 오늘날 교촌리에 위치한 華崗池 남쪽 언저리이다. 六遷에 해당하는 鰲山 北麓에는 옛적 瓦片들이 주위에 산재해 있어 그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이곳으로 移建을 마무리 한 것이 崇禎 戊辰(1628년 인조 6)이었으니, 壽軒 李重慶 先生 鰲山志를 편찬할 당시의 鄕校였다. 1673년에 편찬된 鰲山志》〈學宮편에 따르면, “鄕校在鰲山北麓이라 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아울러 그 아래에 天啓 丙寅(1626년 인조 4) 郡守 宋碩祚 鰲山 北麓으로 옮겼는데, 큰 길과 가까워 수레와 말소리가 들리고 泮水가 맑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아마 宋郡守 移建 작업을 시작하였고, 이어 부임한 郡守 柳袗을 거쳐 鄭皓가 재직하던 중에 마무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神門 앞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는 郡守 柳袗이 심은 것이었다. 평상시 右文堂을 만들어 곡식과 베를 저장하여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비용으로 삼았던 풍속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옛 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李重慶 선생이 토로 하였듯이, 鄕校 運營이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정묘년(1627)에 청도에 부임했던 郡守 柳袗 講學諸生諭文으로 교생들에게 學文 勸勵하려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내려오던 鰲山 北麓 鄕校가 막을 내리고 官內 下天老 子坐 移建한 것이 康熙 23年 甲子(1684년 숙종 10)였다. 七遷에 해당하는 이곳 鄕校 洪受湸 郡守 재임 시절이었는데, 현재 하천리  550번지 일대로 알려져 있다. 이곳 下川里 鄕校 역시 前後方 官路 車馬 行人들로 번잡하여, 41년 만에 또 다시 移建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下川里 鄕校 中松亭으로 移建한 것이 雍正 甲寅(1734년 영조 10)이었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校村里 이 곳 향교는 郡守 鄭欽先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곳도 본래 吏屬들의 私基에 불과했으나 여러 차례 修築 增築을 거쳐 그 규모를 키워갔다. 1843(헌종 9) 군수 宋啓柏, 1929년 군수 崔秉轍이 각각 大成殿 重修하였고, 1978년에 군수 崔亨洙 明倫堂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은 5칸의 大成殿 7칸의 明倫堂 외에 각 4칸의 東廡 西廡,  5칸의 東齋 西齋, 2층 누각으로 된 思樂樓 三門 그리고 東門 西門 등이 있다.

돌이켜 보면, 이 고을 鄕校 歷史가 짧은 것이 아니었고, 歷代 守令 敎導 또한 顯達 文士가 아닌 적이 없었으니, 風俗 敎化되어 鄒魯 洛閔을 더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鄕校가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에 이르러 정규교육 기능은 사라졌지만, 사회교육을 통한 우리 精神文化를 지켜가는 구심점이 바로 鄕校이니, 傳統文化를 되살리기 위한 鄕校의 노력이야말로 미래를 향하는 큰 자산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명륜당

 

重修淸道學記

鐵城李君爲是郡三年令行禁止百事修擧無一不可撫字心勞尤重儒雅於斯文不爲苟然者而一日因舍菜到鄕之校乃睠學舍傾頹不治祗謁祠宇棟楹不撓而蓋瓦破缺檣垣不固庖廚不具而師舍隘陋爲尤甚乃嘆曰是非所以尊師之道也且學校風敎重地鄕射之行養老之設皆於此焉爲郡守者視非其職可乎又嘆曰先聖先師之廟大而中原天子小而列國外夷以及於吾東方國有成均州府皆有校其奉之之所搏矣先聖先師其不眷顧於一僻郡明矣然自天子違於庶人其小以尊其道而承其敎自無夷夏大小之分則其所以盡其誠而致其敬者又其有分哉旣曰無分而斯宇之獘漏如是又非所以盡誠致敬之道於是決意營治又念土木一興妨民者亦多思所以不煩民而集事者乃括闔境中僧徒之欲新寺刹陶瓦而未蓋自舊刹之應而未壤者盡輸而來瓦而新其蓋材以葺其舍春秋釋尊滌牲有所師生函丈之間周旋得有餘地而擧無上雨之虞矣事簡功倍不閱月而訖工李君又具酒食來落之敎授舜佑拜而言曰事君一擧數善幷矣昔太原王仲舒觀察江南壤浮屠舍以葺公宇昌黎韓愈尙韙之今使君壤僧舍乃所以葺學校也而特出不煩民之一念斥異端用以扶吾道而其不煩民存心者又所以不負斯文也則古之所謂措置得宜者正如此使君一擧又加王弘中一等乃酌而祝曰使列郡坐黌堂者皆存心似使君則學校安得不興乎佛老安得不衰乎斯民安得不蒙其澤乎又酌而祝曰使君春秋富非只爲一郡吏而止者所至事事每如此存心則豈特一校一郡受其賜而其自文法之吏一用而長民者內政事而外風敎奴視縫掖腐視師儒學校爲文具謂非其課之所急聞李君之風亦可以作矣然物之廢興存亡相尋於無窮苟亡而無有存之者廢而無有興之者則安知高堂傑閣風打雨隳之後不至於破瓦殘礎之空餘乎王氏建國非不隆學校也及其廢而不修聞之父老是郡之學五遷而不定厥居至假宮於佛舍之中國初興學始移構於此地當時朴先生融爲始路之都事大有功焉李公實郡守乃董成之迄今垂六十餘年其間支欹柱補短榱者不乏其人而至於大其規摹者乃得李君焉噫觀是郡是校之在昔日寓於佛舍而麗季文敎之衰而他鄕可知觀是郡是校之在今日修之者不乏而知國家文明之盛而守令之祗順德意從可見矣李君諱鈞字秉卿斯文重事實有得於家世之淵源今日之於學校盛矣然考滿則當去而登于朝矣其在後者無窮庶後人觀前人之事而使是校增新益舊繼之於無窮不至爲破瓦殘礎而復假宮於佛舍則一郡斯文之幸或在於是記嗚乎李朴兩君之後秉卿君能繼之則秉卿君之後獨無有繼之者乎予旣告李君以當記而招諸生語之曰視第舍則恩安視宮廟則恩敬固人情也汝等視學舍之修而亦恩所以爲學乎時時將事於廟庭其恩敬者不贅敎也而歷視從祀之列當思所以上師魯鄒聖賢下友濂洛群哲取當時言行之迹而惟日孜孜焉如舜佑儧居皐比之上多冒腹便之譏行且去矣聞之尙友古之人諸生無患僻地之無師友此心所同千載一日今代遭聖神爾郡得賢君俾爾由庠序踐古人之跡國家治則譚禮樂以陶吾民一有不幸猶當杖大節爲子死孝爲臣死忠使人有所賴且有所法是維朝家立學之意賢守令興學之意若但弄筆墨以要利達而己豈徒二三子之羞抑亦爲國爲長吏者之憂此盱江李覯之所以諗于袁之衆者今操以諗于諸生習句讀者己務詞華者亦當有感於斯文成化二十一年歲次乙巳夏五月日金馹孫記

 

 

중수청도학기(重修淸道學記)

탁영 김일손(濯纓金馹孫)

 

철성 이군이 청도군수로 온 지 3년 만에 명령이 이행되고 모든 일이 잘 성취되어 하나도 옳지 않은 것이 없으며 백성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다하고 더욱 선비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사문(斯文)을 위하는데 구차하지 않았다.

하루는 석채(釋菜)에 참석하기 위해 향교를 방문하였다. 그는 학사(學舍)가 기울어져도 고치지 않는 것을 보고 사우(祠宇)를 배알하였다. 기둥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기와가 깨어지고 담장이 견고하지 못하였으며 부엌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데다가 사택(師宅)이 더욱 좁고 누추하므로 탄식하기를

이것은 스승을 높이는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 학교는 풍속과 교화를 선도하는 중요한 곳이므로 고을에서 활쏘는 행사와 노인을 봉양하는 행사가 다 이곳에서 베풀어지고 있는데 군수(郡守)로 부임한 사람이 자기 직무가 아닌 것처럼 보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사당을 크게는 중원(中原)에서 천자(天子)가 받들고, 작게는 열국(列國)의 오랑캐로부터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에는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주부(州府)에는 모두 향교(鄕校)가 있으니 그 받드는 범위가 매우 넓다고 할 것이다. 물론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가 이 궁벽한 군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천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그 도를 높이고 그 교육을 받는 것은 오랑캐나 중국이나 크고 작은 구분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성의를 다하고 경의를 다하는 것이 어찌 구별이 있겠는가? 이미 구별이 없다면 이 향교가 이렇게 낡아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중수(重修)를 결의하였으나 토목공사(土木工事)를 일으키면 백성들에게 방해되는 일이 많을 것을 염려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않기로 생각하고 그 일을 주관한 사람들은 군내의 승려들이 새로 지으려고 하는 사찰을 조사하여 아직 덮지 않은 기와와 당연히 허물어야할 구사찰(舊寺刹)을 아직 허물지 않고 있으면 그 사찰의 기와와 목재를 모두 운반하여 기와를 새롭게 단장하고, 재목으로 그 사우를 개수하여 춘추 석전에 제수를 장만할 곳도 만들고 스승과 제자의 사이에 주선할 여지도 있게 하여 모두 비가 샐 우려가 없게 하였다. 일은 간단하고 공은 배로 나타나 몇 달 만에 공사가 완공되었다. 그리고 이군(李君)이 또 주식(酒食)을 갖추어 낙성식(落成式)을 할 때 순우(舜佑)가 절을 하고 말하기를

사군(使君)이 한가지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하게 되었네. 옛날 태원왕(太原王) 중서(仲舒)가 강남(江南)을 관찰(觀察)할 때 사찰(寺刹)을 헐어 공묘(公廟)를 짓자 한창려(韓昌黎)가 그것을 칭찬하였네. 그런데 지금 그대가 사찰을 헐어 학교(學校)를 짓는 것은 특히 백성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일념에서 한 것이네. 이것은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유도(儒道)를 호위한 것이며, 또 백성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사문(斯文)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네. 옛날에 말한 조치를 알맞게 한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네. 사군의 이 거사는 왕홍중(王弘中)보다 한 등급 높은 일을 한 것이네 라고 하면서 술을 한잔 따라 축하하기를

향교에 참석한 여러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사군(使君)과 마음을 같게 한다면 학교가 어찌 흥하지 않을 것이며, 불교와 노자교가 어찌 쇠퇴하지 않을 것이며, 이 백성들이 어찌 그 혜택을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고, 또 술을 한잔 따라 축하하기를

사군(使君)은 나이가 젊어 다만 한 군에서만 벼슬을 하고 마칠 것이 아니니 가는 곳마다 매사에 이와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어찌 특별히 한 학교와 한 군만 혜택을 받겠는가? 그러나 법을 문구(文具)로 여기는 관리를 기용한 후로부터 백성을 다스리는 관장(官長)이 정사(政事)를 안으로 펼치고 풍속(風俗)과 교화(敎化)를 외면하여 선비를 노예처럼 보고 유사(儒師)를 진부하게 보며 학교를 문구(文具)로 생각하여 그것은 시급한 과제(課題)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들도 이군(李君)의 이야기를 들으면 용기를 낼 것이네. 그러나 모든 일은 흥폐존망(興廢存亡)이 끝이 없이 찾아들어 한번 망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고, 한번 폐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 것도 있네. 그렇다면 어찌 고당(高堂)과 걸각(傑閣)이 비바람에 시달리어 기와가 깨어지고 주춧돌이 빠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왕씨(王氏)가 건국할 때 학교를 숭상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이후 점차 옮겼으나 한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사찰(寺刹)을 교궁(校宮)으로 빌려 사용하였다가 국초(國初)에 학교를 지을 때 이곳으로 옮겨지었다고 하는데 그 때 박융(朴融) 선생이 경상도 도사(都事)가 되어 큰 힘을 썼고 이공(李公)()이 군수(郡守)가 되어 교궁(校宮)을 완성하였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의 일이네. 그 사이 비틀어진 기둥을 바르게 하고 짧은 연목을 갈아 넣은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규모를 크게 확장한 사람은 이군(李君)이었네

라고 하였다.

! 옛날 이 고을에 향교(鄕校)가 절집을 빌려서 사용한 것을 보면 고려 말에 문교(文敎)의 쇠퇴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타군(他郡)에서 이 고을에 이 향교를 수축한 사람이 없지 않는 것을 볼 때 국가 문교(文敎)의 융성과 수령(守令)이 성상(聖上)의 뜻에 순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군(李君)의 이름은 균()이며 자는 병경(秉卿)으로 사문(斯文)의 중대한 일을 말하고 있고, 참으로 가정의 연원(淵源)이 있는 사람이므로 오늘날 학교가 융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임기가 끝나면 이곳을 떠나 조정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후임자도 한없이 있을 것이니 후임자가 선임자의 일을 볼 때 이 향교를 더욱 새롭게 단장하여 영원히 지속하고 기와가 부서지거나 초석이 빠지더라도 다시 불사(佛舍)를 빌리지 않는다면 이 고을 사문(斯文)의 행운이 혹 이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  · 이 양군(兩君)의 뒤에 병경군(秉卿君)이 계승하였으니 병경군(秉卿君)의 후에는 어찌 계승할 사람이 없겠는가?

내가 이미 이군(李君)에게 이 학기(學記)를 짓는다고 알리고 제생(諸生)들을 불러 말하기를 제사(第舍)를 보면 편할 것을 생각하고 궁묘(宮廟)를 보면 공경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니 너희들은 이 학교(學校)가 수축된 것을 보고 학자가 될 것을 생각하는 적이 있느냐? 그리고 수시로 묘정(廟庭)에서 일을 볼 때 공경한 마음을 갖는 것은 덧붙여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사 지내는 절차를 일일이 보면 위로는 공자(孔子) 맹자(孟子)를 스승으로, 아래로는 염락(濂洛)의 철인(哲人)들을 벗으로 삼고 당시의 언행(言行)을 취하여 매일 익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순우(舜佑)는 참람하게 스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배만 불리고 편안하게만 지낸다는 기롱(譏弄)을 받고 있으니 곧 떠나갈 것이다. 그러나 들은 말에 의하면 옛날 사람을 친구로 삼은 사람이 있으니 제생(諸生)들은 벽지에 사우(師友)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라. 마음이 이와 같으면 천년을 하루같이 잘 지낼 것이다. 지금 시대에 어진 임금을 만나고 너의 군()은 어진 수령(守令)을 만나 너희들로 하여금 학교에서 고인(古人)의 자취를 이행하게 하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예악(禮樂)을 논하여 우리 백성을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단 한번이라도 불행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큰 절개를 지키어 자식은 효()에 죽고 신하(臣下)는 충()에 죽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의뢰하게 하고. 또 그것이 본받을 만한 법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오직 조정에서 학교(學校)를 세우는 뜻이며 어진 수령(守令)이 학교를 일으키는 의의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필묵(筆墨)을 희롱하여 이익만 추구한다면 그것이 어찌 두 세 사람의 수치(羞恥)만 되겠는가? 그것은 국가와 관리들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이것은 오강(旿江) 이구(李覯)가 원주의 여러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이 말을 또 제생(諸生)들에게 고하노니 구독(句讀)을 배우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격조(格調)와 화려한 문구에 힘쓰는 사람은 마땅히 이 글에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성화(成化) 이십일년 을사(1485) 여름 오월 일 김일손 씀

 

명륜당중수기(明倫堂重修記)

군수 조경하(趙鏡夏)

 

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삼대(三代:  )의 제도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주나라가 쇠한 후부터 사람을 가르치는 법칙이 점점 소원해 졌고, 학교도 따라서 황폐해 갔다. 수도에는 국학이 있고, 군현에는 혹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우리 동방에 이르러서는 문화를 한결같이 숭상하였으며, 나라 전체가 인륜을 함양하고 공자의 학문을 조술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모든 군현에 공자를 모시는 묘가 있었으며, 묘에는 반드시 명륜당이 있어 학교로서 역할을 하였다. 서울에 있는 것을 대학이라 하고, 군현에 있는 것을 향교라 하였다. 기쁘게 준재(俊才)를 기르니 삼대의 융성함에 가까웠다.

중고 시대 이후로 내려오면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점점 줄어들어 건실함이 없었고, 오직 백세에 걸친 묘와 긴 담장만 있을 뿐이며, 제기와 읍양의 예는 아직 상존하고 있다.

최근 수십 년에야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기풍이 다시 치열해졌다. 그러나 군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였다. 학교를 별도로 설립하고자 하는 곳은 번번이 향교를 이용하였으며, 우리 군의 실정 또한 이와 같았다.

나는 금년 봄 봉화로부터 본군으로 이임하였는데, 먼저 여러 유학자들과 더불어 공자묘를 알현하였다.

한 노인이 읍을 하고 일어나 말하기를 "우리 군도 역시 향교에 학교를 설립하고자 한지 십년이 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사 등 여타 기회에 저희들이 머물 곳이 없어서 항상 개탄하였습니다. 지금 교사를 별도로 설립하여 옮기게 되었으니, 차제에 속히 보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바로 공역을 시작하고 독려하여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당우를 완성하였다. 학사가 지금 일관되게 갖추어져 모습이 바뀌었으므로 군의 많은 인사들이 모여 낙성을 하였다.

내가 잔을 들어 유학자들의 용력과 노력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 말하였다.

여러 군자들은 모두 공자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공자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불순하다라고 하셨습니다. 향교와 학교는 그 이름이 같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장소라는 것도 같습니다. 지금 이름이 둘로 나누어진 것을 불순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개 신학문을 공부하는 자는 과학을 위주로 노력합니다. 반면, 옛날 백성을 가르치는 육예의 의는 단지 수시로 늘어나고 줄어듦이 있을 뿐이며, 이는 곧 공자가 가르치신 은과 주의 법도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또한 비록 과학이 아름답다 하여 효제를 행하지 않고 경전과 제도를 존숭하지 않는 것을, 권하여 이끌지 않는 것은 유가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순박하고 도타우며, 향당에서는 굳세게 하여 족히 교화하는 사람은 또한 선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군은 큰 산마루의 남에 굳건히 의치하고, 우리 군에서 출현한 여러 현인들을 사당에 배향하고 있으니, 선비가 눈으로 보고 마음을 느껴 흥기한다면 더욱 잘 다스리지 않겠습니까.

간절히 바라건대, 우리 군의 여러 유학자들은 여기에 더욱 면려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진작시키기를 바랍니다.

 

 

 

 

 

사락루

 

사락루중수기(思樂樓重修記)

직원 이종옥(李鍾玉)

 

계유년(1933) 겨울 소진우(蘇鎭禹)가 오산군에 부임하였는데, 빼어나고 밝아 군정(郡政)을 인화(人和)로 하였다. 현관을 쓰고 단정한 소리로 성전을 알현하고 물러나와 좌중에 고하여 말하기를,

성인은 아득하고 말씀은 막혔는데, 이교(異敎)의 소란하고 난잡(亂雜)함이 넘쳐 마침내 사람의 사람다움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생의 사람다움은 사람으로서 떳떳이 지켜야 할 도리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이 있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바른 학문을 받들어 장려하려면 마땅히 먼저 학문을 닦을 장소를 살피고 강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교궁은 퇴락하고 무너졌으니 오로지 고치고 넓힐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하물며 김탁영, 이모헌, 박농암 등 여러 선현의 유풍의 여운이 아직 있는데 여러분들은 민망함을 면하도록 노력하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어 향교의 기부금 약간을 사업의 자금으로 획출하였다. 이에 신사(紳士)들은 본받을 모범을 탐색하고 공장(工匠)들은 즐거이 일을 추진하여, 낡은 것을 바꾸고 굽은 것은 바르게 하니 정전이 크고 아름답게 되었다. 재실의 지붕과 문루는 차제에 일신하니 산천이 바뀌어 보이고 사기가 북받쳐 올랐다.

일을 도모하고 이끈 사람은 군에 속한 김병호(金炳昊)와 윤갱은(尹澋殷)이며, 일을 맡아 행한 사람은 전 직원 예두기(芮斗基)였고, 준공의 공로자는 현 직원 이종옥(李鍾玉)이다.

날을 잡아 낙성식을 올리니 지역의 대부와 선비들이 모두 모여 글과 술을 서로 나누고, 악기(樂器)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종옥에게 이를 기록하게 하니, 잔을 들어 축하하고 아래와 같이 일렀다.

 

높고 높은 오산이 웅장하게 남으로 서려 있고,

어진 선비를 모아 기르니, 공자의 옛 땅과 흡사하도다.

향리에 노인이 편히 살며, 나라가 진실로 충량한 선비를 구함은,

규범이 향교와 학교에서 비롯되었음이라.

세대를 내려가매 풍속은 흐트러지고, 사기는 잠들었으며,

궁장은 퇴락하여 허물어지고, 행로는 부끄러울 뿐이로다.

어진 군수가 처음 정치를 펼 때 법도와 강상(綱常)을 드러내어

혁혁하게 모습을 바꾸매 유학의 흐름이 바야흐로 비롯되도다.

 

명성과 공적을 자세히 의론하고 그 오른편에 두고 다 같이 가로되,

 "태수여, 태수여, 돌아갈 바 없도다. 높은 하늘과 같은 후()는 홀로 큰 은인이라. 이를 들어 알리노니, 앞으로 천만년에 이르리라."

 

 

 

지인재

 

향로당기(鄕老堂記)

농암 박란(聾巖 朴鸞)

 

유향소의 설치는 국조 이래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중간에 설치되었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도 하였다. 없앤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없애자는 의견이 설치하자는 의견의 원대함만 같지 못했기 때문에 없앤지 오래되지 않아 다시 세워진 것이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뜻이 크고 원대한 반면에 그 일을 전적으로 맡아 담당할 사람이 없고, 그 임무는 실로 막중하지만 그 이름은 영귀(榮貴)하다거나 현달함이 없다. 그래서 혹 아무렇지 않게 흘겨보며 헛된 일로 여기거나 혹은 잘난 척하며 이름을 부끄러워하고 욕되게 여긴다. 그래서 이른바 향소(鄕所)라는 것은 이에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국가에서 건설하려는 뜻도 이에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주부(州府)와 군현(郡縣)에서는 좌수(座首)니 별감이니 해서 그 인원을 4명이나 3, 혹은 2명을 둔다. 이름과 숫자는 비록 갖춰졌으나 출입하거나 쉴 만한 장소가 없다. 혹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좁고 누추해서 거처할 만한 곳은 못되고 비가 새고 무너져도 다시 수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상태로 세월을 보낸다면 있던 것도 장차 없어질 것이며, 없는 것은 다시는 알 수도 없게 되어 형식과 예절 모두가 없어질 것이다.

우리 고을은 서울과의 거리가 비록 멀지만 또한 문물(文物)로 명성을 날린 곳이고 문무(文武)와 재예(才藝)를 갖춘 선비들이 세대마다 부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소가 좁고 누추하며 비가 새고 무너진 것이 이웃 고을과 비교해 불 때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매양 향음례(鄕飮禮)와 향사례(鄕射禮), 그리고 절기(節氣)때마다 이마를 찡그리고 안타까워한 것이 몇 년이나 되었다.

고을의 어른인 생원(生員) 박하담(朴河淡) 선생이 분연(忿然)히 사람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합쳐 자신의 안타까움으로 여기고 한 고을의 일을 맡기를 마치 한 집안의 일처럼 여겼다. 그래서 경영(經營)과 조치(措置)의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온 고을 사람들이 응하고 따랐다. 그래서 일할 사람을 모으고 양식을 공평하고 가지런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공사를 감독하고 설계하고 규획함에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처음 기해년(1539) 봄에 시작되어 그해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에는 50명 정도 앉을 수 있고, ()에는 호위하는 이들을 들일 수 있으며, 요리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방이 있고 일을 하는 사람들에도 집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후에야 조정에서 향소를 건설하려는 뜻을 받들 수 있었으며, 선비들과 군자들이 거처할 곳이 있게 되었으며,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 따위가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고, 심부름꾼과 보좌하는 사람들이 곤란해 하지 않았으니 어찌 한 고을의 다행스러운 일로 세상에 드문 일이 아니겠는가?

대개 공역(工役)은 삼년정도가 걸린 뒤에 완성되는데 힘이 모자란다고 해서 다그치지 않은 것은 관에서 하는 예가 아니다. 그 높고 큼이 반드시 이와 같은 뒤에야 걸맞는 것은 향당에서 힘을 모아서 이룩한 것이니 개인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비록 향안(鄕案)에 이름을 엮지만 이 당()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장차 어떠한 생각을 가지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즐거워할 만한 일이 두 가지 있고, 힘써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으며, 두려워해야할 것이 한 가지 있으니 우리고을 사람들이 어찌 몰라서야 되겠는가?

지나간 수천만년, 그리고 뒤이어 올 수천만년 사이에서 나와 우리고을 사람들이 한 고을에서 함께 살아간다면 시대가 우연이 아닌 것이요, 멀리 끝자락의 경계 아득하고 먼 지역에 나와 우리 고을 사람들이 함께 이곳에서 살아간다면 지역도 우연이 아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은 바쁘고 세상일도 복잡하게 얽혀져 있어도 머리를 모아 속내를 펼치고 손을 잡고 회포를 풀게 된다. 함께 살아갈 세월 속에 혹 공가(公家)의 예로 인해, 혹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항사례로 인해 동서(東西)로부터 여기에 이르고 남북(南北)으로부터 여기에 이르러 기쁘게 서로 만나 도도하게 취하고 즐긴다면 유유자적하여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사람이 혹 잘못될 줄 알면서도 간하여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스스로 고칠 수 없게 되고, 자질이 비록 순박하고 아름답더라도 견문(見聞)이 없으면 스스로 진보할 수 없다. 우리고을은 비록 몇 집 안되는 조그마한 고을이지만 정직(正直)하고 방엄(方嚴)하여 상대방의 과실을 바로잡아 줄 사람도 있으며, 재주와 덕이 훌륭하여 상대방이 우러를 만한 사람도 있다. 이정도가 된다면 견문을 넓히고 잘못을 고치는 사람들이 장차 적지는 않을 것이며, 상대방의 선한 행위를 보고 자신의 덕을 이룰 자도 또한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과실이 있는 사람이 과실이 없게 되고, 자질이 아름다운 사람이 성취가 있게 된다면 우리고을 선비들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유향소는 명성과 지위도 없고 진귀한 임무도 아니다. 그러나 관계되는 일은 실로 긴요하면서 느슨하지 않다. 위로 수령의 다스리는 이치를 바로잡아 구하고, 아래로 못된 아전의 사악한 행위를 규찰한다. 한 가지 일이라도 백성들에게 이롭다면 수령에게 알려 두루 시행 할 것을 생각하고, 한 가지 폐단이라도 백성들에게 해가 된다면 반드시 수령에게 간곡하게 알려 제거할 것을 생각해야한다. 마을에 백성의 물건을 수탈하는 근심이 있다면 이는 못된 아전의 횡포이고, 송사(訟事)에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있으면 이는 못된 아전의 짓거리이다. 반드시 관아의 정사가 맑고 간악한 아전들의 횡포를 그치게 하기를 기필한다. 이런 까닭으로 향청(鄕廳)의 직임이 있는 사람이 힘을 쓰게 되면 한 고을이 막대한 이익을 입게 되고, 힘쓰지 않으면 한 고을이 그 해를 입게 되니, 우리고을 선비들은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향소라는 이름이 비록 하찮코 부끄럽다고는 하지만 기세의 성대함은 환하게 한 고을을 움직인다. 청탁하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머뭇거리고 뇌물을 바치려는 자들이 문과 담장에서 서성거리기 때문에 이 임무를 맡은 자는 힘쓰고 또 힘써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반드시 의리에 함당하게 하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이치에 합당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평소에 품은 뜻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한 고을의 비방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혹 그렇지 않고 구할 수 있는 여건의 물건이라고 해서 의리를 돌보지 않고 반드시 구하려고 한다거나, 이룰 수 있는 형세의 일이라고 해서 이치를 헤아리지 않고 반드시 이루려고 한다면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하고자 한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힘을 쓰게 되면 몸가짐이 바른 훌륭한 선비가 되는 것이고, 힘쓰지 않으면 끝내 오욕을 받는 소인(小人)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고을 선비들이 소홀 할 수 있겠는가?

()나라에는 향교(鄕校)의 논의가 있었고 한()나라에는 월조(月朝)의 평()이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군()에서 모이면 의논(議論)하기를 좋아하고, 의논을 좋아하면 시비(是非)을 다투게 된다. 지금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한쪽에서는 아무개는 집에 있으면서 부모를 따르기를 이와 같이 하고, 형제들과 잘 지내기를 이와 같이 하며, 취하고 버림에 신중하기가 이와 같고, 시비에 밝기가 이와 같다 라고 말한다. 그러면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개는 자신만을 위함이 이와 같고, 어른에게 방자하기 이와 같으며, 탐욕에 힘쓰는 것이 이와 같으며, 투기와 질투에 마음 씀이 이와 같으며, 사벽을 행함이 이와 같다

고 말할 것이니 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열 눈이 보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다. 사람마다 가슴속에 나름의 잣대가 있어 마음에 하늘과 땅처럼 판단의 차이가 난다. 그러니 우리 고을 선비들이 가히 두려워할 만한 일인 것이다.

! ()의 서합괘(噬嗑卦)는 물건이 합하는 것인데, 그 다음으로 비괘(賁卦)가 나오는 것은 물건은 구차하게 합쳐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의 췌()괘는 물건이 모이는 것인데 괘의 단사(彖辭)에서 ()함이 이롭다 라고 말한 것은 모이는 것을 바른 도리로써 하지 않으면 다툼과 어려움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써야 할 것에 힘쓰지 않고, 즐거움만 알아 즐기기만 한다면 구차하게 합하는 것일 따름이고 다툼과 어려움만 불러일으킬 따름인 것이다. 이 당()에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고을 사람으로 매번 여러 군자의 뒤를 따라 이곳에 출입하였는지라 감히 글을 써서 벽에 기록하여 위로는 여러 군자를 권면하고 아래로는 우리 고을 사람들을 북돋우고자 한다.

 

-향 헌-

 향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면 이름을 삭제한다.

 향풍을 어지럽히면 경중에 따라 손삭(損削)한다.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욕심을 탐하여 쫓는 자는 삭제한다.

 동렬자를 음해하는 자는 제명한다.

 동렬자를 헐뜯고 무소(誣訴)하는 자는 경중에 따라 벌을 정한다.

 완의한 뒤에 중의를 따르지 않는 자는 경중에 따라 손삭한다.

 향장을 능멸한 자는 경중에 따라 논죄한다.

 향중에 회의할 때 이유 없이 두 번 불참한 자는 제명한다.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을 추천하면 제명한다.

 모든 벌을 받은 사람이 잘못을 고치고 스스로 잘못을 밝히는 단자를 낸 뒤에는 벌을 해제한다.

-향 규-

 봄가을 강신(講信)하는 날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순가(純可)’를 받은 사람만 쓸 것.

 당연히 참여하는 문무과 중에 출신(出身)은 향선생으로서 향록(향안)에 가부를 쓰지 말 것.

 아내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천망하지 않는다.

 30세 이상인 사람을 추천한다.

 매년 원악향리와 권력을 함부로 쓴 서원(書員)은 모두 모이는 향회에서 공론을 따라 경재소로 이첩하여 정죄하되, 상벌(上罰) 9가지 과일과 9가지 음식과 청주와 탁주 각 7동이로 하고, 중벌(中罰) 7가지 과일과 7가지 음식과 청주 탁주 각 5동이, 하벌(下罰) 5가지 과일과 5가지 음식과 청주와 탁주 각 3동이로 한다.

 

 

 

유림회관

향안

 

향안서(鄕案序)

이광절(李光節)

 

향안(鄕案)은 곧 선() 부로(父老)의 정명(正名)을 기록한 것으로 비단 수로 단장하여 궤 안에 보관하고 있으니, 그를 높이 받드는 정성이 참으로 지극하다 할 것이다. 그 자손된 이들은 마땅히 모피와 갖옷으로 보호해야 하며, 아끼는 것도 또한 규벽(圭璧)처럼 해야 할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순수한 기풍이 일거에 파괴되고 고을의 사습(士習)이 옛과 같지 못하여 명예를 훔치고 더럽히는 변고가 일찍이 뜻하지도 않은데서 나오자, 우리 남쪽 땅의 예의의 가르침이 여기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감추어 지킴에도 적당한 곳을 잃고 도리어 공경스럽지 못한 곳에 돌아가게 하였으니 후생(後生)의 높이 받들어야 할 법도에 비추어 매우 편치 못하다. 나 광절(光節)이 평소에도 울분을 참지 못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외람되게도 헌석(憲席)에 오른 이래 맨 먼저 공경히 수호할 옳은 방도를 꾀하였다. 이에 보관궤를 살펴보고 신구(新舊)의 명록(名錄)을 정()하게 싸서 별도의 장소에 두어 여론(輿論)을 기다린다.

 

 

 

 

향교의 제기들

 

교촌리(校村里)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집필자 박윤제)에는 교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교리와 죽촌을 합해서 교촌이라 하였다. 교리(校里)는 청도 향교가 있어 교리라 부르며, 죽촌은 조선 초기 성종 조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지할 때 죽림사를 폐사하고 그 절을 대밭으로 만들어 관죽전(官竹田)을 삼고 스님을 양죽인(養竹人)으로 하였다는 옛 기록에 관죽전이 있어 죽촌이라 부른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향교가 처음 시행 될 때에 절의 방사를 빌려 향교로 삼았다는 탁영지의 기록과 옛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은 향교가 처음 시작되기도 하였거니와 영조 때 마지막 정착지가 이곳이어서 교촌이라 불렀다고 하며 뒷날 유교가 성하고 불교가 쇠퇴할 때 절을 없애고 대밭으로 만들어 죽촌이라 불렀다가, 다시 향교가 지금의 장소로 옮겨오면서 향교와 죽촌이 합해져서 교촌이라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마을 안쪽 대밭이 있는 곳은 죽촌이었고 향교가 있는 곳은 교리였다. 이후 1979년 화양면이 화양읍으로 승격하면서 화양읍 교촌동이 되었고, 1988년 교촌동에서 교촌리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중심에 청도 향교가 있는 이곳은 예전엔 청도군의 이속(吏屬)들의 개인집으로 형성되었던 곳에 1734(영조 10)에 합천리(合川里)에서 이곳으로 향교가 옮겨오면서 향교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읍지에는 소사(小寺)를 없애고 대밭을 만들어 절에 있던 승려를 양죽인(養竹人)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죽림사(竹林寺)의 옛 터가 이곳이 아닌가 한다.

 

[자연 환경]

오산 자락 낮은 산등에 자리 잡은 교촌리는 옛 청도 동헌 뒤쪽 언덕 위에 자리하다. 교촌리과 동천리의 경계에는 속칭 남산 13곡이라고 하는 계곡이 있다. 남산 계곡에는 여러 곳에 선현들의 글씨를 새겨 놓은 바위들이 계곡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옛날 가뭄이 들면 군수가 직접 기우제를 흔적의 음용지와 운금천, 질양석, 석문을 지나면 시정(詩亭)이 있다. 또 유하담을 지나 옥정암 아래에는 용항이 있고 용항 위에는 봉황대가 있으며, 봉황대 위에는 금사계와 모선동이 있다.

 

[현황]

2012년 현재 면적은 3.05이며,  47가구에 101[남자 50, 여자 51]이 살고 있다. 동쪽과 화양읍 교촌리, 서쪽은 화양읍 서상리·신봉리·각남면 칠성리·사리, 남쪽은 청도읍 상리, 북쪽은 화양읍 동상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교리과 죽촌이 있다. 국도 20호선과 연결되는 도로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인 청도 향교는 건물이 모두 8동이 있으며, 향교 담장 안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다. 교촌리에는 청도 지역에서 사용되는 수돗물 가압장이 있고, 화강지(華岡池)라는 저수지가 있으며 화강지 언덕 위에는 화악루(華岳樓)가 있다. 화강지를 축조할 때 일한 인부들이 전하는 말에 둑을 쌓은 데 쓸 넓적한 큰 돌을 들어내면 돌방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토기가 무더기로 나왔다고 한다. 그때 인부들은 재수가 없다고 하여 토기를 모두 돌로 쳐서 깨 버렸다고 하는데, 뒷날 이것이 고분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교촌에는 2개의 석간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는데 예전부터 물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아무리 가물거나 장마가 때에도 물의 양이 불거나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한편 청도군지에 소개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군의 진산인 오산(鰲山)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인 교촌리는 중산등을 뒤로하여 북향,서향으 로 자리잡고, 마을 동으로는 남산계곡인 동천넘어 동산봉이 막고 있으며, 서로는 남산지맥인 낙안봉(洛雁峰)이 힘차게 내리달리고, 북으로는 눈 아래로 배말구릉(背末丘稜)이 청도천에까지 이어져 있다. 유서 깊었던 중산(中山)도 현재는  도원으로 대부분이 경작되고 있어 많은 변화를 실감한다.

 고려말 조선초에 청도 김씨가 자리잡은 곳이 오산등(鰲山嶝)의 죽촌(竹村)이다1610년경 청도인 김승조 공이 혁혁한 선조(先祖)의 후광을 업고 금오탁시(金烏啄屍)의 명당에 장원(莊院)을 짓고 일세(一世)를  풍미하였으리라?  대대손손 명당자리를 지키다가 1975년 경에 폐가되었다. 

 

*오산 - 현재 청도 남산이라 불리는 화악산의 명칭이며, 자라를 닮았다하여 오산이라 불린다.

 

참고

 

-청도향교지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청도군지(1991, 청도군청)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역주 오산지(2003,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청도문헌자료집(2013, 청도문화원 향토사학회)

-원주 향교 블로그(원승규)

-이서초등학교 90년지(2018, 이서초등학교 총동창회)

- 청도향교 전교 및 장의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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