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와 군수가 배출된 대곡리
2016년 12월 6일(화), 청도군 이서면 한실, 가실, 송정, 중리 등의 자연부락이 있는 대곡리를 찾았다.


망운재(望雲齋)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1176- 1
○건축연대: 1915년
○건물구조: 망운재(목조와가 정면 4칸, 측면 2칸), 대문채(2칸)
○관리문중: 밀성 박씨
○배향 인물: 밀성인 박계원(朴桂源) 선생의 선재이다.
○현황: 대곡리(가곡)에 있다. ‘망운재 기’ ‘청천헌’, ‘상현재’ 등 현판이 있다.

망운재기(望雲齋記)
경산 최시술(耕山崔蓍述)
보현산 한 가지가 남쪽으로 뻗다가 서쪽으로 꺾어져서 수백 리를 가서 팔조령이 되었는데 그 기운이 장대하여 대구와 청도의 경계가 되었다. 그 동남쪽으로 소 한 마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정도의 거리에 휑하게 울타리를 쳐서 마을을 이룬 것이 대곡이란 마을인데 밀성 박씨가 대대로 이어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내가 성묘를 하려고 지나가다가 시냇물이 작으면서 맑고 시원하여 천석(泉石)을 사랑할 만하였다. 소나무와 버드나무 언덕이 앞뒤로 둘러싸 있는데 생각해보니 숨어서 수양할 만한 곳이었다. 문득 보니 눈앞에 새로 집을 지었으나 낙성하지 못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으로 옮겨 기대어 마음껏 바라보니 용각산이 동쪽에 높다랗고 자양산이 서쪽에 빼어났으며 화악산이 남쪽에 우뚝 솟아 그 형세가 심히 장엄하였다. 덕천과 자계가 그 남쪽을 경유하여 흐르고 나열된 봉우리와 기다란 산이 그 어귀에 얽혀있어서 모두 사람이 살만하여 확고부동한 땅이 되었다. 어느 날에 박계성 군이 그 백형의 명으로 내 경산정사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지난번에 지은 집은 곧 저희 집안의 재실입니다. 계성의 직계 선조의 묘소가 동쪽으로 2리쯤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데 묘소 아래에는 집을 지을만한 땅이 없어서 마을에다가 물려서 집을 지었습니다. 앞으로는 시냇물에 다다르면서 조금 널찍한 곳에 제수를 제공하는 장소를 삼았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묘소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재실이 완성되었으나 아직까지 이름을 짓지 못했으니 청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너무 상심할 것 없네.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이끌고 다니던 장소와 옷과 신발을 간직한 곳이 조금 떨어져 있지만 서로 바라볼 수 있어서 조금도 장애가 될 것이 없으니 오르내리는 조상의 혼령이 어찌 여기에는 오지 않고 저기에만 오는 것을 알겠는가? 묘소를 바라봄에 오히려 멀다고 여기는데 그만두지 않는다면 곧 참군 적인걸의 태행산 말을 취하여 이것을 망운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면 하는데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계성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이미 이름을 지은 것을 들었으니 원컨대 그 일을 기록함으로써 다행하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마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말이 이미 나옴에 거두어들일 수가 없어서 드디어 그 말을 부연하여 여기에 써서 가로되 어버이를 생각하는 것은 한결같은 일이니 생전에 거처하시던 곳과 사후에 계시는 묘소를 어찌 가릴 수가 있겠는가? 항상 구름 기운이 있어서 용용(溶溶)하고 애애(靉靉)하여 성대하게 그 위에 계시는 듯하여 아침으로 바라보고 저녁으로 바라보며 기거할 때에 바라보고, 출입할 때에 바라보아 일 년이면 열두 달을 바라보고 한 달이면 삼십일을 바라보아 하루도 바라보지 않는 날이 없네. 생각해보면 재실을 먼 곳에다가 지어두면 혹 한 해에 한번 가보고 한 달에 한번 가보는데 일 년에 한번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남녀 자손들이 각각 제수를 장만하여 변두에다 담아 때를 옮기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가서 바칠 수가 있으니 생각건대 제수를 장만하는 것을 재실을 지키는 사람의 손으로 장만하는 것이 어찌 자기 집안의 사람들이 십분 정결하게 만드는 것에서 나온 것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 구름 기운이 상서로움을 이루어 반드시 자손들로 하여금 구름처럼 일어나게 할 것이고, 장차 제사를 받들 적에 모이는 것이 구름과 같을 것이며 제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도 구름처럼 모여 갈 것이며 서쪽에 운문산이 있어서 구름이 성대하게 일어나니 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망운재의 자손들이다.’ 라고 할 것이니 어찌 성대하지 아니하며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비록 그러하나 만약에 자손들을 예로써 인도하지 않고 의리로써 제어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저 제운루처럼 높기만 높다는 비아냥거림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곧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반드시 시서와 예악의 가운데에 종사하여 형이 피리를 불면 동생이 화답하며 우애롭게 여기에서 형제간 담락을 누리고, 자손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봄과 여름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외우며, 둥근 갓을 쓰고 모난 옷을 입으며 법도 있게 걷고 똑바로 앉아있으면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성대하게 일어날 것이다. 간간이 주자 문집에 실려 있는 운곡기문을 취하여 읽으면 어질고 지혜있는 사람의 즐거워하는 바를 알 수가 있고, 운대의 진일자 서문을 취하여 읽으면 괘상과 말이 보고 구경하는 데에 도움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인즉, 한 고을에서는 한 고을의 희망이 되고, 한 도에서는 한 도의 희망이 되며, 한 나라에서는 한 나라의 희망이 될 것이니, 선조를 받들고 후손들을 넉넉하게 하는 도가 바깥에서 구하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망운재의 아래에 저절로 있을 것이네. 여러분들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아니하겠는가?
(이상은 '국역청도문헌고'에서 국역한 내용입니다.)



도남재(道南齋)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1178
○건축연대: 1670년
○건물구조: 도남재(목조와가 정면 5칸 측면 2칸), 대문채(3칸)
○관리 문중: 밀성 박씨
○배향 인물: 박원장, 박하장, 박이장, 박정장 4형제의 재사이다. 이 분들은 박란 선생의 증손이다.
○연혁:4형제가 뜻을 모아 향인 교육 도장으로 삼기 위해 창건했다. 그 뒤 후손 박상규가 문화학교를 설치하여 다년간 향인교육에 이바지한 바가 있으며 오랜 세월 속에 누차 이건하고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황: 담장은 블로크 담이며 마당은 시멘트인데 사철나무 조경이 되어 있다. 관리가 잘 되고 있다.








경첨재景瞻齋
위치: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784번지
건축연대: 1921년
건물구조: 목조와가 정면 3칸, 측면 1칸
연혁: 경첨재는 밀성인 박훈(朴薰) 선생의 묘재이다. 선생의 자는 덕경(德卿)이며 호는 경첨(景瞻)이다. 두촌 박양무 선생의 10세손으로 1674년(현종 15)에 태어나서 천성이 뛰어나고 문학과 덕행을 사림의 긍지로 삼았다. 1745년(영조 21)에 졸했다. 증 훈련원 판관이다.


안동김씨(安東金氏) 효열각(孝烈閣)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산 72-1(대곡 4리)
○비명: 박유인효열기적비(朴孺人孝烈紀蹟碑)
밀양 박치정(朴致禎)의 아내로, 안동 김치균(金致均)의 따님이다. 남편의 가세가 매우 빈곤해서 만주로 가는 도중에 시아버지가 병을 얻었다. 남편 역시 병자이므로 시아버지를 업고 길을 갔으나 오래지 않아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체를 등에 업고 200여리 길을 가서 산소 쓸 만한 곳에 도착하여 흙을 져다가 묘를 만들었다. 또한 다른 곳에서 남편도 죽었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9살 난 아들에게 말하기를,
“네가 장성하거든 네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러드려라. 나는 부득이 먼저 시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구나!”
하고는 이에 3,000여리의 길을 걸어서 선영 아래에다 안장하였다.



숭의재(崇義齋)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164
○건축연대: 1995년
○건물구조: 숭의재(숭의재 정면5칸, 측면2칸), 상재실(3칸), 솟을대문(3칸)
○관리문중: 철성 이씨
○배향인물: 이광진(李光晉) 선생의 묘재이다. 자는 진경(晉卿), 호는 대은(大隱) 이며 충의위이다. 용헌(容軒) 선생의 8세손이며 모헌 이육 선생의 5세손이다. 천성이 효행하고 성리학에 깊이 몰두하였으며 후진을 양성하고 인의(仁義)를 행하고 우의를 돈독하여 덕행이 높아 향리에 사표가 되었다.
○현황: ‘숭의재 기’ ‘상량문’ ‘창선실’ 등 현판이 대청마루 벽에 걸려 있다. 웅장한 건물에 솟을대문, 석축 기와담장으로 되어 있으며 조경이 잘 되었고 마당에 석등이 있다. 입구에는 ‘고성 이씨 숭의재’를 알리는 대형 표석이 있다.





모암재(慕巖齋)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348번지
○건축연대: 1945년
○건물구조: 모암재(목조와가 정면 4칸, 측면1칸), 하당(3칸), 솟을대문(3칸)
○관리문중: 경산 이씨
○배향인물: 이인구 선생의 재사이다. 선생은 1686년(숙종 12년) 출생으로 성주에서 입청도 하였다. 자는 응여(應汝)이며 학가재 이주(李綢) 선생의 증손으로 우애가 두터웠고 조상의 유덕을 추앙하고 후학들을 훈도했다. 1758년(영조 34년) 향년 73세로 졸했다.
○현황: 상대곡동(한실)에 있으며 이의근(경북지사), 이중근(청도군수) 형제가 선생의 후예이다. ‘모암재 기’, ‘모암재 상량문’ ‘원운’ 등 현판이 마루 벽에 걸려 있다.

대곡 1리 경로당


이의근, 이중근 형제 생가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329-2
○건물구조: 목조 와가 정면 4칸, 측면 1칸
○연혁: 약 150년 정도 된 집이다. 이의근 경북지사와 이중근 청도군수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본래는 초가집이었으나 뒤에 기와로 바뀜.
○현황: 상대곡(한실 마을) 가운데 있으며 현재는 이 지사의 집안사람이 살고 있다. 마당은 잔디로 되어 있으며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송고서당(松皐書堂)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751번지
○건축연대: 1880년
○건물 구조: 송고서당(목조와가 정면 5칸, 측면 1칸), 대문채(3칸)
○관리문중: 밀성 박씨
○배향 인물: 박기록(朴基祿) 선생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현황: ‘대곡 4리 경로 회관’ 앞에 있다. 대곡4리(중리)는 박씨 집성촌이다. ‘송고재’라고도 불린다. ‘송고재 기’, ‘松皐 朴 先生 訓後識’ ‘송고 가훈’ ‘송고 서당기’ ‘송고재 상량문’ 등이 즐비하게 붙어 있다. 마당에 사철나무가 있고 중문이 있다. 담장 밖에 ‘成均館 典學 一陽 朴 先生 紀蹟碑’가 있다. 경로회관 건립 기념비에는 ‘삼성산과 상원산의 두 정기를 이어받은 복된 자리에 일찍이 선조들께서 삶의 터전을 잡고 수대로 살아온 큰 마을 한실 중리는 효제 충신, 경로 효친의 정신을 우리 선인들께서 이어받아 그 숭고한 얼을 자손 대대로 승계하여 길이 빛날 이 고장’이라고 했다.








보본재(報本齋)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323-2번지
○건축연대: 1811년
○건물구조: 보본재(와가 목조 정면 3칸, 측면1칸), 대문채(3칸)
○배향 인물: 이의구 선생의 묘재이다. 선생의 자는 의숙(宜淑)이고 이육 선생의 6세손이다. 1667년(현종 7년)에 태어나 1740년(영조 16년)에 향년 74세로 졸하였다. 문학과 덕행이 뛰어나 향인의 사표였다.
○현황: ‘보본재 기’가 있다.


추원재(追遠齋)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732-2
○건축연대:1910년
○건물구조(추원재 목조와가 정면3칸, 측면 1칸), 대문(1칸)
○관리 문중: 장연 노씨
○배향 인물: 노명신(盧命臣)의 재사이다. 선생의 자는 충노(忠老)이고 광헌공 노단(盧旦)의 7세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대파한 공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일등공신으로 책록되었다. 노단 선생은 초위는 조이고 시조 노수의 7세손으로 고려 문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어사를 시작으로 상서 도성의 우복사 좌복사에 이르렀으며 운문면 상당 신원리에 이거 정착하였다. 졸후 나라에서 광헌의 시호를 내리고 운문면 40리 토지를 하사하였다.



학서재(鶴棲齋)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1089번지
○건축연대: 1917년
○건물 구조: 학서재(목조와가 정면 3칸, 측면1칸), 하당(3칸), 대문(1칸)
○관리문중: 밀성 손씨
○배향 인물: 손기서(孫起緖) 선생의 묘각이다. 선생의 자는 현중(顯仲)이며 호는 학서이다. 문하 평리 손계경 선생의 8세손으로 1542년(중종 37년)에 태어나 1570년(선조3년)에 생원시 급제 하였다.
○현황: 대곡 3동(송정마을) 앞에 있으며 문적은 임진왜란 병화에 모두 소실되었다. ‘학서재기’가 마루 벽에 걸려 있다. 현재 송정마을에는 밀성 손씨들이 10여 호가 조상을 기리며 살고 있다.
문이 잠겨 있어 밖에서 찍었기에 현판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웠다.


대곡 교회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송정길 4
○시설 현황: 본당 및 화장실
○소속: 장로교

대곡리(大谷里)
청도 마을지 준비자료(집필자 박윤제)에는 대곡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대곡리는 동, 서, 북쪽의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골짜기가 깊으며,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넓어지면서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대곡리의 골짜기가 매우 크고 넓기 때문에 큰 골짜기를 뜻하는 ‘한실’로 불러왔다.
마을 북쪽의 상원산에서 발원한 대곡천과 신촌리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합쳐져 자천(紫川)을 이룬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대곡리는 중리(中里)에서 송정(松亭)에 이르는 들판은 경지 정리가 말끔하게 되어 있고, 골짜기 사이에는 군데군데 옛 모습 그대로 계단식 논들이 남아있다.
1) 대곡리(大谷里)
대곡리는 마을이 위치한 지형을 따라 지은 이름으로 1911년 청도군읍면내 동리 구역과 명칭을 변경하면서 차북면의 상대동(上大洞)과 하대동(下大洞)을 합쳐 대곡동이 되었다.
대곡리에는 한실, 가실, 송정, 중리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2) 한실(큰골, 상대곡)
대곡리에서 깊숙한 안쪽에 취락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상대곡동(上大谷洞)으로 불렀다. 큰골의 계천(溪川)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로 큰골 마을이라는 뜻에서 ‘한실’로 부르고 한자로 ‘대곡(大谷)’으로 표기하였다.
3) 가곡(柯谷), 가실(可室)
대곡리 입구에 취락한 마을로 예부터 가죽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가죽나무골’을 뜻하는‘가곡(柯谷)’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한 마을이 자리한 곳이 대곡리에서 바깥쪽인 ‘가-갓’에 있기 때문에 ‘갓실’로 부르고 한자로 ‘가곡(柯谷), 가실(可室)로 표기하였다.
한편 마을 뒤편에 있는 작은 바위에 ‘의롭게 살자’는 뜻의 집의대(執義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집의골’로 불러오다가 점차 음이 변하여 ‘지부골’로 부른다고 한다.
4) 송정(松亭), 수정(水亭)
가곡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하대동(下大洞)으로 불러왔다. 마을 주변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정자를 이루고 있어 송정(松亭)으로 부르며, 주변에 농사짓기에 풍부한 물이 있어 수정(水亭)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5) 중리
중리는 하대동(下大洞)인 ‘송정(松亭)’과 상대동(上大洞)인 ‘한실(大谷)’ 사이에 있는 마을로 주변에 농경지가 넓게 분포한다. 대곡리 자연 마을 가운데 가장 늦게 취락한 마을이다.
한편 청도군지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성현산과 팔조현 산봉우리가 서로 다투듯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내닫고 있는 곳으로 동봉은 칠곡, 양원, 둔직리(屯直里)로 끝맺음한 곳에 이서국의 왕성을 있게 했고, 서봉은 팔조리를 등너머로 하여 칠곡으로 이어졌다. 이 깊은 골 안 좌우 전후로 상원산, 곡내산이 용각산의 기운과 자양산의 정기를 모아 남쪽으로 띠를 두른 가운데 자(紫), 오(鰲)의 밝고 수려한 골 안에 많게 적게 취락이 형성되어 있는 마을로 그 정기를 대곡천이 안고 있다.
상대곡(上大谷)
철성인 이인구 공이 1650년경에 정착하였다. 골 안에서는 가장 깊숙한 안 쪽에 자리 잡은 깊은 골이다. 경산(京山) 이씨도 뒤따라 입촌하여 단단한 마을의 터를 다졌고 본 면에서는 가장 오지 마을이다. 이 마을을 한실이라 한 것은 큰골이라는 뜻이며 아늑하고 고요한 산촌이다.
가실(可室), 가곡(柯谷), 집의곡(執義谷)
이 마을에는 수원인 백 의 공이 1600년 말 경에 정착하였고 또 밀성 박씨도 정주하게 되었다. 가죽 나무가 많아서 가곡, 가실(可室)이라 하며 바위에 집의(執義)라고 새겨져 있어 의롭게 살자는 뜻에서 집의곡(執義谷)또는 음이 변하여 지부골이라고도 부른다.
송정(松亭), 수정(水亭)
1650년경에 밀양인 손기서 공이 택리하였다. 그리고 경주 김씨, 밀성 박씨도 뒤이어 입촌하였다. 동네를 열 당시는 주위에 송림이 우거지고 아담한 정자가 있어서 송정이라 불렀으며 또 이 마을에는 물이 풍부하다고 수정이라는 별명도 있다. 이곳은 산골의 정취가 풍기는 곳이다.
중리(中里)
밀성인 박 순 공이 1779년에 터를 잡았다. 1리인 상대곡과 같은 동리로 중산봉을 중심하여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본 면의 다른 동리와 같이 유풍(儒風)이 생활 전면에 깊게 베어 있어 제반의 범절에 예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교우(交友)에 신의(信義)를 바탕으로 하는 동민들은 선현의 유풍을 따라 수신(修身)을 잘 할 뿐 아니라 상제(裳祭)에 보수적이긴 하나 사라져 가는 풍습을 버리지 않고 잘 답습하고 있다.
*참고자료
ㅇ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ㅇ청도마을지 자료)
ㅇ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ㅇ도주지(1958, 김석봉 외)
ㅇ청도향교지(2018, 청도향교)
ㅇ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면담
ㅇ최성곤(대곡마을 주민)
ㅇ밀성박씨, 밀성손씨 후손 및 대곡리 주민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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