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의 충신과 인간 문화재가 배출된 차산리 / 행전 박영환
2016년 12월 23일(금), 오졸재 박한주 선생의 절의와 영원한 상쇠 김오동님의 상쇠의 흥겨운 가락이 메아리를 만드는 풍각면 차산마을을 찾았다.
신라 때는 상화촌이었으며 1914년 이동면이 풍각면으로 바뀌면서 상차, 중차, 하차마을을 합하여 차산리라 하였다고 한다.
천왕산에서 발원하여 월봉리를 거쳐 내려오는 물과 덕양리에서 내려오는 물이 만나면서 충적 평야를 만드는 곳에 자리 잡은 차산리는 야트막한 산을 뒤로 하여 동남쪽으로 앉은 마을이다.

차산서원에서 내려다본 차산마을


차산서원(車山書院)
◯ 관리문중: 밀성(密城) 박씨 행산공파(杏山公派)
◯ 소재지: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64번지
◯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목조와가 정면 4칸, 측면 1칸의 강당(온돌방 3칸, 대청 1칸)이 있다,
‘차산 서원 강당기’, ‘차산서원삼선생사기(車山書院三先生祠記)’가 벽에 걸려있다.
사당인 맞배지붕 3칸 규모의 숭인사(崇仁祠)가 별도의 영역인 토석담장 속에 있는데 수정문(守晶門)이 현액된 내삼문을 통해 출입하게 하였다.
◯ 배향 인물: 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와 망헌(忘軒) 이주(李冑),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을 향사하고 있다.
1)오졸재 박한주(1459 ~1504)
본관(本貫)은 밀성(密城)이며 자(字)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재(迃拙齋)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행산(杏山) 박세균(朴世均)이며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박돈인(朴敦仁)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16년, 乙巳)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 참군·사헌부 감찰을 거쳐 1491년 사간원 정언에 제수된 후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1493년(성종 24년) 부모 봉양을 위하여 창녕 현감을 청하여 나가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敎書)로서 포상, 가자(加資)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종부시 주부를 거쳐 1497년(연산군 3)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이때 연산군의 실정(失政)과 무상시로 이어지는 유연을 중지할 것을 극간하자 연산군이 크게 노하였으나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임사홍(任士洪)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일정한 격식 없이 사실만 간단히 적어 올리는 상소]를 올렸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문도로 몰려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1500년(연산군 6년) 전라도 낙안으로 이배되었는데 그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이 때 임소에서 부친상을 당해 몇 번이나 혼절하였다가 소생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5월 15일 참형에 임하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향년 46세였다.
이후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년(중종 12년) 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 등의 계(啓)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 직제학으로 추증되었다. 풍각면 차산리에 김응조가 찬한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명(迃拙齋朴漢柱閭表碑銘)’이 세워져 있으며 밀양 예림 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 서원(德巖書院), 청도의 남강서원(南岡書院) 및 석강서원(石岡書院)에 배향되었다. 『오졸재집』이 있으며 밀양 5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2)망헌 이주(1468∼1504)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 주지(胄之)이며 호는 망헌(忘軒)이다. 좌의정 이원(李原)의 증손이고 현감 이평(李泙)의 아들이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8년(성종 19, 戊申)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정언(正言)으로 있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 갔다가 이어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전에 궐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주로 삼사(三司)에서 활약했는데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직언으로 유명하였다. 성당(盛唐)의 품격을 갖춘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문집에 《망헌집》이 있다.
1506년(중종 원년, 丙寅) 신원, 이조 참의로 추증, 정려에 어필이 하사되었고 다시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원(忠元)이다. 청도군 풍각면 석강서원에도 향사되고 있으며 화양읍 유등리 원산재에서 매년 4월, 석채례(釋菜禮)를 봉행하고 있다.
3) 탁영 김일손(1464~1498)
자(字)는 계운(季雲)이고, 호(號)는 탁영(濯纓)이며, 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 부(父)는 이조참판 남계(南溪) 맹(孟)이고, 조부는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이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고제(高弟)이다.
17세까지는 조부에게 <소학>, <통감강목>, 사서 등을 배웠으며, 뒤에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도의교우(道義交友)하였다.
23세 때 문과(文科)와 전시(殿試) 등에 각각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고 청환직(淸宦織)을 두루 거쳐 충청도사, 이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27세 때 명나라 질정관(質正官)으로, 28세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두 번이나 다녀오면서 중국의 명사 정유(程愈), 주전(周銓) 등과 교결(交結)하고, 정유(程愈)로부터 소학집설(小學集說)을 구득(求得) 입국하여 학문발전에 많이 기여하였다.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 연산군 4)때 35세로 참형을 당했다. 생지(生地)인 운계천(雲溪川)이 자계천(紫溪川)으로 변한 것도 충절을 상징하는 표현이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되고 신원복작(伸寃復爵)과 1661년(현종2년, 辛丑)에 자계서원을 사액(賜額)하고, 순조(純祖)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 등을 추증(追贈)하였으며, 시문민공(諡文愍公)을 하사(下賜)하였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유품은 1490년(성종21)경에 직접 제작한 6현금(6弦琴)이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거문고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957호로 지정된 “탁영금(濯纓琴)” 일명 문비금(門扉琴)이 현재 대구국립박물관에 기탁 보관하고 있고, 호당(湖當)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1492년 성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매화벼루”는 청도박물관 개관 시에 기탁 보관하고 있으며, 또 선생 교지, 선생 시호교지, 정부인 교지, 자계서원 둔전답경자개량등록(屯田沓庚子改良謄錄), 자계서원의 사액시 치제(致祭) 홀기(笏記)는 유형문화재 제27호이며, ‘탁영선생문집목판’, ‘탁영집목판’등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보관 되어 있다.
◯ 연혁: 차산서원은 1958년 유림과 후손의 공의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매년 3월과 9월에 오졸재, 망헌, 탁영 세 분의 고고한 절의를 기리며 향사하고 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중수했다.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 및 비각
○소재지: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178-1
○기리는 인물: 이 비석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서 두번의 사화(무오(戊午)·갑자사화(甲子士禍))에 희생된 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 1459 ~1504)의 여표비(閭表碑)이다.
박한주의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며 (字)는 천지(天支)이고 호(號)는 오졸재(迃拙齋)이다 . 청도군(淸道郡) 풍각면(豊角面) 차산리(車山里)에서 출생하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의 조부인 안국암 박대성이 밀양에서 이곳으로 이거했으며 아버지는 돈인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헌납(獻納)·예천군수(醴泉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22년 부모님 봉양을 위해 창녕 현감을 자청했으며 부임 이후로 민과 관리를 대함에 조법(調法)이 있었고 주변에 학문을 일으키니 민속이 달라졌다고 한다. 성종 때는 치적이 제일이라 하여 포상을 내렸고 연산군(燕山君) 3년에 사간원 헌납 재임 중 연산군의 실정(失政)과 무상시로 이어지는 유연을 중지할 것을 극간하자 연산군은 노하여 사간원 직원들에게 식물과 녹피를 하사하면서 박 모(某)는 주지말라는 교지를 내렸다. 선생은 그럼에도 피하지 아니하고 노사신, 임사홍의 간사하고 배임한 죄를 탄핵하고 연산군의 마음이 날로 황폐해지자 외직을 청해 평해군수를 거쳐 예천군수로 부임했다. 무오사화에 김종직 선생의 문도로 몰려 선생과 김굉필 등 문도들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나무라고 비방하였다 하여 선생은 왕과 훈구파에게 미움을 받아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연산군 6년 낙안으로 이배되었는데 그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최산두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유희춘은 이를 보고 호남 학문의 연원이 오졸재에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승하고 성종묘에 배사함을 반대한 사람, 폐비 윤씨 폐사에 찬동한 사람, 연산군에 직언 , 직간(直諫)한 사람을 극형에 처했다. 선생도 연루되어 5월 15일 참형에 임하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향년 46세였다. 이후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조광조 등의 주청으로 통정대부 도승지(都承旨) 겸 예문관에 추증(追贈)되었다. 밀양 예림서원, 함안(咸安)의 덕암서원(德岩書院), 청도 각북면 남산리 남강서원(南岡書院), 풍각 차산서원, 흑석의 석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오졸재집(迂拙齋集)』이 있으며 밀양 5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비각 구조: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풍각면 차산리 전 남부초등학교(南部初等學校) 뒤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내부는 모두 통칸으로 처리되어 있다. 내부 바닥은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으며 중앙에 비가 위치하고 있다. 벽은 원래 개방되어 있었던 것 같으나 현재는 시멘트로 벽체를 하였으며, 정면 어간(御間)에는 철창문을 설치하였다. 시멘트로 마감한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에는 배흘림을 두었다. 주두상(柱頭上)에는 이익공(二翼工)을 두었다. 인방(引枋)과 장혀(장설, 長舌) 사이에는 원형(圓形)의 화반(花盤)을 끼웠으며 도리는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가구(架構)는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이 마룻대를 받는 간결한 구조의 오량가(五樑架)인데, 양측면에서 충량(衝樑)을 대량(大樑) 위에 걸었으며 충량 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여표비: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신(碑身)·귀부·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체 높이는 308cm이며 비신의 높이가 196cm이다. 귀부는 30cm이고 이수가 82cm이다. 이 비는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100여년이나 지난 1629년(인조 7)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대사간(大司諫)이었던 김응조(金應祖, 1587~1667)가 짓고 이관징(李觀徵)이 썼다.




다음은 2020년 1월 9일(금) 다시 찾은 모습입니다. 차산서원은 2019년도에 새로 중수했습니다.

<2019년도에 새로 중수한 차산서원>

<사당 숭인사>

<밖에서 바라본 사당>

<밖에서 바라본 차산서원>

<여표비각>

<여표비>



차산농악 전수관
○소재지: 청도군 풍각면 월봉길 194
○설립 연대: 1993년 8월
○건물 구조: 대지 2,056㎡, 건평 126㎡, 지상 1층 2동 건립.
○차산 농악 개요:
차산농악이란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에서 전승되는 풍물놀이를 말한다. 청도 차산 농악은 청도군 풍각면의 여러 마을 사이에 벌어진 천왕기(天王旗) 싸움에서 발전한 농악 놀이 중 하나이다. 상쇠 김오동을 통해 전수되면서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차산 농악 전수관과 차산 농악 보존회를 통해 전수 및 관리되고 있다.
천왕기는 청도군 풍각면 일원을 중심으로 전해졌고, 마을에서 소유하고 있는 기(旗)이다. 원래는 마을 당제(堂祭)를 올리기 전 ‘신 내림’을 위해 사용되던 깃발로, 놀이에 사용되게 되었다.일반적으로 농악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졌던 놀이이지만 상쇠의 계보에 따라서 전수 또는 중단의 길을 겪게 된다. 차산 농악의 경우 상쇠 김오동을 통해 전수되었으며, 이후 전수 보유자를 양성했지만 작고하면서 중단 위기에 있었다.하지만 1970년대 후반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 나가면서 영남 대학교 민속 보존 연구회와 인연을 맺고 10명의 상쇠 후보자를 배출하였으며, 1984년에는 풍각면의 풍각 농고 농악반을 만들어 그 계보를 이어 갔다. 이후 차산 농악 보존회가 설립되고, 차산 농악 전수관이 설립되면서 상쇠의 계보를 이어 나가고 있다.
청도 차산 농악에 사용되는 놀이 도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천왕기이다. 차산리의 천왕기는 대한 제국 말 고종 황제 때 만들어진 것이다.천왕기는 깃대와 깃포, 오색 수건, 헝겊 그리고 꿩 털로 구성되어 있다. 깃대는 길이 11m, 둘레 20㎝ 가량 되는 청죽(靑竹)이고, 윗부분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대나무의 마디 수는 38마디인데 각 마디의 길이는 보통 30∼40㎝ 정도이다. 깃폭은 가로 210㎝, 세로 140㎝의 천이다. 오색 수건은 모두 8개가 있으며, 빨강, 파랑, 노랑 등 주로 원색으로 만들어진 6개의 헝겊으로 구성되어 있다. 꿩 털은 암컷과 수컷의 구별 없이 깃털을 뽑아 사용하고, 기의 끝 부분에 단다.청도 차산 농악은 상쇠들이 사용하는 꽹과리와 북, 징, 장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는 대부분 마을의 가장 넓은 장소에서 행해졌지만 차산 농악 전수관 건립 이후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청도 차산 농악의 기본적인 편성은 천왕기[서낭기], 나팔재비, 고동재비, 상쇠 1, 중쇠 1, 설징 1, 종징 1, 끝징 2, 설북 1, 종북 1∼4, 끝북 2, 설장구 2, 종장구 1∼4, 끝장구, 설법고 1, 종법고 1∼4, 끝법고, 색시, 양반, 포수 등으로 되어 있다.연행 순서는 굿거리굿[춤굿]에서 시작하여 부정굿[차츰걸음], 연풍기굿[호호딱딱], 자진모리굿[막조우기], 물레굿[미엉잦기], 진굿[2석, 3석, 4석], 농사굿[논서르기, 씨뿌리기], 모내기굿[줄서기], 김매기굿[논매기], 타작굿[밭들기], 조름쇠[굿, 판굿], 오방굿[뚤뚤말기]으로 마무리 된다.놀이의 편성은 약 50여 명으로 구성되는데, 각 25명으로 구성된 두 농악대가 먼저 세납, 나팔, 천왕기, 농기를 세우고 삼 열 종대로 나간다. 이후 자진모리장단으로 바꿔 상쇠가 지휘하면 관중에게 인사를 하고, 이때 천왕기와 농기 그리고 세납과 나팔 등이 전면에 일렬로 서고 나머지는 상쇠의 지휘를 받게 된다.먼저 굿거리굿은 아직 흥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양반이 너울너울 느리게 춤을 추는 것으로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점잖게 춤을 추는 춤굿이다. 이때 상쇠를 중심으로 한 4명의 쇠는 원의 중앙에 우물 정(井)자로 서서 대원을 지휘하게 된다.이어서 부정굿은 세마치장단으로 이루어진다. 상쇠가 쇠를 꺾게 되면 두 개의 동심원을 만들게 되는데, 이는 굿거리굿에서 쫓아내지 못한 잡귀를 마저 쫓아내기 위함이다.연풍기굿 대열은 부정굿과 같이 두 개의 동심원이지만 부정굿에서 잡신을 쫓아냈기 때문에 기분 좋게 훨훨 뛰면서 상쇠를 따라 돈다.자진모리굿은 아주 좋은 기분으로 쇠를 치는 과정으로 하나의 원을 만들어 농악의 흥을 돋우게 된다.물레굿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실을 뽑는 물레를 상징하는 것이다. 상쇠가 쇠를 꺾으면 2명이 한 조가 되어 돌고, 이어 3명이 한 조가 되어 돌고, 4명이 한 조가 되어 돈다.진굿은 옷을 해 입고 일하러 갈 때 열을 지어 가는 과정을 형용한 것이다. 농사굿은 농사짓는 형상을 하는 것으로 주로 상쇠의 지휘를 받아 상모가 하게 된다. 모내기굿은 차산 농악에 삽입된 것이다. 김매기굿과 타작굿을 통해 여러 가지 농사에 대한 형용은 끝을 맺고, 판굿과 오방굿 등이 행해진다.
○ 활동: 1)김오동에게 차산 농악 쇠를 전수 받은 김태훈, 조일환, 백진환, 박준호, 변은경 등이 전수
2)정기공연 행사, 각종 대회 참가
3)정월 대보름 행사, 소싸움 축제 식전행사, 청도반시축제
4)대학생 동, 하계 연수 및 일반 연수






풍산재(豊山齋)
○소재지: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175-1
○건축연대: 1881년
○건물구조: 풍산재(목조와가 정면 5칸, 측면 1칸), 대문(앙지문) 3칸, 식당 및 화장실
○관리문중: 밀성 박씨
○배향 인물: 숭정대부 증 이조판서공 박신보(朴臣輔)의 재사이다. 중종조 보문각 태학사 행산 박세균의 손자이고 오졸재 박한주의 조부이다. 숭정대부 이조참판을 지냈다.
○변천: 1881년(고종 18년)에 건립하여 1938년에 이건하였으며 1999년도에 새로 이건하였다.
○현황: 차산리 오졸재 박한주 선생의 여표비각 서편에 있으며 재사 뒤에는 박신보재단(朴臣輔祭壇), ‘삼공 제단’이 세워져 있다. ‘중건 표성비’








풍산재 앞의 느티나무


차산 교회
○소재지: 풍각면 월봉길 146
○설립연대: 1959
○주요건물: 차산 예배당(2층), 교육관 및 식당, 사택, 구 교회
○현황: 차산리 큰 길가에 있으며 대지 561㎡, 신도 50명, 담임 백광흠 목사


영세재(永世齋)
○소재지: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90-1
○건축연대:1950년
○건물구조: 영세재(목조와가 정면 3칸, 측면 1칸), 대문(3칸)
○배향 인물: 정세량(鄭世良)의 묘재이다. 초휘는 담(淡)이며 설학 정재구의 현손으로 칠곡에서 청도로 들어와 차산에 은거하며 조상의 유훈을 이어가고 후손들의 계도에 힘쓰며 효우하고 어질고 착했는데 판관 훈련원 첨정을 지냈다.
○현황: 마을 뒤편 언덕에 있으며 재실 앞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풍남재(豊南齋)
○소재지: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건축연대: 1948년
○풍남재(목조와가 정면3칸, 측면2칸), 대문
○관리문중: 경주 최씨
○설립목적: 경주 최씨 문중의 종사이다. 마을 중앙에 있으며 경주 최씨 후손들이 모여 조상의 유덕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여름이면 자녀들이 조상들의 생활상을 체험하고 충효교실로 이용된다. 정원수들이 많다.
*참고자료
ㅇ청도군지(1991, 청도군)
ㅇ청도문화(청도문화원)
ㅇ디지털 청도문화대전
ㅇ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ㅇ역주 오산지(2003, 청도문화원)
*면담
ㅇ밀성박씨 후손 및 차산교회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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