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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선비의 고고한 맥박이 숨쉬는 신촌

선비의 고고한 맥박이 숨쉬는  신촌 

 

 

                                                          행전 박영환

 

  2016년 12월 12일(월),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를 찾았다.

  상원산에서 흘러온 지맥이 이어지는 자양산(紫陽山) 아래 옹기종기 밀성 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자양산이란 이름은 화은(華隱박계은(朴繼恩)이 청도읍 한재 지역 평양리에서 이곳에 택거하여 올때 송나라의 유학자 주자(주희)를 흠모하여 마을 이름을 신안’(新安)으로 고치고 뒷산을 자양산’(紫陽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화은의 후손들은 선대의 뜻을 받들어 계속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날 두촌공의 후손인 박희준(82세, 전 신라 남해왕 참봉)님이 서원이며 재실, 동리 곳곳을 직접 안내하며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셔서 매우 고마웠다.

  

 

 

먼저 들린 곳이 훈령서원입니다.

 

 

훈령서원

 

 

훈령서원 강당

 

 

훈령서원(薰嶺書院)

 

 관리문중 : 밀성(密城)박씨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소재지 :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639-1번지

 

 건물구조 : 3칸 규모의 솟을 대문(출입문, 1, 고방1)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면 7칸의 강당(온돌방4, 대청3, 중당협실형)이 있다. 훈령서원 상량문(薰嶺書院 上樑文)’ ‘훈령재기 등이 대청에 걸려있다. 우측에는 훈령서당 4칸이 있으며 강당 뒤에 사당인 맞배지붕 숭절사(崇節祠) 정면3칸이 별도의 토석담장으로 영역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에 문을 세워 사당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마당에는 향나무 등으로 조경이 잘되어 있으며 서원주변에 토석담장으로 둘렀다. 중문으로 통하는 별도의 영역에 식당 및 관리실을 구비하였다.

 

 배향인물 : 입향 중시조인 두촌 (杜村)과 학덕으로 숭앙되었던 화은(華隱), 호재(湖齋), 농암(聾巖) 등 네 분을 숭절사에 배향하여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춘·추 향사를 지내고 있다.

 

1)두촌(杜村) 박양무(朴揚茂)

본관은 밀성(密城)이며 자는 약생(若生) 호는 두촌(杜村)이다. 고려 공민왕 때 선무랑(宣務郞)을 거쳐 김천(金泉) 도독우(道督郵)를 지냈다. 포은 정몽주의 문에서 포은과 종유(從遊)하며 고려의 운명이 다함을 슬퍼하여 벼슬을 버리고 만수산 골짜기로 입촌하였다. 뜻을 함께한 여러 현인들과 은둔하다가 낙향하여 화양 대성산에 은거하여 성학(聖學)을 강론하고 연마하며 후인을 양성하였다. 정헌(正軒) 이종상(李鍾祥)의 봉안문에 공의 의열(義烈)은 야은(冶隱) 경곡(耕谷)과 짝이 된다고 하였다.

 

2)화은(華隱) 박계은(朴繼隱, 14361520)

두촌 박양무의 증손이며 호는 화은(華隱)이다. 어려서부터 남보다 뛰어나서 하나의 사물을 들면 체()와 용()을 알았으며 어떤 책을 읽으면 그 의리(義理)를 분석하였다. 성리학을 평생토록 공부의 주된 요지로 삼았다.

1468(세조14, 戊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서당을 열어 글을 가르치니 문학과 덕행이 알려지면서 많은 선비들이 찾아왔다. 그는 청도읍 평양에서 신안으로 옮겨 새 터전을 마련했는데 고계(高溪) 이휘영(李彙寧)의 당향 조문에 경학은 가문을 이었고 문아(文雅)한 풍조는 나라에 떨쳤네. 신안에 고려(古廬)를 정하시니 남쪽의 선비들이 선생의 인격을 표준으로 삼았네 라고 하였다.

 

 

3)호재(湖齋) 박맹문(朴孟文)

화은 박계은의 아들이며 호는 호재(湖齋)이다. 13세에 대학을 읽었는데 직제학(直提學) 최연(崔淵)이 일찍이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 중에 박 공 같은 이는 매우 드물다.”고 하였다. 성종 때 도천(道薦)으로 순천(順天) 교수(敎授)에 제수되었는데 사림에서 본보기로 삼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상향 축문에 학문은 두루 소통하였고 덕행은 돈독하여 이륜(彛倫)을 밝혔네. 국왕이 교수에 임명하니 아름다운 은혜가 후인에 미치네라고 하였다.

 

4)농암(聾巖) 박란(朴鸞, 14941557)

두촌 박양무(杜村 朴揚茂) 5세손이고 호재 박맹문(湖齋 朴孟文)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농암(聾巖)이다. 1534(중종29, 甲午) 사마시에 합격하여 국상(國庠)에 진출하였으나 그 당시 당론(黨論)으로 분규가 있을 것을 알고 벼슬길을 포기하고 임천(林泉)에 돌아와서 이퇴계(李退溪) 조남명(曺南冥) 양 선생 문에 종유(從遊)하여 자익(資益)이 많았다.

1541(중종36, 辛丑) 청도의 향로당(鄕老堂)을 중수할 때 향로당기문(鄕老堂記文)을 지었으며, 향헌(鄕憲) 10조와 향규(鄕規) 5조를 를 정하여 향청을 통한 향촌 지자체 확립과 세속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도 향로당기문, 향헌, 향규가 목판(木板)에 양각해서(陽刻楷書) 현판(懸板)으로 청도향교(淸道鄕校) 지인재에 걸려있다. 또한 이서면 칠곡리 오수곡 정사와 농암대(聾巖臺) 거닐며 문학과 도행에 모범을 보였다.

 

 연혁 : 1541(중종 36, 辛丑) 훈령산 아래에 훈령서당을 창건했는데 영남의 여러 유림들이 즐겨 글방을 찾아 문()과 도의를 강론하고 후학을 육성하니 지역을 넘어 기호지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림들이 찾아왔으나 1592(선조25) 임진왜란 병화에 서당이 불탔다. 1623(인조 원년 癸亥)에 중창하여 훈령서당을 훈령재로 바꾸고 1844(헌종 10, 甲辰) 1908(순종 2, 戊申)의 중수를 거쳐 1971(辛亥)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1998(戊寅)에 향내 유림이 훈령재를 훈령서원으로 승호 개편하였다.  1845(헌종 11, 乙巳) 숭절사가 창건되었으나 1868(고종5, 戊辰)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던 숭절사를 1986(丙寅)에 다시 복원하였다.    

                

 

 

 

사당인 숭절사

 

 

명성재

 

 

 

 

 

훈령서당

 

안내를 해주신 박희준 참봉님

 

 

2018년 10월 10일(수), 훈령서원 강당에서 청도문화원 경북 선비아카데미가 열렸다. 이날 주제는 '밀성박씨 밀직부사공파 문중의 학맥과 인물이었다.' 이날 발표는 박희범(두촌공 후손, 전 중앙 공무원, 전 청도향교 수석장의)님이 맡았다. 

 

이날 선비아카데비 회원 및 두촌공 후손들이 많이 참석했다.

 

 

다음은 신안재입니다.

 

 

 

신안재(新安齋)

 

관리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5번지

 

건물구조: 평대문 3(출입문 및 고방2)을 들어서면 마당에 큰 회나무가 있고 그 뒤에 팔작지붕 목조와가 5(3, 마루2, 중당협실형)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대청앞 전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新安齋편액이 있고 대청에는 신안재 기 중수 신안재 기가 걸려 있다. 좌측에 4(2, 마루1, 부엌1)의 하당이 있고 별도의 공간에 화장실이 있다. 마당에는 자갈을 깔았고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향 인물: 성균관 생원 박중문(朴仲文), 군수 일청재 박호(朴虎), 천참봉 모효재 박지현(朴之賢), 천참봉 경양재 박태고(朴太古), 천참봉 죽옹 박중채(朴重菜) 의 추모지소이다.

 

연혁: 지산 서원이 훼철되고 난 뒤 1872년에 세웠으며 1950년 중창하여 문중회의 장소와 예절 교육 장소로 사용한다.

같은 공간 우측에 일청재가 있다.

 

 

 

 

 

마당에 있는 회나무 

 

 

다음은 일청재입니다.

 

 

일청재(逸淸齋)

 

관리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413

 

건물구조: 홑처마 목조와가 정면 4(2, 마루2 중당협실형)이며 대청마루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逸淸齋 편액이 있으며 逸淸齋記가 걸려있다.

 

배향 인물: 일청재 박호(朴虎)

본관은 밀성이며 두촌 박양무의 5세손이며 강재공 박중문의 아들로 1512년 태어났다. 1546(명종1) 식년시 대과에 급제하여 평해 군수 직을 맡았으며 재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향민들이 놋숟가락을 모아 주석으로 선정비를 세워 그 덕을 숭앙하였다. 68세에 작고했을 때 이 소식을 들은 평해 군민들이 통곡하며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와 봉축을 모았는데 그 크기가 왕능에 버금갈 정도이다.

특히 일청재는 청도 반시를 시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평해 군수로 있을 때 친구가 명나라 사신을 가게 되자 평소에 효심이 지극한 그는 홍시를 좋아하는 부모님께 더 좋은 감을 드리기 위해 중국 감의 접수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마침내 친구가 잊지 않고 접수를 가져오자 무 속을 파서 접수가 마르지 않도록 그 속에 넣어 향리인 신안에 가져와 재래종 감나무에 접을 붙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감나무에서 열린 감은 씨가 없었고 수분이 많으면서도 아주 달았다. 이는 일청재 효심에 하늘이 감동하여 부모님이 홍시를 드실 때 목에 걸리지 않도록 씨가 없어진 것이라고들 한다. 아무튼 이 씨가 없는 감은 효자감이라 불리기도 했고 또 새월 마을에서 났으니 세칭 새월감이라 하다가 마침내 입소문을 타고 군내로 퍼져나가면서 청도 반시가 되었다. 이 씨가 없고 둥글납작하여 쟁반 같은 모양을 한 이 청도반시는 청도 지역에서는 씨가 없지만 다른 지역에서 접을 붙이면 씨가 생기게 되는 특이한 감이다. 아무튼 청도가 자랑하는 이 최고의 특산품은 청도 군민의 큰 소득원으로 그야말로 효자감이 되었다.

지산 서원에 향사하고 있다.

 

연혁: 1942년에 지었으며 그 뒤 몇 차례 중수했다. 신안재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며 담장 앞에 청도반시 시배 안내판이 있다.  

 

 

 

 

 

<청도반시 시조목>

 

 

 

'2011 청도반시 축제'에 소개된 내용

 

 

시조목 바로 앞에 있는 고가  - 옛날에 이 동리에서 제일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다음은 지산서원 편입니다.

 

 

 

 

 

 

 

지산서원(芝山書院)

 

관리문중 : 밀성(密城)박씨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소재지 :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420번지

 

건물구조 : 3(출입문, 1, 고방)솟을 삼문을 들어서면 목조 팔작지붕 와가 4칸 강당이 있다. 강당은 두 개의 방과 마루로 되어 있는데 동쪽 방은 헌관실(獻官室) 서쪽 방은 유사실(有司室)로 사용하고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좌측마루는 난간을 설치하여 누각 형을 취했다. 강당 우측에 맞배지붕 상청사(尙淸祠, 정면 3)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에 평 삼문을 세워 사당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배향인물 : 지산서원은 향내 유림이 발의하여 일청재(逸淸齋), 모호재(慕孝齋), 경양재(景陽齋), 죽옹(竹翁) 4위의 위패(位牌)를 상청사에 봉안 배향하고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춘·추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일청재 박호(逸淸齋 朴虎, 15121579)

본관은 밀성(密城)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박양언(朴良彦)의 후예이고 박양무(朴揚茂) 5세손이다. 1546(명종 원년, 丙午)에 알성급제하여 이조좌랑을 거쳐 평해군수에 오르고 재임 수년 동안에 선정을 베풀어 향민들이 놋숟가락을 모아 주석으로 선정비를 세워 그 덕을 숭앙하였다. 1579(선조 12)에 향년 68세로 졸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평해(平海) 군민(郡民)들이 통곡하며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 와서 쌓은 봉분의 크기가 왕릉과 같다. 선정비는 일제 때 전쟁물자와 빈곤으로 쇠붙이를 강제 수집할 때 탈취당하여 없어졌으나 다행히 해방 이후 평해 군민들이 일청재를 추모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평해 향교정문 안 가운데에 큰 돌비를 세웠다.

그는 청도반시를 시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명나라에서 가져온 감의 접수(椄穗)를 고향마을 재래종 감나무에 접을 붙였는데 신기하게도 그 감나무에서 열린 감은 씨가 없었고 수분이 많으면서도 아주 달았다. 이는 그의 효심에 하늘이 감동하여 부모님이 홍시를 드실 때 목에 걸리지 않도록 씨가 없어진 것이라고들 한다. 아무튼 이 씨가 없는 감은 효자감이라 불리기도 했고 또 새월 마을에서 났으니 새월감이라 하다가 마침내 소문을 타고 군내로 번져가면서 청도 반시가 되었다. 이 청도반시는 현재 청도군민의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2)모효재(慕孝齋) 박지현(朴之賢, 16341681)

일청재 박호의 현손이고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문인이다. ()는 자겸(子兼)이고 호는 모효재(慕孝齋)이다.

숙종조에 효행 문학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에 올랐다. 우암이 그의 효행을 가상(嘉賞)하여 모효(慕孝)란 호를 주었으며 그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자겸(子兼)은 우리 문의 효도한 선비로 유림의 표치(標幟)라 하였다.

 

3)경양재(景陽齋) 박태고(朴太古, 16561724)

모효재 박지현(慕孝齋 朴之賢)의 아들로 호는 경양재(景陽齋)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75(숙종 원년, 乙卯)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702(숙종28, 壬午)에 왕명으로 문학재덕(文學才德)이 높은 선비를 천거할 때 감사 일휴재 이숙(逸休齋 李䎘)이 천거하여 준원전 참봉(濬源殿 叅奉)이 되고 이듬해에 장녕전 참봉(長寧殿 叅奉)을 지냈으며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봉안(奉安)하고자 임금에 상소(上疏)하여 그 비답으로 사계 김장생이 문묘에 종향(從享)케 되었다.

 

4)죽옹(竹翁) 박중채(朴重采, 16791751)

경양재 박태고(景陽齋 朴太古)의 아들이며 호는 죽옹(竹翁)이다. 일찍이 학문을 즐겨 자양서당(紫陽書堂)에서 수학하고 연구하여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깊어 성학요서집(聖學要書輯)을 지었다. 더욱 연구하고 완역(玩繹)하여 철리를 깨닫고 몸소 수행하며 후학(後學)을 교도(敎導)하였다. 1748(영조 24, 戊辰)에 효행덕학(孝行德學)으로 수의어사(繡衣御使)의 추천으로 장릉참봉(莊陵叅奉)에 천거 되어 참봉을 지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을 문묘(文廟)에 봉안(奉安)하고자 임금에 상소(上疏)하여 그 비답으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이 문묘에 종향(從享)케 되었다. 그는 참봉직(叅奉織) 에 있으면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연혁 : 1844(헌종 10, 甲辰)에 지산서원을 창건하였으나 1868(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가 후일 자양산 기슭에서 현재의 자리에 있던 영모재 자리로 옮겼고 1984(甲子) 상청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담장 안에 지산서원묘정비(芝山書院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

 

 

 

다음은 약천재 편입니다.

 

 

 

약천재(藥泉齋)

 

관리 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285-3

 

건물 구조: 철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목조와가(정면 5, 측면 1)의 재사가 있다. 겹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대청 앞 전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藥泉齋 편액을 걸었으며 대청 벽에 약천재 기가 있다. 재사 보호를 위해 전면에 유리창을 달았으며 재사 주변에 방형 담장을 둘렀다.

 

배향 인물: 약천(藥泉) 박지흥(朴之興)

본관은 밀성이며 농암 박란(朴鸞)의 현손이며 수헌(守軒) 희장(希章)의 아들이다.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문학과 덕행으로 누차 향천(鄕薦)에 올랐으나 불사 은거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유고가 있다.

 

연혁: 1983년에 지었으며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했다

 

 

 

동리 탐방을 하는 중 수필가 박완규(경주문인협회 회장, 불국성림원 부원장)님의 집앞을 지나게 되었다. 금방 화안한 웃음으로 뛰어날올 것 같은데...  직장관계로 경주에 있기에 만나지 못해 아쉽다.  

 

다음은 척첨당 편입니다.

 

 

척첨당(陟噡堂)

 

관리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산 99-1

 

건물 구조: 3칸 대문을 들어서면 목조와가 팔작지붕 5(3, 마루2, 중당협실형)재사가 있다. 시멘트 석축 기단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정면 중앙에 재사의 이름인 陟噡堂 편액이 있고 대청마루에 박효수가 쓴 陟噡堂後園烏竹記 척첨당중건 상량문’, 서흥(瑞興) 김희연(金熙淵)과 권용현이 쓴 陟噡堂記가 걸려 있다. 그 옆에 鶴陰亭 景慕堂 그리고 주손인 박철규가 거처하는 집이 있다.

 

배향 인물: 자초(紫樵) 박정곤(朴珽坤)

본관은 밀성이며 호는 자초이고 경양재 박태고의 7세손이다.

 

연혁: 자초의 서식지소(棲息之所)에 그의 아들 박효수(朴孝秀) 1972년에 지었다. ‘척첨당이란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하여 이 당에 올라 멀리 묘소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인암(忍菴) 박효수(朴孝秀)의 효심 넘치는 '척첨당후원오죽기'이다. 인암은 유학자 권용현과 송병관에게 사사하면서 학통을 계승하였다. 2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했고 21권의 문집을 집필했다. 부모 사후 3년간 시묘를 지극히 하여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다. 이러한 학행, 효행과 덕행을 높이 사서 인암 사후 유림에서 유림장을 결정하여 치렀다. 

  청도 여러 문중 재실과 서원을 탐방하는 동안 인암의 기문을 많이 접했는데 당신께서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지은 재실에서 절절한 기문을 보니 또다른 감회가 있다.  

 

학음정 - 마침 주손이 상중이라 전통적인 빈소의 모습이 보인다.

 

재사 바로 아래 주손인 박철규(신라 시조왕 참봉 역임)님이 집을 짓고 살면서 재사를 관리하고 있다. 박참봉이 수집한 귀한 옛 유물들이 보인다. 

 

다음은 화룡마을에 있는 화룡재 편입니다.

 

 

 

화룡재(化龍齋)

 

관리 문중: 밀성 박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668번지(화룡마을 뒤편)

 

건물구조: 3(고방2, 출입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팔작지붕 와가 5(3, 마루2, 중당협실형)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정면에 재사의 이름인 化龍齋 편액이 있으며 대청에 화룡재기 및 화룡재 이건기 등이 걸려있다.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방형 석축담장을 둘렀다. 재사 밖에 3칸 관리사(재궁지기 집)가 있다.

 

배향인물: 눌암(訥岩)박린(朴麟)

두촌 박양무의 5세손이며 호재 박맹문의 아들로서 조선 중종 때 선무랑을 지냈으며 청도 교수관을 맡았다. 학문이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 교남(영남)의 사림에 많은 추앙을 받았다.

 

연혁: 1902년에 지었으며 그 뒤 몇 차례 중수했다

 

 

 

 

 

화룡 마을에 있는  종택.

 

 

다음은 고성 이씨 집성촌인 상당마을의  자남재 편입니다.

 

 

자남재(紫南齋)

 

관리 문중: 철성 이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상당) 1098번지

 

건물 구조: 평대문 3(1,고방1, 출입문)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목조팔작 지붕 와가 정면 4(3, 마루1, 중당협실형)이 있다. 홑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았다. 대청에 재사의 이름인 紫南齋 편액과 김재화가 찬한 자남재기 및 후손 봉기가 쓴 시가 걸려있다. 하당(4)이 있으며 마당에 자갈을 깔았고 방형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 인물: 이광조(李光朝)

본관은 고성이며 모헌공 이육의 5세손이다.

 

연혁: 1935년에 건축했으며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했다.

 

 

다음은 경보재 편입니다.

 

 

 

경보재(景報齋)

 

관리문중: 고성 이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상당) 978번지

 

건물구조: 3칸 규모의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팔작지붕 정면4, 측면 1칸의 재사가 있다. 겹처마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재사 정면에 재사의 이름인 景報齋 편액이 걸려 있으며 대청에 경보재기가 있다. 재사 보호를 위해 정면에 창을 달았다. 우측에 관리사가 있고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블록담장을 둘렀다.

 

배향 인물: 

이삼구(李參耈, 16811742) 선생이다.

공은 통훈대부 안기도찰방(通訓大夫 安奇道察訪)을 지낸 고성이씨 입청도 선조 모헌공 육(慕軒公 育)6세손이다. 5대조는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된 교()이며 고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매전면 동창의 운수정(雲水亭)을 감독하여 건립한 반()이다. 증조는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를 지낸 수()이며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광시(光時)이다.

 

연혁: 1972년에 창건했으며 그 후 함석기와로 번와하고 창호를 바꾸는 등 여러 차례 중수했다

 

 

신촌리(새월) 전경

 

신촌리(新村里)

 

청도마을지 자료(집필자 - 박윤제)에는  신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신촌리는 옛부터 새올새월로 불렀다마을 앞의 넓은 들판은 일찍부터 물이 귀하여 밭농사를 주로 하였으나 그 뒤에 저수지를 만들고 새로 농경지를 만들면서 새로 만든 들이란 뜻에서 새벌로 불렀다. ‘새벌이 새블 – 새울새월로 변화하여 새올새월로 불렀다. ‘새올의 는 ()’으로 에서 변형된 은 마을의 의미로 ()’으로 한자로 표기하여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1) 새올새월(新月), 신안(新安)

새올은 새월로 부르기도 하며한자의 음과 훈을 따서 신월(新月)’로 표기하였다신안(新安)은 고려 말에 현재 청도읍 평양리에서 화은(華隱박계은(朴繼恩공이 이사를 와서 신촌에 자리를 잡았다이후로 신촌은 밀양 박씨들의 집성촌이 되었다이 마을에서는 성리학을 숭상하여 주자(朱子)의 본관인 신안(新安)을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2) 마곡(馬谷마실)

고드레산에서 뻗어내린 산등성이가 큰골 등성이를 지나 점차 낮아지는 골짜기 사이에 마실화룡상당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에 옛날부터 말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마실(馬谷)’으로 부른다고 한다이 마을은 신안에 비해 먼저 취락한 곳으로 먼저를 뜻하는 과 골짜기마을을 뜻하는 을 합쳐 맏실로 부르고 음을 취하여 한자로 마실(馬谷)’로 표기하였다.

 

3) 웃골고사골(古寺谷)

고사곡 마을은 옛날에 마을이 있는 골짜기 부근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또한 다른 마을에 비해 골짜기 깊은 곳인 위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웃골로 불렀다.

 

4) 화룡(化龍)

화룡(化龍마을은 이 마을에 있었던 용샘(龍井)에서 오랫동안 용이 되기를 기다리던 구렁이가 용이 되어 등천(化龍登天)을 하면서 꼬리를 치는 바람에 골()이 생겼다고 한다그 후 이 골짜기에 마을이 자리 잡으면서 화룡등천(化龍登天)한 곳이기 때문에 화룡(化龍)으로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한 이 마을에 자리 잡은 밀양인 박맹문(朴孟文공이 후손들이 융성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화룡(化龍)으로 불렀다고 한다.

 

5) 상당(上塘)

마을 입구에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저수지 위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上塘)으로 불렀다조선시대에 상북면의 면소재지가 있었던 곳이다.

 

 

 마을 앞에서 바라본 신촌리 

 

 

 한편 청도군지에 소개된 내용은 이러하다.

 

팔조령에서 삼성산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자양산을 낳게 하고 훈령산과 아미산이 되어 마을을 굳게 보호하고 있다. 동은 반쯤 열려있고 들판으로 이어져 나갔다. 마을 옆으로 계천이 가늘게 흐르고 자양산의 정기가 마을을 감도는 은은한 분위기는 이 마을의 특성을 잘 읽게 하고 있다.

 

신안(新安)

서기 1500년초에 밀성인 박계은 공이 입촌했다. 박 공의 입촌당시는 세월(新月)이라 불렀는데 새로 개척한 벌()이란 뜻에서 새들-새월로 불렀으며 다시 한자로 신월(新月)로 표기하였다. 후에 박 공이 주위자연을 살펴보니, 중국의 주자가 거주하던 곳에는 자양산(紫陽山)과 백록한천(白鹿寒泉)이 있는데 이 마을에도 똑같은 이름을 가진 곳이 있다하여 중국의 신안(新安)을 따서 이 마을 동명으로 했다 한다. 일설로는 중국 신안에 있는 산 이름 및 지명을 이곳에다 붙여서 그렇게 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실

옛날 한 장군이 말을 타고 산을 넘다 말이 죽어 묻어 주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한자 표기로 마곡(馬谷)이라 한 것이다. 옛날의 큰 고분을 말무덤이라 불렀는데 이는 말무덤이 아니고 고분이다. 이를 고증하는 것으로 이곳에서 산사태로 신라 토기가 출토된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마곡(馬谷)에는 1500년경에 밀성인 박영립 공이 입주했다. 3리에는 성주 여씨가 먼저 입촌했으나 후손이 거주치 않고 철성인 이방변 공이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에 입주했다는 것이다.

 

화룡(化龍)

밀성인 박맹문 공이 16세기초에 입주하였다. 뱀이 용이 되어 승천한 곳이라 한다.

 

상당촌(上塘村)

마을 입구에 지당(池塘)이 있고 이 지당(池塘)위쪽에 마을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마을의 신목 네 그루가 있어 당제를 모신데서 사당(祠堂)이라 불렀는데 음이 변하여 "상당"이 되었다는 설이다. 두 설의 유래가 다 근거가 있어 정립하기가 어렵다.

 

종족 마을로 보수적인 유교풍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고 일상 생활에서도 예를 바탕으로한 대인 관계와 관혼상제의 유풍이 상존하고 있다. 문인이 많이 배출된 영향으로 지금도 고문(漢文)에 능통한 분이 있어 본 군의 대표적 고전 마을이며 주자를 흠모한 나머지 동명까지 바꾸면서 유학을 숭상한 마을이다.

 

  이상 두 편의 내용을 보면 유사한 점도 있지만 많이 다르기도 하다. 흔히 지명을 한자말로 풀어서 그 유래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나 순수 우리말로 되었다가 뒷날 음차된 경우도 상당히 많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마곡'의 경우도 전자의 해석이 옳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ㅇ청도문화(청도문화원)

ㅇ청도 마을지 자료(박윤제, 청도문화원장)

ㅇ청도군지(1991, 청도군)

ㅇ택리지(1978, 최장영 외)

ㅇ국역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ㅇ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ㅇ도주지(1958, 김석봉 편)

 

*면담

ㅇ박희준(전 신라오릉 남해왕 참봉)

ㅇ박철규(전 신라오릉 시조왕 참봉)

ㅇ박희범(전 청도향교 수석장의)

ㅇ고성이씨(상당) 밀성박씨(화룡) 후손  다수

 

*신촌리는 2016년 12월 12일, 찾은 이래 그 뒤에도 몇 차례 더 찾아 사진 및 내용을 보충하였습니다.

*드론으로 촬영한 '신촌리' 그리고 '훈령서원 전경'은 박윤제 청도문화원장이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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