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의 기상이 서린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 행전 박영환

2016년 12월 24일(토)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를 찾았다. 대전리(大田里)란 이름은 우리말 '한밭'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한밭이란 글자 그대로 골이 깊고 길며 들이 넓다는 뜻이다.
홍두깨산의 동쪽 산자락에 기대어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칠엽리에서 동서로 뻗어온 산등성이가 서쪽으로는 연화봉(蓮花峰), 동쪽으로는 필봉(筆峰)을 이루어 동·서·북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봉황의 기상이 서린 곳이다.
크게 두 마을로 나누는데 북쪽은 상대전(웃한밭), 남쪽은 하대전(아래한밭)이라 부른다. 또 '강당'과 '오수정'이란 작은 부락도 있다.
강당(講堂)은 조선시대에 봉동정사(鳳洞精舍)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대전초등학교가 이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학생수의 감소로 폐교되었다. 오수정(五樹亭)은 상대전 북쪽에 위치하는데 창녕에서 이거해온 밀성 박씨가 거주하면서 5그루의 괴화수(홰나무)를 심은 것에서 유래했다. 또 중천골이 있는데 신라가 가야와 대치하고 있을 때 승려군 천명이 상주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그곳에 골프장이 들어섰다.

대전리는 의흥 예씨 시조인 예낙전(芮樂全)의 11세손이자 예승석의 현손인 어모 장군(禦侮將軍) 예극양이 대전리에 정착하여 산 이후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예승석은 조선 초기 인물로 평안도·강원도·전라도 관찰사, 한성 우윤, 대사간 등을 지낸 인물이다. 문장이 뛰어나 정인지, 신숙주와 함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등을 편찬하였다.
예극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3품 어모 장군을 지냈다.



봉강재(鳳岡齋)
하대전 마을 안쪽 563번지에 있으며 건축 연대가 1936년이다.
의흥인 예례충(芮禮忠)의 묘재(墓齋)인데 그는 수몽헌 예승석(芮承錫)의 5세손으로 통훈대부에 오르고 만년에 향리로 돌아와 문학에 본보기가 되었으며 덕행 또한 높아 여러 사람이 따랐다.
건물의 배치 구성은 넓은 마당에 남향인 재실 본채를 중심으로 ㄱ자형(字形)으로 동쪽에 하당, 뒤편 서쪽에 관리사가 있으며 맞은편에 솟을대문채가 있다. 마당은 자갈을 깔았다. 본채는 4칸으로 가운데에 마루가 2칸이며 양쪽에 각각 방이 한 칸씩 있다. 하당도 4칸인데 방 3칸에 마루가 한 칸이다. 솟을 대문채는 3칸인데 출입구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방, 오른 쪽에는 수납공간이다. 본채 마루에 ‘봉강재기’가 걸려있다.




예조학 효자각(芮祖學 孝子閣)
하대전 마을의 동쪽 봉강재 옆, 561번지에 있다. 의흥인 예조학(芮祖學)[1830년(순조 30)∼1874년(고종 11)]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30년에 예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비각은 단칸[單間]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재사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비각은 양 측면과 배면에는 벽체를 설치하였고, 전면에는 홍살을 세워 내부의 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였다. 가구는 3량가의 이익공(二翼工)집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비각의 중앙에는 ‘효자 예공 유허비(孝子芮公遺墟碑)’라 각자한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예조학(芮祖學)은 조선 후기의 효자로 의흥(義興)인이다. 자는 성서(聖瑞)이고 호는 경암(敬庵)이며, 초명은 예동전(芮東琠)이다. 선생은 타고난 품성과 기질이 남달랐으며 총명하였다. 7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집안이 몰락했지만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지성껏 모셨다. 그는 성현의 심법(心法)을 공부하는 대로 실천에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타고난 효자인 그는 모친이 병이 들어 식사를 하지 못하자 자신도 밥을 먹지 않았고, 하늘에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도하였으며,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리는 등 모친을 연명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눈에선 눈물이 말라 피가 흘러나왔다. 모친의 산소에서 삼 년간 시묘를 살 때, 호랑이가 곁에서 보호하였으며, 그가 죽었을 때는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고 한다.




일간재(一幹齋)
하대전리 424-8에 있으며 1959년에 지은 의흥인 예시학의 묘재이다. 선생의 자는 성여(聲汝)이다.
목조와가인데 구조는 본채와 대문채로 되어 있다. 본채는 좌측 방 한 칸, 중앙에 대청 2칸, 우측에 방 한칸으로 되어 있는 5칸이다. 대문채는 서쪽에 있으며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측은 방이며 우측은 수납공간인 3칸이다.
마당은 보도블록으로 되어 있다. ‘일간재기’, ‘일간재 중건기’가 대청에 걸려있으며 정면에 재사 보호를 위해 유리창 문을 달았다.





첨모재(瞻慕齋)
대전리 411번지에 있으며 밀성인 박덕범(朴德範)의 추모 재사이다. 선생은 밀양에서 청도 원정리에 이거한 후 다시 이서면 대전리로 이거하였다.
1968년에 지었으며 목조와가 한 채이다. 가운데 마루가 있고 양쪽에 방이 한 칸씩 있는 3칸이며 방풍 및 관리를 위해 유리창을 달았다. 마당은 시멘트이며 담장이 있고 출입구는 철대문이다.


람휘당(覽輝堂)
○관리문중: 의흥 예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상대전리 584-1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3칸(출입문과 고방2) 규모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온돌방 3칸, 대청 2칸, 중당협실형)의 팔작기와집인 강당이 있다. ‘람휘당 중수기’ ‘람휘당기’ 및 ‘송 람휘당 중수 낙성운’ 등이 대청에 걸려있으며 재사의 방풍 및 보호를 위해 미닫이를 달았다. 양 측면에는 동재인 ‘천인헌(千仞軒)’, 서재인 ‘상우헌(翔于軒)’이 있는데 각각 온돌방 3칸으로 되어 있다. 뒤편에 양옥 건물인 부속건물(관리동 및 식당 등)이 있다. 재실 옆 마을 회관 앞에 대형 ‘신도비’가 있다.
○배향인물: 의흥인 예몽진(芮夢唇, 1561-1635)
자는 구언이고 수몽헌 예승석(芮承錫)의 7세손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여 선조 조에 선무공신과 인조 조에 한성부윤을 증직 받았다.
○연혁: 1955년에 창건했으며 2008년에 크게 중수했다.
재사의 이름 ‘람휘(覽輝)’는 봉황이 천길 위에 나는데[鳳凰翔于千仞봉황상우천인] 덕의 빛남을 보고 내려온다.[覽德輝而下之람덕휘이하지]에서 나온 말이다. 즉 이곳이 대를 이어 봉황이 내려올 터가 되었고, 이 터의 기상을 갈고 닦아서 자손만대 계속 이어가자는 뜻이 담겨있다. 동재 ‘千仞軒’, 서재 ‘翔于軒’도 역시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오사재(五思齋)
상대전 마을 중앙 833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의흥인 예석훈(芮碩薰)[1631년(인조 9년)-1702년(숙종 28년), 향년 72세]의 묘재(墓齋)이다. 선생의 자는 훈숙(薰叔)이며 호는 독지당(獨知堂)이고 수몽헌 예승석의 9세손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며 병절교위 용첨위 부사과를 지냈다.
1726년에 지었으며 건물 배치 구성은 재실 본채와 평대문을 二자형(字形)으로 남향되게 배치했으며, 담장을 둘렀다. 본채는 5칸으로 좌측으로부터 대청 2칸 온돌방 1칸, 마루 1칸을 배열시켰으며 방 뒷벽에는 벽장이 부설되어 있다. 구조는 얕은 시멘트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간략한 굴도리의 3량가로 꾸민 팔작집이다. 특히 주상부에는 단여 양단에 소로를 끼워 처마도리를 받도록 했다. 대문채는 3칸인데 출입구를 중심으로 양쪽이 수납공간이다. 서쪽에 중문이 하나 있다. 대청 벽에 ‘오사재기’가 걸려 있다.


오수정(五樹亭)
상대전 마을에서 강정지 사이의 서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밀성인 박홍덕(朴弘德)의 묘재(墓齋)로 1939년에 건립되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배치는 서편의 야산을 등지고 동편으로는 강정들을 향해 동남향이며,주변에 토석담장을 쌓아 돌렸다. 평면은 3칸 온돌방에 앞쪽으로 툇마루를 놓고, 우측 끝방 앞으로 누마루를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ㄱ자형(字形)을 취하고 있다.



대전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1호로 지정해 보호하는 노거수이다. 수령은 400년 정도 된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오래된 1,300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은행나무과에 딸린 낙엽교목으로 높이는 29m, 가슴 높이 둘레는 8.5m, 뿌리 근처 둘레가 10.5m의 수나무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쪽 14m, 서쪽 13.2m, 남쪽 11m, 북쪽 13m이다. 아직도 수세가 왕성하고, 나무둥치가 용트림하듯 감겨 올라간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1)신라 때 지나가던 한 도사가 우물을 보고 물을 마시려다 빠져 죽은 후 우물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났다는 것 2)이 마을을 지나던 한 부인이 우물물을 마시려다 빠져 죽었는데, 그 여인이 주머니에 갖고 다니던 은행 알이 싹터 나무가 자라는 동안 우물은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살아남았다는 것 3)신라 말, 지방 행정 구역 변경 때 경계수(境界樹)로 심은 것이라는 등이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이지만 때로는 은행 열매가 달릴 때도 있다.





예씨 종친회 회관이다. 이곳은 의흥(義興) 예(芮)씨의 집성촌이다. 전에는 대전초등학교 자리였으나 학생들이 없어 폐교되자 문중에서 매입하여 종친회 회관으로 삼았다.

하대전 골목의 벽화

이곳은 내 개인적으로는 우리 할머니 친정마을이기도 하다. 우리 할머니 16세 때 14세 신랑을 맞아 등너머 수야리 로 시집오셨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도 이 마을의 '봉황'과 대전의 '전'을 가지고 와서 '봉전(鳳田)'이란 택호를 가지고 계셨다. 오랜만에 진외가 마을을 둘러보니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참 정이 많아 늘 베풀며 사시던 분이다. 이웃은 물론 걸인에게까지 마음을 쓰셨다. 걸인이 오면 거의 뛰다 시피 동냥을 주었다. 걸인들이 많이 오기에 많이 주지는 못해도 빨리 주어야 한 집이라도 더 얻는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뿐만 아니고 우리 숙모님, 종조모님도 다 의흥 예씨이다. 우리 마을과 이 마을은 혼사가 많아 거의 겹사돈이라 할 정도이다. 우리 마을에서 이곳으로 시집 온 사람도 많고 이 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시집 온 사람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언젠가 우리 마을에 의흥 예씨 며느리 계를 모았는데 70명이 넘는다고 했다.
대전댁, 한밭댁, 봉전댁, 봉동댁, 의흥댁, 태전댁, 다전댁 등등, 모두 이곳에서 온 분들이다. 그러니 이 마을은 어느 집에 들어가도 인척이 되지 않은 집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인연이 많다보니 은행나무도 부부의 연을 맺어 이곳이 남편(수나무)이고 우리마을 500년 된 은행나무가 아내(암나무)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 마을 의흥 예씨 후손들이다. 흰 모자를 쓴 분은 학교에서 퇴직하여 향리에 머물고 있는 예윤희 선생님이고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분은 현재 청교 향교 전교인 예병순 님이다. 왼쪽에 있는 분은 현재 동리 이장을 맡고 있는 예이수님인데 그런데 이분은 첫 교단인 이서고 제자의 남편이기도 하다. 왼쪽에서 두 번째 분은 예창수씨로 청도내에 여러 모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마을 곳곳과 재실들을 친절하게 안내하며 설명을 해주어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이 분들 중에도 수야 마을과 연관이 된 사람이 많다. 전교님은 외가가, 예이수 이장님은 처가가 예창수 씨는 누나가 우리 마을에 있다.
대전리, 봉황의 기상으로 대대손손 크게 융성하기를 기원하며 마을을 떠났다.
*참고자료
ㅇ의흥예씨 대종보
ㅇ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ㅇ디지털 청도문화대전
ㅇ청도군지(1991, 청도군)
ㅇ도주지(1958, 김석봉 편)
ㅇ택리지(1978, 최장영 외)
*면담
ㅇ예병순(청도향교 전교)
ㅇ예윤희(의흥예씨 후손)
ㅇ의흥예씨 후손, 대전리 주민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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